오늘 쉽지 않은 로마서 7-8장 말씀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좀 길어졌어요~^^
로마서 7장 1-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법에 대한 논제를 제시하고 결혼비유를 듭니다(1-3절). 비유의 요점은 곧 죽음이 법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온다는 것인데(7:2b), 이 원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믿음으로 그의 죽음과 연합되어 있으므로) 입니다(7:4a). 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 법의 속박 아래 있다가 나중에 사형 집행을 받으면 그 법에서 자유를 얻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려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율법은 우리의 정욕을 자극해 죄를 범하게 하고, 더 나아가 범죄자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습니다(5절).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더 이상 율법의 문자 자체에만 집착하는 삶(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는 바리새인처럼)을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6절).
7-13절에서 바울은 죄의 도구로 전락한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인 변호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죄와 동일한 수준에 둔다는 것으로 오해를 할까봐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7절).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법으로 선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만 죄라는 무서운 세력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 계명을 통해 기회를 타서 인간 안에 각종 탐심을 일으켰다고 하고 있습니다(7-8절).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뱀(죄)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기 전에는, 인간을 공격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들어오자, 그것을 이용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인간을 유혹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마음속에 불같은 탐욕을 생산해 낸 듯합니다(창3: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이처럼, 죄는 계명을 수단으로 삼아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해, 그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는 탐욕(인간의 끝없는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 하나님께 반하는 자기주장으로 표현되는 욕망 등)으로 변질시킵니다. 이는 모든 죄의 시작이며 뿌리인 듯 합니다.
원래 계명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레18:5).
선악과 계명조차 아담을 속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 아담이 항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식하게 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복으로 인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계속해서 그 은혜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개입해 인간에게 사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아담이 죄의 속임수에 빠져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환상 속에서 계명을 어기고 말았는데(창3:13), 그리하여 그 계명에 의해 인간이 정죄되었고 생명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7:11). 율법이나 계명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무엇인지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의 죄와 사망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죄가 이 선한 계명을 이용해 인간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12-13a). 그런 가운데서 긍정적인 부분은 죄의 속임수에 빠지면서, 숨겨져 있던 죄(뱀)의 정체(본성이 악하며 마귀적이라는 사실)가 드러난 것입니다. 물론, 계명은 죄의 악한 목적에 이용당했지만, 그러나 계명은 죄의 흉악한 정체를 밝힘으로써 죄에게 치명타를 가했습니다(13b). 죄에게 악용당하는 중에도 죄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 하나님의 목적을 실질적으로 성취한 듯 합니다.
14-25절에서 바울은 ‘죄 아래에 팔려’ 육신에 매여 있고(14절), 죄의 전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나’에 대해(17, 20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완전히 무능력하여 그래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의 싸움(22-23절), 그리고 ‘나’의 마음과 육신 사이의 싸움(25절)에서 승리는 항상 죄와 육신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적인 속박과 죽음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의 세력보다 더 강한 세력에 의해 구원받지 않으면, ‘나’에게는 조금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25절). 여기서 참고사항은 14-25절의 ‘나’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입니다. 이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되는 주제입니다. 여기서의 ‘나’는 6장과 8장에서 묘사된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인, 곧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유대인의 경험인 듯 합니다(더글라스 무). 개종 전 바울 자신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넓게 보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의 유혹에 빠질 때, 일시적으로 비슷한 체험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제 생각임^^). 하여간 14-25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령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듯 합니다.
8장은 1-17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영위되는 새로운 삶의 실재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종말론적인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들의 육신 안에서 죄를 처리(육신은 죄가 활동하는 영역이므로 육신이 파괴되면 죄의 세력이 붕괴됨, 곧 죽음 외에는 죄의 세력에 대한 다른 대응책이 없음)하셨고, 믿는 자들 안에 생명의 성령을 제공하셨기 때문입니다(1-3절). 그러므로 이제는 타락한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율법의 요구(사랑?/13:8-10절)가 ‘이루어지게’하셨습니다(4절).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는 이제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5-9절). 성령은 우리 삶 속에서 ‘의’, 곧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창조합니다(홍인규 박사). 또한, 성령은 우리 몸이 미래에 부활할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11절).
하지만, 성령의 사역이 미래에 있을 우리 구원을 보증한다고 해서 우리가 수동적인 역할만 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성령의 사람이기에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에게 맡겨진 거룩한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되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동기와 거룩한 열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12-14절). 그런 가운데서 놀라운 특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고 애정 어린 관계를 누리도록 허락하신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즉, 불멸의 생명과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계승하게 되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신 그리스도께 신실하려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뒤따른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15-17절).
그러므로 바울은 18-30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짐 지워진 고난은 일시적이고 미래에 약속된 영광과 비교될 수 없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 고통당하고 있는 의인들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사실(인간의 회복)입니다. 이 소망은 피조물(20절,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허무’에 굴복, 여기서 ‘허무’라는 것은 원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 곧 혼동과 좌절과 부패와 죽음의 상태를 말함)에게도 있습니다(21절). 인간의 몸의 부활할 때 모든 피조 세계 역시 영광스런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피조물도 이 소망 가운데 다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9-22절).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 피조물처럼 탄식하며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추수의 첫 열매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제 시작이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속량, 곧 현재의 천한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신령한 몸’을 부여받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23-25절).
바울은 이 소망 가운데서 사는 자들에게 현재의 고난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두 가지 차원으로 이뤄진다고 얘기합니다. 첫째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이고(26-27절),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28절). 그런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이미 영광을 받으셨고, 그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영광 역시 이미 성취되었다고 얘기하는 듯 합니다(29-30절).
끝으로 바울은 31-39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가 형태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죄인을 정죄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모든 대적하는 영적 세력들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하셨습니다.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일과 상황을 주관하시고, 우주의 모든 공간을 다스리시고, 그 외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절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우리를 절대 확신 가운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선을 행하길 원하지만, 율법은 그런 지식을 가르쳐는 주어도 실천하게 만드는 능력은 없습니다. 바울은 그 해답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7:15-23, 8:1-4)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성령과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상속자가 된 성도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비로소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8:7-14)
하나님의 아들됨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로 서는 것뿐 아니라 그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미리 다 막아주시길 간절히 원해보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까지 포함한 모든 것으로 우리와 하나님을 위한 선을 이루며 일하신다고 하십니다.(8:17,28)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넘어뜨릴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랑안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세상과 나의 연약한 육신에 겁먹고 움츠리는 대신,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 당당히 부르며 믿음안에 거룩한 자녀로 성장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아멘^^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님을 따르며 그 뜻대로 살아갈 때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을 깨닫습니다.
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가르침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더 이상 율법의 문자 자체에만
집착하는 삶을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
•성령은우리 삶 속에서 ‘의’, 곧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창조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동기와.
거룩한 열망을 따라 살아야 함
•추수의 첫 열매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제 시작이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신령한 몸’을 부여받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 아멘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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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 법의 속박 아래 있다가 나중에 사형 집행을 받으면 그 법에서 자유를 얻는 것과 같은 원리
율법과 죄에서 자유함을 주셨음을 믿고 나아갈 때 성령충만의 은혜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나'가 누구인지에 대한 보다 치열한 고민이 아쉽네요. 그 결론이나 가정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일단, '나'에 대한 정의를 학자들 마다 견해가 다른데...'무&라이트'는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유대인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넗게 생각해서 '죄의 유혹에 빠져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적용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을때 율법에 자구에 얽매이는 삶을 살았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되고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삶을 살게 됨을 배우게 됩니다.
아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아, 나에 대한 정체성을 찾게 되고, 진정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