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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권력의 존재론]
명제 1. 의사결정하는 존재가 여럿 모이면 권이 형성된다
1. 뜻풀이
늑대 무리에서 시작하다
캐나다 북부 옐로나이프 인근의 겨울 숲. 열두 마리의 늑대 무리가 사냥에 나섰다. 무리 앞에는 대여섯 마리의 순록 떼가 있다. 어느 방향으로 몰 것인가. 왼쪽 계곡인가, 오른쪽 호수 변인가. 무리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결정이 내려진다. 왼쪽이다. 전체가 동시에 움직인다.
이 결정은 누가 내렸는가. 무리 중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선다. 가장 크지도, 가장 빠르지도 않은 그 늑대를 나머지가 따른다. 망설임 없이. 이것이 권력이다.
늑대 무리에서 알파는 폭군이 아니다. 먹이를 독차지하는 자도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믿을 만한 판단을 내리는 자다. 무리가 그 판단에 의사결정을 위임하는 순간, 권력이 형성된다. 무리가 없으면 알파도 없다. 따르는 자가 없으면 이끄는 자도 없다. 권력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침팬지 무리는 더 복잡하다. 프란스 드 발은 아른헴 동물원에서 침팬지 무리를 15년간 관찰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놀라웠다. 침팬지 집단에서 권력은 단순히 완력으로만 결정되지 않았다. 가장 강한 수컷이 반드시 알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연합을 만드는 자, 중재를 잘하는 자, 암컷들의 지지를 받는 자가 무리를 이끌었다.
▷ 프란스 드 발 Frans de Waal, 1948~2024. 네덜란드 출신 미국 에모리대 영장류학자. 침팬지·보노보 등 유인원의 정치적 행동을 연구하여 권력의 생물학적 기원을 규명했다. 저서 《침팬지 폴리틱스》(Chimpanzee Politics, 1982).
드 발은 이것을 가리켜 '침팬지 폴리틱스'라 불렀다. 인간의 정치 행동이 진화적 뿌리를 갖는다는 뜻이었다. 침팬지도 연대하고, 배신하고, 협상하고, 중재한다. 권력을 둘러싼 이 모든 행동이 인간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이 이 모든 관찰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의사결정하는 존재들이 모이면 반드시 권력 관계가 생겨난다는 것. 이것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다. 집단을 이루는 모든 생명체의 보편적 현상이다.
인간의 의사결정과 권력
인간의 경우는 더욱 분명하다. 아이 셋이 모래밭에서 논다. 누가 성을 쌓을지, 누가 해자를 팔지, 누가 물을 길어올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역할이 나뉜다. 그 역할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미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제일 먼저 말하는 아이, 다른 아이들이 쳐다보는 아이, 이의를 제기했을 때 설득에 성공하는 아이. 세 명이 모인 그 모래밭에 이미 권력 구조가 있다.
왜 그런가. 의사결정하는 존재들이 모이면 반드시 의사결정의 충돌이 발생한다. 내가 원하는 것과 네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충돌을 해소하려면 누군가의 의사결정이 다른 누군가의 의사결정보다 우선해야 한다. 그 우선함이 권력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사결정하는 존재들이 모이는 순간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강요하지 않아도 생기고, 원하지 않아도 생긴다. 그것이 권력의 첫 번째 본질이다.
그런데 이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권력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권력이 충돌의 순간에 드러난다. 의사결정의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권력이 관찰된다. 그러므로 권력을 이해하고 싶다면 충돌을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
권력은 특별한 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의사결정하는 존재가 둘 이상 모이는 순간 권력은 이미 존재한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국가에서도, 심지어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그리고 늑대 무리에서도, 침팬지 집단에서도.
그렇다면 이 원리는 지구에만 적용되는가? 만약 우주 어딘가에 외계 문명이 있고 그들도 집단으로 살고 있다면, 그들 역시 의사결정의 충돌을 경험할 것이다. 그 충돌을 해소하는 구조가 필요할 것이다. 생물학적 형태가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의사결정하는 존재들이 모이는 순간 권이 형성된다는 이 원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은 지구적 현상만이 아니라 우주적 원리일 가능성도 있다. 이 책이 말하는 것들이 그 의미에서 더욱 근본적이다.
