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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제와 감정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더 깊은 구석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잘해내는 아빠’보다 ‘숨 쉬는 나’ 아닐까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도 결국 “너답게 숨 쉬며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아이를 키우는 지금, 나는 나답게 숨 쉬고 있나요?
내 감정과 삶을 외면한 채, 역할만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책의 마지막 문장은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을 줍니다.
“크게 불꽃을 피우고 금방 꺼지는 존재보단
작은 불꽃으로 은은하게 오래 빛을 발하십시오.”
육아도 그렇습니다. 아이 앞에서 한순간 빛나는 아빠가 아니라, 오래도록 따뜻한 온기를 내는 아빠.
그런 아빠가 되려면, 내 호흡을 지키는 연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좋은 아빠란, 숨 막히게 애쓰는 아빠가 아니라, 자신의 숨을 잊지 않는 아빠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는가?”
자문해 보며, 조금은 숨 고르는 시간을 함께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자녀의 날씨가 화창하길 바란다면>
사람들은 흔히 이혼하고 싶지만 이혼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식 때문에 억지로 산다고. 하지만 저는 부모가 이혼해 한부모 가정으로 자란 아이의 정서 문제보다,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계속 싸우고 상대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정서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이 때문에 산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그런 말씀을 하실 거라면, 아이 앞에서는 싸우지 마십시오. '아이 때문에 산다'는 말을 할 거라면, 싸울 일이 있어도 아이 앞에서는 티 내지 마시고, 자녀의 눈을 마주치고 웃어주세요. 이정도 연기도 못 하실 정도라면 이별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아이를 위하신다면요. 정말 큰 문제는, 이혼이나 이별, 다툼이 아닙니다. 싸움을 하고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나 상황 설명도 없이 넘어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 언급 없이 넘어가면 문제가 하나 생길 것이 두 개, 세개, 네 개, 다섯 개로 도미노 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만약 아이 앞에서 다투셨다면, 적절한 타이밍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구구절절 간증하듯이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엄마 아빠 의견이 이랬는데,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 네 앞에서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고, 싸워서 미안하다.'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런 사과와 설명도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도 모자라 아이에게 엄마 욕이나 아빠 욕을 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자존의 근원을 엄마와 아빠에게 반반씩 받습니다. 내 반쪽이 나머지 반쪽을 자꾸 무시하고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의 정서는 혼돈의 세상에 머물게 됩니다. 내 존재를 부정당해, 어느 순간 스스로를 부정하게 됩니다. 자신의 기질에 반하는 행동을 하 거나, 깊은 우물 속에 들어앉게 됩니다.
…엄마와 아빠가 사이좋은 모습은 최고의 유산입니다. 아이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 있습니다. 유전자와는 또 다른 '기억의 대물림'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 다정한 아빠와의 기억, 따뜻한 엄마와의 기억•••. 이런 것들이 아이의 삶을 지탱해줍니다. 튼튼하고 안정된 기반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그 후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반드시 상속됩니다. 아이에게 있어 오늘 하루의 날씨는 부모의 친밀도입니다. 오늘 우리 아이의 날씨는 맑음입니까, 흐림입니까, 계속 비입니까? (p.126~129)
질문3) *아이 앞에서 다툰 적이 있다면, 그 후에 어떤 태도를 보였나요? (설명이나 사과를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이에게 남겨주고 싶은 ‘기억의 유산’은 무엇인가요? (돈, 교육, 기회 말고... ‘관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책에서는 아이 앞에서 싸우는 것보다 더 위함헌 건 바로, “그냥 넘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 도미노처럼 문제를 일으킵니다.”
다툼이 있었던 날,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오늘 아빠랑 엄마가 이런 일로 의견이 달랐어.
너 앞에서 언성이 높아져서 미안해.
엄마 아빠가 서로 존중하며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이정도면 충분합니다. 아이의 마음도 이해받고, 정리가 됩니다.
“아이에게 있어 오늘 하루의 날씨는 부모의 친밀도입니다.”
