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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년도 더 전부터 장 기로는 묘소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기껏해야 겨우 두 달 전에 가묘를 파헤쳐 새로운 봉분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 쪽으로 굴삭기가 들어갔던 약간의 흔적도 남아있는 등, 묘지 입구는 길까지 닦여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다만 그 아래쪽엔 여전히 소나무를 뒤덮은 칡넝쿨의 노란 이파리들 때문에 주변이 가로막혀,
'여기가 호숫가인가?' 할 정도로 빽빽한 숲이었는데,
그 모퉁이를 돌아서자, 그 옛날보다는 확연히 커진 그러면서도 탄탄해 뵈는 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했던 장 기로에게는, 아늑한 언덕의 경사 때문에 여전히 전망도 좋은 곳이었다. 그 정면에는 비록 새롭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운암대교’가 위압적이긴 했지만, 언뜻 보아도 30여 미터 정도는 떨어진 곳이라서 숨 막히게 답답할 지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은 봉분을 덮고 있는 떼가 제 자리를 완전히 잡지 못해 군데군데 붉은 흙도 보였는데, 그 사이 비가 내렸을 텐데도 파인 곳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산장 아저씨, 저 왔습니다!" 하고, 그 묘에 들어서면서 장 기로는,
'나' 대신 '저'라고 낮추면서 자신을 밝혔다. 아무래도 고인에겐 예의를 지켜야 할 테니까.
높지 않은 목소리로, 마치 그 당시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약간 굽히며 인사까지를 하면서.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계속 말로 하기는 멋쩍은 것 같아 이제는 속으로,
'그것도 어저께 갑작스레 유씨(산장 아저씨는 유 범상은 '유씨' 나는 '장씨'라고 불렀다.)로부터 아저씨 소식을 듣고 달려온 건데요, 살다 보니... 이렇게 산장 아저씨 묘지에 제가 찾아오는 날도 있기는 하군요.' 하고 완전히 호수를 등지고 묘 앞에 섰다.
'朴 萬石(박 만석)'.
'단순한 비석이네요. 근데, 옛날엔 몰랐는데... 아저씨 이름을 한자로 보니, ‘그래서 돈을 많이 모았나 보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사람은 이름 따라 간다더니, 아저씨는 살아생전 '만석(萬石)'을 이루신 분이잖습니까?' 하면서, 기로는 가방에서 종이컵을 꺼내, 막걸리를 딸았다.
'이거, 전주에서 사온 건데요, '남문 시장'에 가서 떡을 사올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에 두세 차례밖에 없다는 내가 타고 왔던 버스를 놓칠 수는 없어서, 거기 버스 정류소 앞 수퍼에서 정신없이 이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온 거지만, 아저씨야... 그래봤자 이 막걸리 두 컵이면 족할 테니, 나머지는 제가 마시기로 하지요.' 하면서, 잔을 매끄러운 대리석 제단에 올린 뒤, 천천히 두 번 절을 올렸다. 그러면서,
'근데요, 산장 아저씨, 왜 날 부르지 않았습니까? 실컷 부른다더니...... 그 때가 2003 년이었고... 올해가 2015년이니.. 어느새 12 년이나 지났는데, 그 때 나한테 그랬잖습니까? 한 번 부를 테니, 내려오라고. 그래서 내내, 은근히 기다렸었는데... 왜 약속도 지키지 않고 여기에 이렇게 묻혀있는 거냐구요? 아니 근데, 그나저나 지금 내 모습이 보이기는 합니까? 이제 내 머리도 반백인데, 알아볼 수나 있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내가 '말도 되게 안 듣게' 생겨 보입니까?' 하면서 장 기로는 살짝 웃음기를 머금다간, "근데, 돌아가시기 전에 그 약속을 기억이나 하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나를 부를 생각 같은 건 아예 잊고 계셨었나요? 글쎄요, 그러면 결국은 내가... 아저씨의 부름을 받고 온 게 아닌, 저 스스로 찾아온 꼴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저씨께서 나와의 약속을 지킬 겨를조차 없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믿어 보렵니다. 내 친구 '유씨' 말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고 했으니까요...... 