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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리산둘레길 2구간 제1부
서림공원-북천마을-신기마을-
전촌마을-황산대첩비지-비전마을
20251202
1.맹렬아, 날 버리고 가랴거든 정마저 가려무나
지리산둘레길 2구간은 남원시 운봉읍 지역에서 남원시 인월면으로 넘어간다. 운봉읍 서천리, 북천리, 신기리, 화수리 지역을 통과하여 인월면 인월리 월평마을로 내려가 람천 구인월교 남단 2구간·3구간 시종점에서 마치게 된다. 그러나 구인월교를 건너 2구간 실질적인 종점인, 남원 인월센터까지 가서 마무리한다. 지리산둘레길 운봉~인월, 2구간을 2부로 나누어 제1부 서림공원~비전마을, 제2부 비전마을~월평마을~인월센터 소구간으로 정리한다.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국도 제24호선 황산로 옆 황산토종정육식당 주차장에 보도여행팀 안내버스가 정차하였다. 황산로로 나와 3구간 방향과 역방향으로 지난번 2구간 탐방 때 살폈던 운봉읍행정복지센터 방향으로 나가보았다. 초겨울 아침의 날이 맑다. 동쪽 지리산서북능선에 뜬 해는 운봉고원을 투명하게 비춘다. 이번 탐방은 풍경을 멋지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발걸음을 돌려 황산로의 서림공원 입구에서 서천리 당산으로 들어갔다. 2구간에서 살폈기에 낯이 익어 정답다. 운봉 석장승 한쌍 진서대장군과 방어대장군, 제단이 앞에 마련되어 있는 당산나무, 여러 비석들이 줄지어선 비석군碑石群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지난 번 살피지 못한 충혼탑을 살피기 위해 서림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충혼탑을 살폈다.
서림西林은 동림東林과 더불어 운봉현의 비보림裨補林으로 지난 시절 고을민들의 기복지祈福地로 유서 깊은 곳이었다고 한다. 운봉읍 서천리 지역은 함양과 남원을 잇는 서림대로西林大路가 지나는 운봉 고을의 입구이다. 그래서 운봉읍 서천리에 조성된 비보림은 현두교懸頭橋가 있던 숲이란 뜻으로 현두懸頭숲으로 불렸으며 선두숲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을의 머리와 같이 대대로 신성시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현두숲은 전쟁과 산업화에 따른 이농離農의 세월 속에 버려져 있다가 현재의 서림공원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2001년 서림공원의 쉼터 서림정西林亭이 건립되었고, 그 옆으로 2007년 '절도사손공분충어난비節度使孫公奮忠禦難碑'가 옮겨지고, 그 옆에 '분충어난비奮忠禦難碑'의 유래를 적은 '분충어난유래비奮忠禦難由來碑'가 세워졌다.
지리산둘레길 1구간을 마치고 살핀 친근한 모습을 자꾸 보아도 싫지 않고 오히려 정이 더 쌓인다. 그것은 남쪽에 이어지는 멋진 지리산서북능선과 북쪽으로 봉화산에서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에 싸인 분지 형상의 운봉고원 지형 때문인지 모른다. 운봉 지역은재난을 피하는 안전 지역인 십승지十勝地를 떠나서 풍경이 좋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편안한 평화와 여유를 준다.
람천濫川의 서림교 옆 지리산둘레길 1구간·2구간 시종점 표지판과 벅수 조형물 옆 스탬프함에서 스탬프를 찍고, 지리산둘레길 2구간 탐방을 출발한다. 운봉읍 서천리 지역의 람천 남쪽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간다. 벚나무가 즐비한 둑방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백두대간 고남산이 아담하게 솟아 있고 남동쪽에는 지리산서북능선이 남쪽 고리봉에서 북쪽 바래봉으로 길게 이어지며 그 대미를 장식하는 덕두봉이 살며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십승지길 둑방을 따라 운봉읍 서천리에서 북천리로 넘어가 협동교 남단을 가로지른다. 람천은 북천마을을 북쪽으로 에돌아 흐르고, 천변 북쪽에는 운봉의 주산 잿뫼산이라 불리는 성산城山이 지리산서북능선과 백두대간 사이에서 운봉고원을 거느린다. 북천마을은 예전에 객사가 있었다고 하여 객사마을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객사가 현 운봉초등학교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지리산둘레길은 벚나무들이 가로수로 조성된 람천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간다. 람천의 다리를 건너 람천 남쪽 둑방과 북쪽 둑방을 오간다. 북천리와 신기리를 이어주는 신기교를 건너 운봉읍 신기리 람천 북쪽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 사반교 북단까지 이어간다. 신기마을은 람천 북쪽 넓은 광탄들녘에 자리하여 남쪽으로는 지리산서북능선의 바래봉과 덕두산을, 북쪽으로는 백두대간 고남산을 바라보는 운봉고원 분지에 자리한다. 신기마을 입구 람천의 사반교 남단에서 사반교를 건너 운봉읍 화수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다리 이름 '사반교'의 뜻을 모르겠다. 사반이 무슨 뜻일까? 김동리의 소설 <사반의 십자가> 주인공인 혈맹단 단장 '사반'일까?
사반은 어려서부터 무술(武術)을 좋아하였으며, 유대를 점령한 로마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열여덟 살에 집을 나와 무력을 기른다. 그 뒤 3년 동안 유랑하면서 그는 유대의 독립을 위해서는 개인의 무술보다 집단적으로 훈련된 군대와 민중을 움직일 수 있는 메시아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사반은 메시아로 생각되는 예수를 두 번 만나면서 그가 땅 위에 새 나라를 세우려 하기보다는 하늘나라에 새 나라를 세우려 하는 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실망과 더불어 그는 사생활에서는 똑같이 사랑하며 그에게 힘이 되었던 마리아와 실바아 가운데 예수에게 귀의한 마리아를 잃게 되고, 신봉하던 하닷까지 잃으면서 점차 자신감을 상실한다. 그러나 아굴라의 흉계로 로마군에게 잡혀 십자가에 처형될 때도, 함께 처형을 당하고 있던 예수가 말하는 내세의 낙원을 끝까지 거부하며 죽는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니면 사반(沙泮)으로, 람천의 모래밭을 뜻하는 것일까? 또 이 지역의 지명인 사반(四班)이거나, 신기리와 화수리 지역의 지명 두 곳의 첫머리 글자를 딴 것일까? 람천의 서림교, 협동교, 신기교 등의 다리 이름은 그 뜻이 분명한데, 사반교의 '사반'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를 가장 먼저 떠올린 사반교를 건너 운봉읍 화수리 지역으로 넘어갔다. 이제부터 람천 남쪽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 전촌마을 대첩교까지 이어간다. 남쪽에는 광평들녘이 넓게 펼쳐지고, 지리산서북능선 끝자락인 바래봉이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덕두산으로 이어져 지리산서북능선은 동쪽 인월면 중군리 지역의 람천으로 꼬리를 내릴 것이다.
지리산서북능선 북쪽 자락에는 운봉읍 화수리 지역의 소석小石마을과 그 동쪽에 화신花新마을이 자리한다. 소석마을은 지리산서북능선에서 갈라지는 바래봉지맥 서쪽 기슭의 잔등평전平田 평지에 자리하고, 화신마을은 서쪽의 소석마을과 동쪽의 옥계동 사이에 둥지를 틀며, 그 맞은편에 전촌前村마을이 그윽한 솔숲에 싸여 있고, 람천 북쪽 화수산 자락에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와 비전碑前마을이 자리한다. 그리고 신기마을 북쪽 너머에는 백두대간 능선이 지나며 고남산이 아담하게 솟아 있다. 람천濫川의 평평한 바위에 백로 한 마리가 앉아 먹이를 찾고 있고, 물에서는 청둥오리 가족이 먹이를 찾는 듯 유영을 즐긴다. 지리의 확인과 풍경의 감상은 탐방 최고의 즐거움이다.
