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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산자연학교 학부모 교육예술강좌 첫날 강의 내용입니다.
◎ 인지학·정신과학 :
루돌프 슈타이너 ( 1861 ∼1925 , 오스트리아 ) 님은 이 두 개념을
거의 같은 뜻으로 썼다.
인지학이란 말은 루돌프 슈타이너 님이 그 바탕을 놓고 발전시킨 정신 과학, 곧 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인지학이란 말 자체는 인간과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두 그리스 말을 합친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 님은 인지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인지학이란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다. 이 길은 사람 안에 있는 정신을 우주 안에 있는 정신으로 이끌고자 한다. 사람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바램을 마음 속 깊이 갖고 있다. 인지학은 사람들이 갖는 이런 바램을 채워 줄 수 있어야 비로소 제 몫을 다 할 것이다. 인지학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인지학 속에서, 자신이 마음 속으로 찾고자 했던 것을 찾는 사람 밖에는 없다. 따라서 , 사람이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느끼듯이, 사람의 본질과 세상에 대한 의문도 갖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인지학이 제시하는 길을 갈 수 있다.
인지학은 정신적인 방법으로 얻는 깨달음을 전해 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일상생활과 감각을 통한 인식이나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학문은 삶을 막다른 경계로 끌고 갈 수 밖에 없으며, 사람의 영혼 존재는 이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존재는 일상생활이나 학문이 끌고 간 경계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각 - 인식이 끌고간 경계에서 인간 영혼 자체를 통하여 정신 세계를 볼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
감각 인식의 경계가 모든 인식의 경계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자신이 어떻게 그러한 경계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의식하게 된다면, 그 의식 속에 그러한 경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것을 찾을 것이다.
물고기는 물의 경계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물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신체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감각 인식의 경계에 다다르는 것은 이와는 다르다. 그 때 그 사람은 자신에게 있던 영혼의 힘이 경계에 다다르자, 감각 인식을 넘어 설 수 있는 힘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
루돌프 슈타이너 전집 26권 14쪽 (1924년)
◎ 물질체(物質體), 정기체 (精氣體), 성기체 (星氣體) 그리고 <<나>>
인지학 - 정신과학에서는 사람의 본질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떤 물건 처럼, 외부감각에 드러나고 오직 물리법칙에 따라 물질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물질로만 보지 않는다.
정신과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의 신체를, 사람을 이루고 있는 전 본질 가운데 오직 한 요소라고 말한다.
사람과 광물세계는 이 물질체(物質體)를 공동으로 갖고 있다.
사람의 신체도 바깥 자연세계에 놓여있는, 겉보기에는 죽어있는 광물세계와 같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돌이나 사람의 신체에서 물질이 이루어내는 과정은, 겉보기에는 같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일반 물질체에서 이루어지는 과정과 사람의 신체에서 이루어지는 과정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돌과 같은 물질체는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두들긴다거나 외부에서 어떤 힘으로 파괴하기 전 까지는 그 형태를 유지한다.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의 물질체는 이와는 달리, 죽었을 때라야 비로소 자체가 갖고 있는 물리-화학 법칙에 따라 파괴된다. 이런 경우에 사람의 신체는 시체라고 한다.
정신과학은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 곧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을 때, 사람에게는 사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두 번째 요소가 있다는 것을 가르켜준다. 이 요소는 사람의 물질체가 허무러들지 않도록 끊임 없이 싸우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 요소를 정기체(精氣體) 또는 생명체라 부른다. 이 요소는 우리 모두 안에 들어 있다. 이 두 번째 요소가 사람 안에 없다면, 사람 몸은 오직 물질의 기운을 따라 곧바로 허물어질 것이다. 정기체 또는 생명체는 사람 몸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싸우는 존재이다. 이 생명체는 사람이 죽어야 비로소 물질체와 떨어진다.
다른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들도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이 생명체((에테르체))를 공동으로 갖고 있다. 동물도 식물도 끊임없이 싸우는 이런 존재를 갖고 있다. 동물이나 식물 안에도 물질체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가 있어야한다.
생명 존재를 이루고 있는 첫번째 요소를 물질체, 그리고 두번째 요소를 생명체라고 나타낸다면, 사람은 이 두요소를 넘어 세번째 요소를 갖고 있다.
이 사실은 단순한 논리를 통해서도 알아낼 수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우리 앞에 서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서 있는 공간 안에, 또 그 사람이 사용하는 손 안에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 말고는 더 없을까? 물론 더 있다.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뼈나 근육이나, 뼈나 근육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화학요소 외에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을 합친 것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안다. 왜냐하면 아침부터 저녘까지 전 삶을 통하여 느낌과 감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과 느낌을 실어나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
우리는 이 존재를 성기체(星氣體) 또는 감정체라고 부른다. 사람이 몸에 갖고 있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 성기체 ((아스트랄체))는 물질체보다 훨씬 더 크다.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성기체는 빛을 내뿜는 구름처럼 나타난다. 그 속에 물질체가 놓여있다.