그래도 되겠지요? 근데요, 왜 날 보자고 했던 겁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냐구요? 아니면,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자는 뜻이었던 겁니까? 내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답답해서 죽겠다는 겁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때... 떼를 써서라도 무슨 말이냐고 캐물었어야 했는데......' 하듯, 기로 자신도 묘소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의 실체가 너무 불확실했고 또,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 얘기는, 어제 유 범상에게 실토를 했기에, 그를 제외하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있으나 마나 한 말'이 되고 만 꼴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 묘지에 앉아 있다 보니, 저절로 새로운 운암대교 위를 불규칙적으로 내달리는 차량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장 기로의 입장에서도,
'비록 약간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적적하지는 않을 것 같네......' 하면서,
'잘 됐네요, 산장 아저씨. 생전엔 어딜 가고 싶어도 그 ‘무섬증’ 때문에 갈 수도 없다는 양반이었으니, 이렇게 여기에 묻혀서, 저 앞으로 지나다니는 수많은 차들을 바라보면서 어딘가로 가는 꿈이라도 꾸고 계시면 되겠네요. 어쨌거나 지금 보아 하니, 밤이나 낮이나 이 다리를 지나다니는 차들로 심심하지는 않으시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다 보면, 또 어느 날엔간 저도 이 앞을 누군가의 차를 타고 다시 지날 수도 있을 텐데, 여태까지는 그냥 마을이 우선이었고, '그 양반도 잘 지내실까?' 했었지만, 앞으론 그 주체가 산장아저씨로 바뀌겠네요. 아, 산장아저씨... 저는요, 아직도 여전히 차가 없이 산답니다. 가난한 화가니까요......
아무튼 제가 다시 이쪽으로 올 일이 생겨 다리를 지나게 되면, 그 때는 손을 흔들며 인사라도 하지요.
“어이! 장씨... 어딜 가?” 하고, 옛날처럼 물으신다면,
“좀 기다리십시오. 돌아오는 길엔 막걸리 한 병 사가지고 들를 테니까.” 하며 지나갈 겁니다...... 우리가 그 때 늘 그러던 것처럼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산장 아저씨가 먼저 가셨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사이에 제가 먼저 갔다면, 오늘 같은 일도 없었겠네요. 그때 어느 날인가, 우리가 머리를 깎으러 갔다가... 줏어 들었던, '무른 감이 먼저 떨어질지 땡감이 먼저 떨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나야, 내가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온 거지만... 산장 아저씨는 그저 누워서 나만 보고 있으면 되는 일이니까요. 근데 어쨌거나, 적어도 나는 이러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 해는... 나에겐 참으로 아름다웠던 그리고 잊을 수 없었던 한 해였으니까요. 당시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냈는데, 해가 갈수록 그 때의 일들이 새록새록 나를 웃게 만들었고, '내 생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 싶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 날들을 나에게 선사해 주셨던 산장아저씨 당신께 감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나마 당신을 찾은 내 뜻이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요, 산장 아저씨... 아직 이 얘기는 우리 누님과 형님네 가족들밖에 모르는데, 그 말도 겨우 이번에 불가리아에서 돌아와서야 가족에게 밝혔는데, 그렇기 때문에 친구 유 범상이도 모르고 있는데, 저, '불가리아'란 나라에... 여자가 생겼답니다. 아주 착한 여잔데... 아직 정식 결혼식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게 대순가요? 2년 전에 제가 스페인에 갔을 때 만났고, 그 뒤론 불가리아까지 갔었는데, 곧 다시 나가게 되면, 또 몇 달은 거기서 지내다 돌아오게 될 텐데요......'
