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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도경(大武道經)
일단의 무리들이 함관검부가 자리잡고 있는 단원산(壇元山)을 오르고 있었다. 모두 똑같은 도복(道服) 차림의 도사들이었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산언덕을 오르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련을 쌓은 무인들로 보였다
“사부님, 무정혈도 장막이 과연 이곳으로 올까요?”
“그건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은 그가 동영으로 가는 주요 길목 중 하나다. 강호인들에게 쫓기는 그의 입장에서는 동인성을 장악한 북청파와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의 독립된 세력이면서 힘없는 검부가 있는 함관부를 도주로로 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군요!”
“우리가 함관검부를 장막에게서 보호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검부 문하들과의 충돌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비록 무정혈도가 가고 있는 고독혈마의 무급을 수습하는 것이 중하긴 하지만 동인성에 명망 높은 검협의 검부를 자극해 강호 동도들에게 욕먹을 짓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북청파의 장로 포우자(抱遇子)는 자신의 제자를 이끌고 감히 동인성을 소란스럽게 하는 고독혈마(孤獨血魔)의 무급(武笈)을 수습하기 위해, 현재 그것을 지니고 자신의 근거지인 동영(東營)으로 도주 중인 무정혈도(無情血刀) 장막(帳幕)의 유력한 도주로 가운데 한곳인 함관부에 왔다. 그러나 이곳엔 어엿한 문파가 있었으니 그저 함관부의 마을에 머물러도 좋으나 주인의 허락은 받아야 하겠기에 검부가 있는 단원산을 오르고 있었다. 검부는 그렇게 깊은 산속에 있는 문파가 아니었다. 그래서 포우자와 그의 제자들은 금세 검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난감하게도 검부 입구에는 손님을 맞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왔으면 상관없겠지만 무리를 이끌고 영내로 들어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허어~! 이것 참! 동인성 전체가 고독혈마의 무급 때문에 술렁이고 있는데, 이곳은 태평성대로구나!”
“사부님, 제가 들어가 우리가 왔음을 알리겠습니다.”
포우자는 제자 진언(眞言)의 의견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언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계단을 오르자, 포우자는 적당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고 다리를 쉬게 했다. 그때 예민한 포우자의 감각에 누군가 이곳으로 접근하는 인기척이 포착되었다.
“할아버지, 제가 들어드릴게요.”
“됐다. 이 정도는 문제없다!”
“그래도….”
“운신하기도 버거운 녀석이 객기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이기나 해라!”
포우자의 눈에 나뭇짐을 진 노인과 그 옆에서 커다란 물통을 들고 노인을 따르는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런데 청년은 몸이 무척 무거워 보였다. 비록 물통이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긴 했지만 저 나이 또래의 젊은이라면 그리 힘들지 않을 텐데 청년은 무척 힘겨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
“할아버지, 잠시만요!”
현석은 검부 입구에 일단의 무리들이 진치고 있자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 긴장하며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그들이 입고 있는 도복(道服)을 보고서야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고 긴장을 풀었다.
“저어~! 북청파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그렇네. 나는 북청파의 장로직을 맡고 있는 포우자일세.”
“아! 포우자 노사님. 저는 검부 문하인 현석이라 합니다.”
“그러신가?”
포우자는 가까이서 본 현석의 기도에 은은히 놀랐다.
‘호오! 검부에도 인물이 있었군. 저 나이에 저런 기도를 가질 수 있다니….’
포우자는 현석이라는 젊은이와 몇 마디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진언이 검부의 인물과 같이 돌아와 더 이상 그 청년에게 관심을 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했습니다. 저는 법석이라 합니다. 저희 부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오르시지요!”
“허허, 이것 참! 귀부를 너무 번거롭게 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군요. 저는 포우자입니다.”
현석은 법석 사형이 나서자 뒤로 물러서 북청파의 인물들이 검부로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다 물통을 챙기기 위해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 몸놀림은 검부 제일의 신법 고수인 현석답지가 않았다.
“아휴~! 처음부터 열 근은 너무 무리였나?”