동물도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이 세 번째 요소를 공동으로 갖고 있다.
이 밖에도 사람의 본질에는 네번째 요소가 있다. 이 요소는 지상에서 으뜸가는 요소이다. 이 요소는 사람의 본질 가운데 가장 높은 요소이다. 우리가 만일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움직임을 따라 갈 수만 있다면, 이 네 번째 요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안에는 바깥에서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이것은 <<나>>라는 단순한 이름이다. 오직 영혼 속 깊고도 깊은 곳에서만 <<나>>라고 부르는 이 이름이 울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옆 사람 보고 결코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 <<나>>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만 <<나>>가 우러 나올 수 있다. ......
루돌프 슈타이너 전집 108권 46쪽 (1908)
온전한 교육과 교육예술
□ 새로운 시작은 어린이들과 함께
월간 문예종합지 "예감" 편집인으로 일을 하다가, 잡지가 폐간된 다음, 몸과 맘을 추슬러 보고자 안성 미리내 성지 아랫마을에 내려가 살았습니다. 그 곳 마을 회관에 적지 않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마을을 위해 기증한 책들이었습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 했던 경험이 있는 제 처가 돌보지 않는 마을문고를 꾸려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주말이면 윗마을 아랫마을 어린이들이 책을 빌려 보겠다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저희를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어린이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가 1991년이었습니다.
제 처와 저는 처녀, 총각시절에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는 좋은 세상이 오면, 부부교사가 되어 시골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자고 꿈을 키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난망하다고 좌절한 다음 어린이들을 만났습니다.
어린이들은 해맑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들과의 만남이 작은 낙이었습니다.
돌아 돌아 다시금 서울에 삶의 터를 잡았을 때, 새로운 시작은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비롯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1998년 정월 대 보름날, 동네 아이들을 모아 민속놀이 잔치 마당을 열었습니다.
제 처가 닭죽을 쓰고, 감자를 삶아 어린이들 새참거리를 마련하였고, 저는 놀이판 기획을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잃어버린 놀이를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 후 주말이면 어린이들과 함께 박물관, 미술관, 과학관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린이 주말학교의 모태가 되었으며, 그 해 4월 어린이 교육예술학교가 정식으로 꾸려졌습니다.
어느덧 4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미술, 연극, 무용, 음악, 사진, 영화 등 모든 갈래의 예술 장르를 어린이들과 함께 섭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가 탈춤마당에서 만나 20 여년의 세월 동안 해 온 것이 교육예술이었다는 것도 비로소 깨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말라하였던 것이 교육미학이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예술가는 대중의 교사여야 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그리고 예술을 통해 거듭나기를, 나아가 예술을 통해 우뚝서기를 늘 소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술을 삶 속에서 맘껏 누리기를 바랬습니다.
한 때는 제가 몽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회의하기도 하였지만, 3년 전에 스위스 유치원과 초중등 통합교육 현장 및 마을을 둘러보며, 제가 꾸는 꿈이 제 혼자 만의 꿈이 아니란 것을 깨쳤으며, 꿈이 이미 실현된 곳이 지구 상에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 온전한 교육을 위하여
스위스를 떠나올 때, 그 곳에 계신 선생님 한 분께서 루돌프 슈타이너의 시 한편을 엽서에 적어 제게 선물하셨습니다.
" 사람이 스스로를 알면, 스스로 온누리가 되고
사람이 온누리를 알면, 온누리 스스로가 된다. "
- 루돌프 슈타이너
저에게는 이 시가 화두가 되었습니다.
일년이 지난 후, 제게 새로운 시간이 주어져, 겨울 가야산에서 면벽 수도를 하였습니다. 40여년의 지난 생을 되돌아 보며, 진참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한울님을 영접하였습니다.
" 꽃문이 스스로 열려야 봄바람 불어 오나니... "
- 수운 최제우
백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 때 동과 서에서 함께 하였던 수운 최제우 님과 루돌프 슈타이너 님은 같은 자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엇 비슷한 시간대에 톨스토이 님과 간디 님도 같은 자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 분들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같았습니다.
낱나 (個我)를 넘어서서 온나 (全我)를 본 것이며,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은 헛것이며, 이를 여위어야 비로소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일러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교육 ( Holistic Education )의 핵입니다.
온전한 교육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혜의 전승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류 지혜의 보고인 우파니샤드에서는 가르침을 청하는 이들을 깨치기 위해 이렇게 묻습니다.
" 세상은 길, 감각은 말, 마음은 고삐, 마부는 지혜, 몸은 수레,
이 수레를 탄 주인은 누구인가? "
이것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참나를 찾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온전한 사람의 길도 깨쳤음으로 새롭게 거듭 날 것입니다.
온전한 교육은 이렇게 새롭게 거듭나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내는 것이겠지요.
□ 사람에 대한 이해 바르게 해야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생장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이해을 바르게 하는 것이 기본이겠습니다.