2. 관중과 마키아벨리의 생각, 그리고 다른 주요 인사들
관중은 권력의 형성을 질서의 문제로 봤다. 《관자》 목민편(牧民篇)에서 말했다. 무리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무리를 이루는 순간 위아래가 생긴다. 그것은 강제가 아니라 필연이다.
▷ 관중 管仲, ?~기원전 645.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 환공을 섬기며 제나라를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권국으로 이끌었다. 공자가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옷을 입었을 것"이라 평할 만큼 탁월한 경세가였다. 저서 《관자》.
관중에게 권력의 형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설계해야 하는 것이었다. 관중이 환공을 섬기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이 필연을 인정하고 위임의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권력의 존재를 직시하는 것에서 그의 경영이 시작됐다.
관중은 또 다음과 같은 뜻을 말했다. "권력을 설계하지 않으면 권력은 스스로 형성된다. 스스로 형성된 권력은 설계된 권력보다 훨씬 다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먼저 설계하는 자가 권력의 주인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형성을 인간 본성의 문제로 봤다. 《군주론》 첫머리에서 그는 말했다. 공화정이든 군주정이든, 모든 형태의 국가는 권력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1469~1527. 이탈리아 피렌체의 외교관·사상가. 도덕과 분리된 권력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근대 정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저서 《군주론》(Il Principe, 1532), 《로마사 논고》(1531).
마키아벨리에게 권력의 형성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하는 존재이고, 욕망하는 존재들이 모이면 반드시 충돌이 발생한다. 그 충돌을 조정하는 힘이 권력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말했다. 도덕이 권력을 대체할 수 없다. 성인들이 모여도 의사결정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권력은 도덕 이전에 존재한다.
푸코는 말했다.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작동하는 것이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 누가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의사결정하는 존재들이 모이면 권이 형성된다는 명제 1이 푸코에게서 가장 철학적으로 완성된다. 권력은 왕이나 대통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실에도, 병원에도, 가정에도, 대화 속에도 권력이 작동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는 권력이 없다. 둘이 모이는 순간 이미 권력 관계가 시작된다.
▷ 미셀 푸코 8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역사학자. 권력을 소유가 아니라 관계와 작동으로 재정의했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는 선언으로 권력론의 지평을 바꿨다. 권력과 지식이 서로를 만든다는 권력/지식 개념이 현대 데이터·담론 권력을 분석하는 핵심 틀이 됐다. 저서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é, 1976).
그리고 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파고들었다. 권력/지식(pouvoir/savoir). 권력은 지식을 만들고 지식은 권력을 만든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이것이 오늘 데이터 권력과 알고리즘이 만드는 새로운 권력 형태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진화심리학은 이것을 가장 넓은 시야로 설명한다. 로버트 라이트는 《도덕적 동물》에서 말했다. 진화 과정을 통해 수백만 년 동안 우리 마음을 형성한 두 가지 주제가 모든 문화를 관통하는 굵은 실처럼 흐른다. 첫째, 능력에 따른 사회적 위계. 둘째, 호혜적 이타주의.
▷ 로버트 라이트 Robert Wright, 1955~. 미국 저술가·진화심리학 대중화자. 진화론의 렌즈로 인간의 도덕·사회·정치 행동을 분석한다. 저서 《도덕적 동물》(The Moral Animal, 1994), 《넌제로》(Nonzero, 2000).
집단 안에서 위에 있으려는 충동이 수백만 년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내장됐다. 그리고 협력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주변을 돕고 그 친절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감각도 내장됐다. 권력의 형성은 악덕이 아니다. 수백만 년 진화가 만든 필연이다.
그리고 라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침팬지도 정의감의 기초를 보인다. 지적·언어적 수준에 도달한 어떤 종이든 호혜적 이타주의가 도덕 직관과 도덕 담론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것이 명제 1의 외계 문명 논지를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집단으로 사는 어떤 존재든 권력 문제를 피할 수 없다.