람천 남쪽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가며 정면 동쪽의 황산, 북쪽의 백두대간 능선, 남쪽의 지리산서북능선 사이에 자리한 운봉고원 분지를 살핀다. 람천 남쪽의 광평들녘과 람천 북쪽의 광탄들녘이 펼쳐진 운봉고원 분지, 그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아가는 마을의 위치를 확인하고 풍경을 감상하는 것에 황홀하다. 그 황홀함을 즐기며 대첩교에 이른다. 대첩교는 람천 남쪽의 전촌마을과 북쪽의 비전마을과 황산대첩지를 이어준다. 먼저 전촌마을로 들어가 입구의 모습을 살핀다. 박초월 국창의 동상과 그 뒤 솔숲 쉼터에 제5회 국악거리축제를 기념하여 '길따라 소리 따라 동편제' 무대가 조성되어 있다. '국악거리축제'는 2015년부터 시작되어 '동편제국악축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제11회 동편제국악축제가 2025년 9월 13일(토) 15:00~21:00에 황산대첩비지, 정자마루 일대, 운봉읍 비전·전촌마을 일대에서 열렸다고 한다. 국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열어가는 남원시 운봉 지역의 '동편제국악축제'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대첩교大捷橋를 건너 람천 북쪽 둑방으로 넘어갔다. 반월산(半月山)이라고도 불리는 화수산花水山 자락에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와 비전碑前마을이 자리하는데, 먼저 황산대첩비지를 살핀다. 하마비下馬碑와 어휘각御諱閣이 화수산 서쪽 자락에 있고, 그 중심을 이루는 황산대첩비는 화수산 중앙 자락에 사적비각, 황산대첩기념비와 파비각과 함께 자리한다.
1380년(우왕 6)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鎭浦, 현 금강 하구)에 침입하였다. 이때 왜구를 이끈 장수는 17세 아지발도였다. 우왕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로 임명하였다. 이성계는 운봉(雲峯)을 넘어 황산(荒山) 서북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峯, 남원시 인월면 서무리 사창마을 서쪽에 있는 정봉鼎峯, 이성계가 이 산에서 솥을 걸고 군사의 밥을 지었다는 전설이 있음)에 올라 적진을 살펴보며 작전을 세웠다. 이성계는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황산에서 왜구를 지휘하던 아지발도를 이두란(李豆蘭)과 합세하여 죽이자 적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고, 이성계가 돌진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1577년(선조 10)에 황산대첩비를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웠다.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1882)에 다시 고쳐 지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계의 행적은 조선 건국이 되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통하여 영웅화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 세종 27년(1445) 편찬되어 세종 29년(1447)에 발간된 악장·서사시로 모두 125장이며, 제목은 '용(임금)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리는 노래'라는 뜻이다. 각각의 노래는 노래원문-한역시漢譯詩-한문 주석으로 구성된다. 이들 중 제48장은 이성계의 황산 전투를 칭송하는 노래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48장의 원문, 한역시, 현대어 풀이를 위키백과에서 살펴본다.
굴허〮ᅌᅦ〮 ᄆᆞᄅᆞᆯ〮 디〯내〯샤〮 도ᄌᆞ기〮 다〯 도라〮가니〮 半 길〯 노ᄑᆡᆫ〮ᄃᆞᆯ〮 년기〮 디〯나리〮ᅌᅵᆺ가〮
石壁에〮 ᄆᆞᄅᆞᆯ〮 올이〮샤〮 도ᄌᆞᄀᆞᆯ〮 다〯 자ᄇᆞ시〮니〮 현〮 번 ᄩᅱ운〮ᄃᆞᆯ〮 ᄂᆞ〮미〮 오ᄅᆞ리〮ᅌᅵᆺ가〮
深巷過馬 賊皆回去 雖半身高 誰得能度 심항과마 적개회거 수반신고 수득능도
絶壁躍馬 賊以悉獲 雖百騰奮 誰得能陟 절벽약마 적이실획 수백등분 수득능척
(금나라 태조가) 골목에 말을 지나게 하시어 도적이 다 돌아가니, 반 길 높이라 한들 다른 사람이 지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이 태조가) 바위 절벽 위로 말을 올라가게 하시어 도적을 다 잡으시니, 몇 번을 뛰어 오르게 한들 남이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금(金) 나라 태조가 한 번은 군영을 나와 적을 많이 죽이고 돌아올 때, 많은 적의 군사가 쫓아오는데 혼자 좁은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쫓아오는 적은 급히 쫓는데 앞에 한 길이나 되는 절벽이 있었다. 태조는 말을 채찍질하여 언덕을 무사히 뛰어오르니 적은 쫓지 못하고 돌아갔다. 고려 우왕 때 왜적이 남쪽 해안선을 침범하므로, 태조가 화살을 쏘아 적장을 넘어뜨렸다. 이에 기세가 꺾인 왜적은 황산 높은 절벽 위에 올라가 버텼다. 벼랑이 높고 험하여 다른 병사들은 오르지 못했다. 태조는 비장과 태종을 차례로 보냈으나 절벽을 올라갈 수 없으므로, 자신이 칼등으로 말을 쳐서 한달음에 오르니 군사들이 뒤쫓아와서 왜적을 섬멸했다. - 주석
이 노래는 금 나라 태조가 도적을 피하기 위해 말을 타고 한 길이 넘는 언덕을 뛰어넘었듯이, 조선의 이 태조가 높은 석벽에 말을 단숨에 올려 도적을 잡았음을 드러냄으로써 태조의 초인적인 능력을 강조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태조가 새 왕조인 조선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뛰어난 영웅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황산대첩비지를 살핀 뒤 그 동쪽 자락의 동편제마을 비전마을로 들어갔다. 전촌마을과 비전마을을 함께 동편제마을이라 이르며, 비전마을에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났다고 하여 비전마을은 특히 동편제의 탯자리라고 이른다. 송흥록 생가와 박초월 고택이 있는 뜰로 들어갔다. 이곳은 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과 국창(國唱) 박초월(朴初月)이 살았던 곳으로, 10가구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그 시대의 초가 형태로 2000년 7월 28일 복원하였다고 한다. 뜰에는 송흥록 가왕의 동상과 여러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중국의 경극京劇, 일본의 가부키歌舞伎, 우리의 탈춤은 각국의 전통연극을 대표한다. 음악으로서의 판소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악이다. 우리는 혹시 판소리를 홀대하지 않았는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 송흥록 생가, 판소리를 계승한 국창으로서 국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국악 교육에 앞장선 국창 박초월의 고택 뜰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송흥록 생가 뜰에서 동쪽의 황산, 남쪽의 지리산서북능선 덕두산이 보인다. 그는 지리산과 황산을 바라보며 판소리 가창을 피를 토해 내며 연습하였을 것이다. 그는 진양조 가락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춘향가의 ‘귀곡성(鬼哭聲)’은 진양조 최고 소리로 자리매김하였다. 가왕歌王 송흥록은 대구 감영 관기官妓 맹렬을 사랑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를 알아본다. 가왕 송흥록이 대구 감영에서 소리할 때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지만 경상 감사의 수청기생(守廳妓生) 맹렬 (孟烈)만은 아무 말이 없었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명창이긴 하지만 아직 미진한 곳이 많다고 말했다. 이에 송흥록은 다시 운봉으로 돌아와 피를 쏟으며 노력을 기울인 후 다시 맹렬 앞에서 소리를 했고, 드디어 맹렬은 그의 소리에 반해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지만 부부생활이 평탄치 못했다. 어느 날 맹렬이 짐을 싸서 집을 나가자 송흥록은 그 비통한 감정을, "맹렬아 잘 가거라/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잘 가거라/ 날 버리고 가랴거든 정마저 가려무나/ 몸은 가고 정만 남아/ 쓸쓸한 빈 방안에 애를 태우니 병 안 될소냐."라고 노래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맹렬은 봇짐을 풀었고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한다. 맹렬을 향해 부른 이때의 노래도 진양조 가락이었을 것이다.
2.탐방 과정
탐방 거리 : 10.6km
탐방 소요 시간 : 3시간 15분
국도 제24호선 황산로의 서림공원 입구에 지리산둘레길 제2구간(운봉-인월) 시작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서림공원길을 따라 맨 뒤 왼쪽의 서천리 당산으로 이어간다.
서천리 당산 앞쪽에 남원 서천리 당산 안내판, 석장승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그 옆에 당산나무와 비석군이 있다.
