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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차씨의 역사 스크랩 1791년 규장각에서 간행한 차문절공 유사는 진본인가?
양희출(천산) 추천 0 조회 30 15.05.27 10:5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791년 규장각에서 간행한 차문절공 유사는 진본인가?


규장각 도서는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건물을 이동하며 보관하였고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의 명에 의해 경성제국대학 부설도서관에 보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한연구원에서 규장각의 고도서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규장각이 아닌 곳에서 보관하던 고서들도 새롭게 입수하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규장각에서 보관하던 진본인지 아닌지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혜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차문절공 유사는 혜제에 의하면 1791년 규장각에서 간행한 진본입니다. 물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또한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혜제를 믿는 이유는 당대에 판서를 하고 정승을 하고 대제학을 하던 규장각 관료 출신들이 차문절공 유사의 서문을 쓰고 후문을 쓰고 발문을 쓰며 함께 편찬하였습니다. 당대의 이러한 상황은 조작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혜제를 믿는 것입니다.


1790년대 직전까지만 해도 차원부의 설원과정은 관료적 판단기준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는데 당대의 학문 최고 기관이라고 하는 규장각 관료들이 왕명으로 눌재집을 간행하였는데 차원부를 추모하는 눌제의 응제시를 눌재집에 등재하였습니다. 눌재집은 정조께서 직접 서문을 지어주었고 목차까지 정조께서 직접 재가하였으니 눌재의 작품에 대한 진위여부는 당대의 규장각 관료에 의해 철저한 검증과정이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또한 눌재께서 사적으로 간행한 문집(가집)은 양난의 병화를 겪으면서도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에 위작이 눌재집에 등재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차원부의 설원과정에 대한 관료적 판단기준은 1790년대를 기준으로 해서 확실히 달라졌다고 판단하며 그리하여 1804년 차문절공의 시호를 받는 연시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791년 규장각에서 간행한 차문절공 유사에서 차원부의 행적에 대한 출처는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하였는데 동국여지승람의 대부분은 현존하지 않는데 증보할 때는 내용을 빼지 않고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차원부의 행적이 없기 때문에 원본인 동국여지승람에도 차원부의 행적은 등재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1791년 차문절공 유사가 규장각에서 당대의 대학자요 관료들이 편찬한 것은 조작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 많은 관료들이 이러한 출처를 확인하지 않고 함께 편찬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1791년 차문절공 유사가 규장각에서 대학자들이 함께 편찬한 것이 맞다면 출처 또한 당대의 학자들이 검증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입장은 후자의 입장입니다. 제가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훈신세력과 사림세력이 교체되는 과정에 서적의 간행과 보관에 대한 상당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고 결론적으로는 서적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차문절공유사라는 서적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오래전부터 훈신세력이 보았던 그 많은 고서들과 훈신세력이 남겼던 그 많은 서적들이 사림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던가에 대해 궁굼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첫 번째는 그 방대한 내용에 놀라게 되고 두 번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서가 전해졌기에 전국의 모든 지역에 대한 씨족의 시대에 따른 이동상황까지 모두 파악하고 등재하였을까 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놀라게 되는 것은 당대 참고하였던 그 많은 고서가 지금은 단 한 페이지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서적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훈신세력들은 직전시대까지의 역사를 꾸준하게 정리하였고 태종과 세종과 세조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정리하였던 역사지리 서적들은 완성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지리서적을 완성시킨 주축은 집현전 학자출신들이며 때로는 많은 관료들이 이해와 요구가 서적간행에 작용하여 벌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당대의 역사서적을 간행하였던 집현전 학자출신들은 이전 시대의 엄청난 고기를 정리하면서 세종실록지리지와 같은 방대한 내용의 역사지리 서적을 간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정리 자료를 토대로 하여 역사 지리지에 대한 방대한 정리 작업을 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도 이러한 선상에서 편찬한 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초기부터 성종시대까지 정리하였던 서적들은 성종시대의 사림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폐기하거나 재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이전의 사료인 그 많은 고기와 조선 초기 훈신세력이 남긴 그 많은 사료는 사림의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결론적으로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훈신세력은 성종시대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정리한 서적들이 간행되지 않자 불만을 토로하고 개인적 간행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중기 이후에 간행한 역사지리 서적의 내용과 조선 전기에 편찬한 역사지리지의 내용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국여지승람도 이러한 범주 속의 서적이었던 것으로 판단합니다.


저는 이수건 교수님의 토성분정설은 굉장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내공을 흠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부분에서는 때로는 확언하시는 입장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방대한 내용에 대한 탐구는 대단하시지만 부분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그 부분을 더 보고 싶어 하는 비전문가가 보았던 것을 오히려 전문가께서 못 보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감히 들기도 하였습니다. 눌재집과 동국여지승람의 편찬과정과 1790년대 관료들의 인식변화 과정이 이러한 범주에 속합니다.


차원부의 설원과정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개인적 판단기준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1790년대에 차원부의 설원과정에 대한 관료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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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5.27 10:56

    첫댓글 눌재집의 응제시에 대한 진위여부가 논쟁이 되어서 살펴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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