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
18세기 말부터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왕실에서조차 천주교 신자가 나올 정도였다. 당시 정조와 남인 재상 채제공은 이들을 문제 삼지 않는 입장이었다. 천주교는 서학 또는 천주학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의 과학지식과 함께 전파되었는데, 정계에서 소외된 재야 남인을 중심으로 점차 천주교에 심취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승훈(李承薰)·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이가환·정약용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이가환과 정약용은 뛰어난 문장과 단아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았다. 이런 두 사람이 천주교에 심취하자 이들의 추종자도 그 길을 따랐다. 천주교의 확산과 함께 천주교회의 활동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785년(정조 9)에는 형조에서 천주교도들을 적발해 순교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794년(정조 18) 말에는 청나라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800년(정조 24)에는 교인이 1만 명으로늘어나는 등 교세가 급속도로 퍼졌다.
이렇게 되자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해 성토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난하는 「상소」가 연일 올라왔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는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유학을 진흥시켜 막을 수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박해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남인 시파의 실권자인 채제공의 영향도 작용했다. 노론은 기회를 봐서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해 정계에서 영원히 축출하려 했다. 그리고 정조가 죽자마자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채제공까지 죽고 정계의 주도 세력이 노론 벽파로 바뀌면서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선봉장인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는 천주교를 ‘인륜을 저버린 종교’라고 비난했다. 대왕대비인 정순왕후는 배후 인물을 철저히 밝혀낸 후 관련자들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정순왕후는 이를 위해 남인 목만중(睦萬中)을 대사간에 임명하고 이 사건의 수사를 맡겼다. 채제공 일파와 사이가 좋지 않던 목만중은 대사간이 된 이후에 이가환・이승훈・정약전・정약종・정약용・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이기양(李基讓)・권철신 등을 성토하고, 주문모의 정체를 밝혀냈다.
당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천주교도를 색출해 이 중 300여 명이 순교했다. 이때 순교한 인물로는 주문모와 초기 교회의 지도자인 이승훈・정약종이며, 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최필공(崔必恭)・홍교만・김건순(金健淳)・홍낙민 등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왕족인 은언군의 처 송 씨와 며느리 신 씨도 사사되었다. 신유박해는 기호 남인을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한 사건이었다. 노론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영남과 기호 남인을 정계에서 축출하더니 이어 소론을 제거하고, 또다시 신유박해로 기호 남인을 모조리 몰아냈다. 이제 정치는 안동 김 씨의 손에서 놀아났다. 이들에게 아첨하거나 뇌물을 주는 자만이 벼슬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조선의 수많은 인재는 처형되었고, 겨우 살아남은 인재도 귀양 가거나 재야에 묻혀 학문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인재 등용이 세도 가문에 의해 좌지우지 되자 정치는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했고,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하게 세금과 재물을 빼앗음)에다 자연재해까지 겹쳐 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황사영 백서 사건
1801년(순조 1) 9월에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이 터졌다. 황사영은 그해 봄부터 이루어진 신유박해의 전말과대응책을 비단에 적어 비밀리에 청나라 북경의 구베아(湯士選, Alexandre de Gouvea) 주교에게 보내려 했다. 그는 충북 제천 배론 산중으로 피신해 토굴에 숨어서 자신이 겪은 박해 내용을 일일이 기록했다. 이때 그는 동지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를 만나 천주교의 장래에 대해 상의하고,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비단에 한 줄에 95~127자씩 121행, 모두 1만 3,311자를 깨알처럼 썼다. 그리고 옥천희로 하여금 10월에청나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9월 20일에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이 26일에 체포되면서 「백서」는 사전에 압수되었고, 황사영도 29일에 체포되었다. 황사영은 대역부도죄로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와 작은아버지, 아내와 아들도 모두 귀양 갔다. 「백서」에는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방안으로, 조선이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청나라 황제가 조선 정부에 강요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울러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조정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하는 방안도 제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한 조선 조정에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하고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런가 하면 「백서」의 사본이 청나라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를 겸하게 하고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요약해 청나라 예부에 제출하게 했다. 그간에 이루어진 박해가 정당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황사영은 한림박사 황석범(黃錫範)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정약종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했다. 그는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우고 진지한 토론과 고민 끝에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 뒤 1795년(정조 19) 주문모를 만나 그의 측근 인물로 활동했고, 1798년(정조 22)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하면서 서울 지역의 지도적인 활동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서구의 무력으로 조선을 쳐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한 행동 때문에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했다. 처숙인 정약용도 그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역적 황사영이 체포되었다”고 그를 역적으로 기술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은 천주교도를 비롯해 그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정치 세력이 더욱 박해받는 결과를 초래했다.
출처:(조선왕조실록)
신유박해[辛酉迫害]
정의
1801년(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내용
천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등으로 순교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 1만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천주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세력에 의한 성토·상소·박해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1800년)와 채제공(1799년)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는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김건순(金健淳)·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왕족인 송씨(宋氏 : 정조의 庶弟인 恩彦君의 부인)와 신씨(申氏 : 恩彦君의 며느리)도 사사(賜死)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 천주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한편,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천주교회가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된 점도 신유박해와 관계되는 천주교회 발전의 모습이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신유년(辛酉年)에 있어서의 신문상황」(홍이섭, 『아세아학보』 8-2, 1965)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의사회사상적배경」(조광, 『사총』 21·22합집, 1977)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성격」(조광, 『민족문화연구』 13, 1978)
Histoire de l'Eglise de Coree(Dallet, 1874)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유박해[辛酉迫害]
요약 :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4-10-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