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남원 서천리 당산에는 남녀 한쌍의 돌장승이 서 있다. 외형상으로는 남녀를 구분하기 쉽지 않은데 북쪽에 서 있는 장승이 남장승, 남쪽에 서 있는 장승이 여장승이라고 전해진다. 각각의 돌장승에는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이다. 두 장승은 모두 수염이 있고 벙거지를 썼는데 남장승인 방어대장군은 귀가 없다. 두 장승이 부부 싸움을 하다가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원 서천리 당산의 돌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속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 서천리 당산 안내판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맞은편에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이 서 있고 왼쪽 뒤에 공중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람천의 서림교가 왼쪽에 있고, 그 오른쪽 둑방에 지리산둘레길 1구간·2구간 시종점이 있다. 뒤쪽에 고남산이 아담해 보인다.
서림교 입구에 2001년에 건립한 서림정(西林亭), 그 옆에 서림정 건립비(西林亭建立碑)와 분충어난비(奮忠禦難碑)가 있다.
왼쪽에 석장승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그 옆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는 당산나무와 비석군(碑石群)이 있다. 당산나무 뒤에 운봉읍행정복지센터, 맨 뒤에 지리산서북능선 고리봉이 보인다.
운봉 석장승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을 포토존 안에 넣어 찍어 보았다. 안내판의 솟대는 당산에 보이지 않는다.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운봉 석장승 ː 서천리 당산은 당산나무, 돌장승, 솟대로 구성되어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남녀 한 쌍인 돌장승은 운봉초교 서쪽 500m여 지점에 마주보고 서 있는 부부 장승이며, 이 주변에 당산나무가 있다. 부부장승은 마을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입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비석군(碑石群)에는 지방관의 선정비 2기와 불망비 2기, 어사선덕비, 갑오동학농민혁명사적비인 갑오토비사적비 등 운봉 고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비석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서림공원 안쪽 중앙에 6.25전쟁 충혼탑이 있고, 그 앞에 안내비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원래는 느티나무·밤나무 등으로 숲을 이루어 마을에서는 선두숲이란 명칭으로 관리하여 왔다. 그러다 고목나무 등이 폭풍 또는 병해로 한두 그루씩 고사되어 현재는 서어나무 5주, 88서울올림픽을 맞아 남원군에서 올림픽숲 조성사업으로 심은 느티나무 40주가 있다. 현재는 근원경 20~40㎝가 되었고 벚나무도 10여 그루가 군식되어 아름다운 숲으로 가꾸어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리 지역은 6.25전쟁 당시 후퇴하지 못하고 지리산 일대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과 주민살상의 만행을 저지른 이현상 부대 등과 맞서 싸웠으며, 지리산 지역주변 면지역 지서(지금의 파출소) 등이 모두 이들에게 점령되었지만, 운봉읍은 최후까지 점령되지 않았다. 이렇게 운봉읍을 끝까지 사수해 낸 호국영령들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현 우체국 자리에 충혼탑을 세웠으나, 우체국 개설과 주민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마산고개로 이설하여 방치하였던 것을 같이 싸우던 향토방위 전우와 유족,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아 현 위치로 옮겨왔다. 매년 현충일을 맞이하여 운봉읍사무소 주관 옛 전우들의 후원 아래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자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맨 오른쪽에 '서림정 건립비(西林亭建立碑)', 중앙에 '절도사손공분충어난비(節度使孫公奮忠禦難碑)', 그 왼쪽에 분충어난비(奮忠禦難碑) 유래를 적은 새로운 '분충어난비(奮忠禦難碑)' 등 3기의 비석이 서림정 옆에 세워져 있다.
서림정 건립비(西林亭建立碑) : 운봉 고을은 잿뫼산(성산)을 주산으로 동천과 서천을 끼고 가히 배산임수의 길지로 신라 경덕왕 16년 모산현이 운봉현으로 개칭된 바, 이곳 서림은 동림과 더불어 운봉현의 비보림(裨補林) 중의 하나였으며 과거 고을의 기복지(祈福地)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운봉현 관아가 위치하던 운봉초등학교 앞 홍살문을 거쳐 서천 옛 현두교(懸頭橋)를 통해 함양과 남원을 잇는 서림대로(西林大路)는 고을의 입구 역할을 하였던 만큼 비보림이 조성되어 현두숲으로 불렸습니다. 이는 현두교가 있던 숲이란 뜻으로 선두숲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곧 마을의 머리와 같이 대대로 신성시되던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석장승 2기를 세워 악귀를 쫓았는데 민속자료 제20호인 진서대장군(남)과 방어대장군(북)이 그것입니다. 또한 과거 지방관의 선정비(2기)와 불망비 (2기), 어사선덕비, 갑오동학농민혁명사적비인 갑오토비사적비, 6.25 충혼탑 등 우리 고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비석군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석장승은 한때 도난 당했다가 최근 목이 부러진 채 되찾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운봉에는 야제당의 사직단, 잿뫼산의 여제단, 사정 동편의 성황단 등의 기복지가 있었습니다. 잿뫼산과 멀리 바래봉, 고남산, 황산 등 운봉의 명산을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이 대대로 고을의 발복을 잇고, 운봉읍의 문화 휴식공간으로 거듭나길 원하며 서림정을 세웁니다. 글 : 이남일 2001. 10. 17. 6代 운봉읍장 박진기 건립
분충어난비 유래를 적은 '분충어난비(奮忠禦難碑)'가 '절도사손공분충어난비(節度使孫公奮忠禦難碑)' 옆에 새로 세워졌다.
이 비(碑)는 절도사(節度使) 손명대(孫命大,1675년숙종1~1733영조9)의 분충어난비(奮忠御難碑)이다. 손명대는 자(字)가 칙천(則天) 본관이 일직(一直)으로 1697년(숙종 23)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영조(英祖) 3년 여산부사(礪山俯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 운봉영장(雲峯營將)에 위임해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했다. 이에 당시 운봉 인사(人士)들이 손 절도사의 충렬공(忠烈功)을 널리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1784년에 세운 바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단, 세월의 변화와 무관심 속에 이 비석이 북천리 도로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제 6,10대 전 운봉면장 박원용(朴元鏞)선생께 1970년대 운봉 축산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학생들의 충효정신 교육 차원상 고등학교내로 옮겼다. 그 뒤 축산고등학교가 준향리 내 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로 신축 이전됨에 따라서 제9대 박진기(朴進基) 운봉읍장이 선렬(先烈)의 충국(忠國)에 대한 지극한 흠모 정신에 입각해 제노소(諸老少)의 의견을 수렴한 바, 민선 4기 최중근(崔中根) 시장께서 그뜻을 높이 기려 이곳 서림공원 내 충혼탑(忠魂塔) 옆으로 옮겨 모셔졌다. 아! 이제 비로서 문화재적인 이 비석을 잘 보존함은 물론 아울러 후대에 선렬(先烈)의 거룩한 충국애민(忠國愛民) 정신을 귀감(龜鑑)케 하니 아아! 참으로 다행하고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서기 2007년(단기 4340년) 7월 30일 글 : 공안서당 훈장 이학규(李學圭)
2001년에 건립된 서림정(西林亭)이 서림숲(선두숲) 앞에 자리하고 그 옆에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서림교가 람천 위를 가르고 뒤쪽에는 백두대간 고남산이 아담하게 솟아 있다.
석장승 한쌍이 당산 앞을 지켜주고 오른쪽에 당산나무가 있으며 뒤쪽에 지리산서북능선의 바래봉과 덕두산이 확인된다.
서천리 당산의 당산나무와 비석군이 서림공원 입구에 있고, 앞쪽에 서림정, 그 옆에 서림정 건립비와 분충어난비가 있다.
서림교 옆 람천 동쪽 둑방에 지리산둘레길 1구간·2구간 시종점 안내판과 스탬프함 등이 설치되어 있다.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안내판에 적힌 옛 '통영별로'는 통영에서부터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가던 지름길이라고 한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10km의 지리산둘레길. 운봉-인월 구간은 남쪽으로는 정령치, 고리봉, 바래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수정봉, 여원재,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걷는 길이다. 이 길은 옛 '통영별로' 길과 람천변의 제방길로 연결된 폭이 넓고 평이한 길이다. 운봉 일대의 역사문화 유산을 즐기며 걷기에 좋은 구간이다.
