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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귀검록》
## 제4화 ― 철무광의 천 걸음
해가 청하진의 지붕 위로 떠올랐을 때, 진무혁은 아홉 번째로 걸음을 멈추었다.
당소혜가 만들어 준 계보기의 숫자는 구백구십칠에 머물러 있었다.
남은 것은 단 세 걸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세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땅에 세워 둔 철검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걷는 동안, 그의 오른쪽 어깨가 검보다 먼저 앞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무혁은 계보기의 숫자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당소혜가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설마 다시 시작하려고?”
“그렇소.”
“세 걸음만 더 걸으면 천 번이잖아.”
“마지막에 중심이 흐트러졌소.”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천 번 했다고 하면 되지.”
무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철무광 선배에게 거짓말하라는 뜻이오?”
“그 사람이 옆에서 세어 본 것도 아니잖아.”
“그분에게는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게는 속일 수 없소.”
당소혜는 답답하다는 듯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그 고집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옆에서 약초를 다듬던 백리운이 대답했다.
“주변 사람들이 많이 참아 준 모양이지.”
무혁이 그를 돌아보았다.
“수련을 하지 않을 것이면 조용히 있어 주시오.”
“나는 벌써 천 걸음을 채웠네.”
백리운은 당당하게 자신이 걸었던 자리를 가리켰다.
땅에는 둥근 발자국 대신 가지런히 깔린 이불 한 채가 놓여 있었다.
당소혜가 물었다.
“누워서 걸었다는 말이야?”
“꿈속에서 걸었지.”
“그건 수련이 아니잖아.”
“정신을 수련했네.”
“코까지 골면서?”
“깊은 호흡을 운용한 걸세.”
소혜가 작은 쇠구슬 하나를 꺼내 들자 백리운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남궁 소저는 어디 갔나?”
“당신이 코를 고는 동안 천 걸음을 끝내고 표사들을 청하진 의원으로 데려갔어.”
백리운의 얼굴에 억울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픈 사람을 의원인 나에게 알리지 않고 데려갔다고?”
“두 번이나 깨웠어.”
“나는 들은 적이 없네.”
“자고 있었으니까.”
무혁은 두 사람의 말을 뒤로하고 첫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검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른발을 옮길 때에는 왼발에 남은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했다. 발을 땅에 놓은 뒤에야 몸을 움직이고, 상체보다 하체가 먼저 길을 열도록 했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처음에는 단순히 검 주위를 도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같은 걸음을 반복할수록 자신의 몸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발이 왼발보다 반 치 더 벌어졌다.
검을 의식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빠르게 돌려 할수록 허리와 발의 움직임이 따로 놀았다.
태허유운보를 배울 때 청허진인은 늘 걸음의 모양을 바로잡아 주었다. 하지만 무혁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겼다.
보법의 초식을 외웠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철무광은 그 얕은 생각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둘백서른하나.”
당소혜가 바위에 앉아 숫자를 세었다.
무혁이 물었다.
“왜 직접 세는 것이오?”
“계보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거야.”
“나를 못 믿는 것이 아니고?”
“둘 다.”
백리운이 옆에 작은 솥을 걸었다.
“아침은 죽이면 되겠나?”
“만두만 아니면 돼.”
“당 소저는 만두 여섯 개를 받아 갔으면서 왜 만두를 싫어하는 척하나?”
“그건 장치 값이었어.”
“먹는 순간 식사가 된 것이지.”
“두 사람 모두 조용히 해 주시오.”
무혁이 말하자 백리운과 당소혜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도와주고 있잖아.”
“우리가 없으면 숫자를 잘못 셀 수도 있어.”
“계보기가 있소.”
“그건 내가 만든 거잖아.”
무혁은 결국 대답을 포기했다.
그는 다시 철검을 바라보며 걸었다.
아침 햇살이 높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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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소연이 돌아온 것은 무혁이 육백 번째 걸음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빈 물통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표사들은 어떻소?”
무혁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백리 의원이 응급 처치를 잘해 두어서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만보상회에 전서를 보냈으니 오늘 안으로 사람들이 올 겁니다.”
“다행이군.”
소연은 땅에 놓인 계보기를 확인했다.
“육백십이.”
당소혜가 말했다.
“이 속도라면 점심 전에는 끝나겠지?”
“일곱 번째 걸음에서 중심이 흔들렸습니다.”
소연의 말에 무혁의 발이 멈췄다.
당소혜가 다급히 말했다.
“흔들리지 않았어. 내가 계속 보고 있었어.”
“오른쪽 발뒤꿈치가 먼저 땅에 닿았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잖아.”
무혁은 이미 계보기의 숫자를 되돌리고 있었다.
당소혜가 소연을 노려보았다.
“왜 말한 거야?”