자신도 모르게 나왔던 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장 기로는 남은 막걸리를 마시지 않고 그 주변에 뿌리고는,
'이제 저는 가렵니다.' 하고 갑자기 공손한 자세를 취하면서,
‘나는 이 산장 아저씨한테는, 어떤 때는 '저'를 사용하고, 또 어떤 때는 '나'를 사용하니... 나도 모르겠다.’ 하면서,
박 만석의 묘를 천천히 한 바퀴 돈 뒤, 성큼성큼 걸어 아스팔트길로 나갔다.
그리곤 곧장, 도로 건너편 절벽 위에 있는 '또 다른 묘'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장 아저씨, 내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기왕에 여까지 온 것, 그 때 우리가 자주 올라갔던 ‘비밀 아지트’에는 들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저씨가 기분이 좋을 때면 벌러덩 누워, “흘러가는 저 구름아, 내 맘 전해다오...” 라고 읊조렸던 그 언덕에요......' 하면서, 장 기로는 주변을 살폈다. 혹시 누군가 이 마을 주민이라도 마주치면, 낭패가 될 거라서. 그런 행동은 10 년 전과도 다를 바 없었는데,
그런데 거기 약간의 오르막 한 구비를 돌자, 옛날에는 없었던 '버스 정류소'가 턱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노선을 이용해본 적은 없어도, 거기서 버스를 타면 면소재지인 ‘관촌’에 닿을 거고, 거기서 버스를 갈아타면 전주가 종점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 노선확인도 하지 않은 채 장 기로는 도로 반대편인 절벽 쪽을 조심스럽게 돌았고, 드디어 '둔터니' 마을로 내려가는 입구를 지나며 살짝 보니, 마을은 여전히 호수를 끼고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새 집도 몇 채 보이는 등 그가 여기 살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한 눈으로 봐도 그 마을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는데, 기로에겐 무엇보다도 ‘몽상(夢想? 옛날 자신이 살았던 집)’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글쎄, 유 범상이 지금 저 집안에 있는지, 외출이라 다른 곳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에게마저도 내 모습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 하면서 마을 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도로 반대편으로 걸어, 비밀 아지트 입구에 닿았다.
거기 역시 입구는 말끔하게 길이 트여 있었다.
'허긴, 여긴... 그 옛날에도 묘를 너무 잘 관리해서, 늘 깔끔하게 정돈된 곳이기는 했지.' 하면서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핀 뒤, 장 기로는 숨어들 듯 그 숲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백 미터는 될 숲길은 아늑했다. 옛날보다 키가 커졌을 소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여전히 그 길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지난 추석에 정리했을 테니까.
그렇게 닿은 묘소 역시,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말끔했다.
소나무 터널 숲길을 한참 걸어 올라와야 하는 여기는, 물론 마을이거나 호반도로에서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호젓한 곳일뿐더러,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평화롭고도 앞이 확 트인 '명당' 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나저나, 이 묘소 주인이 누구길래? 그리고 그 자손은 누구길래... 이렇게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 결 같이 묘소에 정성을 쏟아붙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 그 때는 그런 것까지는 관심 밖이었는데, 나도 나이가 들어선지... 이제는 그 사람(가족)이 누군지 궁금해지기까지 하네......' 하면서, 묘 앞 잔디에 앉았다.
물론 거기 잔디는 새롭게 조성된 박 만석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 가꾸어놓은 상태였는데, 여전히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시원한 경관이기도 했다.
'아, 그 때 어느 날인가 그랬었지? 그 때도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초가을이었을까?’ 하고 잠시 생각에 젖었다가, ‘근데, 그 양반 여기만 오면 벌러덩 눕곤 했는데, 어릴 적부터 마음이 안 좋을 때는 늘 혼자서 이곳을 찾았다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
"장씨! 내가 물어보고 자픈 말이 하나 있는디......" 불현듯 박 만석이 물었었다.
"예? 뭔데요?"
“나중에 장씨 여기서 떠난 담에 내가 한 번 오라고 허믄, 올 텨?” 하고 전혀 뜻밖의 물음을 했었다.
