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나은 것 4
(잠19:1)
초점:신용의 승리
(잠19:1) : 아무리 가난한 자일지라도 신용이 있으면 비록 장사술이 능한 자본가라도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이다. 이처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영적으로 바로 설 때 어떤 세상의 유수한 실력자도 따라오기 어려운 다 방면의 성공을 가져온다.
(잠21:9) : 다투는 여인과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이나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함은 여인들에게 경종을 줌은 물론 스트레스의 피해를 교훈함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으면 마치 떠나신 듯 임재의식이 상실됨을 기억하자.
이 시간에 이어서 [보다 나은 것 4]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보다 낫다고 하니까 좀 나은 줄 알았는데 말씀을 해석해 보니까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즉 성공과 실패, 부요와 가난, 행복과 불행, 형통과 좌절, 천국과 지옥, 은혜와 심판 등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몇 가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신용의 승리를 교훈합니다.
잠19:1에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비슷한 말씀이 잠28:6에도 있습니다.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잠19:22에도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여기 "성실히 행하는 자"란 문자적으로 '그의 완전함에 걷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거룩함을 입은 자요, 일반적으로 말하면 믿을 만한 신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난하다는 것은 신용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악의 상황을 도입한 것입니다. 즉 이처럼 가난한 처지에서도 신용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최상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이 이기겠습니까? 아니면 부자가 이기겠습니까? 동일한 조건이라면 가난한 자가 부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 굴러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보면서도 자금이 없어서 안타까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대기업과 소기업이 경쟁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보통 부자가 아닙니다. 여기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부자라고 했습니다. 입술이 패려하다는 것은 거짓말과 허풍을 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미련한 부자란 악하고 욕심 많은 것을 가리킵니다. 또 사곡히 행하다는 것은 '두 길을 가다'라는 뜻으로 겉 다르고 속 다른 진실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별 사람 아니구나 이렇게 느껴질 것이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 여러 표현들은 갈고 닦은 세련된 상술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고도의 상술은 대대로 물려받았거나 아니면 수십 년의 노하우를 통해 얻은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속에 감취어 있어서 아무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고도의 상술을 통해서 많은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이런 부자에 살술까지 뛰어나니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신용을 가진 자는 이길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이기고도 남습니다. 신용이 사업의 생명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잠언입니까? 이러한 잠언을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로 사용하여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은 세계를 정신적 물질적 정치적 모든 면에서 장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상륙하면 10년 가지 않아서 그 세계를 정복하고 맙니다. 그것이 다 성경에서 나온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려면 잠언을 읽으십시오. 우리에게 귀한 성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제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주 젊은 집사가 시장에서 물건을 대주는 도매업을 하는데 얼마나 신앙 양심으로 하는지 벌써 그 큰 시장에서 정직하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게 정직하니 상인들이 누구의 물건을 갖다 쓰겠습니까? 큰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경험이 많고 속고 속아서 속지 않아요. 그 사람들에게 장사술 부려봐야 속만 보입니다. 그런데 상인들이 이 정직한 사람을 대하니 너무 너무 신선하거든요. 이제는 흙으로 메주를 안 쑨다 해도 믿을 만큼 됐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이 사람과 거래해서 잘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어디에 이르렀든지 자만하지 말고 욕심이 틈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욕심은 나를 망하게 하는 시험 중의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해도 신용만 있으면 장사술이 능한 부자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제 이 말씀을 신령한 관점에서 봅시다. 여기 '성실히 행하는 자'란 문자적으로 '그의 완전함에 걷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난하다는 것은 배운 것도 부족하고 힘도 없고 물질적으로도 여의치 못한 악의 환경을 시사합니다. 그렇지만 날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바르게 살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육적으로 여러 면에서 창대하고 창대하게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의 영적 생활을 보통 사람이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자란 성경도 많아 알고 복음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말할 수 있고 인물도 좋고 의지도 강하고 직분도 고위직을 가지고 있고 모든 면에서 손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방법에만 능하지 엎드려 영적으로 바로 되지 않으면 그 영혼이 더 복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신학교를 실력 있게 나왔지만 이것이 되지 못하면 목회현장에서는 더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학식도 좋고 학위도 좋지만 나를 먼저 영적으로 바로 세우지 못하면 못 배웠어도 영적으로 바로 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물론 학식도 풍부하고 영성도 있으면 그 사람은 더 귀하게 쓰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최상의 조건을 가진 지성과 영성을 고루 구비한 마치 사도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성을 구비하지 못하면 영성 가진 사람을 못 당합니다. 그 만큼 영성이 중요합니다.