동서양의 사람에 대한 근원적 이해가 상통합니다.
인지학회의 큰 스승이신 루돌프 슈타이너 님은 사람은 크게 육체(body), 영혼(soul), 정신(sprit)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이것을 일러 종종 몸, 맘, 얼이라고 하지요.
동양의 성스러운 지혜에 뿌리를 둔 신지학회를 새롭게 갱신한 인지학회에서는, 사람의 육체(body), 영혼(soul), 정신(sprit)을 세분하여 깊이있게 통찰하면, 육체는 물질체, 정기체(에테르체), 성기체 (아스트랄체)로, 영혼은 감정혼, 이해혼, 의식혼으로, 정신은 정신적 자아(마나스), 생명정신(붓디), 정신인간 (아트만)으로 각각 삼분 할 수 있으며, 이것들은 전생애를 걸쳐 단계적으로 생장 발달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신령(神靈)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수운 최제우 님과 해월 최시형 님은 사람 받들기를 한울 받들기 같이 하라고 가르치셨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이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장과 발달 속에 깃든 신비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슈타이너 님은 어머니의 몸을 태반(胎盤)으로 하여 육체(肉體)가 생성되고, 육체를 태반으로 하여 에테르체(정기체)가 생장하며, 에테르체(정기체)를 태반으로 하여 아스트랄체(성기체)가 자라고, 아스트랄체(성기체)를 태반으로 하여 자아(自我)가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나비가 낳은 알에서 애벌레가 깨어나고, 다 자란 애벌레가 고치를 틀고 번데기가 되며, 그 번데기가 고치 속에서 충분히 생장한 다음 나비로 꼴바꿈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슈타이너 님은 각 체(體)의 튼튼한 생장과 탄생에 7년여의 세월이 필요하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과정을 이해하지 못해 기형적 생장과 무리한 조산을 촉진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안타까와하였습니다.
생각하게 하는 그림동화 " 꽃들에게 희망을 "은 이같은 세태를 잘 빗대어 보여주고 있지요.
□ 생장 단계에 맞춘 교육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오늘날의 슈타이너 학교에서는 생장 단계에 따른 적기 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조기 교육이 팽배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크게 대비됩니다.
어머니 모태에 있는 아이를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하기 위해, 한두달 먼저 조산시키는 것이 도리어 의도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이 조기 교육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미취학 아동들에게 까지 일찍부터 한글을 깨치고 수 계산에 능하게 만들기 위해 대부분의 부모들은 안달을 합니다. 그래서 유치원 교육조차 파행적으로 아니 기형적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초중등 교육이야 어떻겠습니까? 높은 교육열이 생산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고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슈타이너 학교에서는 0세부터 7세까지의 아동교육에 있어서는 몸으로 하는 교육, 손가락을 많이 쓰게 하는 교육을 중시합니다. 이들은 새몸을 입고 환생한 이들이기 때문에 자기 몸의 주인이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돕는 한편, 육체 속에서 이를 태반으로 하여 생장하고 있는 에테르체가 튼실할 수 있도록 받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들은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걸맞는 교육이 행해집니다.
그리고 아동들이 자신의 몸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편안히 적응할 수 있도록, 신체의 리듬과 자연의 리듬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규칙적인 식생활과 수면 그리고 놀이와 교육을 강조합니다.
이 시기는 또한 원초적인 의지가 생성되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기(氣魄)를 함부로 꺽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머리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나 선생님이 본을 보여 줄 것과 애정과 신뢰의 대상이 일관성 있는 태도와 자세 그리고 가치지향성을 보여 줄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육에서는 선(善)을 강조합니다.
" The world is good "
원초적 의지의 지향성을 선(善)으로 향하게 하고자 함이겠지요.
앞니가 빠지고 이갈이가 시작되면 에테르체가 다 자랐다고 보고 다음 단계의 교육으로 진입합니다.
7세부터 대략 14세까지는 아스트랄체가 에테르체를 태반으로 하여 생장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는 마음을 통한 교육, 가슴으로 느끼는 교육이 중시됩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문자와 숫자 교육이 행해지는데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림과 상징으로 수업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몸과 맘으로 느끼는 체험학습 중심으로 모든 수업이 구성됩니다.
특히 눈여겨 볼 만 한 것은 식의주 생활과 관련한 교육, 절기별 세시풍속과 관련한 교육, 그리고 고대사회의 정신 발달과 삶을 추체험하게 하는 교육입니다.
모든 교육은 예술을 통해 이루어지며, 한차시 한차시의 수업이 예술성 있게 꾸려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합니다. 이는 톨스토이 학교 수업과 상통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육자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요구됩니다.
학교 안에 농장과 베틀실, 수공예실, 목공예실, 도자기 공예실, 대장간, 무용실, 연극,음악 연습실이 갖추어져 있고, 학교 수업의 시작은 늘 레코드 연주와 기도 그리고 시낭송으로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소년, 소녀는 캪틴( Captain )을 필요로 하며, 학동들이 자발적으로 권위와 신뢰 그리고 애정을 부여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합니다. 이들에게는 믿고 추종할 수 있는 대상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아스트랄체가 본격적으로 생장하는 이 시기에는 미(美) 교육이 중시됩니다.