'응? 이건 무슨 소리야?' 하면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로가 물으니,
“어떻든간에 장씨는 내년에, 아니 몇 달 뒤믄... 여길 떠날 거 아녀?” 했었다.
“그건 그렇지요...”
“그러믄, 서울로 갈 거여?"
"일단, 그렇게 되겠죠."
"그러믄, 여기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잖여?”
“글쎄요... 여기가 그리우면 자주 올 수도 있구요... 뭐, 서울이 대순가요? 외국이라면 또 모를까......" 하기는 했지만, 이 마을에서 태어나 기껏해 봐야 장이 서는 '강진'이거나 군청이 있는 '임실'을 제외하고는, 평생 전주에 있는 자식들이 사는 아파트마저도 갔다가, 잠도 자지 못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해왔던 박 만석에게는, 서울이 갈 수조차 없는 멀고도 먼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장 기로인지라, 얼른 말을 바꾸어,
"친구도 있는데 제가 잊은 척, 아예 여기와 발을 끊겠습니까?” 하고 다소 여유를 부리려는데,
"그러믄, 유씨 보러는 오고... 나는 볼 생각도 없단 말여?" 하고 묻기에,
"무슨 애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제 말은 유씨보다 산장아저씨를 보러 올 거라는 뜻이었는데요......" 하자,
“뭐? 그러믄, 오기는 온다는 거여? 근디, 지금 나헌티 친구라고? 내가 장씨 친구여?” 하고 좋아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확 바꿔 뾰로통하게 물어서,
“친구나 마찬가지지요. 그럼, 뭐라고 하겠어요. 우리 사이를......” 하고 있는데,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하고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었다.
“형님요? 우리가 뭐, 조폭인가요? 나는 ‘산장 아저씨’로 부르는 게 더 좋구만......” 하자,
“그려도, 형님이라고 불러 봐" 하고, 이번엔 또 사정하듯 말하면서,
"저는, 그냥... 산장 아저씨가 더 좋다니까요!"
"그려도, 한 번만 '형님'이라고 불러라, 장 기로야!” 하고 떼를 쓰기에,
“아이, 산장 아저씨는 굵직굵직한 동생이 둘이나 있잖아요? 그리고... 막둥이 동생은 저하고 동갑이라면서요? 근데, 나까지...형님 형님 하라구요? 나는 별론데...... 그리고, 그러면 재미도 없잖아요?”
“그려도... 기로야, 형님이라고 한 번 불러 봐라, 잉?”
“아이, 자꾸 그러지 마세요. 그럼, 나도... ‘만석아!’ 하고 부를 거요!” 하고 '만석아'를 더 큰 소리로 강조하듯 말하니,
“아니,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러?" 하고 목소리를 높이기에,
"내가 언제 아저씨 이름을 함부로 불렀습니까? 왜 성질을 내고 그러세요!"
"지금 방금 불렀잖여!"
"어디, 제가 아저씨 이름을 부릅니까? 이를 테면, '만석아!' 하고, 부를 거라는 얘기지요! 그게 이름을 부른 겁니까? 그렇게 할 거라고 알려주는 말이지요. '만석아!' 하고......" 하고 계속해서 '만석아'를 강조하며 크게 부르자,
(사실 나에게도 그런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정말 나보다 열 살도 위이신 어른한테 그렇게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이 아닌데도, 나는 어느덧 그 양반과 그렇게 버릇없이 굴고 있는 내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 붕알을 깔 놈 봐라?” 하더니, "에라!" 하는 동시에 어느새 정말 내 그곳을 움켜잡아서,
“아, 왜 이러십니까? 아프게?" 하고 그 손을 탁 치자,
"아프긴 아픈 거여? 살어는 있나부네? 그 써먹지도 못허는 거! 히 히 히...."