●운봉읍 ː 운봉 들판은 고산지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한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 다툼이 있던 지역으로 조선시대까지 운봉현이 있던 곳이다. ●석장승 ː 운봉 석장승은 서림공원에 있으며, 서천과 북천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만든 장승이다. ●신기마을 숲 ː 이 숲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토성을 쌓고 조성한 숲이다.
서림교 옆 람천 동쪽 둑방의 지리산둘레길 1구간·2구간 시종점에 여러 안내판과 이정목, 스탬프함 등이 설치되어 있다.
벚나무 가로수가 조성된 람천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간다. 중앙 뒤에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이룬 황산이 솟아 있다.
람천 둑방 안쪽에 남원 운봉축구장이 조성되어 있고, 뒤쪽에 지리산서북능선의 끝자락 바래봉과 그 왼쪽 뒤 덕두산이 보인다.
운봉읍 서천리 람천 동쪽 둑방길에서, 고리봉에서 세걸산, 부운치로 이어지는 지리산서북능선을 돌아보았다.
지리산서북능선이 맨 오른쪽 세걸산에서 왼쪽 바래봉과 그 왼쪽 뒤 덕두산으로 이어진다.
십승지길을 따라 운봉읍 북천마을로 들어간다. 왼쪽 아래 람천 왼쪽 산은 잿뫼산(城山)이며, 중앙 뒤에 황산(荒山)이 솟아 있다.
운봉읍의 북쪽 냇가 마을인 북천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천변과 뒷산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마을이라 벽송동(碧松洞)으로 불리기도 했고, 객사가 있는 마을이라 객사마을로도 불리었다. 객사란 조선시대 국립숙박시설이었고 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운봉초등학교에 있었다고 한다. 방위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보이는 석장승 2기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유난히 귀가 크고 온화한 표정의 동방축귀대장군과 상투를 틀고 조금 험상궂어 보이는 서방축귀대장군이다. - 지리산둘레길
운봉읍 북천리 합동교 남단을 가로질러 람천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간다. 북천마을 뒤편으로 남천(濫川)이 마을을 휘감듯 흐르고 있으며, 냇가 건너에는 운봉읍의 주산인 해발 460m 성산(城山, 잿뫼산)이 자리한다.
협동교는 남쪽의 북천리와 북쪽의 서천리를 이어준다. 뒤쪽에 백두대간 고남산이 아담하게 솟아 있다.
운봉읍 북천리 지역의 십승지길을 따라 람천을 내려간다. 황산이 오묘하다.
신기교는 운봉읍 북천리와 신기리를 이어준다. 지방도 제743호선 승전로의 신기교를 건너 람천 북쪽 둑방길로 이어간다.
신기교에서 람천 하류를 바라본다. 람천이 북쪽의 신기리와 남쪽의 북천리를 가르며 동쪽의 황산을 향하여 흘러간다.
왼쪽은 지방도 제743호선 승전로이며, 오른쪽 길은 운봉신기길이다. 지리산둘레길은 맨 오른쪽 둑방길로 나간다.
운봉읍 신기리 람천 북쪽 둑방에서 건너편의 북천리를 흘러온 운봉천이 신기교 아래에서 람천에 합수하는 모습을 살폈다.
운봉읍 신기리 람천 북쪽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 내려간다. 억새풀꽃 뒤쪽에 운봉읍 신기리 신기마을이 보인다.
람천 북쪽 둑방에서 운봉읍 신기리(新基里) 신기마을을 바라본다. 왼쪽 뒤에 백두대간 고남산이 아담하게 솟아 있다.
입향조인 장덕복이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새터’, 곧 신기(新基)라 하였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휴전 상태에 접어들어 왜적이 잠시 철수하고 영남이 아직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할 때인 1595년(선조 28), 비교적 전란의 피해가 적은 호남 지방을 유랑하며 정착지를 찾던 사람들 중 맨 처음 이곳 길지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인동 장씨 장덕복(張德福)이었다. 신기(新基, 새터)는 본래 운봉군 군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운봉읍 신기리가 되었다. 자연 마을로 진수러기(장연, 진수역)가 있다. 람천이 운봉의 주산인 성산(잿뫼산) 남쪽 기슭을 휘돌아서 마을 동쪽 너른 광탄 들녘을 지나고 황산의 좁은 협곡을 지나 인월면 풍천으로 빠져나간다. 신기리에는 1748년 보맥유림만대(補脈有林萬代)의 뜻으로 사주(仕主) 장준대(張俊大)와 별좌 정태우(鄭太右)의 주관으로 길이 50m, 폭 3m, 높이 1.5m의 흙을 쌓아 만든 토성(土城)이 있다. 공공 시설물로는 1996년에 신축된 마을회관이 있고, 종교 단체로는 예수교 장로회 신기동부교회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운봉읍 신기리(新基里) 람천 북쪽 둑방 십승지길에서 사반교를 건너 운봉읍 화수리 남쪽 둑방으로 넘어간다.
사반교는 운봉읍 신기리와 화수리를 이어준다. 뒤쪽에 지리산서북능선이 중앙의 바래봉과 맨 왼쪽의 덕두산으로 이어진다. 건너편 산자락의 마을은 운봉읍 화수리 소석마을이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주위가 큰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어서 소나무에 싸인 작은 마을이라는 뜻의 소송리(小松里)라 하였다가, 후에 마을 뒷산에 잔돌이 많아 소석리(小石里)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사반교에서 람천 하류 방향을 바라본다. 모양새가 멋진 황산 옆으로 람천이 흘러 인월면 지역으로 내려간다. "지리산 고리봉에서 흘러온 물이 람천이 되고 운봉고원과 인월, 산내를 지나 함양의 마천을 거치고 마침내 낙동강으로 흐른다. 갈대가 우거진 람천은 철새와 수달들이 찾는 곳으로 그 외에도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가 되고 있다." (지리산둘레길)
운봉읍 화수리(花水里) 지역의 람천 남쪽 둑방 십승지길을 따라 황산을 바라보며 내려간다.
화수리(花水里)는 본래 운봉군 서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촌리, 옥계리, 비전리, 소석리 일부를 병합하여 화수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운봉읍 화수리가 되었다. 화수리의 자연 마을로 전촌, 소석리, 육거리, 지와막, 비전, 하마정, 옥계동이 있었으나 현재 육거리, 지와막, 하마정, 옥계동은 폐촌이 되었으며, 1961년 이후 군화동과 화신동이 새로 형성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십승지길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맨 뒤에 지리산서북능선 바래봉과 그 왼쪽에 덕두산이 가늠된다. 건너편 중앙의 화수리花水里 잔등평전에 자리한 소석마을을 확인한다. 바로 앞 들녘을 광평들녘이라 이른다.
소석마을은 1674~1720년 숙종 연대에 평산신씨, 이씨, 범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마을 뒷산에 매방골이 있는데 이 골짜기는 예로부터 원님이 1년에 몇 차례씩 나와 매사냥을 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과거 매방골에서 흘러내린 골짜기 물을 물넘기틀로 넘겼는데, 이곳을 물고개라 하며 물고개로 넘어온 그 물로 소석리에서는 농사를 지었다. 물고개의 낙차 거리가 약 70m에 달하였는데, 이것이 아침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건넛마을 신기리와 매요리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되어 상대 마을과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끝내는 말썽 많은 물넘기를 중지해 버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왼쪽은 화수리 소석마을, 그 오른쪽 뒤는 용산리 지역이며, 중앙 맨 뒤에 지리산 서북능선 고리봉이 가늠된다.
