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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한규삼 / LA 나성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목회자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는 ‘기도 많이 하세요’와 ‘기도하겠습니다’가 있다. 어떤 목회자들 모임에서 입술로 범하는 가장 빈번한 범죄가 기도 약속에 대한 부도 수표임에 의견을 모으고 깊은 회개를 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임을 알면서 항상 부족한 것 중 하나가 기도다. 기독교의 영성을 주도해 온 사람들 중에 깊은 기도의 습관을 체득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토머스 머튼, 헨리 나우웬, 리처드 포스터와 같은 영성 관련 저술가는 말할 것도 없고 C.S. 루이스 같은 탁월한 변증학자도 꾸준한 기도를 몸에 익힌 사람이었다. 루이스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걸어가 아침 7시에 드려지는 대학 캠퍼스의 기도 모임에 참석했다고 한다.
꾸준한 기도를 강조하는 누가
그러나 막상 꾸준한 기도를 익히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기도의 방법에 관해 질문했었다. “선생님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십시오(눅11:1)”
물론 예수님은 기도의 방법과 내용에 대해 비유와 주기도문을 통해 알려 주셨지만, 예수님 생애 전체를 통해서도 꾸준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네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세 복음서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가르침 모두를 합쳐도 누가복음 만큼 조직적이며 상세한 예수님의 기도관(觀)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흔히 예수님의 기도 신학은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심도 있게 다루어져 왔다.
기도는 훈련이다. 지식적인 깨달음 자체는 훈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적인 깨달음 없이도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기도의 사람이 된 경우가 많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는 목회자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꾸준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기도의 사람의 되는 것이 아니며, 기도하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항상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모델로 보여 주시고,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교훈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분명한 지식은 정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깨달음은 대부분 바른 지식의 습득에서 시작된다. 필자는 기도의 훈련을 많이 받은 목회자라기보다는 신학의 훈련에 익숙하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연구는 나에게 기도를 훈련하는 가장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를 바로 깨달음으로 지금은 전보다 조금 더 깊게 그리고 꾸준히 기도하게 되었음을 감히 밝힐 수 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는 모범적인 천국 백성의 삶의 핵심에 기도가 있으며, 또한 기도는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근간임을 밝힌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도가 필수 불가결의 것임을 천명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엇을’, ‘왜’ 기도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고 있다.
누가의 기도신학에 대한 견해들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 부류다. 하나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두 부류 모두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독특하며, 조직적이어서 누가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물론 누가복음은 기도와 관련된 용어 사용도 훨씬 빈번하며.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도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자리가 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기록된다.
편집 비평이 성행하던 1960년 이후 누가만이 예수님의 기도를 강조한 데 대한 신학적 이유를 규명하는 논문이 지속적으로 출간됐다. 오토(W. Ott)가 처음으로 이 문제를 다룬 데 이어 해리스(O.G. Harris)가 학위 논문을 같은 주제로 썼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데, 오토는 누가의 기도신학은 누가 신학의 핵심인 구속사를 보여주는 한 맥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기도는 구속의 역사 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사건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의 관찰은 누가복음을 대충만 훑어 보아도 타당함을 알게 된다. 예수님의 세례 때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고백할 때나 변화산에서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을 누가만 기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복음이 기록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듯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관한 것뿐 아니라, 직접적인 가르침도 다른 복음서보다 훨씬 풍부하다는 것이다. 해리스는 오히려 후자를 중요시하여, 누가가 예수님의 기도를 강조한 것은 신학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실천적인 이유임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이유, 방법, 내용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지, ‘구속사'란 신학적 관점을 제시하기 위함이 그 주된 목적이 아니란 주장이었다.