" The world is beautiful "
세상에 숨겨진 신비, 경이로움, 아름다운 누리와 사람과 삶, 창조적 노동을 통한 충만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학동들을 이끕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맘이 기뻐하며 춤출 수 있도록 ...
학부모들에게는 당부합니다. 미담보다는 세상의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추악한 인간 군상들의 삶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과 방송 그리고 TV 시청을 절제하여 달라고...
남녀 성징이 분명해지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사춘기가 오면, 다음 단계의 교육으로 진입합니다.
14세부터 21세까지는 아스트랄체를 태반으로 하여 자아가 생장하는 시기입니다.
어떤 삶을 지향하며, 어떤 사람으로 자신을 가꾸어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기입니다.
반항기이자 방황기이기도 합니다.
마치 고슴도치같이 침을 세우고 있지만 속에서는 자아가 자랍니다.
머리 공부, 얼 공부가 중시됩니다. 이성적, 합리적, 비판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철학과 신학 그리고 미학, 과학과 수학 등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중세와 근대 사회의 정신 및 삶을 추체험하게 하여 줍니다.
이들 청소년들은 앎과 함을 일치시키며, 신념을 갖고 헌신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기성 세대의 이중성을 비판하며, 그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나는 선생님들도 말 따로, 함 따로인 사람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이들에게는 존경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세상 곳곳에 참 의인(義人)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 The world is true "
진(眞) 교육이 중시됩니다.
시비(是非) 가림을 통한 진리 탐구교육이 행해집니다.
본질에 대한 궁구와 진리 실천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현실 속에 있지 않다고 판단할 때는 빗나가기 쉽상이라고 합니다.
슈타이너 학교의 선생님들은 발달단계에 맞춰 교육을 내실있게 하기 위해 교사연구모임을 자주 갖습니다. 슈타이너 학교에는 교장이 없습니다. 교사협의회가 모든 것을 이끕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이념을 실행하기 위해, 스스로는 수행자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삽니다.
나이드신 선생님을 뵙고 있노라면, 동학의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의 가르침이 떠올려집니다.
□ 신(神)의 맑고, 밝음을 체득하길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를 위해 애쓰는 러시아의 톨스토이 학교나 스위스의 슈타이너 학교나 인도의 간디학교나 공동의 교육이념, 교육철학, 교육미학 위에 학교가 꾸려지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받습니다.
그리고 이 세 학교를 설립하신 세 분은 동시대를 살며, 음으로 양으로 신지학회와 관련을 맺으셨던 것이 아닌가 유추를 하여 봅니다. 서양의 신지학은 동양의 현학(玄學)과 맥이 닿는 것이며, 오늘날의 신과학의 기저를 이루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학교, 간디학교, 슈타이너 학교는 인류에게 물려져 내려오는 귀한 교육자산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학교가 있었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세우시고, 한국의 간디라고 일컬어지는 조만식 선생님이 초대교장으로 계셨던 오산학교가 그것이지요. 그후 오산학교와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으셨던 분들이 새로 설립하신 학교가 오늘날의 거창학교와 풀무농업기술학교라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3.1운동 직후 오산학교장으로 계셨던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글을 보면, 이분이 유불선 기독교를 두루 회통하시고 가르침을 펴신 것이 앞의 큰 스승들과 상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밟으신 길은 다르나, 다다른 곳은 같습니다.
교육의 궁극적 지향은 깨침을 통한 하나됨이었으며, 그 속에서 신(神)의 맑고, 밝음을 온 몸, 온 맘, 온 얼로 체득하기를 모두에게 소망하는 것이었지요. 다르게 말하면 신명(神明) 체득, 체화였습니다.
온누리가 신(神)에서 의(意)로, 의(意)에서 사(思)로, 사(思)에서 상(想)으로, 상(想)에서 형(形)으로, 형(形)에서 물(物)로 생생화화(生生化化)하는 것을 깨치고, 제나를 여의고 한우리(한울)가 되는 것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정신(精神)에서 의식(意識)으로, 의식(意識)에서, 사념(思念)으로, 사념(思念)에서 상상(想像)으로, 상상(想像)에서 형상(形象)으로, 형상(形象)에서 산물(産物)로 낳고 낳고 되고 되는 것임을 알고, 마침내 소아(小我)적 자의식(自意識)을 내려놓고, 우주의식, 우주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거듭나, 온누리의 뭇 생명이 한배에서 난 형제 자매이며, 내가 곧 온누리와 동체(同體)임을 자각하고, 인류와 뭇 생명의 무궁진화를 위해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 예술을 통한 교육 - "교육예술" 로
진보적 성향의 예술가들이 1970년대 말부터 공식, 비공식 교육현장에서 예술을 통한 교육을 해 왔습니다.