십승지길에서 광평들녘을 바라보면, 중앙의 잔등평전에 소석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소석마을은 바래봉 지맥이 슬며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덕두봉(德頭峯)을 동쪽으로 끼고 폭 1㎞, 길이 약 4㎞의 옥계동의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옥계동 서쪽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오랜 침식과 풍화로 형성된 완만한 서편 기슭이 길게 타고 내려와 24번 국도 못미쳐 잔등평전이란 평지를 이룬다. 소석마을은 바로 이곳에 자리한다. 남쪽으로 넓은 종축장이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화신마을 너머 황산이 위치한다. 마을 앞 서쪽 넓은 광평들녘 너머로 고남산(古南山)이 보인다. 바래봉 기슭에서 발원한 하천이 옥계동과 용산천 쪽으로 흘러내려오나 수량은 풍부하지 못하다. 물이 마른 잔등평전의 지형적인 이유 때문인지 잔돌이 많은 편이다. 화신(花新)마을은 1969년 북한 김신조 부대의 대남 침투 사건 이후 독가촌(獨家村)을 한데 모아 화수리에 편입하여 화수리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화신(花新)으로 부르게 되었다. 행정적으로 독가촌 여러 세대가 일시에 이주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는 운봉읍에서 인월면 방면으로 3㎞ 지점 국도 24호선 좌우측에 분포한 마을로 소석·전촌·비전·화신 마을 등이 있다. 건너편 왼쪽 산자락에 화신(花新)마을, 그 앞쪽 솔숲에 전촌(前村)마을이 자리한다.
화신마을은 바래봉의 완만한 서쪽 기슭에 위치하여 물이 많지 않고 논농사에 적합한 평지가 없어 주민들은 대부분 고랭지 채소나 가축업에 종사한다. 종교 단체로는 1963년 옛 절터에 건립하였던 운선암을 개명하여 1996년 건립한 태고종 사찰인 천광사가 있다. 유적으로는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은거했던 옥계동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소리무덤이 남아 있다. 화신마을은 운봉읍과 인월면의 경계에 가까운 지역으로 24번 국도에 인접해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황산을 바라보며 화수리 광평들녘을 지난다. 오른쪽에 전촌마을이 보이고, 람천 건너편 북쪽에 비전(碑前)마을이 있다.
전촌마을이 주차장 뒤에 자리하고, 람천의 대첩교를 통해 비전마을과 통한다. 전촌마을과 비전마을은 동편제마을로 불린다.
운봉읍 화수리 람천 북쪽 반월형의 화수산 자락에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그 동쪽에 비전마을이 자리한다.
화수산(花水山)은 운봉읍 화수리 들녘 가운데 반달 모양으로 솟아 있어 반월산(半月山)이라고도 불린다. 산 이름은 마을 이름인 화수리(花水里)에서 유래하였으며, 인공적으로 조성된 작은 산이다. 이곳에는 황산대첩비지와 어휘각(御諱閣)이 자리하고, 판소리 가왕 송흥록(宋興祿)의 생가와 국창 박초월(朴初月)의 고택이 복원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람천의 대첩교는 동편제마을인 남쪽의 전촌마을과 북쪽의 비전마을을 이어준다. 전촌마을을 먼저 살피고 전촌마을로 간다.
대첩교 남단에서 화수산 남쪽에 위치한 동편제마을 전촌마을을 살핀다. 운봉읍 화수리 전촌마을은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세워져 있는 앞 마을이라 하여 앞마을 또는 앞몰이라 하였다가 한자로 전촌(前村)이 되었다고 한다.
1674~1720년 숙종 연대에 운봉읍 밀양박씨가 황산대첩비 옆 북천 변에서 낚시를 하다가 황산대첩비 입구에 있던 수려한 풍치의 소나무 숲에 이끌려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마을을 세웠다. 그후 김씨, 이씨, 강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봉에서 번성하였던 밀양박씨들은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동천리 박씨인 동박과 서천리 박씨인 서박으로 분리하여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전촌에 들어온 박씨가 동박에 속했다. 전촌 뒤에 위치한 신당에서는 당산제를 지내왔으나 1960년대 중단되었다. 1970년대까지 전촌 앞에 지와막이라는 도요지가 존속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 기간 중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까지 직통으로 마을 진입로를 확장하였으며 1980년 비전마을과 전촌마을을 연결하는 길이 65m, 폭 6m의 다리인 대첩교를 가설하였다. 1988년 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황산교회가 설립되었다. 1993년 마을회관을 건립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촌마을 입구에 동편제마을 표석과 박초월 국창 동상이 세워져 있고, 뒤에는 커피&빵 '반달곰의 새참'이 있다.
소나무숲 쉼터에 동편제마을 제5회 국악거리축제를 기념하여 '길따라 소리 따라 동편제' 무대가 조성되어 있다. 동편제마을은 판소리 동편제의 태동지로, '동편제'는 판소리의 한 유파로, 남원을 중심으로 한 동쪽 지역에서 발달한 판소리 양식이다. '동편제국악축제'는 2015년부터 시작되어 제11회 동편제국악축제가 2025년 9월 13일(토)에 황산대첩비지, 정자마루 일대, 운봉읍 비전·전촌마을 일원에서 열렸다고 한다.
오른쪽에 동편제마을 종합안내도, 건너편 주차장에 화장실과 남원시 관광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나가 대첩교를 건넌다.
대첩교를 건너며 람천의 북서쪽을 살폈다. 오른쪽 나무 뒤에 어휘각과 하마비가 있고, 왼쪽 뒤에 고남산이 솟아 있다.
대첩교에서 람천 북동쪽의 화수리 비전마을과 황산을 바라본다. 맨 오른쪽에 람천의 황산교가 보인다. 비전마을은 황산대첩비 앞에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전마을은 처음 경주김씨가 터를 잡은 후 박씨, 이씨 등이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서편에 하마정(下馬亭)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를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황산대첩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 구한말까지 존속되었던 2층 규모의 하마정 주변에는 주막과 기녀, 소리꾼, 가마꾼이 상주하여 비전마을을 역촌(驛村)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니 하마정은 비전마을이 동편제의 발상지가 된 연유와 무관하지 않은 곳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원 황산대첩비지는 하마비, 어휘각, 황산대첩사적비, 황산대첩비, 황산대첩기념비, 파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 후기 1380년(우왕 6)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이두란(李豆蘭)이 황산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이다. 1577년(선조 10) 8월에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고려사(高麗史)>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내용을 고증하여 조정의 윤허를 받고,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글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재임 1574~1578]이 비를 세웠다. 그 후 관찰사 민유중(閔維重)의 장계로 1667년 운봉현감 허제(許濟)가 비각을 세웠으며, 1882년 운봉현감 이두현(李斗鉉)이 어휘각을 건립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至此 大小人員皆下馬(지차대소인원개하마)가 적힌 '하마비(下馬碑)'와 그 옆에 '하마비(下馬碑) 재건 유래비'가 있다. 하마비의 원래 위치는 왼쪽 전신주 뒤쪽이었던 것 같다. 왼쪽 맨 뒤에 백두대간 고남산이 보인다. '하마비(下馬碑) 재건 유래비' 내용을 옮긴다.
본 하마비는 황산대첩비지 앞에서 대소인원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예의를 표하라는 표지석으로 원 소재지는 화수리 828번지였으나 1961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찾을 수 없음을 운봉 읍민들이 안타깝게 여겨오던 중 현 운봉읍장이 그 뜻에 부응 주선하여 하마비 재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운봉 애향회 후원으로 이 비를 세워 보는 이로 하여금 민족의 역사 의식을 고취하고 후세의 귀감이 되고자 한다.
하마비 앞에서 화수산 서쪽 자락에 있는 어휘각과 그 뒤쪽의 황산대첩비지를 바라보았다.
황산대첩비지에는 어휘각(御諱閣)이 있는데 태조의 어휘인 단(旦)자와 황산대첩에 참전한 8원수 4종사관 이름을 새겨 놓았다는 바위다. 그러나 1758년 발간된 운성지(雲城誌)의 ‘화수산서각’의 내용을 보면 ‘동고록정왜 경신이신(同苦錄征倭庚申李紳)’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나머지는 판독할 수 없다고 했다. 일설에는 황산대첩에 승리한 이듬해 이성계가 다시 이곳을 찾아와 창 끝으로 단(旦)자를 새겼다고 전하는데, 단(旦)은 왕위 즉위 후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고증할 수 없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다만 운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아용부곡의 교졸들이 훗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바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비전마을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마을이지만, 내호곡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생겨난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석벽에 태조의 어휘(御諱)인 '단(旦)'자와 황산대첩에 참전한 8원수 4종사관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안내판 내용을 옮긴다.