이후에 출간된 소논문이나, 단행본, 학위 논문 대부분은 이 둘의 견해 중 하나를 견지하거나, 둘 중 하나를 주된 관심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보조로 보는 시도였다. 필자는 2000년 Journal for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 출간한 소논문에서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에 관련된 구절은 크게 기도 생활을 보여 주는 구절들과 기도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담은 구절로 나누어지지만, 이 두 부류는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 그리고 제자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했다. 이를 통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는 기도를 통해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고 이루는 것이며, 이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성도에게 요구됨과 동시에 이들이 누리는 축복이다. 오토가 발견한 ‘신학적’ 관점과 해리스가 주장한 ‘실천적’인 요소가 궁극적으로는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였다. 누가가 이해한 예수님의 기도는 신학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이다. 힘있는 실천은 견고한 신학적 이해 위에 서 있다. 반면, 실천적 의미가 없는 신학은 초대 교회 리더들의 관심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 살핀 누가복음의 기도신학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한다(살전 5:17). 그러나 그의 편지 중에 실상 자신의 기 도 생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예수님의 기도 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기도하 시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예수님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인생의 고비 때마다 그 리고 예수님의 사명이 드러나는 의미 있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기도하고 계셨으며, 이런 사건들은 기도를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 을 때도, 사역이 바삐 진행되어 점점 유명세 를 타고 있을 때도, 대를 이어 사역할 열두 제 자를 뽑기 전에도,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수 난을 처음으로 예고하던 때에도, 변화산에서 미래에 있을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 줄 때도, 그리고 수난을 준비하면서, 마지막 으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쉬지 않고 드려지고 있다. 이런 기도들은 예수님 께서 당신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게 한다.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삶은 지속적인 기도 없이는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드린 기도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눅3:21)”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직후 기도를 시작하셨고 이 기도는 하늘에서 ‘소리’가 있을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이 기도는 성령과도 연계되어 있다. ‘기도하실 때’에 해당하는 원어는 현재형 분사(participle)인데, 성령께서 오신 것이 세례 받을 때가 아니라 기도하실 때임을 보여 준다. 언뜻 보기에는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는 십자가 및 하나님 나라와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에 언급된 성령은 하나님 나라와 세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오스카 쿨만에 의하면, 예수님은 지상 사역을 하는 동안 세례를 베풀지 않으셨다(요3:26, 4:2). 예수님이 의도하셨던 세례는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에의 연합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된 후에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사역의 시작일 뿐 아니라,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을 미리 보게 한다.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은 십자가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힘있게 도래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첫 시작에 드려진 헌신뿐 아니라, 사역 전체를 향한 기도라고 보아야 한다.
세례 때 드렸던 예수님의 기도와 짝을 이루는 기도가 누가의 기록 가운데 한 번 더 나온다. 사도행전 7장에 있는 스데반의 기도이다(55~56, 60절). 스데반의 기도는 예수님이 세례 중에 드렸던 기도 및 마지막으로 십자가 상에서 드렸던 기도(눅23:34)의 반복인 듯하다. 세례 때처럼 하늘이 열렸고, 십자가 상의 기도처럼 타인의 무지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결과적으로 복음이 불신의 세계로 확대되는 놀라운 선교의 장(場)을 연다. 세례 때 드려진 기도의 의미는 십자가 상에서의 기도와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곧 예수님 사역의 전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2. 예수님의 반복적인 기도 생활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5:15~16)”
본문은 예수께서 일상 가운데 반복적으로 하셨던 기도 생활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물러 가사’와 ‘기도하다’의 시제는 현재형이며 be 동사와 함께 사용되어 반복적인 상태를 묘사 하는 분사이다(Jesus was [in habit of] retiring … and praying). 물론 이 기도의 목적은 헛된 명성에 현혹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한시라도 사람의 환호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만큼 십자가의 길은 어려웠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목적에 마음을 고정하게 만든다. 세상의 현혹에 이끌리지 않게 한다.
그런데, 누가복음 5장 16절은 단순히 명성을 멀리하려는 의도 이상이다. 만약 이것이 목적이었다면, 누가는 이런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누가복음 4장 42절(막1:35와 평행구)에 삽입했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 42 절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언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누가복음 5장 16절은 명성에 현혹되지 않기 위함이며 동시에 뒤따르는 일련의 시련을 준비하기 위한 기도임을 알 수 있다(눅5:17~26, 27~39; 6:1~11, 특히 눅6:11은 십자가의 미리 보기다). 이런 이해는 누가복음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른 복음서보다 상세하게 기록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누가는 또한 기도의 목적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함’임을 분명히 한다(눅22:32).