미감과 미의식 개발, 감상 능력과 표현력 계발, 미적 자원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향수권 확대도 더불어 꾀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와 호흡을 같이 하였던 동인들은 " 예술을 통한 의식화, 자주화, 창조화 "에 보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예술이 삶 속에서 쓰임새 있게 활용되어 지기를 늘 바랬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같은 바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십여년 세월을 통해 더욱 더 신명(神明)의 미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는 것입니다. 신명(神明)은 동체(同體)의 신명(神明)이었습니다.
신명은 제나를 잊거나 여의고, 하나됨이 될 때 온 몸, 온 맘, 온 얼로 체득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의 전제는 소아(小我)를 벗어 놓고, 비움이었습니다. 비울 때에만 울림, 공명(共鳴)이 가능하며,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신명은 하나됨이었습니다.
저는 " 예술을 통한 의식화, 자주화, 창조화 "의 궁극이 " 예술을 통한 신명화 (神明化)"임을 보았습니다.
예술을 통한 의식화, 자주화, 창조화 교육 그리고 이것의 궁극(窮極)인 신명화 (神明化) 교육이 바로 교육예술입니다.
교육예술은 신명 속에서 거듭남이며, 신명 속에서 치유됨이며, 신명 속에서의 살림입니다.
그리고 동학과 서학에서 일컬는 창조의 근원이며, 우주의 본체인 천(天)은 천지에 가득한 신명(神明)을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자이자 예술가이길 소망하는 모든 분들이 온전히 하나되어 신명 속에 있기를 바라며,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창조체험을 하며, 신명 속에서 거듭 새로워 지길 바랍니다.
시천주 조화정 ( 侍天主 造化定 )
영세불망 만사지 ( 永世不忘萬事知 )
라원식 (미술비평가)
교육예술아카데미 대표
초암교육예술연구소장
인지학적 교육
오늘날 사람들이 문제삼고 있는 현재 삶의 많은 부분이 과거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현재 당면한 문제(와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많이 있다. 사회적 문제, 여성문제, 다양한 교육문제, 위생문제, 인권문제 등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다각적인 처방들이 있다. 이러한 처방과 해결책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 의존하고 있다. 과정 속에서 의견이 제시되는 방식이나 의견이 나타나는 양상에는 혁명적인 경향의 급진론, 새로운 것으로의 진화를 바라면서도 기존의 것을 존중하는 온건론, 구제도적인 것을 고치려고 할 때마다 막으려는 보수론이 있다. 주된 세 경향 외에 중간적 입장도 있다.
삶의 모든 사태를 보다 더 깊은 비전을 가지고 보면,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부적합한 방식의 현대 생활에 관련된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안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기초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삶을 개혁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해 제안하는 사람들은 삶의 표피만을 다루는 지식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
삶은 식물과 매우 흡사하다. 식물은 외관상 보이는 생명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은 곳에 미래의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 앞에 놓여 있는 식물은 잎만 보이고 있지만, 장차 그 곳에서 꽃과 열매가 생길 것을 알 수 있다. 식물은 장차 꽃과 열매로 될 형태를 깊숙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보이는 외관만을 본다면 장차 식물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식물의 존재와 본성에 대해 제대로 알 때 식물의 미래에 나타날 기관까지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 역시 그 안에 미래의 씨앗이 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인간 안에 숨겨진 본성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는 별로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표면에 나타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외적인 관찰을 벗어나는 것을 탐구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길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 문제는 확실히 더 간단하다. 우리는 식물과 마찬가지로 다른 것들도 이전의 것으로부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안다. 인간의 삶은 현재에 오직 한 번 존재한다. 식물의 경우에도 장차 꽃으로 필 것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현재 삶은 배(embryo)의 형태로 존재했었고, 식물의 꽃은 잎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본성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본다면,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삶에 대해 깊게 파고 들 때에만, 현재 나타나는 무수히 많은 개혁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인지학(Anthroposophy:人智學)은 그것이 갖는 본래 특성과 경향상, 세계에 대한 실천적인 개념을 제공할 임무를 가져야 한다. 세계에 대한 실천적 개념은 인간 삶의 특성과 본질을 포함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지학의 참된 본질이다.