3. 역사적 사례
아테네 — 광장에서 권력이 태어나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1만~2만 명의 시민이 프닉스 언덕의 민회(에클레시아)에 모인다. 각자가 의사결정권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이 모이는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가.
권력이 형성된다. 누가 먼저 발언하는가. 누가 설득력이 있는가. 누구의 말에 함성이 터지는가. 이 모든 과정이 권력의 형성 과정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역설은 바로 여기 있다. 평등한 시민들이 모인 바로 그 공간에서 권력 불평등이 생겨났다.
페리클레스가 30년간 아테네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칼이나 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민회에서 연설할 때마다 시민들이 그의 의사결정에 자신들의 의사결정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위임이 반복될수록 권력은 강해졌다. 페리클레스가 죽자 아테네의 권력 구조는 흔들렸다. 위임의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로마 원로원 — 원로원 역시 권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로마 공화정은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체제였다. 두 명의 집정관을 두고 서로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다. 원로원은 수백 명의 귀족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원로원 안에서도 권력 관계가 형성됐다. 원로원 의원 300명이 의사결정하는 존재로 모이는 순간, 그 안에 또 다른 권력 구조가 생겨났다. 누가 먼저 발언하는가(선임 의원), 누구의 파벌이 더 큰가, 누가 가장 많은 후원자 관계를 거느리는가. 카이사르가 등장하기 전에도 원로원 안에는 항상 몇 명의 실세가 있었다.
평등하게 설계된 구조 안에서도 권력은 반드시 형성된다. 이것이 명제 1이 말하는 바다.
조선 — 사림의 공론과 권력
15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사림(士林) 세력이 성장했다. 이들은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었다. 강제 권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원 안에서도 권력이 형성됐다. 누가 원장을 맡는가, 누구의 학파를 따르는가, 누가 유림의 공의(公議)를 대표하는가. 사림의 공론정치는 자발적 합의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권력이 생성되고 다투었다. 붕당정치의 씨앗이 바로 이 공론의 장에서 자랐다.
의사결정하는 존재들이 모이면 어떤 구조 안에서도 권력은 생겨난다는 것을 조선의 역사는 잘 보여준다.
현대 — 마을 청소 모임에서도
사례가 거창할 필요는 없다. 2020년대 한국 어느 아파트 단지의 입주자 대표회의를 생각해보자. 스무 명 남짓의 주민 대표들이 모인다. 청소 업체를 어디로 할 것인가, 주차 구획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경비원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의사결정하는 존재들이 모이는 순간, 그 작은 회의실에도 권력이 형성된다. 발언권을 쥔 사람, 침묵으로 반대를 표시하는 사람, 회의 전에 미리 표를 모아오는 사람. 입주자 대표회의는 국회의 축소판이 아니다. 국회가 입주자 대표회의의 확대판이다.
4. 종합정리
늑대 무리에서 아테네 민회까지, 침팬지 집단에서 조선 서원까지, 아파트 대표회의에서 유엔 안보리까지. 규모가 다르고 형태가 다르지만 하나의 원리는 일관되게 작동한다.
의사결정하는 존재가 여럿 모이면 권이 형성된다. 이것은 권력이 나쁘다거나 좋다는 말이 아니다. 권력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권력을 모른다고 해서 권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모르는 사이에 권력에 지배당한다. 관중의 말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여기 있다. 권력을 설계하지 않으면 권력은 스스로 형성된다. 스스로 형성된 권력은 설계된 권력보다 훨씬 다루기 어렵다.
두 번의 촛불혁명을 치른 우리가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쁜 권력자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권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권력의 정체를 모르면, 좋은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도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 책이 명제 1에서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 이 인식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명제 1 — 의사결정하는 존재가 여럿 모이면 권이 형성된다. 이것은 강제가 아니라 필연이다. 늑대 무리에서도, 아테네 민회에서도, 아파트 대표회의에서도 예외는 없다. 그리고 만약 우주 어딘가에 집단으로 사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도 이 원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leewysu@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