“아니다! 기왕 열 근으로 시작한 것, 약한 모습 보여서 되겠느냐!”
현석은 흐름을 거스르는 검을 얻기 위한 1단계로 근력을 키우기로 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현석에게 적당한 근력을 만드는 것은 필수였다. 그래서 손목과 발목에 10근 무게의 철환을 차고 있었다. 처음엔 별거 아니게 느껴졌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빨리 지쳐갔고 10근 철환이 아니라 천근만근같이 느껴졌다.
***
―헉헉헉….
낭패한 몰골의 한 사내가 산길을 구르듯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무작정 앞으로 뛸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산길을 달리다 다리에 힘이 풀리자 사내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한참을 굴렀다. 그리고 사내는 말 그대로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며 숨을 몰아쉬었다.
―졸졸졸졸….
그런 사내의 귀에 어디선가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갑자기 목이 말라오는 것을 느끼고 시냇물 소리가 나는 곳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를 발견한 사내는 시냇가에 엎드려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푸어푸어푸….”
그렇게 마른 목을 축이고 사내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게 고독혈마의 무공이 담긴 비급이란 말이지.”
―혈세록(血世錄).
피 냄새 진득한 빨간 주사(朱砂)로 씌어져 있는 제목이 유난히 선명했다.
“형제들, 내가 이 비급 안의 무공을 익혀 무정혈도 장막의 머리로 장사 지내주겠네.”
사내는 포사삼귀(布絲三鬼) 중 대귀(大鬼) 관서(關西)로 그를 포함한 삼귀 셋은 포사산의 녹림 화적이었다. 평화롭던 포사산 삼귀채(三鬼砦)에 혈세록(血世錄)을 품에 안고 도주 중이었던 무정혈도 장막이 들이닥치면서 근 50여 명의 화적들이 장막의 혈도(血刀)에 도륙되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던 삼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무정혈도는 삼귀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모든 기업과 형제를 잃은 악에 받친 삼귀의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동귀어진 수법으로 장막에게 중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삼귀 중 소귀(小鬼) 중포(中包)와 잔귀(殘鬼) 모악(募岳)은 그 명(命)을 달리했다. 그리고 찢어진 장막의 앞섶에서 흘러나온 비급을 탐욕에 물든 대귀(大鬼) 관서가 주워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리고 안전한 곳이라 판단한 곳에서 잠시 쉬고 있다가 자신을 뒤쫓아온 장막을 보고 놀라 다시 도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도주에 도주를 거듭한 관서는 이곳까지 흘러든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니는구나?”
“헉! 자, 장막….”
관서는 잠시 숨을 돌리고 물을 마시는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을 따라잡은 무정혈도(無情血刀) 장막(帳幕)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안색으로 그 특유의 붉은빛이 감도는 섬뜩한 혈도를 휘둘러왔다. 평상시 장막의 실력이라면 관서 같은 무명지배(無名之輩) 따위는 일도(一刀)에 몸을 가를 수 있겠으나 지금 장막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챙!
―큭!
대귀 관서는 장막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음을 확인하고 기세를 드높이며 독문무기인 환도(還刀)를 휘둘렀다.
“이야압!”
―챙, 창, 깡~!
그러나 장막은 관서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진 관서는 환도를 크게 휘두르고 다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거기…. 이런!”
무정혈도 장막은 다시 쥐새끼 같은 화적 놈이 도망치자 신법을 운용하려 했으나 등과 옆구리의 상처에서 어마어마한 통증이 몰려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장막은 그 즉시 품에서 약병을 꺼내 병에 들어 있는 가루약을 들이마시며 통증을 가라앉혔다.
“내 너를 죽이지 못하면 이 혈도를 꺾어버리겠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자 장막은 쥐새끼를 다시 추적하기 시작했다.
***
입이 갑자기 열이나 느는 바람에 불목하니 노릇을 하는 라혼의 일도 배로 늘었다. 밥도 그만큼 더 지어야 하고, 반찬도 더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검부의 제자들은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설거지를 했지만 손님인 북청파 인물들에게까지 설거지를 시킬 수는 없었기에 그 뒤처리를 라혼이 해야 했다.
