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네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 Bethell) 한국명 배설(裵說)-1872~1909-
영국인 베델의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1904년《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으며, 같은 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아 배일(排日)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일본의 침략만행을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제(日帝)는 영국인 발행인이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펴는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서 그를 국외로 추방하는데 전력했다.
이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上海)에서 3주간 금고형(禁錮刑)을 선고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서거(逝去)했다.
배설(裵說)은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당시에 사명(賜名)한 한국식 이름이다.
중국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에게 저격(狙擊)되어 생을 마친 조선통감부의 일본대신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統監)은 분통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 이토오(伊藤)의 백 마디 말보다 이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훨씬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이 일군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우리 일본제국 시책을 정면으로 맞서 조선인을 계속 선동하고 있으니 통감으로서는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되어 1905년 을사국치(乙巳國恥)를 전후한 일본의 야욕에 정면으로 포문을 열어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당시는 일제가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檢閱)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언론탄압을 하고 있었으나 이 신문의 발행인이 영국인임으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도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즉 명성황후 민비의 조카인 충정공 민영환의 활약상을 지극히 찬양하고 친일파 송병준을 ‘만고의 역적 매국노’라 욕하는 등 신문사의 필진들은 서릿발 같은 논설로서 일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 때의 신문사 논설필진 들은 민족주의자 양기탁(梁起鐸),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안창호(安昌浩), 장지연(張志淵)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에 이 신문이 있었기에 일제의 만행을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 한국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신문을 통한 이들의 애국심은 당시의 국민들과 사이에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했고, 그 발행부수가 17.000부에 이르렀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통탄할 일이 곧 벌어졌다. 베델이 서거하여 물러나자, 신문사를 인수한 그의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은 곧 이장훈(李章薰)에게 일금 4만원에 매도하고 이 나라를 떠나 버렸다. 또 이장훈이 신문을 인수한지 두 달이 지난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부터는 이 신문은 ‘大韓’이란 신문제호의 앞 글자를 떼 내고《매일신보-每日申報》로 변경하고 일본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베델이 이 땅에 와서 5년 동안 그야말로 피땀으로 일군 항일투쟁의 작업을 송두리째 예전으로 되돌려버리고 만 것이다.
베델의 항일투쟁정신(抗日鬪爭精神)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풍전등화 같은 신문은 결국 베델의 서거(逝去)로 말미암아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물론, 발행인이 영국국적(國籍)의 베델이었으니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피하여 일제의 만행실상(蠻行實狀)을 자유롭게 파헤칠 수 있었으나 일제는 영국과의 동맹 관계에 있음에 신문의 ‘일부 논지’를 국제 법으로 문제 삼아 베델을 두 차례나 국제법 재판에 걸었다. 결국 그는 상해에서 3주간의 징역을 살면서 재판을 받아야 했으며 그 후유증에서인지 베델은 재판 후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 심장병을 앓기 시작하여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순절(殉節)했다.
《신한민보-新韓民報》135호(1909년 6월 2일자)는 베델사진을 곁들인 논설로서 그의 부음을 전하자 온 국민은 그를 깊이 애도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그의 조의금(弔意金)을 광고료로 걷었는데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 Thomas Bethell)은 1872년 11월 13일, 영국 브리스틀(Bristol) 시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 가정 사정으로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하고, 완구점을 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일본에 가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사람들을 피부로 겪으면서 일제의 만행이 세계평화 구축에도 어긋남을 알게 되었다. 그때 마침 노일 전쟁이 터졌고, 그는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의 통신원으로 취직되어 그해 2월 10일 한국 땅을 밟았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쪽은 일본이었지만, 베델은 이때 각국의 언로(言路)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즉, 일본의 더러운 침략성에 의분을 느낀 그는 한국을 돕는 길은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 다부진 마음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그는 자신이 번 돈과 부인의 사재(私財), 그리고 통신원 월급을 통틀어《대한매일신보》와 영자지(英字紙) 코리아 데일리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창간하여 일본 침략의 야욕을 세계에 전하고 매국노 타도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으로부터의 탄압을 피할 수 없이 되었고 1908년 6월, 상해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이 재판 뒤 1년이 채 못 되어 사망했다.
그러나 베델은 임종 순간에도 대한매일신보 기자의 손을 굳게 잡았다.
“나는 죽으나, 신보(申報)는 영생케 하여 한국동포를 구하라”라고 한 그의 유언은 그의 서거 100주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민족의 言論史에 한 줄기 광명의 빛을 발하는 생명수가 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베델보다 나이가 한 살 적은 그의 부인도 사재(私財)를 털어 신문사 운영을 도왔으며 또 그 남편의 죽음 앞에서 “나는 결단코 망부(亡夫)의 사업을 계속 하리다”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석 달 후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어찌하여 사랑하는 남편의 시신을 멀리 두고 총총히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가 서거(逝去)하자마자 대한매일신보가 일본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였고, 한국이 일제에 피탈(被奪)되는 과정을 직접 겪게 된 그녀이기에 더 이상 일제의 핍박(逼迫)을 견디지 못했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료제공 :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진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