이 어휘각(御諱閣)은 조선 태조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고려 우왕 6년, 1380)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지(聖旨)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렷하였던 그 성적(聖蹟)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본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어휘각 처마에 '御諱閣內譯' 현판이 붙어 있다. '御諱閣內譯(어휘각내역)'을 '御諱閣來歷(어휘각내력)'이라고 고쳐야 할 듯.
이 御諱閣은 李太祖께서 荒山大捷翌年庚申年(1381) 本石壁에 都元帥인 自己와 八元帥 四從事의 名單을 刻하게 명하시어 自己單獨의 功이라기보다는 同功一体의 大捷이 있다는 聖旨를 表하였던 唯一의 遺蹟이었던 것이다. 春風秋雨 565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하였던 그 聖蹟이 1945年 1月 17日 새벽 倭帝의 毒手로 本 碑殿을 爆破하는 同時 鐵釘으로 쪼아버려 現在 그 殘影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황산대첩비지 삼문(三門)으로 들어가 맨 왼쪽 사적비각부터 대첩비각, 황산대첩기념비, 파비각을 살핀다.
남원 황산대첩비지 삼문(三門) 앞에 설명안내판과 황산대첩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 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군의 최고지휘관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金貴榮의 글, 송인宋寅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왼쪽에 사적비각, 중앙에 대첩비각이 있다. 왼쪽 사적비각을 살핀다.
사적비각(事蹟碑閣)은 황산대첩사적비와 화수산비각비를 보호하는 비각이다.
1958년에 중건한 황산대첩사적비 옆에 고종 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안치하였다.
"황산대첩사적비는, 고종 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이다. 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비각 등이 함께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 - 안내판
사적비각 아래서 황산대첩비지 삼문과 황산대첩기념비, 파비각을 바라보았다. 중앙 맨 뒤에 덕두봉이 솟아 있다.
황산대첩비지의 중심 '황산대첩비각'과 파비각을 바라보았다. "파비각(破碑閣)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비석의 잔편을 보호하기 위하여 1977년에 건립되었으며, 훼손된 비석의 조각들을 모아 내부에 안치하였다."
황산대첩비지의 중심 '황산대첩비각' 앞에 설명안내판과「운성지 雲城誌」번역본(1994년)을 옮긴 안내판이 서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5년(1380)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1882)에 다시 고쳐 지었으며 이때 어휘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 설명안내판
「운성지 雲城誌」번역본(1994년)에 실린 '황산대첩비'의 비문을 옮긴 안내판의 글을 옮긴다.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 동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신 김귀영은 교서를 받들어 짓고, 봉헌대부 여성군 신 송인은 교서를 받들어 글씨를 썼으며,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남용운은 교서를 받들어 전서를 쓰다.
만력 3년 선조 8년(1575) 가을 본도 감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운봉현 동쪽 16리에 황산이 있는데, 이곳은 태조 대왕이 전공을 세운 곳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이 바뀌어져서 길가는 사람이 머뭇거리며 그곳을 가리켜 보고자 해도 그곳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천백 년 이후에 높은 언덕은 무너지고 낮은 골짜기가 메꾸어진다면 더욱 혼미하여 그곳을 알 수 없게 될까 두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의 큰 비석을 세워 그 지역을 기록하고자, 고을의 노인과 어린 사람들이 함께 관아에 찾아와 하소연하기에 그곳을 지키는 신하로서 감히 이를 보고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삼가 이 사실을 올리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상께서 그의 장계를 수긍하여 전라도에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김귀영에게 글을 짓게 하니 나는 임금의 명을 받들매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삼가 살펴 보건대 고려 말엽의 국운은 위태로웠다. 태조께서 남원을 출발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에 이르러 정봉 위에 올라 산세를 살펴보고서 병영을 설치하고, 크게 용맹을 내어 분격한 나머지 열 곱절이나 되는 적을 하루가 못되어 소탕하였다. 이는 근래 2백년 사이에 나라가 평정되어 풍파가 일지 않고 호남 영남은 평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이 전투의 승리에 의한 것이다. 남녘 백성들이 이에 감격하고 존경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비를 세워 우러러 사모하려 하니 어떻게 이를 그만두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보면 태조의 크나큰 공훈은 역사에 기록되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천지에 드높고 고금에 휘황찬란하다. 그 업적이 이 황산과 더불어 함께 할 것이니 굳이 조그만 빗돌에 이를 기록하여야 무궁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녘의 산 가운데 드높은 산은 무려 수백 곳이 있지만 태조의 위대한 공업이 이루어진 것은 때마침 이 산에 있으니, 이는 하늘이 높은 산을 창조하심으로부터 그 아름다움을 함께 일컬어 숭고한 산봉우리로 만세에 우러러 볼 수 있게 함이다. 기수岐水 북쪽에 사냥을 하는 것은 수레와 병사를 선별함인데 돌 거북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고, 회서淮西를 평정한 것은 변방을 평정한 것인데 많은 신하들이 이 사실의 기록을 청하였다. 이로 미루어 태조의 무예와 승리의 전공 드높고 커서 만세에 길이 그 덕화를 입혀주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 사실을 큰 빗돌에 기록하고 거북과 용이 새긴 전각을 지어, 이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과 길가는 나그네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고개 숙이어 사모하는 마음 세상이 다하도록 잊지 않게 함이니, 이 또한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귀영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헌송獻頌하는 바이다.
고려 운수가 다하려 함에/ 간악한 신하들이 조종을 어지럽혀/ 밖으로 오랑캐를 불러들였으니/ 어떻게 난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태조께서 왕명을 받자와/ 병사를 출정하되 군법을 따르시니/ 그 위엄 빛나고 빛나며/ 그 정신 위로 하늘에 솟구쳤네./ 하얀 무지개 태양을 꿰뚫으니/ 승리의 조짐 앞서 알았고/ 하늘이 상서 내려주시고/ 땅은 승리 소식을 전해 주었다./ 황산의 승리여/ 이에 한 번의 노여움으로/ 무예를 휘날려/ 우리의 깃발과 우리의 북소리 울려 퍼졌네./ 철없는 왜적이 어린 날개 짓으로/ 감히 범에게 대항하려 하다니/ 제 목숨을 스스로 내주는 격이다./정수리를 맞춤에/ 투구가 기울자 이미/ 예리한 살촉은 목구멍을 꿰뚫었다./ 벌떼와 개미떼처럼 몰린 왜적들은/ 하염없이 길을 잃고 통곡하였다./ 수많은 소는 골짜기에 가득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올라서니/ 사면에서 이미 무너짐에/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겠는가?/ 우뢰와 번개처럼 공격하니/ 대나무 깨지는 듯 기왓장 무너지듯/ 피와 살이 낭자하고/ 사람과 신의 가호로/ 하루아침에 말끔히 쓸어버리니/ 삼한이 다시 창조되었고/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바다건너 공물을 올린지도/ 어언 2백여 년/ 남녘의 백성들이 마음놓고 밭갈이하며/ 부모 섬기고 자식 기름은/ 모두 그의 공덕이시다./ 이에 사모하고 축원하여/ 마음 속에 새겨 두었으니/ 더욱 오랜 세월 흘렸지만/ 어제처럼 생생하다./ 만력 5년에/ 빗돌을 마련하고 이를 기록하여/ 황산 옛 터에 세웠으니/ 영원토록 성하게 하여/ 길이 무너지지 않게 하며/ 이 비석과 함께 있게 함이라. 만력 5년 정축(1577) 8월 일 현감 박광옥 세우다.
비문 내용은 위의「운성지 雲城誌」번역본(1994년)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다. 이 비는 1957년 10월에 세워졌다.