“잘못된 걸음을 천 번 반복하면 잘못된 습관만 깊어집니다.”
“그래도 육백 번을 걸었는데!”
“아홉 번이나 다시 시작했으니 한 번 더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무혁이 말했다.
“남궁 소저의 말이 맞소.”
소혜는 무혁과 소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정말 답답한 곳이 잘 맞아.”
백리운은 솥에서 죽을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있으면 숨이 막히지.”
소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죽이 타고 있습니다.”
백리운이 놀라 솥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무혁은 다시 첫걸음을 내디뎠다.
소연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빈 물통을 들었다.
“물을 길어 오겠습니다.”
“내가 다녀오지.”
무혁이 말하자 소연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천 걸음부터 끝내세요.”
“물통이 두 개요.”
“두 개라서 혼자 들 수 있습니다.”
“오는 길이 멀지 않소?”
“진무혁.”
소연이 그의 이름을 온전히 불렀다.
무혁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당신은 어깨를 다쳤습니다. 백리 의원이 검을 휘두르지 말라고 했지, 무거운 물통을 들고 다녀도 된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이 정도 부상은 괜찮소.”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귀검을 감당하겠습니까?”
무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연은 물통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당소혜가 무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남궁 언니한테는 꼼짝도 못 하네.”
“무엇을 말이오?”
“내가 쉬라고 했으면 듣지 않았을 거잖아.”
“당 소저는 쉬라고 한 적이 없소.”
“앞으로 해 볼까?”
“그때 생각해 보겠소.”
“봐. 벌써 다르잖아.”
무혁은 철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귀가 조금 붉어진 것 같았지만 당소혜는 더 놀리지 않았다.
소혜는 무혁의 걸음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부러진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는 오른발로 돌 때만 중심이 흔들렸어.”
“알고 있소.”
“그런데 왜 그런지는 모르지?”
무혁은 걸음을 계속하며 대답했다.
“오른쪽 어깨의 부상 때문이라고 생각했소.”
“아니야. 귀검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래.”
무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소혜는 등에 멘 귀검의 끈을 가리켰다.
“검이 무거운 것은 아닌데 검집 아래쪽이 몸에서 떨어져 있잖아. 걸을 때마다 검의 무게가 오른쪽 어깨를 뒤로 당기고 있어.”
무혁은 걸음을 멈추려다가 그대로 이어 갔다.
소혜의 말대로 귀검이 몸의 중심을 조금씩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고칠 수 있겠소?”
“끈의 위치를 한 치만 옮기면 돼. 하지만 지금 고치면 천 걸음의 의미가 없잖아.”
“어째서요?”
“철무광은 귀검을 멘 상태에서 걸으라고 했을 거야. 검의 무게까지 네 몸의 일부로 만들라는 뜻 아닐까?”
무혁은 당소혜를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고 엉뚱한 소녀였지만 기관을 다루는 눈은 날카로웠다. 작은 톱니 하나의 움직임만으로도 전체의 균형을 읽어 내는 사람이었다.
“고맙소.”
“왜 갑자기?”
“내가 놓친 것을 알려 주었으니까.”
당소혜는 괜히 흙바닥의 선을 발로 지웠다.
“동료니까 알려 준 것뿐이야.”
무혁은 귀검의 무게를 의식하며 다시 걸었다.
검이 뒤로 흔들릴 때 몸으로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왼발의 중심을 조금 낮추고 허리를 움직여 검의 흔들림을 걸음 속에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러나 백 걸음쯤 지나자 몸과 귀검의 움직임이 조금씩 맞기 시작했다.
무혁이 움직이면 검이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과 한 자루의 검이 함께 움직였다.
귀검을 경맥의 일부로 여기라던 철무광의 말이 비로소 아주 조금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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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지났을 때, 무혁은 마침내 천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마지막 발이 땅에 닿았지만 몸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등의 귀검도 더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무혁은 한동안 그 자세로 서 있었다.
당소혜가 계보기를 확인했다.
“정확히 천 번.”
백리운은 죽 그릇을 내밀었다.
“축하하네. 천 걸음의 상으로 탄 죽을 주지.”
“탄 부분은 당신이 드시오.”
“이럴 때만 스승에게 양보하는군.”
“누가 당신을 스승이라고 했소?”
“이 죽을 끓이는 동안 불을 다스리는 법을 깨달았네.”
소연이 솥을 내려다보았다.
“실패한 것 같은데요.”
“깨달음에는 실패도 필요한 법이오.”
네 사람은 그늘 아래 둘러앉아 죽을 나누어 먹었다.
죽에서는 희미하게 탄 냄새가 났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무혁은 말없이 그릇을 비웠다.
당소혜가 그의 빈 그릇을 보고 물었다.