성도들의 기도도 예수님의 기도처럼 일상 생활 중에 쌓여야 한다. 기도에 훈련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칭찬 혹은 비난에 현혹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관심과 목적이 뚜렷하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쌓인 기도는 고난을 대비한다. 고난이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당히 맞이할 힘과 지혜를 공급받는다.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고난을 넘어서 인생의 목적을 알기 때문이다.
3. 열두 제자를 세우기 전에 드린 기도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2)”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열 두 제자를 택하신다. 누가복음 6장 12절의 기도는 열두 제자 선택을 준비하는 기도인 셈이다. 누가복음에서 열두 제자의 역할은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보다 더 중요하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미션을 주제로 한다면, 사도행전은 교회의 미션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미션을 이어 받아 교회의 미션을 이루는 사람들이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철야기도는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가복음의 흐름에서 볼 때 누가복음 5장 16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정규적인 기도 생활에 관한 기록과 본절 사이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무리들의 반발이 점점 거세짐이 나타난다. 이런 흐름의 정점이 누가복음 6장 11절이다.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본절의 철야 기도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드린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던 당시의 상황은 실제적이며 또한 상징적이다. 상징적이란 앞으로 지실 십자가에 대한 ‘미리 보기’란 의미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한 시기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위협 속에서 결국 당하실 죽음을 예견하면서, 죽으심 이후에 있을 ‘교회의 미션’을 위해 열두 제자를 부르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누가복음이 기록하는 열두 제자의 선택이 마태복음의 그것과 다른 문맥에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누가는 보다 선명하게 열두 제자의 임무를 암시하고 있다.
한 가지 더 관심 있는 사실은 열두 제자의 이름 목록 중에 부연설명이 붙은 사람은 베드로와 유다뿐이라는 점이다. 베드로에게 붙은 설명은 베드로의 다른 이름이지만, 유다에 붙은 설명은 그가 할 역할 곧 ‘예수를 팔’ 것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다. 유독 유다에게만 설명을 붙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열두 제자의 선택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었다는 의미다.
4. 베드로의 고백을 듣기 전에 드린 기도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 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눅9:1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했던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 사역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 고백 직후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분명히 예고하시며, 세상을 향한 가르침보다는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에 몰두하심으로 당신의 죽으심 이후를 대비하기 시작한다. 누가는 베드로의 고백 직전에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음을 기록한다.
예수님이 드리셨던 기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고백 사건에 관하여 누가가 독특하게 이해한 부분을 살펴보자(비교, 막8:32~33). 누가는 마가와는 달리 베드로의 무지한 간청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꾸지람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 한때 베드로는 무지한 간청을 드렸지만, 기도하는 예수님 때문에 궁극적으로 베드로가 한 고백이 성취됨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또한 ‘제자도’의 가르침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듣기 위해 기도하신 것은 또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날마다의 삶에서 실천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롱게네커는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제자도의 핵심을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찾았다. 그는 누가가 평행구인 마가복음 8장 34절에 ‘날마다’를 삽입함으로 십자가의 도를 생활 중에 적용하였음을 지적한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를 십자가와 연결하는데, 수난으로서의 십자가뿐 아니라, 성도들이 생활에서 지는 십자가와도 연결한다. 결국 기도의 신실한 삶은 십자가를 삶의 현장에서 지는 실천적인 삶을 의미한다.
5. 변화산에서 드린 기도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8~29)”
누가는 변화산 사건도 기도의 맥 안에서 이해했다. 기도와 변화의 장면을 연결시킴으로, 예수님의 변화는 기도 중에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누가가 기록한 변화산 사건을 마가의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역시 첨가된 부분이 있다. 31절이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예표하지만, 그 영광은 수난 없이 얻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우리말 번역의 ‘별세’는 직역하면 길로 들어선다는 의미다. ‘예루살렘에서 이룰 그 길에 들어선다’란 뜻이다. 변화산에서 드린 예수님 기도의 의미를 정리하면, 기도는 당신이 최종적으로 이루실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방편이며, 또한 이루는 과정이었다.