2. 순복함이 귀하다는 교훈입니다.
잠21:9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잠21:19에도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했고, 잠25:24에도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한 말씀이 반복됩니다.
여자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긴 해도 맞긴 맞지요? 성내고 다투고 말 많은 것이 얼마나 힘들면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했을까요? 성격 사나운 여자 분들 이 말씀 들으시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남자가 여자 없으면 어떻게 삽니까? 다투고 성내더라도 여자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실재로 나가서 움막에서 혼자 살라는 말이 아니라 여자들에게 자중을 주는 교훈입니다.
왜냐하면 이 잠언의 저자 솔로몬도 그런 것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는 최고의 왕이었지만 솔로몬처럼 아내 때문에 고생한 사람은 없습니다. 솔로몬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정략 결혼을 했는데 그 왕후들이 모두 이방 나라의 공주들입니다. 공주 출신의 왕후들이니 오냐오냐해서 키워서 버릇이 없고 왕의 공주들이라고 안하무인으로 자랐고 정략 결혼을 했으니 그들에게 할 말도 함부로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만약 함부로 대했다가는 이웃 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구사항도 많고 말도 많고 솔로몬에게 아내가 많으니 독수공방시키기 일수이기 때문에 나는 공주인데 내 나라를 놔두고 이 나라에서 이 고생이냐고 대들고 따지고 낯뜨겁게 하고 위로는커녕 만나면 혼만 납니다. 그나마 육체의 매력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왕실이 정한 진미를 먹고 놀기만 해서 비만하여 매력조차도 없습니다. 거기다 왕후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어느 것 하나 맘에 든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솔로몬이 움막에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만큼 괴롭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부부간에 마찬가지입니다. 다투고 성 잘 내면 서로가 살기 어렵습니다. 하루 살 것도 아니고 평생 살 것이니까 서로가 피곤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가정 생활만이 아니라 교회생활도 그래요. 피차 피곤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하였듯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면 더 이상 행복이 없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여자는 교회나 성도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봉사와 헌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교회를 위해 수고한다 해도 그래서 여자 없이 못살 듯 그 사람이 없으면 안될 만큼 중요한 일군일지라도 말없이 봉사하고 수고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일군을 소로 비유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소입니다. 소는 봉급도 받지 않으면서도 말도 없이 일하고 새끼까지 낳아서 대를 이어 충성하고 나중에는 자기 몸마저 고기로 가죽으로 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군이 자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큰상을 주십니다.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실재 그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느 할머니가 개척 교회에 나왔는데 따라가서 심방 가보니 가난한 셋방에 솥에 보리를 삶아 시커먼 보리밥을 지어먹으며 가난하게 삽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바로 이름은 대지 않겠지만 감리교의 대표적인 어느 교회 건축을 위해 수백 억을 헌금한 할머니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 돈을 헌금하고 자기는 혹시 교회에 부담을 줄까봐 그 교회를 다니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개척교회를 나오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했다고 훌륭하다기보다 그 겸손함 이것이 더 위대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 누구 때문에 소란합니까? 일 많이 한 사람들, 공로 많은 사람들,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참으로 그렇게 함은 잘한 일이되 그리고 그들은 교회에서 참으로 귀한 사람들이지만 자기를 나타내고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고 교회를 좌지우지 내 맘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투표에라도 떨어졌다고 하면 누구를 물고 늘어지더라도 늘어져서 소란을 피웁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차라리 움막 쳐놓고 따로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혹은 광야로 나가서 홀로 기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이지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교훈입니다.
이 다투는 여자 이야기를 각인에게 신령하게 적용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다투고 성 잘 내는 여자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자기 안의 성령님을 거슬리고 사는지 성령님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고 죄지어 거슬리고 사람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백 번이라도 떠나 마땅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슬리더라도 아주 떠나지는 않지만 마치 움막에서 혼자 살거나 광야로 나가서 사는 사람처럼 우리 안에서 임재 의식만은 떠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허전하고 성령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성도들은 성령님을 거슬리고 살았음을 깨닫고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다 이런 신령한 교훈입니다.
남자가 여자 없이 살지 못하지만 여자도 남자 없이는 살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못 하나 빠져도 남자 없이 어떻게 박습니까? 남자가 돈 벌어다 주지 않으면 나가서 일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에 순복하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순복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교훈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먼저 바로 되면 사업에서도 성공합니다. 이처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영적 생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다투고 성내는 사람은 가정도 교회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순복하고 봉사를 하더라도 깨끗하게 봉사하고 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래서 영육 간에 가장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