“맛있어?”
“먹을 만하오.”
백리운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무혁은 음식의 가치를 아는군.”
무혁이 덧붙였다.
“사흘 동안 만두만 먹은 뒤라서 무엇이든 먹을 만한 것이오.”
백리운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때 바람을 가르며 작은 물체 하나가 날아왔다.
무혁은 몸을 돌려 그것을 받아 냈다.
마른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가 날아온 곳에는 철무광이 서 있었다.
그는 어제와 같은 낡은 갈색 무복 차림이었다. 등에 멘 장도와 허리에 찬 술병도 그대로였다.
“천 번을 채웠느냐?”
“그렇습니다.”
철무광이 당소혜를 바라보았다.
“저 장치의 숫자를 믿은 것이냐?”
무혁이 대답했다.
“숫자는 장치가 세었지만 걸음은 제가 확인했습니다.”
“중간에 틀리지 않았고?”
“열 번 다시 시작했습니다.”
“왜?”
“몸의 중심이 흔들렸습니다.”
철무광은 무혁의 발과 어깨, 등에 멘 귀검을 차례로 살폈다.
“걸어 보아라.”
무혁은 철검을 땅에 세운 뒤 그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오른발을 내디디고, 허리를 움직인 뒤 왼발로 중심을 이었다.
철무광은 두 바퀴를 지켜본 뒤 나뭇가지를 던졌다.
나뭇가지가 무혁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무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반걸음 돌려 나뭇가지를 피한 뒤 흐트러진 중심을 왼발로 이어 갔다.
철무광이 다시 작은 돌 두 개를 던졌다.
하나는 무릎을, 다른 하나는 발목을 향했다.
무혁은 돌을 보며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철검과 자신의 거리, 귀검의 무게, 땅에 닿은 발의 위치를 동시에 느끼며 원을 좁혔다.
돌 두 개가 그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
철무광이 말했다.
“그만.”
무혁이 걸음을 멈췄다.
“통과한 것입니까?”
“겨우 서 있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 수련을 알려 주십시오.”
“급하군.”
“강해져야 합니다.”
“어제도 들었다.”
철무광은 백리운과 소연, 소혜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냐?”
무혁이 한 사람씩 소개했다.
“떠돌이 의원 백리운입니다. 의술과 독술에 뛰어납니다.”
백리운이 포권을 취했다.
“뛰어나다는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해도 좋았을 텐데.”
“남궁세가의 남궁소연 소저입니다. 저보다 검술과 내공이 뛰어납니다.”
소연은 무혁을 바라보았다.
“그 설명은 꼭 필요했습니까?”
“사실이니 말했소.”
철무광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당소혜에게 향했다.
“사천당문의 당소혜 소저입니다. 암기와 기관술에 뛰어나고…….”
무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소혜가 기다렸다.
“그리고?”
“계산이 정확합니다.”
“그게 끝이야?”
“만두를 좋아합니다.”
“누가 만두를 좋아한다고 했어?”
철무광이 네 사람을 바라보다 물었다.
“함께 다닌 지 얼마나 되었지?”
무혁이 대답했다.
“백리운과 남궁 소저는 사흘, 당 소저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철무광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런데 벌써 서로의 목숨을 맡겼느냐?”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백리운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기에는 무혁의 실력이 아직 부족해서 말입니다.”
무혁이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도 무공이 뛰어나 보이지는 않소.”
“나는 싸우기 전에 상대의 차에 독을 넣으면 되네.”
소연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앞으로 백리 의원이 주는 차는 마시지 않겠습니다.”
“농담이오.”
당소혜가 말했다.
“눈빛은 진심 같았는데.”
철무광의 굳은 얼굴에 아주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따라와라.”
“어디로 말입니까?”
“청하진 북쪽의 객잔.”
무혁이 철검을 거두며 물었다.
“저를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철무광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네 사람은 서둘러 짐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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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진 북쪽의 객잔은 십 년 전부터 폐가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기울어진 현판에는 객잔이라는 두 글자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문짝 하나는 경첩이 빠져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당소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지낸다고?”
철무광이 대답했다.
“비를 피할 지붕은 있다.”
백리운이 낡은 기둥을 손으로 밀어 보았다.
기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지붕이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싫으면 나가라.”
“싫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숙박비가 없다는 점은 마음에 드는군요.”
철무광은 마당 중앙에 나무토막 하나를 세웠다.
나무토막의 굵기는 어른 팔뚝만 했고 높이는 무혁의 허리 정도였다.
“철검을 뽑아라.”
무혁이 철검을 뽑았다.
“베어라.”
무혁은 태허검법의 기본 베기를 펼쳤다.
검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퍽!
철검은 나무토막의 절반쯤 들어가 멈췄다.