6. 베드로를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베드로를 위한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제사장적 사역을 보여 준다(비교 요한복음 17장). 이 기도도, 앞서 살핀 기도처럼, 예수께서 지실 십자가를 위한 준비이며, 제자들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바로 뒤따르는 34절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을 예견하고 있다. 베드로를 위한 중보기도는 실패한 베드로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는 다시 회복되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중보하는 기도라고 보아야 한다. 누가복음 22장 29~30절은 이런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해 중보한 것은 장차 그에게 맡기려는 사역을 위해서이며,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7. 그밖의 기도들
누가복음에는 앞서 살핀 것 이외에도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한 두 개의 구절이 더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22:39~46)와 십자가 상에서의 기도(23:46)이다. 물론 이 두 절도 마가복음의 구절들과 살펴보면, 누가만의 독특한 관점이 드러나며, 이 독특성은 앞서 살핀 구절들에서 도출된 결론들과 멋지게 일치한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고찰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네 번에 걸쳐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데(눅11:2~4; 5~8; 18:1~18; 21:36), 누가복음 21장 36절만이 마가복음에도 있으며 나머지는 누가만이 기록한다. 누가복음 21장 36절도 마가와 비교 하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가 추가되어 있어 기도에 대한 가르침임을 분명히 한다. 이 네 가르침을 종합하여 보면 기도에 대한 균형있는 가르침을 추출해 낼 수 있다. 두 개의 비유는 기도하는 방법(manner)에 대해서, 주기도문은 기도의 내용(content)에 대해서, 그리고 누가복음 21장 36절은 기도해야 하는 이유(reason)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누가복음은 기도에 대해 구체적이며 종합적인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는 데 기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누가복음은 기도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깊게 연결함으로 제자들의 필수 조건으로 제시한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제자들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persistent prayer)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셨던 모습 속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일부 학자들은 누가가 강조한 기도신학이 다가올 천국을 준비하는 방편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나, 이 주장은 누가신학을 반 정도 이해한 것이다. 누가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가장 본질적인 신앙 생활의 모습(자세)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제시한다.
누가복음 11장 2~4절에 나타나고 있는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델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11:1).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을 명확하게 밝혀 주신다. 주기도문에는 다섯 개의 간청이 있는 데 처음 둘은 ‘당신의’가 중심이며, 다음 셋은 ‘우리에게’가 중심이다. 특별히 ‘당신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보여 준다.
독일 신학자 예레미야스는 주기도문의 원형을 복원하려고 힘썼다. 그가 제시한 원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비교하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확실히 현재적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이해가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13절을 주기도문을 포함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종결절로 본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우리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실 선물이 ‘성령’임을 강조한다. ‘성령’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최종적인 승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누가가 이해한 주기도문의 의미는 제자들에서 꼭 필요한 기도의 내용을 제시함으로 제자들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도래할 나라 사이의 기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주기도문은 이미 경험한 구원이 현재에 반복적으로 확인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며, 미래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당신의’ 기도에 있는 ‘아버지여’ 또한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음을 전제하고 있다. 두 번째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분은 더욱 명백하게 기도와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킨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전제하여 그 통치의 온전함이 이루어지길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1장 5~13절의 강청기도의 비유에서 주는 가르침은 지속적인 기도다. 물론 한밤중에 이웃의 집 문을 두드리며 무엇인가를 달라는 것은 예의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구하는 모습 속에서 제자들이 익혀야 할 기도의 진수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제자는 기도 중에 바른 것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고상한 것만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많이 그리고 힘있게 하는 사람일수록 기도 중에 다양한 것을 구한다. 심지어는 사소한 것까지도 구하는 기도의 습관이 기도의 사람을 만든다.
누가복음 11장 9~10절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얻을 수 있음을 교훈한다. 하나님은 주시려고 준비되어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9절을 보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불특정 주어인 ‘그것(it)’이지 우리가 구한 바로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주시지만, 당신이 주시려는 것을 주신다. 11~13절은 이 점을 더 분명하게 한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한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도 성령과 기도를 연결한다.
물론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표한다.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려는 성도를 붙드신다.
물론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예표한다.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 이 가능하고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나라가 이 미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 도래한 하나님나 라에서는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려는 성도를 붙드신다.