"에이, 왜 이러십니까? 정말... 무슨 애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쯧!” 하고 그 손을 뿌리치면서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쓰면서 짜증을 내니,
"버르장머리 없이 까붕게 그러지! 그리고 어차피 써먹지도 못허고 달고만 댕긴 게 힘 쓸 디 없어서... 아버지는 아녀도 삼촌뻘인...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르는디, 그냥 내버려 둬? 붕알을 까버리믄 그러지 않을 거 않여? 히 히 히.... 쯧!" 하고 통쾌하다는 듯 빈정댔다.
"아, 정말... 그럴거요?" 하고 인상을 쓰면서,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하자,
"뭘, 어쩐다는 건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기에,
"그러면.... '만석아~' 하고, 부른다는 거지요. '만 석 아~" 하고 악을 쓰듯 비아냥대니,
"너, 장 기로! 진짜... 붕알을 확 까버린다!" 하고 다시 달라 들려기에,
기로는 자신의 그곳을 손으로 덮은 채, "아, 알았어요, 알았어! 그니까, 아저씨라는 거지요. '형님, 형님!' 하는 것 보다 '아저씨'가 낫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도 그냥, 지금 하는 것처럼... '산장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좋다니까요......" 하자,
“그려? 그럼, 그려라! 장 기로. 내가 인심 썼다!" 하더니, "에이, 말도 디게 안 듣는 장 기로!" 하더니, 금방, "히 히 히.... 내가 장 기로 붕알까지 만징게, 꼬소름헌디? 히 히 히......" 하더니, "장씨, 근디 말여, 난, 장씨허고 같이 있으믄, 왜 그렁가는 몰라도, 그냥 까불고 싶당게... 근디, 1 년만 살다 간다니께.. 섭섭혀서 그렇지. 히 히 히....” 하고 웃기에,
“그건 그렇다 치구요, 근데, 왜, 죽기 전에 오라는 겁니까?” 하고 정색을 하고 기로가 물었는데,
“응.. 그 건, 그냥.. 괜시리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근디, 언젠가는 몰라도 내가 죽기는 헐 틴디... 그러기 전에, 내가 한 번 맘먹고 오라고 허믄 오기는 올 텨?” 하고, '맘먹고'라는 말을 강조하며 다시 물었다.
“아니, 절더러 오라시면.. 당연히 와야겠지요. 어디 먼 데, 외국에 나가 있지 않다면요...... 근데, 누가 압니까? 제가 한국에 없을지, 아니면, 또... 무른감이 먼저 떨어질지 땡감이 먼저 떨어질지는......” 하자,
“예끼 이 사람아. 어따 대고 그런 말을 함부로 허는 거여?” 박 만석은 그럴 수는 없을 거라는 듯 장 기로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말을 가로막고 나섰었다.
“아니, 이를 테면 그렇다는 거지요... 산장아저씨가 절더러 오라시면, 제가 안 오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떨는지 모르지만... 그 전에 얘기했듯이, 나중에 산장 아저씨가 먼저 돌아가신다면... 저는 저 아래 가묘(假墓)에도 들를 걸요?” 하자, 박 만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참말여? 나 죽은 담에도 올 거여?” 하고 물었었다.
“그럼요. 제가 더 늦게까지 산다면요. 저는 제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그려? 듣기만 혀도 고마운 일인디... 근디, 그렇다고 내가 죽은 뒤, 알기를 허긌어, 어쩌긌어?” 아무래도 그 말엔 자신이 없다는 투였다.
“그러게요... 그렇지만, 그건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는 다만, 제가 제 입으로 내뱉은 말은 지킨다는 거니까요......”
"그건 그려. 장씨가...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책임을 지는 사람인게......" 하는데,
기로도 다시 잔디에 벌러덩 누웠었다.