철무광이 물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느냐?”
“힘이 부족했습니다.”
“틀렸다.”
“검의 각도가 흐트러졌습니까?”
“그것도 틀렸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네가 나무를 베려 했다는 것이다.”
당소혜가 작은 목소리로 백리운에게 물었다.
“나무를 베라고 해 놓고 베려 한 것이 잘못이래.”
“고수들의 말은 원래 이해하기 어려워야 값이 오르는 법이지.”
철무광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듣기 싫으면 나가도 좋다.”
“조용히 듣겠습니다.”
백리운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철무광은 나무토막에 박힌 검을 뽑아 무혁에게 돌려주었다.
“검이 닿는 곳만 보았으니 검이 그곳에서 멈춘 것이다.”
“나무 뒤를 보라는 말씀입니까?”
“베려는 것의 끝을 보아라. 나무를 베고 싶으면 나무를 보지 말고 그 뒤를 봐야 한다.”
철무광은 나무토막 뒤에 작은 돌 하나를 놓았다.
“돌을 향해 검을 내려라.”
무혁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는 나무가 아니라 뒤에 놓인 돌을 바라보았다.
검을 들어 올린 뒤 허리와 어깨의 힘을 빼고 아래로 내렸다.
퍽!
이번에는 나무토막의 삼분의 이까지 검이 들어갔다.
철무광이 고개를 저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다시 나무를 보았다.”
무혁은 철검을 뽑았다.
“다시 하겠습니다.”
“해라.”
세 번째 검도 나무를 완전히 가르지 못했다.
네 번째 검에서는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다섯 번째에는 발이 먼저 들렸다.
열 번째 검이 끝났을 때 무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철무광은 한 번도 잘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무혁은 검을 들었다.
백리운이 앞으로 나섰다.
“어깨를 다친 사람입니다.”
“알고 있다.”
“알고도 계속 검을 휘두르게 하시는 겁니까?”
“어깨로 휘두르지 않으면 된다.”
“현재 무혁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철무광이 백리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백리운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가볍지 않았다.
“몸을 망가뜨리는 가르침이라면 제가 막겠습니다.”
“의원으로서인가?”
“동료로서입니다.”
무혁이 두 사람 사이로 나섰다.
“그만하시오.”
그는 백리운에게 말했다.
“내 어깨는 내가 압니다.”
“환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군.”
“무리하지 않겠소.”
“자네는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모르잖아.”
철무광이 말했다.
“백리운의 말이 맞다.”
무혁이 그를 돌아보았다.
“검을 내려놓아라.”
“아직 열 번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어깨를 아끼기 위해 오늘은 열 번만 시킨 것이다.”
무혁은 그제야 철검을 내렸다.
철무광은 백리운에게 말했다.
“약을 발라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백리운은 무혁을 낡은 평상에 앉힌 뒤 어깨의 천을 풀었다. 그는 부은 곳을 살피고 새 약을 발랐다.
“조금 전에는 내가 말려도 듣지 않더니 저분이 한마디 하니 바로 듣는군.”
“수련을 시키는 분이 그만하라고 했으니까.”
“앞으로 내 말 뒤에 ‘철무광도 그렇게 말했다’라고 덧붙여야겠어.”
“잔소리하지 말고 약이나 바르시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게.”
“아프지 않소.”
백리운이 손가락으로 부은 곳을 눌렀다.
무혁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것도 안 아픈가?”
“일부러 누른 것은 아프오.”
“그럼 아픈 것이 맞잖아.”
당소혜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말했다.
“두 사람은 친한 거야, 사이가 나쁜 거야?”
남궁소연이 대답했다.
“친해서 저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혁과 백리운이 동시에 물었다.
소연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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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 무렵, 철무광은 네 사람을 마당에 불러 세웠다.
그의 앞에는 물이 가득 담긴 사발 세 개와 빈 사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진무혁.”
“예.”
“귀검을 뽑아라.”
무혁은 잠시 망설였다.
“어깨가 다쳤습니다.”
“검을 휘두르라고 하지 않았다.”
무혁은 등에 멘 귀검을 풀었다.
검자루를 잡고 천천히 뽑자 푸른 검신이 저녁 햇살을 받았다.
귀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세 사람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철무광은 빈 사발을 가리켰다.
“검끝을 사발 위에 두어라.”
무혁은 귀검을 수평으로 들어 검끝을 사발 위에 놓았다.
“태허심법을 운용해라.”
무혁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려 오른팔로 보냈다. 진기가 손바닥을 지나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귀검의 검신에서 낮은 떨림이 일었다.
우웅.
그러나 열 번의 호흡도 지나지 않아 무혁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철무광이 물었다.
“사발에 무엇이 있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왜 검에 진기를 밀어 넣고 있지?”