저는 이것을 ‘정서적 기후’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우리가 매일같이 아이에게 어떤 하늘을 보여주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랑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사랑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즉 따듯한 온기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당연히 차갑고 얼어 있고 굳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녹이려면 서서히 계속 열을 가해야 합니다. 너무 추웠다가 갑자기 따뜻해지면 얼었던 손등이 터져버립니다. 그러니 갑자기 강한 열을 주지 마세요. 때로는 사랑한다는 표현보다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짧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말 입니다. 이 책의 시작에서도 말했듯이, 그저 조금 더 예의 바르게, 조금 더 친절하게, 조금 더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가 가십시오. 얼린 고기를 해동도 하지 않고 불에 올리면 겉은 타버리고 속은 여전히 땡땡하게 얼어 있습니다. 은은하게 오래, 자연 해동하듯 그 사람을 감싼 공기가 따뜻해 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변할 것입니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 포근포근해질 것입니다. 사랑은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사랑을 받지 못한 시간과 방치된 시간만큼 은은하게 오래, 온기를 주셔야 합니다.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화학 법칙입니다. 그 결심이 서는 사람이 계신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만약 그런 각오가 생기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권하고 싶습니다. (p.130~131)
질문4) 우리 아이는 지금, ‘정서적으로 따뜻한 공기’ 속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얼어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를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는 진짜로 그 사랑을 '느끼고' 있을까요?
예를 들면
우리가 줄 수 있는 사랑의 온도가 따뜻하더라도 아이의 내면이 꽁꽁 얼어 있다면, 우리는 "은은한 온기"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책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조금 더 예의 바르게, 조금 더 친절하게, 조금 더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십시오.”
아빠가 먼저,
그렇게 은은한 온기가 되어 준다면 우리 아이는 언젠가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존재로 스스로 피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보는 법>
제가 좋아하는 화가 선생님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큰 그림일수록 멀리서 보라" 고요. 큰 그림일수록 가까이에서 보면 눈의 초점이 나가기 때문에, 큰 그림일수록 뒤로 가서 보고, 가까이에서 볼 수밖에 없으면 눈을 살며시 감고 보면 그림을 더 잘 볼 수 있다 는 설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여행의 이유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큰 그림은 자신의 삶입니다. 너무 가까이에 서 보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더 잘 보려고 가까이 가면 초점이 흐려집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멀리서 보거나 눈을 살며시 감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도 큽니다. 내 인생도, 내 아이의 인생도. 그러니 조금 뒤로 떨어져서 바라보십시오. 또는 살짝 눈을 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보십시오. 요즘 뭔가 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너무 그 앞에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고 방향을 잡으려 하지 말고, 조금은 멀리서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좀 더 잘 보이고, 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p.138~139)
질문5) 요즘 나는 아이의 어떤 부분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있지는 않나요? (그게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고 있진 않나요?)
육아 중 “한 걸음 떨어져서 보니 잘 보였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큰 그림일수록 멀리서 보라."
가까이에서 보려고 하면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오히려 멀리 떨어져야 전체의 윤곽이 보이고 아름다움이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육아’와 ‘부모 역할’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너무 가까이에서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오히려 안 보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주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책은 조용히 말해줍니다.
“인생에서 제일 큰 그림은 자신의 삶이다. 너무 가까이 서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육아도 마찬가지에요. 너무 가까이에서만 보려 하지 말고, 한 걸음 물러나서, 아이의 인생 전체를 그리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지금 이 한 장면에 덜 휘둘릴 수 있어요.
아이가 성장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험이 필요합니다.
실수와 실패도 필요합니다.
