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흔히 아메리카 신대륙을 콜롬부스가 처음 발견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바이킹이 500년 먼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여기에 바이킹이 먼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증거를 소개한다.
빈란드(Vinland) 전설
유럽에 있는 아이슬란드 사람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전설은 13~4세기에 '플래티 북'이라는 책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이 전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쯤 에릭손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이끄는 바이킹들이 서쪽으로 낯선 바다를 항해해 새 땅을 발견했다.그들은 그곳을 빈란드(Vinland)라 부르고 거기에서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빈란드를 찾기 위해 연구를 하였고, '빈'이라는 낱말이 '야생 포도'를 뜻한다고 생각한 학자는 미국 동해안을 빈란드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웨덴 고고학자 헬게 잉스타드는 '빈'이 바이킹말로 '풀'이라고 생각하고 캐나다 동부해안의 래브라도 반도를 조사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해안을 따라 운항하던 병원선을 타고 가던 중 한 선원의 증언에 옛 집터가 있다는 뉴펀들랜드 북쪽 끝 랑스 오 메도로 갔다. 그 곳에서 그는 '빈란드 전설'에서 나오는 바이킹이 발견했다는 지형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곳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빈란드 유적 발견
1961년 잉스타드는 랑스 오 메도 바닷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이 일에는 고고학자인 그의 아내 안네와 바이킹의 후손인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자도 여럿 참여했다.그들은 조그만 집터부터 발굴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불을 떼던 화덕 자리와 냄비, 난로를 발견하였고, 그 것을 시작으로 바이킹의 유적으로 보이는 대장간의 흔적, 화살촉, 그리고 그 당시 인디언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작은 돌멩이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바이킹이 살았다는 결정적인 유물이었던 것이다.
이 유물은 물레 추로써 바이킹이 짐승 털로부터 실을 만들었던 것으로 이 지역에 분명 유럽 사람이 건너왔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와 유물들이 끊임없이 발견되었고, 세계의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바이킹의 유적으로 인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 지역은 유네스코(UNESCO) 선정 유적지가 되었다.
바이킹의 북대서양 횡단
바이킹 시대는 서기 800년쯤부터 비롯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노르만 사람들 중에 모험과 싸움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러시아,영국,프랑스를 점령했고 더 나아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그들은 ‘해적’을 뜻하는 바이킹이라고 불렸다. 바이킹은 배 타는 재주를 타고났다. 그들은 해적질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갑자기 쳐들어갔다가 잽싸게 도망칠 수 있는 날쌘 배를 만들어냈다.
노르(Knorr)라고 불린 이 배는 길이 24m,너비 5m로 바이킹 44명과 말 두 필을 실을 수 있었다. 네모꼴 돛에 바람을 잔뜩 머금고 높은 파도를 매끄럽게 헤치는 이 배를 유럽 사람들은 ‘긴 배(Long Ship)’라고 부르며 몹시 두려워했다.
바이킹 가운데 한무리는 서쪽 바다(북대서양)로 나아갔다. 그들은 차가운 파도와 안개를 헤치고 아이슬란드에 닿아 거기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 무렵 머리카락이 붉어서 ‘붉은 에릭(Eric the Red)’이라고 불린 인물이 바이킹 역사에 등장했다.
붉은 에릭은 살인죄를 짓고 아이슬란드로부터 3년간 추방되었다. 서기 982년 에릭은 서쪽으로 800㎞쯤 항해해 처음 보는 육지에 닿았다. 그는 3년 동안 그곳에서 머무르다 아이슬란드로 돌아가,자기가 발견한 땅이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내고 다녔다. 그는 사람을 끌어모으려고 그 땅을 숲이 우거진 초록빛 땅ㅡ그린란드(Greenrand)ㅡ라고 선전했다.
붉은 에릭이 이끄는 긴 배 25척이 서기 986년 아이슬란드를 떠났다. 그들은 도중에 폭풍을 만나 14척만이 그린란드에 닿았다. 바이킹은 그곳에 마을을 이루고,노르웨이를 오가며 털가죽 장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란드에는 농장이 300군데가 넘게 생겼고,인구는 4,000명으로 불어났다(그들은 그 뒤로 500년쯤 번성하다가 14세기 말에 흑사병이 휩쓸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무렵 그린란드의 바이킹 중에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났다. ‘아주 크고 힘이 세며,잘생기고 모든 일에 공정한’ 이 행운아는 붉은 에릭의 아들 에릭손이었다.
모험심을 주체하지 못하던 에릭손은 서기 1001년 배를 타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북아메리카의 북쪽은 그린란드와 아주 가깝다. 둘 사이에 있는 바다(데이비스 해협)의 너비는 겨우 320㎞. 노르웨이와 그린란드 사이 2400㎞ 뱃길을 오가던 바이킹으로서는 8분의1밖에 안되는 거리여서 아주 손쉬운 항해였을 것이다.