“저놈들은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군.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인지 모르지만, 참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라혼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올랐다. 여기저기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지게를 채운 라혼은 평소와 같이 운공삼매경(運功三昧境)에 들었다. 아주 느린 속도지만 몸이 점점 회복되어가고 있었기에 틈틈이 짬이 날 때마다 운공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외부의 마나를 끌어모아 그것을 진기(眞氣)로 삼아 혈도(血道)를 뚫기 시작했다. 혈관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이 있었지만 이미 그 고통은 익숙한 것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운공을 하고 나면 언제나 온몸에서 땀이 흥건히 배어나왔다. 라혼은 땀을 씻어내기 위해 가까운 냇가를 찾았다. 시원한 시냇물에 앙상하기 그지없는 몸을 담그고 땀을 씻어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 기분에 따라 흥얼대는 콧노래는 다른 사람이 듣기에 고통스러웠지만, 여기는 오직 라혼 혼자뿐이었기에 세상에 없는 노래를 막 지어냈다. 웬만큼 몸을 씻어내고 물 밖으로 나와 물기를 닦아낸 다음 벗어놓은 옷을 다 입었을 때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창!
“서랏!”
어디선가 나타난 괴인들이 쫓고 쫓기며 서로에게 칼질을 하며 멍하니 그 모습을 구경하던 라혼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라혼이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쫓기던 사내가 달려들었다.
“비켜, 영감!”
“어이쿠~!”
라혼은 둔한 자신의 몸을 원망하며 시냇가에 자란 덤불에 몸을 피했다.
“장막아, 장막아! 내 오늘 너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네가 비록 천하에 이름 높은 고수라 하지만 나 또한 한 가닥 하는 놈이다. 네가 중상을 입은 것 같아 피해주려 했건만 네가 계속 나를 핍박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쥐새끼 같은 놈이 말이 많구나!”
덤불에 몸을 던진 라혼은 도망가기 바빴던 험악하게 생긴 놈이 자신을 쫓던 살벌하게 생긴 놈과 하필이면 자신의 눈앞에서 싸움을 시작하려 하자 급히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 : 투명화] 주문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험악하게 생긴 놈과 살벌하게 생긴 놈의 생사가 걸린 결투를 구경했다.
“야차십팔도(野次十八刀)! 제일도(第一刀) 야차참두(野次斬頭).”
험악하게 생긴 놈의 무식한 칼 휘두르기를 시작으로 시작된 싸움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험악하게 생긴 놈이 시전하는 야차십팔도(野次十八刀)라는 도법이 무척 흥미로웠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펼치는 공격 일변도의 도법이 예전에 자신이 처음 스승 지슈인드에게 배웠던 그 검술과 유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험악하게 생긴 놈의 칼질은 살벌하게 생긴 놈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놈은 무식하고 험악하게 생긴 놈의 도세(刀勢)를 피하면서 움직임을 최대한 억제하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신하여 시기적절한 때에 날카롭게 일도를 날렸다. 그러나 어디가 불편한지 동작이 매끄럽지 못해 하수(下手)가 분명한 험악하게 생긴 놈을 어쩌지는 못했다. 하지만 살벌하게 생긴 놈의 날카로운 공격에 험악하게 생긴 놈은 계속 상처를 얻어 점점 혈인(血人)으로 변해갔다.
“씨양! 야차분시(野次分屍)!”
“혈섬(血閃)!”
험악하게 생긴 놈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생사를 도외시한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고, 살벌하게 생긴 놈도 길게 끌기는 싫었는지 상체를 그대로 내주고 번뜩이는 일도를 날렸다. 결과는 살벌하게 생긴 놈의 승리였다. 험악하게 생긴 놈은 라혼이 숨어 있는 덤불 위로 쓰러졌고, 폭포처럼 피를 토해내던 살벌하게 생긴 놈은 품에서 약병을 꺼내 가루약을 마시듯 입 안으로 털어 넣고 몸을 추스르더니 험악하게 생긴 놈의 시체가 있는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엎드린 모습으로 쓰러진 험악하게 생긴 놈의 시체를 뒤집더니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험악하게 생긴 놈의 몸에선 여러 가지 물건이 나왔지만 정작 찾는 물건은 없는지 시체의 옷을 벗기더니 꼼꼼하게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비급이 없다니! 그럼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말인데…. 망할! 우둔한 놈이 돌아가지 않는 머릴 굴렸군.”