왜냐하면 인지학은 삶으로부터 분리된 이론이 아니고, 인간의 호기심이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또 이기적인 이유에서 고차원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는 소수 사람들을 위한 방법도 아니다. 인지학은 오늘날 인문학의 중요한 과제와 결합해서 일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 복지를 위해서도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명을 가지고 인지학은 모든 회의와 반대를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영역에서의 급진주의자, 온건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인지학을 회의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지학은 본래부터 거의 어느 한 입장을 만족시키지 않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인지학의 전제는 각 당의 운동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삶에 대한 참된 지식과 인식에 의해서만 세워진다. 만일 사람들이 삶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면, 그것은 사람이 자기 과업을 다하고 있는 삶, 그곳으로부터이다. 이 때 아무렇게나 프로그램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이미 있는 삶의 법칙만이 미래의 삶에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적 탐구자(spiritual investigator)는 반드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존중한다. 이미 있는 것 속에서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개선의 필요성이 크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것 속에서 미래의 씨앗이 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는 변하는 모든 것 안에는 반드시 성장과 진화가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현재 속에서 변형과 성장의 씨앗을 볼 수 있다. 그는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것으로부터 읽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변화 속에서 읽어내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프로그램이다. 발달의 본질 속에 프로그램은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지학적 통찰력은 현대 생활의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 생활의 문제 중 교육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볼 것이다. 우리는 요구나 프로그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아동의 본성에 관해 기술하려는 것이다. 성장하고 진화하는 인간 존재로부터 적합한 교육의 관점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진화하는 인간의 본성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있는 그대로의 숨겨진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감각관찰을 통해 인간에 대해 알게 된 것과 삶에 대한 물질주의적 개념은 인간 존재 중 한 가지 요소만을 다룬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에 관한 것은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 중 물질체(physical body)에 관한 것만을 고려한 것이다. 인간의 물질체는 다른 물질적 존재의 법칙과 같은 법칙에 지배받고, 물질적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와 힘으로 물질체도 구성되어 있다. 이런 것을 보통 무생물의 세계라고 한다. 인지학은 인간이 무생물의 세계와 같은 물질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물질체는 물질계의 요소들과 같은 방식으로 재료를 섞고, 결합하며, 형태를 나타내고, 분해한다.
인지학은 물질체 이외에 제2의 인간의 본질적인 원리를 인정한다. 이것을 생명체(Life-Body) 또는 에테르체( 精氣體, Etheric Body)라고 한다. 물리학자들은 이 용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에테르(의 세계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가설적 에테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에 국한된 의미를 갖는다. 에테르체라는 말이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에테르체를 말하는 것은 굉장히 비과학적인 것을 의미한다. 옛날 사람들은 무생물계에서 작용하는 재료와 힘만으로는 살아있는 생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생명계에는 생명계 고유의 힘이 있다. 이 힘을 생명력이라고 하고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생명력은 식물, 동물, 인간 안에서 작용하고 생명이라는 현상을 낸다. 이것은 마치 자석이 자력에 의해 붙는 성질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물질주의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생각은 주류에서 멀어지게 되고 사람들은 점차 생명체 역시 무생물과 같은 방법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광물계에 없으나 살아있는 유기체 안에서만 작용하는 힘 같은 것은 사라졌다. 똑같은 힘과 작용이 단지 생물계 안에서는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복잡한 구조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생명력을 강하게 부정하는 오늘날은 매우 강력한 물질주의 시대이다. 그렇지만, 자연과학자들 중에 생명력 또는 생명의 원리 같은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지학적 과학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현대 과학은 감각으로 지각한 사실로부터 지적인 사고를 통해서 일종의 생명력과 같은 것을 가정한다. 이것은 인지학이 사용하고 있는 정신적 탐구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인지학과 현대 주류의 과학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현대과학에서는 모든 지식의 토대가 감각적인 경험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러한 토대에 의해 기초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각인상으로부터 귀납과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것의 범위를 넘는 것은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넘는 것이 된다.
인지학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마치 눈 먼 사람이 만질 수 있는 것만을 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인간지식의 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인지학은 인간이 진화하고, 새로운 지각기관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세계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색과 빛은 맹인 주위에 가득하다. 만일 맹인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지각기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지학은 사람 주위에는 풍부한 세계가 있지만, 사람이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 기관을 발달시킬 수 있을 때에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눈 수술에 성공한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듯이, 차원 높은 기관을 발달시킨 사람만이 보통 감각으로 볼 수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알 수 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수술할 수 있을지 못할지는 신체 기관 즉 눈의 상태에 달려 있다. 그러나 고차원적 세계를 볼 수 있는 고차원적 기관의 싹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이것을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Knowledge of Higher Worlds and it(s Attainment에 적힌 대로 자기 경우에 적용하면 모두 고차원적 기관을 발달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인지학은 인간의 지식에 한계를 정해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고차원적 세계를 볼 수 있는 지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지학은 존재하는 한계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은 에테르체와 앞으로 이 책에서 다룰 인간의 고차원적 본성에 관한 것이다. 인지학은 물질체만으로도 신체적 감각을 통해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탐구로는 기껏해야 고차원적 체(體)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인지학은 수술 후에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사물이 드러나듯이, 인간 본성의 고차원적인 성원들도 고차원적 지각기관을 발달시킨 후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고차원적 지각기관을 발달시킨 사람에게 에테르체는 단순히 지적 귀납이 아니라 지각대상이 된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에테르체를 갖는다. 에테르체는 물질체의 재료와 힘에 형성적 방식으로 작용하여, 성장, 재생산, 체액의 내적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에게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거의 형태와 크기 면에서 같다. 그러나 동물과 식물의 경우에는 형태 면에서나 신장 면에서 물질체와 매우 다르다.