뇌는 수많은 시도(실패)를 통해 미세 조정으로 최적의 상태를 스스로 알아냅니다. 그리고 찾으면(도파민 발생) 내적보상(만족감, 성취감, 자신감, 행복감) 등을 받고 자발적으로 반복하죠. 충분한 시도가 있어야(실패가 충분히 쌓여야) 최적의 상태(신경망/배움형성)을 알아낼 수 있어요. 지름길로 성공하면(가르쳐주기, 선행학습) 신경망 고속도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서 지금 당장 ‘잘 되게’ 만들려는 욕심을 품곤하죠. 결과적으로 아이에게 너무 가깝게 들이댄 시선이 압박이 되고, 긴장이 되고,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살며시 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보십시오.”
내 아이를 믿고,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그림 전체는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육아는 ‘디테일’보다 ‘전체 그림’이에요.
지금 아이가 느려 보여도,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아도,
어떤 부분에서 부족해 보여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아이의 인생도 너무도 크다.”
하루하루 성적, 습관, 버릇에 매달려 일희일비하기보다 '큰 그림 속에서 지금 이 시기를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해방되십시오>
지나간 과거의 일로 남으면 좋은데, 그리움으로만 남으면 좋은데, 희한하게 과거의 문제가 과거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여전히 저의 삶에 영향을 줍니 다. 저처럼 부모로부터 독립을 했어도, 놀랍게도 '해방'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립과 해방은 다릅니다. 독립은 물리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거예요. 결혼을 해서 분가했거나, 일을 하면서 자취를 하거나, 물리적 경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은 과거의 상처나 부모로부터 받은 것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벗어나는거에요. 그게 해방인데, 우리는 환경적으로 독립만 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해방을 못한 경우, 과거의 문제가 과거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 제 딸에게 사랑을 주는 일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표현도 잘하고, 딸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관계는 줄곧 어색했으니 제 쌍둥이 아들들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막막 할 때가 많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받은 대로 행해지는 것이죠. 인간은 가던 길로 가는 것이 편한 법이니까요. 자녀는 또 다른 '나'입니다. 그 아이에게서 자신을 보게 되고, 부모와의 관계는 자녀와의 관계로 대물림됩니다. (p.141~143)
질문6) 내가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 중, ‘그냥 내가 받아왔기 때문’인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 방식은 계속 이어가고 싶은가요, 아니면 바꾸고 싶은가요?)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대물림'을 멈추고 싶은가요? (그걸 멈추기 위해 지금 어떤 ‘해방’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독립했는데 왜 여전히 부모에게 묶여 있죠?”
책에서는 아주 중요한 개념을 구분해줍니다.
“독립과 해방은 다릅니다.”
독립은 물리적인 분리입니다.
부모와 떨어져 살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내 삶을 꾸리는 것.
하지만 해방은 정서적인 분리입니다.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 결핍, 습관으로부터 감정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처럼 부모로부터 독립을 했어도, 놀랍게도 ‘해방’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방되지 않으면, 그대로 ‘되물림’되요.
저자는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 딸에게 사랑을 주는 일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는 어색했고, 그래서 쌍둥이 아들들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많은 아빠들의 현실을 대변해요.
왜일까요?
“그냥 받은 대로 행해지는 것이죠. 인간은 가던 길로 가는 것이 편한 법이니까요.”
우리가 부모에게 받았던 대로 행하면, 무의식적으로 내 아이에게 흘러갑니다. 그게 좋은 것이든, 아픈 것이든.
“자녀는 또 다른 ‘나’입니다. 그 아이에게서 자신을 보게 되고, 부모와의 관계는 자녀와의 관계로 대물림됩니다.”
내가 받은 사랑은 그대로 전해지고
내가 받은 무시는 무심결에 반복되고
내가 경험한 불안은 아이의 정서에 스며들어요.
그 고리를 끊는 유일한 길이 바로 ‘해방’입니다.
해방은 부모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관계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에요.
책을 읽으며 이런 깨달음이 생깁니다.
사랑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연습과 선택의 반복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요.
✔️ 과거의 대물림을 알아차리고
✔️ 무의식적 반복을 멈추고
✔️ 내 아이와는 새로운 방식의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결심
이것이 진짜 ‘좋은 아빠’가 되려는 우리의 시작이 아닐까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다시 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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