무혁은 진기의 흐름을 멈췄다.
“귀검을 운용하려면 내력을 넣어야 하지 않습니까?”
“검기를 펼치려면 그렇다. 하지만 지금 네게 검기를 펼치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진기를 쏟아부으니 세 초식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철무광은 물이 담긴 사발 하나를 들어 빈 사발 옆에 놓았다.
“물을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당소혜가 대답했다.
“사발을 기울이면 됩니다.”
“물을 밀어내야 하느냐?”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철무광이 무혁을 바라보았다.
“진기도 같다. 네가 억지로 밀어내려 하니 경맥이 먼저 지치는 것이다. 길을 열어 주면 진기는 스스로 흐른다.”
“길을 어떻게 여는 것입니까?”
“태허심법의 호흡은 단전에서 시작하여 임맥을 따라 가슴으로 올라오고, 어깨와 팔을 지나 검에 닿는다. 하지만 너는 어깨에서 진기를 한 번 막은 뒤 힘으로 밀어내고 있다.”
무혁은 눈을 감았다.
평소 검에 내력을 실으려 할 때마다 어깨와 손목에 힘을 주었다. 그것이 진기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힘을 줄수록 경맥의 흐름을 막고 있었다.
“다시 해 보아라.”
무혁은 호흡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기를 밀어내지 않았다.
단전에서 일어난 따뜻한 기운이 자연스럽게 위로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깨의 힘을 풀고 손가락도 검자루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쥐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호흡이 지나자 귀검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열 번째 호흡.
스무 번째 호흡.
진기는 여전히 소모되고 있었지만 전보다 훨씬 느렸다.
귀검의 미세한 떨림도 잦아들었다.
철무광이 물었다.
“무엇이 달라졌지?”
“검이 진기를 빼앗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검에는 의지가 없다. 네 진기를 탐내지도, 네 원수를 대신 갚아 주지도 않는다.”
철무광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귀검은 좋은 검일 뿐이다. 좋은 검일수록 주인의 잘못을 숨겨 주지 않는다. 네 호흡이 흔들리면 검끝도 흔들리고, 네 마음이 조급하면 진기는 더욱 빨리 흩어진다.”
무혁은 귀검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귀검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검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철무광이 말했다.
“귀검 앞에서도 평범한 철검을 들었을 때와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명검의 이름에 기대지 않고, 명검의 날카로움에 취하지 않으며, 자신의 한계를 검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 그것이 주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무혁은 귀검을 천천히 검집에 넣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말로만 명심하지 마라. 내일부터 매일 새벽 천 걸음을 걷고, 정오에는 나무를 열 번 베어라. 저녁에는 귀검을 들고 백 번 호흡한다.”
“백 번이나 말입니까?”
“오늘 스무 번을 넘겼으니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무혁은 망설이지 않고 포권을 취했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철무광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제자로 받는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 받아 주실 겁니까?”
“천 걸음을 걸었다고 제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닙니까?”
“하루 천 걸음은 누구나 걸을 수 있다.”
철무광은 객잔 뒤쪽 산을 가리켰다.
“내일부터 귀검을 메고 저 산의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와라. 경공은 쓰지 말고, 태허심법도 운용하지 마라.”
“얼마나 걸립니까?”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세 시진.”
“그 뒤에 천 걸음과 나무 베기, 호흡 수련도 해야 합니까?”
“그렇다.”
당소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하루 종일 수련만 해야 하잖아요.”
철무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시킨 것이 아니다.”
“무혁 혼자서 어떻게 해요?”
“하지 못하면 떠나면 된다.”
무혁이 말했다.
“하겠습니다.”
소연이 그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부상이 회복된 뒤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철무광은 고개를 저었다.
“산에 오르는 동안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몸을 움직여 굳은 어깨를 풀어야 한다.”
백리운이 물었다.
“제가 상태를 살피며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
“왜요?”
“혼자 올라야 한다.”
당소혜가 말했다.
“길을 잃으면요?”
“산 정상까지 길은 하나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없다.”
“들짐승은요?”
“진무혁이 알아서 해야지.”
소연이 한 걸음 나섰다.
“철 선배께서 무혁을 가르치겠다면 최소한 안전은 책임져야 합니다.”
철무광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강호에서 안전한 수련을 찾느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목숨을 함부로 걸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산 하나를 오르라는 것이다.”
“현재 무혁의 몸 상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무혁이 소연을 막았다.
“괜찮소.”
“당신은 늘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소.”
“무엇을 믿고요?”
무혁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돌아올 곳에 세 사람이 있으니까.”
소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소혜도 입을 다물었다.
백리운은 평소처럼 농담을 하지 않았다.