에릭손은 처음 발견한 배핀 섬을 ‘평평한 돌의 땅(Helluland)’이라고 이름짓고,계속 남쪽으로 항해했다.그는 두 번째로,풀이 우거지고 모래가 곱게 깔린 땅에 닿았다.그곳에는 ‘숲의 땅(Markland)’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아마 오늘날의 래브라도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에릭손은 이틀을 더 항해했다.세 번째로 발견한 땅,그곳이 바로 랑즈 오 메도였다.푸른 풀밭과 무성한 숲,강물에 넘치는 연어떼가 바이킹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에릭손은 그곳을 빈란드라고 부르고 눌러살 집을 지었다.
1년이 지나 에릭손이 그린란드로 돌아가자 그의 동생 토르발트가 바이킹 30명을 이끌고 빈란드로 건너갔다.그곳에 정착해 살던 그는 어느날 생전 처음 맞닥뜨린 이상한 사람들과 싸우게 되었다.자기네 땅을 지키려고 찾아온 그곳 토박이 종족 스크랠링 인디언이었다.이 전투에서 토르발트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빈란드에 찾아온 바이킹의 세 번째 지도자는 칼세프니.그는 빈란드를 바이킹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사람과 물자를 많이 동원했다.그는 그린란드로부터 바이킹 160명과 가축을 배 3척에 태우고 왔다.
칼세프니는 3년 동안 빈란드에 머무르면서 스크랠링 인디언과 맞섰으나 끝내 견디지 못하고 돌아갔다.빈란드를 찾은 마지막 바이킹은 에릭손의 누이동생인 프레이디스.그러나 그녀도 빈란드를 바이킹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빈란드는 바이킹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어떤 학자는 빈란드에 살던 바이킹들이 인디언에 동화해 아메리카 토박이가 되었다고 말한다.어떤 이는 그들이 모두 인디언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에서 바이킹의 역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르지만,확실한 것은 그들에게 자기네보다 월등히 많은 인디언을 물리칠 인원이 없었다는 점이다.기동성이 뛰어난 바이킹의 좁고 긴 배는 치고 빠지며 노략질하는 데에는 알맞았지만,사람을 44명밖에 태우지 못해 그린란드로부터 사람을 많이 수송해 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이킹은 쇠를 다루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진 적이 없다고 알려진 인간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예외가 되고 말았다.그에 반해 스크랠링 인디언은 아메리카 인디언 역사에서 유일하게 유럽인의 침입을 물리친 자랑스러운 종족이 되었다.결국 바이킹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하고도 아메리카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매독 유럽전파자 콜롬버스 아니다“
유럽에 매독을 퍼뜨린 장본인이 ‘신대륙’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일행이 아니라는 증거가 새롭게 제시됐다.
‘디스커버리 뉴스’ 온라인판은 12일 미국 노스이스트 오하이오 관절염센터의 고병리학 연구팀이 이탈리아 묘지들에서 청동기시대부터 흑사병이 만연한 시기(1485∼1486)까지의 사체 688구로부터 뼈를 발굴해 조사한 내용을 소개했다.
연구 결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보다 수백년 전 이미 이탈리아에 매독이 퍼져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매독에 걸리면 뼈에 특유의 상처가 생기며 모양이 변형되는데, 800년 전의 사체 뼈에서 이런 증거가 발견된 것.
그동안 유럽 최초의 매독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해 이견이 분분했다. 한편으로는 콜럼버스 일행이 당시 아메리카 거주민으로부터 유럽으로 옮겼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콜럼버스 전기를 여러 권 저술한 역사학자 루게로 마리노는 “매독이 콜럼버스 일행으로부터 유럽으로 전파됐다는 설은 문헌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며 “콜럼버스의 뼈를 구해 조사할 수 있다면 좀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고대 로마제국이 대대적인 납중독 때문에 쇠퇴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대해서도 반박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시기의 사체로 추정되는 439구 가운데 납중독으로 인한 통풍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단지 두 건뿐이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희대의 살인마">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11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인류 사상 최대의 학살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그는 이날 아메리카대륙 원주민 대표 회의에 참석해“콜럼버스 원정대가 처음 도착한 이후 150여년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영국 등 서방 침략자들이 10분에 1명꼴로 원주민을 학살했다”면서 “그결과 원주민 인구는 1492년 1억 명에서 1640년대 300만 명으로 절멸되다시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 침략자들은 히틀러보다 더 악랄했다”고 비난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그런데도 중남미인들이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는것은 치욕”이라고 말했다. 차베스는 지난 해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과 일부남미 국가에서 제정한 이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대통령령을공표한 바 있다.
그는 특히 35만 원주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저리로 사업자금을 빌려주는 ‘과이카이푸로(스페인 침략자에 저항한 원주민 추장 이름) 계획’을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 이전에 아메리아 대륙에서 로마동전이 발견되기도 하고 탄소 연대측정결과 로마시대의 것으로 밝혀진 백인의 해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못 찾겠네요.
북프랑스에 정복한 땅. 노르망디가 됨.
King Harald of Norway: Russia: 1031 - Constantinople 1035 - Sicily 1038-1041 바이킹이 한 때 팔레스티나까지도 진출했었다함.
이주한 이들은 극동유럽에 영토를 가지고 있다가 차츰 슬라브족에 동화되어 훗날 수십개의 러시아 제 공국들을 만듬.
바이킹족2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