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런웨이》
제3회 ― 동대문 원단시장 대소동
김태석 교수의 첫 과제는 간단했다.
"천을 사 오게."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교수가 덧붙였다.
"비싼 천 말고, 좋은 천."
강인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윤이 속삭였다.
"비싼 거랑 좋은 게 달라?"
강인이 대답했다.
"아버지는 다르다고 하셨다."
"어떻게?"
"비싼 건 지갑이 기억하고, 좋은 건 손이 기억한다고."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야, 너 가끔 멋있는 말 한다?"
그날 오후.
강인과 도윤은 동대문 원단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안은 전쟁터 같았다.
"학생! 양복지 보고 가!"
"꽃무늬! 최신 유행!"
"이건 파리에서도 찾는 원단이야!"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파리?"
강인이 물었다.
"프랑스 파리?"
상인이 웃었다.
"아니, 우리 집 파리도 좋아해."
도윤이 감탄했다.
"아저씨, 말솜씨가 디자이너보다 화려하시네."
강인은 천을 만져 보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짙은 감색 울 혼방 원단.
아버지 양복점에서 맡던 냄새와 비슷했다.
상인이 말했다.
"학생, 눈이 있네. 이거 좋은 거야."
"얼마입니까?"
"학생이라 싸게 줄게."
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도윤이 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야. 아직 가격도 안 깎았어."
강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학생이라 싸게 주신다잖아."
"그걸 그대로 믿어?"
"왜? 거짓말이야?"
도윤은 잠시 강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시장에 오면 안 되겠다. 넌 시장이 아니라 사기꾼 보호구역이야."
바로 그때였다.
"아저씨."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강인이 돌아보았다.
하미송이었다.
옆에는 윤소희가 천 꾸러미를 안고 서 있었다.
미송은 상인 앞에 서더니 방긋 웃었다.
"지난주엔 제 친구한테 천 원 더 싸게 주셨잖아요."
상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
미송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직 안 왔어요."
잠시 정적.
도윤은 입을 벌렸다.
상인은 미송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고, 학생 말은 못 당하겠네."
미송도 웃었다.
"아저씨가 먼저 학생이라 싸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졌다. 천 원 깎아 줄게."
"실도 하나 얹어 주세요."
"학생, 너무하네."
"그럼 단추라도요."
상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작은 단추 봉지를 하나 올려 주었다.
"가져가. 대신 다음에도 우리 집 와."
미송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아저씨 원단은 손이 먼저 기억하거든요."
강인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아버지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비싼 건 지갑이 기억하고, 좋은 건 손이 기억한다.
강인은 미송을 바라보았다.
미송은 천을 햇빛에 비춰 보고 있었다.
"이건 색이 좋아요. 그냥 감색이 아니라 밤하늘 쪽이에요."
강인이 물었다.
"밤하늘 쪽?"
"네. 어두운데 차갑지 않잖아요."
도윤이 끼어들었다.
"나는 그냥 남색 같은데."
윤소희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모델이지 디자이너가 아닌 거야."
도윤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늘 처음 뵙는데 너무 정확하시네요."
소희가 웃었다.
"저는 봉제 담당 윤소희예요."
"저는 박도윤. 말 담당입니다."
"말 담당?"
강인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재봉틀보다 빠른 입."
소희가 빵 터졌다.
도윤은 억울하다는 듯 강인을 바라보았다.
"야, 그 별명 퍼뜨리지 마."
"네가 만든 거잖아."
"나는 남이 부를 줄 몰랐지."
그때 시장 반대편에서 오세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원단 전부 주세요."
모두가 돌아보았다.
오세나는 비싼 수입 원단 앞에 서 있었다.
상인이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학생은 보는 눈이 있네."
옆에 있던 최현우가 말했다.
"좋은 천이긴 하지만 과제 기준에는 너무 화려해."
세나가 차갑게 대답했다.
"화려한 것도 실력이야."
현우는 천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옷보다 천이 먼저 보이면 실패야."
세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 교수님께 들려 드리고 싶네."
"좋아. 같이 듣자."
두 사람은 조용히 웃었지만, 주변 공기는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도윤이 강인에게 속삭였다.
"저 둘은 사귀는 거야, 싸우는 거야?"
강인이 대답했다.
"둘 다 아닌 것 같다."
"그럼?"
"대결 중."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 사랑보다 경쟁이 먼저 오는 사람들."
미송은 강인의 손에 들린 감색 원단을 보았다.
"강인 씨는 이걸로 뭘 만들 거예요?"
강인은 잠시 망설였다.
"남자 재킷이요."
"왜요?"
"아버지가 양복을 만드셔서요."
미송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버지께 배웠어요?"
"네. 어릴 때부터요."
"그래서 손이 원단을 잘 고르나 봐요."
강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칭찬을 받는 일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대신 원단을 더 꼭 쥐었다.
도윤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귀 빨개진다."
강인은 도윤의 발을 밟았다.
"악!"
시장 한복판에 도윤의 비명이 울렸다.
상인들이 돌아보았다.
한 상인이 말했다.
"학생, 원단보다 발이 먼저 재단됐네."
사람들이 웃었다.
미송도 웃었다.
강인은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계산을 마친 뒤 네 사람은 시장 밖으로 나왔다.
도윤은 단추 봉지를 흔들며 말했다.
"오늘 배운 것. 시장에서는 입이 기술이다."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치도 기술이죠."
미송은 강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패션은 협상도 디자인이에요."
강인은 그 말을 곱씹었다.
패션은 그림만 그리는 일이 아니었다.
천을 고르고, 값을 흥정하고, 손으로 만지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이었다.
강인은 처음으로 서울의 패션이 조금 무섭고, 조금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하미송이라는 사람은 그 복잡한 세계를 웃으면서 걸어가는 사람 같았다.
도윤이 말했다.
"자, 이제 다 샀으니 밥 먹자."
소희가 물었다.
"뭐 먹을 건데요?"
도윤이 당당하게 말했다.
"천 원 깎았으니까 떡볶이."
미송이 웃었다.
"그럼 제가 단추 얻었으니까 어묵은 제가 살게요."
강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모두가 강인을 바라보았다.
강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물을 사겠습니다."
도윤이 한숨을 쉬었다.
"야, 너는 사랑도 물처럼 밍밍하게 할 것 같다."
미송이 강인을 보며 웃었다.
"괜찮아요. 물도 꼭 필요하잖아요."
그 말에 강인은 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귀만 조용히 붉어졌다.
동대문 시장의 오후는 시끄럽고 복잡했다.
사람들은 흥정했고, 천은 쌓였고, 학생들은 웃었다.
그날 강인은 좋은 원단 하나를 샀다.
그리고 또 하나 배웠다.
좋은 옷은 천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사람의 말, 웃음, 눈치, 그리고 마음까지 함께 꿰매져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