황산대첩비의 비석은 거북 좌대에 비신을 세우고, 용 문양의 이수를 얹었고, 비신은 오석, 좌대와 이수는 화강암이다. 비신의 높이는 410㎝, 폭 125㎝, 두께 65㎝이다. 비의 앞면 상단에 가로로 ‘황산대첩지비(荒山大捷之碑)’라고 새겼고, 비문은 일본 해적을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만력 5년(선조 10, 1577) 정축 8월 일에 조봉대부 행운봉현감 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 겸춘추관기사관 신 박광옥이 세웠다. 단기 4290년(1957) 정유년 10월 일에 성적봉찬회에서 중건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파비각(破碑閣) 앞의 황산대첩기념비(荒山大捷紀念碑)는 1973년 현충일에 신석호(申奭鎬)가 비문을 짓고, 김기승(金基昇)이 글씨를 썼으며, 남원군에서 건립한 비석이라고 한다.
파비각(破碑閣) 앞의 안내판을 읽어본다.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때 세웠던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들을 모아 안치하였다."
1977년에 건립된 파비각(破碑閣) 내부에 일본인들에 의해 훼손된 비석의 조각들을 모아 안치하였다.
1943년 11월 14일에 조선총독부는 반시국적인 고적(古蹟)을 관할 도 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파괴하여도 좋다는 문서를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총독부에서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철거할 물건 중 황산대첩비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 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 방법을 강구할 것. (중략)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당국에 일임하는 바임.”이라 하였다. 그 결과 이곳에 있는 비석과 어휘각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파비각(破碑閣)과 파비(破碑)를 살피고 황산대첩지 옆문으로 나오면 굴뚝과 그 오른쪽에 황산별곡비가 있다.
'황산별곡비'에 새겨진 변용일의 '荒山別曲'을 읽어본다.
"황산이 높이 솟아서 조국의 방패였던가/ 그 이름 청사에다 민족의 얼을 새겨놓고/ 말없는 선렬을 달래 고개 숙여 말 것인가// 五백여 척 배를 타고 바다 건넌 오랑캐떼/ 삼남을 휩쓸면서 살인, 방화 일삼다가/ 침략자 최후의 날을 여기서 맞았었구나// 고려 군사 무찌른 칼엔 피안개 서렸었고/ 왜적의 가냘픈 목은 낙엽처럼 떨어졌나니/ 까마귀 쫓던 해골을 눈앞에 보는 듯하다// 아― 그날의 절규는 오늘도 들릴 사한데/ 이토록 장한 역사를 그 누가 짓밟았기에/ 두견새 슬픈 회포만 귓전을 거슬리노라" 1972년 현충일 변용일 짓고 변학용 세움
왼쪽에 송흥록(宋與祿) 선생 생가터碑, 오른쪽에 북 모양으로 조성한 '동편제 탯자리 동편제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판소리의 으뜸가는 명창(名唱) 송흥록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계면(界面), 우조(羽調), 진양조 등 가조(歌調)를 집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춘향가>의 '옥중가'에서 귀곡성(鬼哭聲) 등 많은 곡을 남겨 판소리의 큰 유파(流派)인 동편제의 시조가 되어 당대의 가왕(歌王)으로 명성을 떨쳤다.
송흥록(宋與祿) 선생 생가터碑 앞에서 황산대첩비지를 돌아본다. 대첩비지 담 앞쪽에 굴뚝과 황산별곡碑가 보인다.
동편제 탯자리 비전마을 방문을 환영한다는 받침돌 위에 '동편제마을,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적힌 북 모양의 표석이 앉아 있다.
가왕 송흥록의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탯자리이다.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1780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 정조 때 화수리 비전마을에서 출생한 송흥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하여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확대하는 등 다양한 음악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극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특히 <춘향가>의 '옥중가' 중 귀곡성(鬼哭聲귀신 울음소리)은 그가 창작한 독창적인 판소리 창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의 생가가 조성되어 있는 비전마을은 마을 앞에 비각(碑刻), 즉 황산대첩비각(荒山大捷碑閣)이 있어서 비전(碑前)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비전마을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 곳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편제 탯자리 비전마을을 알리는 북 모양의 표석 뒷면에 '동편제 탯자리'가 적혀 있다.
동편제 판소리의 탯자리 :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하여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확대하였다. 진양조는 판소리 장단 중 가장 느린 대목들에 많이 쓰인다. 또한 양반의 음악인 정악의 특성을 간직한 곳도 많다. 이러한 특성이 진양조의 개발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을 판소리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다. 한편 운봉은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 명창의 고향이기도하다. 박초월이 살았던 집이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2000년부터는 비전마을에 국악성지가 조성되고 송흥록 선생 생가와 박초월 명창 고택이 복원되었다. 운봉이 소리의 고장임은 옛 기록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예부터 운봉은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하나이자 신라시대 거문고의 명인 옥보고가 옥계동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입구 왼쪽에 송흥록 가왕과 박초월 국창의 안내판, 오른쪽에 송흥록과 기생 맹렬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생가(生家) 대신에 고택(古宅)이 나을 듯.
소재지 :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이곳은 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과 국창(國唱) 박초월(朴初月)이 살았던 곳으로 10가구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그 시대의 초가 형태로 2000년 7월 28일 복원하였다.
●송흥록(宋興祿, 1780년경~1863년경)은 조선 정조 초기 권삼득의 고수 송첨지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하였고, 철종 10년(1859) 정3품 통정대부 벼슬에 제수된 조선말기 순조·헌종·철종 대에 걸친 명창으로 계면조·진양조의 완성, 메나리조 도입과 모든 가사를 집대성하여 판소리의 중시조라 불리며 가왕(歌王) 칭호를 받았다. 춘향가(春香歌)의 옥중가(獄中歌) 중에서 귀곡성(鬼哭聲)이 장기이며, 제자 박만순(朴萬順)과 동생 광록(光祿), 광록의 아들 우룡(雨龍), 우룡의 아들 만갑(萬甲)으로 이어지는 송문일가(宋門一家)의 소리를 이루었다. ●박초월(朴初月, 1916.9.17~1983.11.26)은 12세에 김정문(金正文)에게 흥부가(興夫歌)를, 송만갑(宋萬甲) 지도로 춘향가(春香歌)·심청가(沈清歌)·수궁가(水宮歌)를 전수하였고, 1961년 (사)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 초대 이사장 취임과 한국국악예술학교(韓國國樂藝術學校)를 설립하여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였으며,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5호 수궁가(水宮歌) 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1983년 68세에 숙환(宿患)으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공원에 안치되었다가 제자와 국악계의 성원으로 2000년 8월 28일 운봉읍 가산리 산1-12번지로 이장하였다.
가왕 송흥록과 기생 맹렬(孟烈)의 사랑 이야기를 만화 형식으로 그려 알기쉽게 읽을 수 있다. 맹렬이 집을 나가 진주 병사 이경하의 수청기생(守廳妓生)으로 들어가자 송흥록은 이경하를 찾아가 수궁가를 불러 이경하와 맹렬을 감복시켜 맹렬과 함께 운봉으로 돌아온다는 내용, 송흥록이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고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제수받은 이야기가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송흥록 생가 앞 뜰에 여러 개의 둥근 돌들이 놓여 있다. 이 조형물은 진양조의 24박을 상징한다고 한다.
송흥록 생가 앞 뜰의 조성 원리를 설명하는 안내비를 읽어본다.
본 공간은 가왕 송흥록의 업적을 기리는 곳으로 직선적인 길은 동편제 판소리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임. 여러 개의 둥근 조형물은 진양조의 24박을, 5개의 사각기둥 조형물은 메나리조의 구성음을, 2개의 석연지(石蓮池)에 담긴 물은 계면조에 세련미를 보인 송흥록의 비곡(悲曲)을 듣고 청중들이 두 눈에서 흘린 눈물을 상징화한 것이다.
왼쪽 뒤에 송흥록 생가, 오른쪽 뒤에 박초월 고가가 있고, 앞뜰의 5개의 사각기둥 조형물은 메나리조의 구성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송흥록의 업적을 기리는 가왕 송흥록 업적비 내용을 읽어 본다. "조선 전기 8명창 중 한 분으로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임. 모든 가사를 집대성하였으며, 계면조·진양조의 완성과 메나리조를 도입하여 판소리를 오늘의 민족음악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가왕 송흥록의 소리 장면을 형상화한 동상 뒤쪽에 송흥록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송흥록 생가 앞에서 생가 앞뜰을 살핀다. 맨 왼쪽 뒤에 지리산서북능선의 마지막 봉우리 덕두봉이 보인다.