누가복음 18장 1~8절에서는 기도와 하나님 나라의 연관성은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누가는 보통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구절을 명시하지 않지만 본 비유 1절에는 비유의 주제가 무엇이란 명시가 있다(‘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에 관한 비유). 하나님은 지속적이며 성실한 기도로 부르짖는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으시고 속히 응답하실 것을 약속한다. 따라서, 낙심하여 기도를 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이다.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는 주된 의미가 분명하지만, 끝마무리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 하)” 우선 알아야 할 것은 본 비유는 언제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눅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블롬버그는 본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완성하는 한 가지 방편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약간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재림이 막연히 연장 된 것이 아니라, 언제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 성도들은 늘 준비된 자세로 살아야 한다. 낙심하여 기도를 쉬는 것은 재림에 대한 긴장을 푼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본 비유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성실한 기도 곧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도임을 가르쳐 준다.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는 제자가 인자가 보고 싶어 하는 제자이다.
누가복음 21장 36절 역시 누가복음의 기도 신학의 주된 가르침인 꾸준한 기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본절은 기도를 통해 제자들이 항상 깨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항상 깨어 있기 위한 최고의 수단은 꾸준한 기도란 뜻이다. 기도는 성도들을 끝까지 붙들고, 견고케 하며, 힘을 얻게 함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르게 준비하게 한다. 기도가 종말을 준비하며 이루는 수단임을 암시하기 위해 누가는 기도와 ‘인자’를 연결시킨다(눅18:1~8; 눅21:36; 행7:56, 60). 기도를 통해 성도는 어느 때에 다가올지 모르는 재림을 준비할 수 있으며, 기도를 통해 재림을 두려움과 당혹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약속의 성취로 담대하며, 담담한 기쁨 속에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살핀 네 구절들을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제자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제시임을 알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할 지를 가르쳐 주며(낙심치 말고 계속해서), ‘무엇을’ 기도할 지를 제시하고(하나님 나라), 그리고 ‘왜’ 기도해야 하는가(지탱할 힘을 얻기 위해)를 보여 준다. 흥미로운 것은 네 개의 가르침 모두는 기도와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고 있다. 기도와 하나님 나라는 두 가지로 관련된다. 이미 이룬 하나님 나라가 우리로 하여금 실망치 않고 계속 기도할 수 있게 하며, 오직 기도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준비할 수 있다.
누가의 기도신학과 종말론
오토와 견해를 같이 하는 학자들이 누가의 기도신학에서 오류를 범한 부분은 콘첼만 이래로 누가가 미래적 종말론만을 알고 있었다는 전제이다. 자연히 기도는 이런 미래를 준비하는 도구일 뿐, 이미 도래한 현재적 종말이 요구하는 제자의 모습이란 측면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이 점에 관해 콘(Conn)과 쉬나겐버그(Schnackenberg)는 누가의 종말론에 현재적 요소가 있으며,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미래적 종말론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소위 연기된 재림(delay of parousia)은 자칫 종말에 대한 긴장을 늦추기 때문이다. 사실, 다가올 일을 항상 준비하면서 오랜 동안 같은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님은 성도들에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다가올 일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은 지혜롭지만, 그것만을 붙들고 사는 것은 균형을 잃은 삶이다. 예수 안에서 축복, 곧 하나님 나라의 소유는 미래의 당연한 일을 준비하지만, 현재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즐기면서, 현재에 바탕을 두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제자들에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초조해 하면서 긴장한 가운데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소중하게 사는 균형 잡힌 긴장감, 곧 깨어 있는 가운데 맞이하기 때문에 도래할 나라의 시기와 기다려야 할 시간의 길이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바로 누가 신학의 종말론이 현재적 요소(이미 이루어진 것)와 미래적 요소(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기도신학의 목회적용
누가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낙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분명히 하셨고, 기도하면서 그 소명을 이루어 가셨다. 특별히 사역의 전환기에는 어김없이 기도하셨다. 미래가 불투명하며 큰 환난을 앞에 두고 집중적으로 하신 것도 기도였다.
기도는 제자들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한다. 이런 실천적인 교훈을 누가는 또한 신학적인 논리로 설득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미 이룬 하나님 나라 안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임을 보이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제자의 모델인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야 함을 강조한다(눅9:23). 제자들이 날마다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에는 꾸준히 드려지는 기도가 엄연히 포함되어 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기도는 성도가 이 땅에서 하여야 할 가장 뚜렷한 일이다. 성도의 기도는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부르셨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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