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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4)
낮은 형제, 부한 형제
약1:9-11
요즘은 신문을 보거나 방송뉴스를 듣기가
겁이 날 정도로 자살 소식이 넘쳐납니다.
그 원인이 대부분 생활고로 인한 것이랍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더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것은
자기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자식들까지
함께 죽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서워
아이들만 남겨둘 수가 없다’는 이유로
자식들까지 동반 죽음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생활고는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일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차상위계층’의 사람들이 문제랍니다.
그들은 생계위협을 느낄만큼 어려워져도
국가는 물론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없답니다.
그들은 생활보호대상자도 아니면서
그러나 실제로는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 장치가 덜 된 우리나라에서
그런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속히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인 보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해도
자살은 살인만큼이나 큰 범죄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자식들을 자기 소유물로 착각해
죽이는 것은 더욱 큰 범죄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소위 ‘물질만능시대’,
혹은 ‘황금만능시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돈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오직 돈이 인생의 최고 목표입니다.
돈이 곧 성공의 척도요 인간 가치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일단 돈만 많이 벌면
성공했다고 떠벌이는 추악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진실된 삶을 살고도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한 인생 취급을 받습니다.
더욱이 빈부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정책과 세금을 통해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정부의 역할인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빈부의 격차가 심할수록 사회는
더 불안하고, 갈등이 깊어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적 공동체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마저도
이러한 세속적 기준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주눅 들고,
반대로 부자들이 더욱 행세하게 되고,
결국 이러한 세속화는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고 하고, 심각한 갈등을 초래해
결국은 성장을 멈추게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빈부격차가 존재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이러한 빈부의 격차를 해결하고
하나된 공동체가 되는 비결을 설명하여
주십니다. 즉 신앙인의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해 주는 내용입니다.
<낮은 형제는 높음을 자랑하라>
먼저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약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그런데 여기서 ‘낮은 형제’란 헬라어로
‘타페이노스’란 말인데 그 원뜻은
‘땅 위에서 멀지 않은 자’ 란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그런 의미의 말이 있습니다.
‘밑바닥 인생’, 바로 그 의미입니다.
즉 본 절에서 말하는 ‘낮은 형제’란
단지 경제적인 가난만이 아니라 배운 것도 없고
내세울 지위나 직업도 없는 그래서 당시에는
노예 정도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하층민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별반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 그대로만 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자랑할 것이 없는데 자랑하란 말입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영적이며 종말론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곧 땅의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떤 것도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는
성도일지라도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자랑할 것이 무구무진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모범이 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천한 직업 가운데 하나였던
목수 집안에서, 그
것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어떤 정규교육이나 그 어떤 권력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땅의 관점에서 보면 밑바닥 인생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그분이 위축되거나
비굴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소위 권력자들인 헤롯 왕, 심지어
로마 총독 앞에서도 당당했고, 학식을
자랑하는 율법사들, 서기관들을 도리어 책망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신분은 오직 주님만이
가질 수 있는 신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엡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당당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의 주인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했습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자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이 받지 못한 성령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요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언제나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늘 감격과 감사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국선교초기 박성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862년 서울 관자골(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포졸,
광대, 고리장, 무당, 기생, 갖바치, 백정 등은
칠천반(七賤班)이라 하여 하류계층에 속했는데
그중에서도 백정은 인구조사에서 제외되었고,
거주지역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상투를 올릴 수 없고, 망건이나 갓을
쓰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망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미성년의 표시로 여겨졌기에 나이 많은
백정도 아이 취급을 당하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백정마을에서 백정의 딸과 결혼한 박성춘에게는
봉출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만은 백정신세에서 면해주려고
곤당골예수교학당에 보냈습니다.
당시, 1892년에 입국한 미국 선교사 사무엘 무어(모삼열)가
1893년 6월 곤당골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안에 학당을 세우고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박성춘은 두 딸도
엘러스가 시작한 여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1894년에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했습니다.
이때 박성춘도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곤당골교회 사무엘 무어 목사와
제중원 담당의사 에비슨 선교사가
백정마을을 찾아가 완쾌될 때까지
계속 왕진하면서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백정에게 손을 대어 치료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로 감동받은 박성춘과 가족들 모두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으며,
마침내 박성춘은 1895년 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곤당골교회 교인은 20여명이었는데
정부 관리들도 출석하는 등 양반위주의 교회였습니다.
천민 중의 천민인 백정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던 양반들은
박성춘을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무어에게
압력을 가하며 교회출석을 거부하였습니다.
무어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며
그들을 권면했으나 결국 양반들은
모두 나가서 따로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세운 ‘홍문사골교회’는
순수 양반교회가 되었고, 곤당골교회는
백정과 상민만 남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박성춘은 자신 같은 백정을 위해서
애쓰는 무어 목사에게 감동을 받고 전도하기를
시작하여, 곤당골교회는 다시 교인이 20여명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홍문사골교회’는
생명력이 없는 교회로 전락하여, 분리한지
3년 만인 1898년 다시 두 교회가 합쳐져서
‘승동교회’로 재탄생하였습니다.
1911년 박성춘은 이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한편 박성춘은 당시 내각총서로 있던
유길준에게 ‘백정차별금지법’을 만들어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고 다니게 해달라는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마침내 그 요구가 관철되어 박성춘은
이조 500년간 못 썼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갓을 쓰던 날 너무 기뻐서
잠잘 때도 갓을 벗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성춘은 독립협회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종로 군중집회에서 연사로 강연을 하는 등
개화기에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한편 백정출신 박성춘의 아들 봉출은
세브란스를 졸업한 후 1907년 조선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는데, 그가 의사 박서양입니다.
그는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 유일의 양의사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민족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또한 3.1운동에 호응해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국민회 산하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백정 박성춘과
그의 가족에게 무어 선교사를 붙여 역사하시고
교회를 일으키시며 나아가 그의 회심된 믿음으로
반상차별의 유교 조선의 질긴 역사와 전통,
관습을 끊어내고 사회개혁을 이끄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들어 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영적인 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내세우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
야고보 기자는 이제 부한 자들에게 권면합니다.
10-11절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 역시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들은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부귀’를 ‘풀의 꽃’에 비유합니다(10).
그리고 그 결말을 11절에서 아주
실감나게 설명합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그야말로
끝장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기후에서는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잠시 후면 사라질 것을 가지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고전7:29-31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구약의 예례미아 선지자도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렘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명예와 권력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의지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러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을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은 일반 사회과학을
가지고도 충분히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재물만 하더라도 이미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증적
통계로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재물이 4대 이상 지속된 에는
10% 미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경제가 안정됐다고 하는
미국의 통계입니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나라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한국의 재벌을 연구한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벌의 역사처럼 경제의 부침과 아울러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조그마한 재물에도
목이 곧아지고, 심지어 연봉이나 집의 평수,
그리고 자동차의 크기를 가지고 우쭐댑니다.
그것들이 지푸라기와 같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기자는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항상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맺는 말씀 - 물질에 흔들리지 않는 성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물질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물질의 많은 것 때문에 교만하지 말고,
물질의 적은 것 때문에 비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 바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의미 깊게 되새겨야 합니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성도들에게 가난한가 부한가,
낮은가 높은 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히려 물질을 지배하며 살 수 있습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물질에 지배를 받지 말고 오히려
물질을 지배하며 당당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