그렇게 중얼거린 살벌하게 생긴 놈이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라혼은 여전히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 주문을 풀지 않고 험악하게 생긴 놈이 쓰러질 때 굴러 나온 두루마리 책자를 살펴보았다. 살벌하게 생긴 놈은 바로 코앞에 있던 라혼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레짐작하며 그 자리를 떠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살벌하게 싸운 모양인데, 이게 뭐지? 어느 가문의 극비 문서 같은 건가?”
라혼은 그 자리에서 두루마리를 풀고 내용을 확인했다.
“마법서잖아? 이곳에선 비급이라고 하지, 아마?”
혈세록(血世錄)은 고독혈마가 천하를 종횡하면서 익힌 무공과 자신의 심득을 남겨놓은 무서(武書)였다. 혈마(血魔)라는 별호를 가진 대마두(大魔頭)답게 여러 가지 잔인한 무공을 많이 익히고 있었다. 마공(魔功)이나 사공(邪功)은 물론이거니와 정종무공(正宗武功)까지 알고 있었다.
“재미있군. 흡성대법이라, 이것은 광무자가 언급했던 그것이로군. 다른 생명체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무공이나 빨아들인 생기가 몸에 쌓여 결국에는 미쳐버리게 되는 허접한 무공이라고 했지 아마!”
혈세록을 주욱 읽어 내려가던 라혼의 혈세록에 대한 평가는….
“쓰레기로군. 위력은 강력하지만 전혀 쓸모없는 마법서, 아니 비급이야! 지금 머리에 바람 든 검부의 제자들이 보면 안 되니까, 불쏘시개로 사용해야지!”
라혼은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를 해제하고 험악하게 생긴 놈의 품속에서 나온 약간의 은자와 환도, 그리고 책자 하나를 수습한 뒤 나무 지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도 검부의 제자들에게 먹일 국을 안치고, 밥을 짓기 위해서였다.
라혼이 검부에 도착할 때쯤 해가 거의 저물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식사를 하는 이곳 풍습으로 볼 때 지금 쌀을 씻고 밥을 하면 식사는 별이 빛나는 밤이 다 되어서야 준비가 끝날 테니 늦어도 한참 늦은 터라 라혼은 서둘러 주방을 찾았다. 거의 100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늦었어요! 부주 사형의 기분이 좋지 않아요! 중요한 손님들이 계시는데 식사가 늦어져서…. 쌀은 제가 씻었으니 찬거리를 만들어야 해요!”
주방에서는 현석이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라혼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괜한 헛기침만 해댔다.
“험험, 거참…. 그런데 그 많은 네 사형들은 뭐 하고 너 혼자 주방에 있는 것이냐?”
“사형들은 바쁘잖아요.”
“그러냐? 비켜라. 불을 지펴야 하니까, 너는 이제 국거리나 준비해라!
현석이 국거리 준비를 위해 밖으로 나가자 라혼은 지게에서 땔감을 가져와 불을 붙였다.
“시간이 없으니 할 수 없군. 마이너 파이어볼(Minor Fireball)!”
라혼은 3서클 [파이어볼Fireball]주문을 2서클 유저인 자신이 사용할 수 있게 위력을 대폭 약화시킨 [마이너 파이어볼Minor Fireball]을 시전했다. 만약 마법을 아는 자가 라혼의 지금 행동을 본다면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겨우 밥을 짓기 위해 마법 주문을 아예 새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어? 어느새 불이 커졌네요?”
현석은 주방과 거의 붙어 있는 텃밭에서 무를 두어 개 뽑아온 사이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자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불씨가 있더라도 저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을 그 짧은 시간에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이제 불목하니 일을 2년 가까이 하고 있단다. 그보다 어서 국거리나 준비하자!”