이제 기로의 눈에는 파란 호수에서 하늘로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그 하늘로 하얀 구름 서너 점이 둥실 떠가고 있었던 게 지금도 눈에 선했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내 님에게 소식 전해 다오......” 기로는 슬쩍 그 대목을 읊조렸다. 박 만석을 놀리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당연한 듯,
“어? 그거는 내가 허는 소린디?” 박 만석은 벌떡 일어나며 기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게, 어디.. 아저씨 혼자만 하라고 전세를 낸 싯구절인 줄 아십니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데... 뭐, 나라고 그런 맴이 없는 줄 아십니까?” 기로는 짐짓 태연한 척 오금을 박고는,
“내 님을 보거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돌아가는 날까지 변치 말고 기다리라고...” 라고 있지도 않은 말을 갖다 붙이며, 눈을 감았는데,
“하이고! 시를 써요... 시를, 써... 히 히 히...” 하더니, 박 만석이 이제는 또 어느새 뭔가를 기로의 코에 들이밀며 쑤시니,
“아, 아 아 에이취!” 하고 재채기를 하면서 빼앗아 보니, '강아지 풀'이었다.
“아이, 정말! 왜 이러십니까? 완전, 애야, 애!” 하고 기로는 손으로 강아지풀을 빼앗아 허공에 뭉개며 한 쪽으로 휙 던져버리자,
“그러지? 글씨 말여! 나도 왜 그렁가는 모르지만, 장씨허고 함께 있으믄... 이렇게 자꾸만 애가 되는 거 같여. 히 히 히......” 하고 웃어 제쳤었다.
'아, 그랬었다...... 그 양반 나이 예순에, 옛날 같으면 할아버지도 상 할아버지 나이였는데도, 여기서 마치 애 둘이 노는 것처럼... 10 여 년 전, 우리는 그랬었다.
그랬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아른하기만 하구나......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계속 그렇게 지내다 헤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얼마 뒤 계절이 바뀌면서, 우리 사이도 뭔가 좀 소원해지더니... 헤어지는 건(내가 이 마을을 떠날 때) 용두사미 격으로 너무나 싱겁게 끝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양반이 '맘먹고 나를 부르기를' 기다려 왔었는데......'
늦은 가을 날 오후가 제법 깊어가고 있었다.
옥정호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면서 장기로는,
'앞으로, 여기는 다시 올 일이 없겠지? 오늘은 그저 옛 생각 때문에 왔을 뿐......' 하면서, 다시 한 번 묘 주변을 살펴보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밀의 아지트'에서 내려오면서 장 기로는, 아까와는 달리 숨는 기색 없이 '둔터니'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아, 저 안에 살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대부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로구나. 산장 아저씨, 산장 할머니, 아랫집 할머니, 뒷집 부부, 키큰 아저씨 부부 그리고 마을길의 끝집 반장 어머니까지 여덟 명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남은 사람은 산장 아주머니와 반장 부부 그리고 이제는 처녀가 되었을, 그래서 이 마을에 살고 있을지 도시로 나갔을지도 모를 '정미'까지... 서너 명만 살아있을 것이로구나. 물론 지금은 친구 범상의 부부가 들어와 살고 있다지만, 그들은 어차피 최근 몇 년 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새로운 주민일 테고, 나머지 집에도 또 내가 모르는 새로운 주민들이 살고 있겠지만...... 그나저나 산장 아주머니는 만나 봬야 하는데, 아... 어쨌거나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오늘은 범상도 모르게... 그냥 돌아가야겠다. 내가 산장아저씨 묘지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그도 이해하지는 못할 테니까.
"너도 참 독하다! 여기서 일 년 동안 그렇게 잘 지내더니, 어떻게 떠난 뒤 10 년이 넘도록 발걸음조차 않냐?"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전히 원망을 해대는 유 범상이었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 왔다는 말을 하면 뒤로 나자빠질 수도 있을 테니...... 물론 상황은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그 양반과의 이야기가... 뭐 남들에게 비밀로 붙일 일까지는 없고,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나 개인적으론...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기에......’ 하면서,
어쩔 수 없는 회한과 깊은 한숨이 기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차라리 박 만석의 묘에서는 무덤덤하기만 했었는데, 어느새 기로의 눈에 뜻모를 눈물이 고이는 것이었다.
그건, 슬퍼서라기보다는 인생의 허망함에서 오는 아련함 때문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