태허문을 떠난 뒤 무혁에게 돌아올 곳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만 있었을 뿐, 뒤에서 자신을 기다려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백리운은 투덜거리면서도 상처에 약을 발라 줄 것이다.
당소혜는 혹시 모른다며 계보기나 기관 장치를 쥐여 줄 것이다.
남궁소연은 말없이 그가 돌아오는 산길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데 반드시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의 싸움에서 등을 맡기고, 한 끼의 식사를 나누며, 아픈 사람을 함께 구한 시간도 충분히 인연이 될 수 있었다.
소연이 말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가겠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오겠소.”
“약속하십시오.”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오.”
철무광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그날 밤, 네 사람은 폐객잔의 먼지를 털고 잘 곳을 마련했다.
백리운은 부서진 탁자를 고쳐 약재를 올려놓았고, 당소혜는 기울어진 방문에 작은 기관을 달았다.
문을 건드릴 때마다 나무 새가 머리를 내밀고 울도록 만든 장치였다.
끼룩!
백리운이 인상을 썼다.
“왜 하필 새소리인가?”
“누가 문을 열면 바로 알 수 있잖아.”
“밤새 바람이 불면 잠을 못 자겠군.”
“세 번 이상 울면 멈추게 만들었어.”
바람이 불어 문이 흔들렸다.
끼룩! 끼룩! 끼룩!
나무 새는 세 번 울고 멈추었다.
백리운이 안도하는 순간 다시 바람이 불었다.
끼룩! 끼룩! 끼룩!
“이것을 떼어 버리면 안 되나?”
“은자 닷 냥짜리 기관이야.”
“왜 물어볼 때마다 값이 오르지?”
“만지지 못하게 하려고.”
소연은 한쪽에서 가져온 쌀을 씻고 있었다.
무혁이 물었다.
“누가 쌀을 주었소?”
“청하진 의원에서 받았습니다. 백리 의원이 표사들을 치료해 준 답례라고 했어요.”
백리운의 귀가 밝아졌다.
“얼마나 받았소?”
“쌀 한 포대와 은자 반 냥입니다.”
“은자도?”
“표사들의 약값으로 쓰겠습니다.”
“내가 치료했는데?”
“약재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당소혜가 웃으며 말했다.
“돈 밝히는 의원이 돈을 빼앗겼네.”
백리운은 억울한 얼굴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한마디 해 주게.”
“남은 돈을 만두로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돌려드리는 것이 어떻소?”
“강호에 어떻게 그런 가혹한 약속이 있을 수 있나?”
“그렇다면 남궁 소저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낫겠군.”
백리운은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자 철무광을 바라보았다.
철무광은 처마 아래 앉아 장도를 닦고 있었다.
“철 선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용히 해라.”
“알겠습니다.”
백리운은 곧바로 물러났다.
당소혜가 무혁에게 속삭였다.
“백리운을 조용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 봐.”
무혁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배우고 싶군.”
“방금 무엇이라고 했지?”
철무광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은 소연이 끓인 흰죽과 당소혜가 산에서 따 온 나물이었다.
철무광은 네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무혁이 죽 그릇 하나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드십시오.”
“배고프지 않다.”
“오늘 종일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잖습니까?”
“나를 감시했느냐?”
“아닙니다.”
“그럼 네가 먹어라.”
무혁은 물러나지 않았다.
“내일부터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 스승 될 분을 굶길 수는 없습니다.”
철무광의 손이 멈췄다.
“스승 될 분?”
“아직 제자로 받아 주지 않으셨으니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철무광이 무혁을 바라보았다.
“내게 무공을 배우면 태허문의 검을 버릴 수도 있다.”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도객이다. 검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
“검법만이 무예의 전부는 아닙니다.”
“흑도 출신인 나를 스승으로 모시면 정파에서 손가락질할 것이다.”
“정파의 이름을 달고 태허문을 외면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무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느 길에서 왔느냐보다 그 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철무광은 죽 그릇을 받아 들었다.
“말은 제법 하는군.”
“백리운에게 배웠습니다.”
멀리서 듣고 있던 백리운이 가슴을 폈다.
“역시 내 영향이 컸군.”
무혁이 덧붙였다.
“말을 길게 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소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소연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백리운만 억울한 얼굴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철무광은 죽을 한술 먹은 뒤 무혁에게 물었다.
“왜 그 셋과 함께 다니느냐?”
“목적이 같기 때문입니다.”
“무슨 목적이지?”
무혁은 잠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모두 칠성검문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무혁은 태허문의 원수를 찾기 위해서였다.
소연은 자신의 가문이 태허문 멸문에 관련되었는지 확인하려 했다.
당소혜는 당문에서 사라진 독을 찾고 있었다.
백리운은 자신의 목적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네 사람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같은 목적이라며?”
“찾는 것은 서로 다를지도 모릅니다.”