“예, 할아버지.”
현석은 무와 몇 가지 야채를 씻은 다음 듬성듬성 썰어 국솥에 집어넣고 아궁이에 나무를 채워 넣었다. 그런데 현석의 눈에 두루마리와 책자가 보였다.
“어?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한참 바쁘게 찬거리를 만들던 라혼이 슬쩍 눈길을 주더니 말했다.
“별거 아니다. 불쏘시개로 사용해라! 두루마리는 태워버리고 책자는 아직 보지 않았으니 한쪽에 치워놓거라!”
“혈세록? 야차도보? 이거 무공 비급 아니에요?”
“쓰레기다!”
현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번 내용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쓰레기라 하시며 태워버리라 하신 말이 마음에 걸렸다. 라혼은 현석의 망설임을 읽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상당한 위력의 마공 비급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공이다. 완성되지 않은 마공은 말 그대로 마공일 뿐이다!”
“유운검도 얻지 못했는데 마공 따위에 정신을 팔 이유가 없지요!”
현석은 고독혈마의 혈세록을 불쏘시개 삼아 검부 제자들이 먹을 국을 끓일 아궁이에 불을 옮겨 붙였다. 라혼은 현석이 주저 없이 절세 마공 비급을 태우는 것을 보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때 주방에 포석이 들어왔다.
“현석아, 아직 멀었냐?”
“금방 돼요!”
“어, 해노? 어디 계셨기에 이렇게 늦으신 겁니까?”
“그럴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배가 고프면 너도 도와!”
“안 그래도 그러려고 왔습니다.”
해노가 불목하니로 오기 전에 거의 이 주방을 책임지던 포석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전문가(?) 셋이 달려들어 일을 하자 식사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이제 밥과 국이 완성되면 식사 준비는 끝난다.
“휴우~! 이제 한숨 쉬자!”
“네가 한 일이 뭐 있다구?”
“수고하셨습니다, 사형!”
“해노,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이 고생도 하루 이틀만 하면 끝날 겁니다. 포우자와 북청파의 제자들은 마을에서 묵을 거랍니다.”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세….”
요새 유운검을 익히는 재미에 푹 빠져 세상사에 별 관심 없었던 현석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포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네들은 무슨 일 때문에 온 거래요?”
“무정혈도 장막을 쫓고 있대나 뭐래나?”
“무정혈도 장막?”
“그래, 그런데 이제 쫓는 대상이 바뀌었다나 봐!”
“예?”
“정확히 장막이란 놈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장막이 가지고 있다는 무슨 비급을 추적하는데, 장막이 그새 그걸 다른 놈에게 빼앗겼대나 어쨌대나….”
현석은 문득 생각나는 바 있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라혼은 현석의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아까 낮에 본 그놈들을 이야기하는 거로군?”
“예?”
“단원산에 내가 나무 하는 곳 근처에서 장막인가 뭔가 하고 산도적같이 생긴 놈이 싸우는 걸 봤거든. 워낙 살벌하게 칼을 휘둘러서 그놈들 중 산도적같이 생긴 놈이 죽고 나서야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지.”
“에!?”
“할아버지, 그게 정말이에요?”
라혼은 땔감을 내리기 위해 치워놨던 환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봐라! 이게 죽은 그놈의 환도다! 팔면 은자 한 냥은 족히 받을 거야! 내일쯤 가서 송장을 수습해서 볕 좋은 곳에 묻어주고 생각중이다. 이것은 그 수고비조로 미리 챙겨온 거지.”
“…!?”
“…!”
현석과 포석은 해노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그럼 해노가 무정혈도가 싸우는 모습을 보셨단 말입니까?”
“그래, 이 환도의 주인이 ‘장막아, 장막아! 내 오늘 너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덤볐다가 골로 가는 것을 봤지.”
포석은 멍하니 해노를 쳐다보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주방을 뛰쳐나갔다.
“이 녀석아! 밥 다 돼가는데 어딜 가!”
