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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본문 : 살후1:3-4
서로 옆사람과 인사합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특히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감사하였습니다.
첫 번째 감사의 이유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난 것”(3절)에 대하여
감사하였습니다.
두 번째 감사의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박해와
환난 중에도 잘 인내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다음주)
3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3절 말씀에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전서에서도 그들의 ‘사랑의 수고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와 더불어)를
칭찬한 바 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그들이 보다
더 사랑으로 뭉쳐지길 소망하며 간구하였습니다.
<살전3:12-13>
12절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절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두 번째 들려오는 소식에서도
그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졌음을 듣고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사랑의 이유>....
사랑하는 성도님들 !
사랑이 왜 중요합니까?
도대체 왜 사랑해야 합니까?
왜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이
풍성하길 기도했습니까?
첫째, ‘사랑’만이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이 먼저 언급되지만
‘믿음’은 씨와 같아서
어떻게 변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바로 열매, 곧 사랑입니다.
<약2:14-18>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지난 주 저는 서산지방 한 목사님으로부터
놀라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지난주일 남자 한 분이
스스로 교회에 나오셨답니다.
그래서 어떤 오시게 되었는지를 여쭤보니
자신의 자식이 신장이 좋지 않아 입원 중,
기증자를 만나 신장이식 수술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 기증자를 만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았으면 좋겠냐고 하니
그분이 “소원이 하나 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
“환자와 가족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말하였답니다.
그래서 그분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교회를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신지 모르지만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믿음을
‘사랑을 행함으로’ 온전히 증명하였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확인된 믿음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고,
흠이 없게 합니다.
<살전3:12-13>
12절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절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랑으로 확인된 믿음만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님).
왜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이
풍성하길 기도했습니까?
첫째, ‘사랑’만이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됨의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34-35>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가
구별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꼭 교인들끼리만 사랑하라고
가르친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점점 더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웃에게로, 세상으로 점점 넓어져 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래전 이야기인데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강남구를 독립시켜달라고 주장해
논란을 빚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예, 한국에서 독립해라.”,
“강남구로 가는 도로와 교량을 끊어
섬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극단적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중앙일보 2015.10.09.자 참조.)
사랑하는 성도님들 !
성도님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더불어 살아야 진짜 잘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아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안전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
그 사회는 불안정한 사회가 됩니다.
결국 그 피해는 공동체 전체가 지게 되어 있고,
부자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담을 높이 쌓는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지켜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이기적이
되어 가는데 대해 한국교회가 큰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강남이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제일 높은 것을 아십니까?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들이 대부분 강남에 있습니다.
오늘 강남의 목회자들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설교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작정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웠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극단적인 이기심에 빠질 수 없습니다.
‘예수 정신’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혹시 교회에 모여든 사람들마저
예수가 아닌 자신들의 ‘배’를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지경입니다.
얼마나 배를 채워야 만족할까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맞습니까?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이
풍성하길 기도했습니까?
첫째, ‘사랑’만이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됨의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랑’은 우리의 구원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요한의 이 말씀은
놀라운 변화의 말씀입니다.
요한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부르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성품을 보면
굉장히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간 때가 있었는데 ...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로서 불을 명하여...
그들을 살라 버리게 하자고 제안했다가
예수님께 책망 받은 일이 있습니다(눅9:52-55).
제자들은 그의 성품을 잘 알았기에
그를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는 뜻)
이라고 불렀습니다(막3:17).
또한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막9:38-40).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요한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가
보려고 요한은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낯선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쳐졌습니다.
요한은 깜짝 놀라 이 낯선 사람에게 큰 소리로....
“감히 어떻게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쓸 수 있단 말이오?
우리 선생님이 언제 허락을 하셨기에
무슨 권한으로 우리 선생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단 말이오?
주님의 이름을 쓰지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이 일을 고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9:38-40).
그러자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눅9: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입니다.
자기만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역을 한다면 자기를 따라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의 그러한 성품은 제자 공동체에서도 나타나
예수님의 사랑을 독점하려 하였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관심에 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그의 그러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장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기어 있던 제자는
요한이었습니다(요13:23).
실제로 예수님도 그의 노력에 호응하여 주셔서
늘 예수님의 곁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로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훗날 베드로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예언하셨을 때(요21:18)에 베드로의 반응은
이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21:20-21)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불같은 성격에,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요한이...
훗날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요한은 성령 충만을 받은 다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첫째는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사도행전3:1-10에 보면 요한이 베드로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함께 “우리를 보라” 했는데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붙잡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면서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가 발목에 힘이 생겨
일어서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전에 같으면 자기가 할 것을
베드로가 했다고 다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앞서 하는 일에
보조자로서 사역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전에는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요한은 성령 충만을 받은 다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첫째는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둘째, 요한은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성경은
요한복음과 요한1, 2, 3서입니다.
요한은 요한1, 2, 3서에서 모습은 너무나
훌륭한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는 사랑과 관련된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요3:16도 유명하지만,
요일3:16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요일3:16에서는 “그 사랑을 형제를 향하여
나타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각 지체인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
지극히 불쌍하고 가난한 작은 소자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요한은 믿음 가운데서
사랑의 사람으로 완전히 거듭난 난 것입니다.
<‘다’, ‘각기’, ‘서로’>....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보십시오.
3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너희가 ‘다’, ‘각기’, ‘서로’라는 말씀은
참으로 좋은 표현입니다.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상대방이 짝사랑하게 놔두면 안 됩니다.
나도 주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기왕이면 내가 먼저 사랑하십시다.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가 나를 먼저
사랑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사랑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짜 사랑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가 사랑이 없다”란 말을 못합니다.“
더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더욱 자라고 있다면,
사랑도 더욱 풍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정비례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함 속에
보호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처럼
사랑함이 풍성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에서도 더욱 자랄 뿐 아니라.....
사랑에도 더욱 풍성한
우리 금산교회와 온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