인간의 제3성원에 해당하는 것을 슈타이너는 아스트랄체(星氣體, Astral Body)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통과 기쁨, 충동, 갈망, 열정 같은 것의 전달자로서 생물 안에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감각적 감정, 감각작용에 해당한다. 식물은 감각이 없다. 그런데 식물이 외부의 자극이나 운동에 의해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식물이 감각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감각작용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체가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극이 내적 과정에 반영되는지 여부가 문제이다. 내적과정은 고통, 기쁨, 충동, 욕망 같은 것을 말한다. 이 기준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푸른 색 리트머스 반응을 보이는 종이가 자극에 대한 감각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동물계와 공유하고 있는 존재를 갖는다. 이 감각적 존재야말로 감각작용, 감각적 생활의 전달수단이 된다.
우리는 신지학회 사람들이 빠진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가 물질체보다는 더 견고한 존재를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본성에 대한 고차원적 성원의 물질주의적 개념이 될 것이다. 에테르체는 힘-형태로서, 물질이 아니라 능동적인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스트랄체 (星氣體)는 내적으로 움직이고 색을 나타내며 빛나는 형상이다. 아스트랄체는 형체, 크기 면에서 물질체와 다르다. 사람에게 이것은 길쭉한 알 형태이다. 그 안에서 에테르체와 물질체가 깊이 새겨져 있다. 아스트랄체는 모든 면에서 물질체와 에테르체 보다 훨씬 생생하고 빛을 내는 형상이다.
인간의 4번째 성원을 갖는다. 이것은 지상의 어떤 존재와도 공유하지 않는 인간 고유의 성원이다. (나(라고 하는 인간 자아의 매체(전달 수단)이다. 영어에서 (나((I)라고 하는 말은 다른 이름들과 다른 말이다. 이 명칭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사람에게는 인간의 참된 본성에 대하여 지각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다른 모든 이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가 지명하는 대상에 적용할 수 있다. 각각의 사람은 탁자를 탁자라 하고, 의자를 의자라고 한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말은 이렇게 사용되지 않는다. (나(라는 말을 어떤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나(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라는 말을 쓸 때, 사람은 그 안의 그 자신을 부르는 것이다. 그에 대해 (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 안의 세계뿐이다. 정신적 지식에 기초한 종교들은 항상 이 진리감각을 갖는다. 따라서 그들은 (나(라는 말이 신이 안으로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나(라고 말하는 능력의 매개체는 바로 자아체(自我)이다. 이것이 인간의 4번째 성원이다.
이 자아는 인간의 고차원적 영혼의 매개체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모든 창조물의 왕이 되었다. 오늘날 인간에게 있어서 자아는 결코 단순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각자 다른 발달단계에 있는 인간들을 비교할 수 있다면, 이 자아의 본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유럽인이 아닌 교육받지 못한 야만인을 고상한 이상주의자와 비교해 보라. 그들 각각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육받지 못한 야만인은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열정, 충동, 동물적인 열망을 따른다. 그러한 충동과 열망을 따를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제하고 억누른다. 이상주의자들은 나타나는 원래의 충동과 열망을 새로운 충동과 열망으로 발달시킨다. 이러한 것은 자아가 인간의 나머지 성원들에게 작용할 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 중요한 임무이다. 자아로부터 밖으로 향해 작용하면서, 자아는 인간 본성의 나머지 성원들을 고상하게 하고 정화시킨다.
외부세계가 사람을 위치 지우는 처음의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에게는 저차원의 성원들이 자아의 영향 아래 더 높은 단계로 변화한다. 인간이 동물의 차원을 넘어설 때, (자아(가 작용하기 시작할 때에도 역시 인간은 저차원의 성원들을 갖는 한 동물적이다. 인간의 에테르체는 생명의 형성적 힘, 성장과 재생산의 힘을 나타내는 매개체이다. 아스트랄체는 인간의 충동, 욕망,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며, 아스트랄체는 외부 자연에 의해서만 자극되어진다. 인간이 발달단계를 밟아감에 따라, 즉, 반복되는 삶, 육화를 통해 높은 단계로 진화해감에 따라 자아는 다른 성원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변형시킨다. 이런 식으로 아스트랄체는 기쁨, 고통이라는 감각작용이 순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바램과 욕망도 정제되어 나타나게 된다. 에테르체 역시 변형된다. 이것은 인간의 습관의 매개체인데, 보다 항구적인 경향, 성향, 기질, 기억을 변하게 한다. 자아가 아직 에테르체에 작용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삶 속에서 갖게 되는 경험에 대한 기억을 못한다. 그는 자연이 불어넣어 주는 대로 살뿐이다.