포석의 입장에서는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었다. 해노의 부름을 귓가에 흘리고 부주인 대사형 천석에게 이 일을 알리기 위해 둔중해 보이는 몸을 움직였다.
“할아버지? 그럼 아까 그 혈세록인가 뭔가는 거기서 나신 거예요?”
“그렇단다.”
현석은 할아버지가 보통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북청파 같은 천하에 이름 높은 명문에서 쫓는 비급(秘笈)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무공이 적혀 있는 비급일 텐데, 한마디로 쓰레기라 폄하하고 주저 없이 태우라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내력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번 구경이라도 할걸. 나는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너스레 떨지 말고 밥통에 밥이나 옮겨 푸거라!”
어느새 쌀이 익어 밥이 되고 구수한 밥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현석은 커다란 나무 밥통에 밥을 옮겨 담기 시작했고, 라혼은 국을 국통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그때 주방으로 포석과 검부의 부주인 천석이 들어섰다.
“해노!”
“미안하오, 부주. 그러나 이제 식사 준비가 다 되었으니….”
“아니, 그보다 해노께서 무정혈도가 싸우는 모습을 보신 것이 사실입니까?”
라혼은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그자의 무기는 핏빛 혈도라던데, 그자의 무기도 보았습니까?”
“혈도라? 붉은빛이 감도는 칼을 말하는 것이라면 역시 그자가 맞는 모양이군.”
“그럼 혹시 비급, 비급도 보았습니까?”
“혈세록…?”
천석의 다급한 물음에 대답한 것은 의외로 현석이었다.
“네가 고독혈마의 비급 이름을 어찌 아느냐?”
“그거요?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럼 네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냐?”
“아니요, 그거 여기 불붙이는 데 불쏘시개로 사용했는데요?”
“…?!”
현석의 말에 천석과 포석의 표정이 ‘벙’해졌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현석이 가리킨 아궁이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어차피 마공 비급인데요, 뭐!”
“뭐 하시오! 부주, 제자들 저녁을 굶길 셈이오? 네 녀석은 어서 밥차나 밀어!”
한순간 부풀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 천석은 너무 허탈해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그리고 부주답게 냉철한 판단을 했다.
“북청파 사람들에게는 혈세록에 대한 것은 숨겨주십시오. 그리고 너희들도 명심하고.”
“예? 왜요?”
“너라면 한때 강호를 종횡하던 거마의 절세 마공을 불쏘시개로 사용했다고 곧이곧대로 말하면 믿겠냐? 널 잘 아는 나도 믿질 못하겠는데….”
포석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 현석이었다.
다음날 아침 천석과 현석을 비롯한 사형제들은 포우자와 그 제자들을 데리고 어제 무정혈도 장막이 싸움을 벌였다는 곳으로 해노의 안내를 받아 다시 찾아갔다. 천석은 비록 혈세록에 대한 것은 숨기더라도 그 외의 것은 숨기지 말아야겠다고 판단해 포우자에게 오늘 아침 해노에게 들었다는 식으로 말을 꾸몄다.
“부주, 저 노인의 정체가 뭐요?”
“저희 선사님의 친구 분이십니다.”
“불목하니 아니었소?”
“불목하니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은 맞지만, 귀파의 장문인과 더불어 선사의 둘도 없는 말년 친우이신 것도 맞습니다.”
포우자는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해노라 불리는 노인의 말하는 품세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기에 그의 정체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다. 아직 경륜이 짧은 천석은 포우자에게 시달린 끝에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해노에 관한 것을 전부 털어놓아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저 노인의 내력에 대해서 부주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렇지만 선사가 사람을 함부로 사귀시지는 않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포우자의 예리한 시선은 해노라 불리는 불목하니 노릇을 하는 노인에게 떠날 줄을 몰랐다.
“뭘 그렇게 보시오?”
“험, 허험…!”
“내 정체가 그리 궁금하시오?”
포우자는 길을 가다 말고 갑자기 따지듯 물어오는 노인의 태도에 난감하면서도 왠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겨우 불목하니 노릇을 하는 자가 동인검협 조식의 말년 말벗이 되어 친구 대접해주자 주제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라? 지금 내가 불목하니 일을 한다고 날 무시하는 거요?”