공간은 가왕 송흥록의 업적을 기리는 곳으로 직선적인 길은 동편제 판소리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임. 여러 개의 둥근 조형물은 진양조의 24박을, 5개의 사각기둥 조형물은 메나리조의 구성음을, 2개의 석연지(石蓮池)에 담긴 물은 계면조에 세련미를 보인 송흥록의 비곡(悲曲)을 듣고 청중들이 두 눈에서 흘린 눈물을 상징화한 것이다.
박초월 명창의 생가를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박초월은 전남 승주군 출신이라고 한다. 박초월 고택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 바로 앞 박초월 생가비 내용을 읽어본다. "박초월(朴初月, 916.09.17~1983.11.26)은 송만갑·김정문 지도로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전수. (사)한국국악협회 초대 이사장 역임과 한국국악예술학교 설립.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됨."
박초월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 지역에서 활동한 현대 여류 판소리 명창으로서, 김소희, 박록주와 함께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여류 판소리를 대표해 온 인물이다. 서슬과 구성이 있는 목으로 서민적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김소희와는 다른 여창 판소리의 경지를 개척했다. 창극과 여성 국극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춘향가」의 월매 역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성준 바디 「수궁가」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현재 박초월 바디 「수궁가」와 「흥보가」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박초월은 전라남도 승주군 주암면 봉암리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남원으로 이사하였으며, 아영면과 운봉읍에서 생활하면서 판소리를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박초월은 12살 때부터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살 때부터는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20살 무렵에는 오수암으로부터 서편제 「흥보가」를 배웠고, 25살 무렵에는 정광수로부터 유성준 바디 「수궁가」를 배웠다. 박초월은 임방울에게도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박초월은 16살 때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여 이름을 얻었다. 18살 때부터 폴리돌(Polydol)에서 「육자배기」, 「흥타령」, 「춘향가」 등을 녹음하였다. 17살 때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이후 대동가극단, 동일창극단 등에서 활동했다. 동일창극단에서는 극단의 대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여주인공인 아리주 공주 역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 박초월은 「춘향가」의 월매 역으로는 당대 제일인자라는 평을 들었다. 1976년에는 서베를린 국제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박초월은 1955년 박귀희와 함께 ‘대한민속예술원’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후에 국악예술학교로 발전하였다. 51살 때인 1967년에는 유성준 바디 「수궁가」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박초월의 제자로는 남해성, 최난수, 최승희, 김수연, 조통달, 박양덕, 전정민, 왕기창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송흥록 생가 뜰에서 복원된 생가와 뜰 모습과 중앙 뒤 황산을 바라보았다.
송흥록 생가 출입구는 대문이 아니라 초가집으로 지어져 왼쪽은 관리사무소, 오른쪽은 화장실로 사용된다. 오른쪽 뒤에 보이는 소리쉼터 정자로 올라가 지리산둘레길을 이어간다.
람천 북쪽 둑방에 체력단련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비전마을 안내판이 서 있다.
고려 우왕 6년(1380)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1577) 운봉 현감 박광옥이 세운 대첩비는 일제시대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고,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8.15 광복 후 1959년 10월 27일 재건한 것이다. 아울러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 선생의 출생지가 비전마을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람천 북쪽 언덕에 운동시설과 소리쉼터 정자가 조성되어 있으며,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이 서 있다.
소리쉼터 정자 기둥에 비전마을 표지판, 안쪽 처마에 '송흥록의 맹렬을 부르는 노랫말'이 적힌 현판이 붙어 있다.
『조선창극사』에는 송흥록이 그의 매부인 “김성옥에게 진양조를 처음 듣고 다년간 연마하여 그 완성이 극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송흥록이 진양조를 완성한 데에는 대구 감영의 명기였던 맹렬이란 기생과 관련이 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송흥록의 소리에 반하여 같이 살던 맹렬이 괴팍한 성격 때문에 그를 떠나자 슬픈 마음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진양조였다는 것이다. 안민영이 쓴 『금옥총부(金玉叢部)』에 송흥록의 집에 가니 맹렬이가 집에 있어서 같이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는 사실인 듯하다. 송흥록은 귀곡성을 잘했는데, 진주 촉석루에서 「춘향가」 중 ‘옥중가’를 부를 때 귀곡성을 내자 촛불이 꺼지며 공중에서 귀신 울음 소리가 나는 듯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춘향가의 ‘귀곡성(鬼哭聲)’에 반한 대구 감영의 관기 맹렬은 송흥록과 함께 살게 되었다. 맹렬은 질투가 심하여 자주 다투고 헤어지기를 반복하였는데, 송흥록이 봇짐을 싼 맹렬을 향해 애절한 진양조 가락으로 불렀던 이 노래를 듣고 맹렬은 봇짐을 풀었다고 한다.
"맹렬아 잘 가거라/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잘 가거라/ 날 버리고 가랴거든 정마저 가려무나/ 몸은 가고 정만 남아/ 쓸쓸한 빈 방안에 애를 태우니 병 안 될소냐." '병'은 病의 뜻일 것이다.
비전마을을 살피고 오른쪽 람천 둑방으로 올라가 십승지길을 따라간다.
람천 둑방 십승지길에서 당산나무가 있는 비전마을 쉼터정자와 그 오른쪽 뒤 황산을 바라본다. 맨 오른쪽 뒤에 군화마을이 보인다.
십승지길에서 람천의 황산교 건너 화신마을을 바라본다. 맨 왼쪽 뒤에 지리산서북능선의 대미 덕두봉을 확인한다.
운봉읍 화수리(花水里) 화신마을은 1968년 북한 김신조 부대의 대남 침투 사건 이후 독가촌(獨家村)을 한데 모아 화수리에 편입하였다. 화신(花新)마을은 화수리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화신의 동쪽은 덕두봉, 북동쪽은 황산과 옥계동, 북쪽은 가산산성이 있다. 그 사이에 황산대첩비지를 끌어안은 반월산(화수산)이 위치한다. 유적으로는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은거했던 옥계동과 마을 입구에 소리 무덤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앙 뒤쪽에 국악(國樂)의 성지(聖地)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국악의 성지를 거쳐 황산에 오를 수 있다.
국악(國樂)의 성지(聖地)는 종합 국악 문화관으로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 음악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곳이며, 남원 지역이 우리 민족의 전통과 혼이 담긴 국악의 본 고장이요 성지임을 증거하는 시설이다. 남원시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이 될 만큼 예로부터 국악의 산실이었으며, 오늘날 동편제 판소리를 정형화한 송흥록(宋興祿)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에 국악 본고장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판소리의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 등록에 따른 전통 문화의 고급화·관광 상품화를 통한 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해 2007년 10월 31일 동편제의 발상지인 가산리에 국비 및 지방비 105억 원을 들여 국악의 성지를 완공하였다.
부지 면적은 7만 4540㎡, 건물 8동의 총면적은 1,947㎡이다. 전시 체험관, 독공장, 국악 한마당, 사당, 납골묘, 야생화 단지, 선인 묘역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전시 체험관 1층은 안내 데스크, 판소리 기념실, 민속 국악실, 관리 사무실, 학예 연구실, 국악단 사무실, 시스템실, 숙직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은 국악실, 국악 공연실, 국악 체험실[대], 탕비실, 국악 체험실[소]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 체험장은 판소리·농악·기악·무용 등 4대 전통 국악의 유물·유적 400여 점을 한 곳에 모아 누구나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독공장은 소리꾼이나 일반인이 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동굴 형태로 꾸몄으며, 판소리의 가왕으로 불리는 송흥록 명창과 거문고의 달인 옥보고(玉寶高)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도 마련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십승지길은 끝나고, 황산교 북단에서부터 동편제길을 따라 앞의 양촌양수장을 지나 황산 자락의 화수리 군화마을로 이어간다.
황산(荒山)이란 이름은 고려 후기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 죽이고, 왜구를 크게 물리쳐 황산대첩의 승리를 거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황산과 화수산을 동일한 산으로 아는 경우가 있으나, 두 산은 별개의 산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