무혁은 모닥불 곁에 앉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군가 다치면 함께 구하고, 억울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합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철무광은 더 묻지 않았다.
---
이튿날 새벽.
무혁은 귀검을 등에 메고 객잔 앞에 섰다.
백리운은 약병 두 개를 내밀었다.
“붉은 병은 어깨가 아플 때 바르고, 흰 병은 벌레에게 물렸을 때 쓰게.”
당소혜는 작은 나무패를 그의 허리끈에 달았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이 줄을 당겨.”
“무슨 장치요?”
“작은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우리가 위치를 알 수 있어.”
“길은 하나라고 했소.”
“하나뿐인 길에서도 길을 잃는 사람이 있어.”
“누구 말이오?”
당소혜가 백리운을 가리켰다.
“어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뒤뜰에서 한 시진을 헤맸어.”
백리운이 항의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귀한 약초를 찾은 걸세.”
“손에 들고 온 건 잡초였잖아.”
“약초도 처음에는 모두 잡초로 보이는 법이지.”
남궁소연은 무혁에게 작은 주먹밥 꾸러미와 물통을 건넸다.
“정상에서 먹으세요.”
“고맙소.”
“서두르지 마십시오. 해가 지기 전에만 돌아오면 됩니다.”
“알겠소.”
“어깨가 아프면 내려오고요.”
“알겠소.”
“들짐승을 만나면 귀검부터 뽑지 마세요. 내공을 아껴야 합니다.”
무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궁 소저.”
“왜 그러지요?”
“걱정되는 것이오?”
소연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당소혜가 얼른 끼어들었다.
“당연히 걱정되지. 당신은 혼자 두면 열 명에게 달려드는 사람이잖아.”
“그 이야기는 언제까지 할 생각이오?”
“다음에 또 혼자 달려들 때까지.”
백리운이 무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녀오게. 해가 질 때까지 오지 않으면 우리가 찾으러 갈 테니까.”
“남궁 소저도 같은 말을 했소.”
“나는 그보다 한 시진 먼저 찾으러 가겠네.”
“왜요?”
“먼저 찾아야 생명의 은인 값을 받을 수 있잖아.”
“얼마를 받을 생각이오?”
“그건 구한 뒤에 정하지.”
무혁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소.”
그는 세 사람을 뒤로하고 산길에 올랐다.
철무광은 객잔 처마 아래에서 무혁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혁의 모습이 산길 너머로 사라지자 백리운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말 혼자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으면?”
“몰래 따라갈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막을 것이다.”
백리운의 웃음이 사라졌다.
“무혁이 다쳐도 말입니까?”
“저 산을 혼자 오르지 못하면 앞으로 내가 가르칠 수련은 하나도 견디지 못한다.”
“왜 무혁입니까?”
철무광이 백리운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태허문의 생존자이기 때문에 가르치려는 겁니까, 아니면 귀검의 주인이기 때문입니까?”
“둘 다 아니다.”
“그렇다면요?”
철무광은 산길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것만으로 제자를 삼지는 않을 텐데요.”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한 척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검을 놓지 않는다. 가르침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만 자신의 검도는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철무광의 손이 장도의 자루에 닿았다.
“그런 아이는 흔치 않다.”
“제자로 받으실 생각이군요.”
“오늘 산에서 돌아온다면.”
백리운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돌아올 겁니다.”
“확신하느냐?”
“무혁은 돌아올 곳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백리운은 객잔 앞에서 기다리는 소연과 소혜를 바라보았다.
“저 고집 센 녀석이 처음으로 한 약속입니다. 어떻게든 지키겠지요.”
---
해가 서쪽 능선에 걸리기 시작했을 때, 산길 위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무혁이었다.
옷에는 먼지가 묻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산 중턱에서 미끄러졌는지 왼쪽 무릎의 천도 조금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등에 멘 귀검도 출발할 때와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당소혜가 가장 먼저 뛰어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친 나무꾼을 만났소.”
무혁의 뒤에는 중년 나무꾼 한 사람이 그가 만든 나무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고 있었다.
“발목을 다쳐 혼자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연이 물었다.
“그래서 부축해서 내려온 겁니까?”
“도중에 두고 올 수는 없었소.”
“어깨는요?”
“괜찮소.”
백리운이 바로 무혁의 손목을 잡았다.
“그 말은 내가 확인한 뒤에 하게.”
나무꾼이 네 사람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진 소협이 아니었으면 산에서 밤을 보낼 뻔했습니다.”
무혁은 나무꾼을 객잔 안으로 안내했다.
그때 철무광이 그의 앞을 막았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했을 텐데.”
붉은 해의 절반이 이미 능선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무혁이 대답했다.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을 버렸다면 한 시진은 일찍 왔을 것이다.”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도 데리고 왔느냐?”