“감히, 사부님에게 무슨 행패요? 사부님은 대북청파의 장로요. 노인장의 정체를 궁금해할 이유가 없소!”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내게 우리 부주에게 캐묻듯이 캐물어올 줄 알고 내심 긴장했는데 그럴 이유가 없다니, 대북청파 장로씩이나 되는 자가 제자가 일구이언하게 하지는 않겠지?”
“아니….”
“그만, 늙은 노인 분에게 이게 무슨 행패냐?”
“사부님…?”
묘하게 포우자의 행동을 비꼰 라혼의 말에 북청파의 제자들이 발작하려 했지만 포우자는 그런 제자들을 제지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 사과드리지요!”
“받아들이겠소!”
대북청파 장로의 사과를 라혼이 한마디 겸양의 말도 없이 당당하게 받아들이자 북청파 제자들의 안색이 굳었다. 그것은 포우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마치 ‘네가 잘못한 걸 알았으니 다행이다’라는 표현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의 기세 싸움에 조마조마한 것은 오히려 현석을 제외한 검부의 사형제들이었다.
***
창백한 안색의 사내가 어제 자신에게 죽은 산적 두목의 시신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비급은 분명 끝까지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비급을 잃은 경우와 같이 내 도에 베어진 앞섶 사이로 비급이 흘러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 냇가 상류에서 나는 그놈이 혈세록을 보고 있었던 것을 목격했다. 그 뒤 내가 이놈을 시야에서 놓친 건 총 세 번, 모두 이 시냇가 근처 숲에서였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표식 없이 뭔가를 숲에 숨기면 아예 잃어버리기에 딱 좋은 경우다. 그리고 이곳에 발자국을 보건대 누군가 이곳에 와서 값나가는 물건을 전부 가져갔다는 뜻이다. 혹, 그 노인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사내 무정혈도 장막은 몸을 움직이려다 말고 누군가의 접근이 느껴지자 급히 몸을 숨겼다.
“저기 있군. 에고, 힘들어라! 힘없는 노인을 이렇게 막 몰아치다니….”
북청파의 제자들은 불목하니 노인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포우자는 천천히 털이 숭숭 난 벌거벗은 시체를 보며 말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혈도와 겨루었으니 무명지배는 아닐 텐데….”
“포우자 장로님, 그자는 아마도 포사삼귀의 맏형인 대귀 관서일 겁니다.”
포우자의 물음에 지석이 대신 답해주었다.
“이자를 아시오?”
“모릅니다. 하지만 무정혈도가 도륙을 냈다는 포사산의 녹림도는 삼귀채뿐이고 그곳 채주는 포사삼귀입니다. 환도를 사용하는 자가 대귀 관서라 했으니, 그자가 대귀 관서가 맞을 겁니다.”
“흐음~!”
“사부님, 이자가 장막의 손에서 비급을 탈취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자가 그자의 혈도에 명을 다했으니 비급은 다시 그자의 손에 돌아가 있을 겁니다.”
“네, 말이 옳은 듯싶구나.”
포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부 부주인 천석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대로 무정혈도를 추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시지요!”
“그럼!”
북청파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관서의 시신까지 들쳐 메고 산을 내려갔다.
“시신은 왜 들고 가는 거야?”
“아마도 해노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그 시신의 얼굴을 아는 자나 무정혈도의 무공을 잘 아는 자에게 시신의 상흔을 보여 확인하려고 그러는 거야!”
포석은 부주인 대사형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쳤다. 그러나 속편한 현석이나 포석과는 달리 생각이 많은 천석은 무척 불안했다. 무정혈도 장막이 비급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이다. 포우자의 말대로라면 그의 무공 수위는 포우자와 평수를 이룰 것이라 말했다. 만약 그가 비급의 소재를 좇아 검부에 나타난다면 지금의 검부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잘못하면 제2의 삼귀채 꼴이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석의 걱정은 기우(杞憂)가 아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풀에 은신한 무정혈도 장막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때 그 노인과 함께 있는 검부의 사형제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부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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