이것이 문명의 성장과 발달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바이다. 문명의 성장과 발달은 자아가 인간 본성의 저차원적 성원들에게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은 물질체에 직접 이루어진다. 자아의 영향으로 전체 인상과 외형, 몸짓, 물질체의 움직임이 변한다. 또 문화나 문명의 상이한 방식이 인간 본성의 성원에 각기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문명의 보통 요인이 아스트랄체에 작용해서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기쁨과 고통, 충동과 욕구를 불어넣는다.(The ordinary factors of civilization work upon the sentient body and imbue it with pleasure and pains, with impulses and cravings, of a different kind from what it had originally). 또 인간이 위대한 예술작품에 빠질 때 에테르체는 영향을 받는다. 예술작품을 통해 인간은 일상의 감각적 환경이 제공한 것보다 고차적이고 고상한 어떤 것을 간파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생명체를 형성하고 변형시킨다. 종교는 에테르체를 정화하고 고양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인류진화에 중요한 목적을 갖는다는 종교적 충동이다.
우리가 의식(conscience)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계속되는 육화를 통해 자아가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각하고, 이 지각이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주며, 그 인상이 에테르체에 전달될 때, 의식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아가 저차원적 성원에 미치는 작용은 인류라는 전체 종(種)에 적합한 것이거나 또는 전적으로 개인적 자아의 작용에 의한 성취이다. 전자의 경우, 인류 전체가 변형할 수 있도록 힘을 합친다. 후자의 경우는 개인적 자아의 활동에 의한 개인의 변형을 뜻한다. 자아는 자신의 힘과 아스트랄체에 의해 변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자아가 아스트랄체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정신적 자아(Spirit- Self, 神我) (동양적인 표현으로는 마나스이다)이다. 이 변형 과정은 주로 학습, 고차원적 관념과 지각으로 내적 삶을 고양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아는 더욱 고차원적 과제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자아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스트랄체뿐만 아니라 에테르체를 변형시키고 고양시킬 때 이루어진다. 사람은 일생에 걸쳐 많은 것을 배운다. 자신의 과거 삶을 회상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덜하지만 일생동안 기질이나 성격이 변하기도 하고 기억력이 좋아지거나 감퇴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학습에 관한 것이 아스트랄체와 관련있다면, 후자의 경우는 에테르체와 관련이 있다. 일생에 걸친 아스트랄체에서의 변화를 시간의 분 단위에, 에테르체의 변화를 시간 단위에 비교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
사람이 고도의 훈련-신비적 수련-에 들어가면 자아의 힘에 의한 이러한 변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자신의 습관, 기질, 성격, 기억력 등을 변형시켜야 한다. 에테르체에 영향을 주어 변형시킨 이것을 인지학적 용어로는 (정신의 에테르체((Life-Spirit, 생명정신 / 生神 )라고 한다. (동양적 표현으로는 붓다 라고 한다)
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사람은 물질체에 영향을 주어 그것을 변형(예를 들어 피순환이나 맥박의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변형된 물질체를 (정신의 물질체((Spirit-Man, 정신인간 / 神人)라고 한다. (동양적 용어로는 아트만 이라고 한다)
전체 인류 種의 성원으로서 또는 전 인류의 한 부분인 국가나 종족, 가족의 한 성원으로서 인간은 자기 본성의 저차원적인 부분을 변형시킨다. 인지학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에 의한 아스트랄체의 변형을 감정혼(sentient soul), 자아에 의한 에테르체의 변형을 이해혼(intellectual soul), 자아에 의한 물질체의 변형을 의식혼(consciousness soul 또는 spritual soul)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차례대로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빛을 내기 시작하면서 세 가지 체는 동시에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의식혼 부분이 형성되고 발달하고 나서야 자아의 활동을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다.
이상에서 인간 본성의 네 가지 성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감정혼, 이해혼, 의식혼, 그리고 정신적 자아, 정신의 에테르체, 정신의 물질체 역시 네 가지 성원이 변형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인간의 질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이 네 가지 성원을 고려해야 한다.
교육자가 알아야 하는 것도 이 네 가지 성원에 대해서이다.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작용이 일어나기 바란다면, 인간 성원의 각각의 특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성원이 인간 안에서 동일하게 발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각각 연령에 따라 다르게 발달한다. 교육과 교수를 위한 올바른 기초는 바로 인간 본성 발달의 법칙에 관한 지식이다.
물질체 탄생 이전, 성장하는 인간은 다른 물질체에 의해 모든 면이 둘러 사여 있다. 이것이 물질계와 만나는데 독립적이지 않다. 엄마의 물질체가 그의 환경이다. 자라고 성숙하면서 이것이 단독으로 그에게 작용한다. 물질체의 탄생은 참으로 산모의 물질체에 달려 있다. 산모의 물질체는 외피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이후에 물질체의 환경이 그에게 직접 작용하게 한다. 외계에 대한 그의 감각이 열리고 ???
인지학이 제시하는 세계에 대한 정신적인 이해는 이 속에서 물질체의 탄생과정을 이해한다. 아직 에테르체는 탄생하지 않았다. 탄생 즈음, 즉 모체의 물질적 외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