“수련을 끝내는 것보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명령보다도?”
무혁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객잔 앞이 조용해졌다.
당소혜는 철무광의 표정을 살폈고, 남궁소연은 무혁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백리운도 언제든 끼어들 수 있도록 자리를 옮겼다.
철무광은 무혁을 오래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어라.”
무혁은 귀검을 풀어 옆에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철무광이 말했다.
“나는 도를 쓰는 사람이다. 태허문의 검법을 가르쳐 줄 수 없고, 네게 사문의 무공을 버리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
“내가 가르칠 것은 몸을 세우는 법, 진기를 다스리는 법, 적의 앞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수련은 혹독할 것이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어도 쉽게 보내 주지 않는다.”
“견디겠습니다.”
“복수에 눈이 멀어 무고한 사람에게 검을 휘두르면 내가 먼저 네 검을 꺾을 것이다.”
무혁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철무광은 허리에 찬 장도를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진무혁을 나 철무광의 제자로 받아들인다.”
무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허문이 멸문한 뒤 처음으로 얻는 새로운 스승이었다.
청허진인을 대신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태허문의 검법을 버리고 다른 문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철무광은 무혁이 태허문의 검객으로 더 단단하게 설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사람이었다.
무혁은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정식으로 삼배를 올렸다.
“제자 진무혁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철무광은 세 번의 절을 모두 받은 뒤 무혁을 일으켰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그리하겠습니다.”
당소혜가 백리운에게 속삭였다.
“우리도 절해야 해?”
“철 선배가 우리까지 제자로 받는다면.”
철무광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받지 않는다.”
당소혜가 눈을 깜빡였다.
“아직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요?”
“부탁할 것 같은 얼굴이라 미리 말한 것이다.”
백리운이 웃었다.
“저도 스승을 모실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스승 말을 들을 성격이 아니니.”
“사람을 아주 정확히 보시는군요.”
남궁소연이 철무광에게 포권을 취했다.
“무혁을 잘 부탁드립니다.”
철무광이 물었다.
“너는 남궁세가의 사람인데 왜 내 제자를 부탁하지?”
소연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동료이기 때문입니다.”
당소혜가 곁에서 작게 말했다.
“그것뿐일까?”
소연의 차가운 시선이 향하자 소혜는 얼른 백리운의 뒤로 숨었다.
백리운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내 뒤로 숨나?”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잖아.”
“스물두 살이 방패가 될 만큼 많은 나이는 아니네.”
철무광은 네 젊은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운 검객.
냉철하지만 누구보다 동료를 걱정하는 남궁세가의 여검객.
웃음 뒤에 의술과 독술을 감춘 떠돌이 의원.
엉뚱한 기관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는 당문의 소녀.
서로 성격도 다르고 살아온 곳도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한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함께 찾으러 갈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철무광은 무혁에게 말했다.
“제자가 되었으니 내일부터 수련을 두 배로 늘린다.”
무혁의 표정이 굳었다.
“두 배 말입니까?”
“산을 두 번 오르고, 천 걸음을 이천 걸음으로 늘린다.”
당소혜가 대신 물었다.
“나무 베기도 스무 번이에요?”
“그렇다.”
백리운은 무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자가 된 것을 축하하네.”
“전혀 축하하는 얼굴이 아니오.”
“자네의 앞날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그렇지.”
소연이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원하던 스승을 얻었잖아요.”
“그렇소.”
무혁은 철무광을 바라보았다.
“견뎌 보겠소.”
철무광이 정정했다.
“견디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배워라.”
“예, 사부님.”
서쪽 능선 너머로 해가 완전히 내려갔다.
폐객잔의 처마 아래에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진무혁은 첫 번째 사부 철무광을 얻었다.
남궁소연과 백리운, 당소혜는 그의 사문 제자가 되지 않았다. 세 사람에게는 이미 각자의 무공과 걸어갈 길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철무광의 혹독한 수련에서 무혁은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소연은 그의 잘못된 검초를 가장 먼저 알아볼 것이고, 백리운은 망가진 몸을 치료하며 무모함을 꾸짖을 것이다. 소혜는 기발한 장치로 수련을 돕다가 때로는 더 어렵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혁 역시 세 사람이 위험에 빠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들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같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조금씩 같아지고 있었다.
그것이 네 청춘이 강호에서 맺은 첫 번째 약속이었다.
귀검의 주인이 되는 길은 아직 멀었다.
무혁에게는 깊은 내공도, 완성된 검법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걸음을 바로잡아 줄 사부가 있었고, 수련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세 명의 동료가 있었다.
천하를 향한 진무혁의 검은 그렇게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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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 「귀검을 들고 오르는 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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