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
2. 비전의 공동체 클라팜섹트
3.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의 비전
4. 사랑해요 엘지", 조동완 국장
5. 근대음악의 아버지 '바하'
6. 쪽방동네 거지왕초 김응룡
7. 한국유리 고 최태섭 회장
8. 무실역행 도산 안창호
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
조지 워싱턴 카버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아주 허약하고 또 환경조차 좋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려서 남북전쟁이 끝이나고 노예해방이 됩니다. 자신과 형을 돌보아준 주인집을 떠나, 카버는 공부를 하고 싶어 미국의 중서부 지방에서 이 읍에서 저 읍으로 흑인 소년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가서는 노동을 하며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1860년 미국 미조리에서 천신만고 끝에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이오와 농과대를 졸업하고 1894년 석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카버는 대학연구원이 되어 편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당시 흑인 지도자였던 부커박사의 부름을 받고 1896년 알라바마의 흑인교육기관인 Tuskegee 연구소에 들어가 흑인들에게 농업을 교육하면서 땅콩을 연구하였습니다.
카버는 오랫동안 면화만을 재배하여 척박할 대로 척박해진 수백만 에이커의 남부 농장에 땅콩을 심게 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생산된 땅콩이 아이들의 간식이외의 용도가 없었기 때문에 남부농업은 경제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됩니다.
1886년부터 2년간 캔자스 평야의 농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시는 그의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 주저앉지도 말고 멀거니 서 있지도 말자. 누구에게든 할 일이 너무나 많으리라. 혹 어떤 사람들처럼 크게 성공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내게는 한가지 재능이 있으니 그 재능을 갈고 닦아 나가자."
결국 그는 땅콩을 가지고 수많은 발명품을 개발해 냅니다. 땅콩 닭고기, 땅콩 거위고기, 땅콩 조갯살, 땅콩 컷틀렛, 스프, 음료, 아침 대용식, 캔디, 쿠키, 아스파라가스 대용품, 식초, 완하제 등 모두 100여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로로 1916년 영국왕립 예술회원이 되었고, 1921년에 미국 Ways and Means 위원회에서 연설을 했으며, Kansas주로부터 Spingarn메달을 수여하게 됩니다.
쿨리지 대통령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그의 가정을 방문하였으며, 각처의 사람들이 그의 자문을 받았고, 여러 외국정부들이 그를 고문관으로 추대하였으며, 헨리 월러스, 포드, 간디 등은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의회 상원 농업위에서 땅콩에 대해 증언하게 되는데, 이 놀라운 땅콩 발명품들을 보고 놀란 국회의원들이 카버박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성경이 땅콩 에 대해 뭐라 하던가요?" 그는 이 질문을 받고 답했습니다.
"성경에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게 하나님에 관해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제게 땅콩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연설을 통해 국회의원의 기립박수를 받는 위대한 흑인이 되었습니다.
평생을 흑인이라는 멸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귀한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간 아름다운 모습이 감동이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귀한 하나님의 재능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갑시다.
비전의 공동체 클라팜섹트
아래 글에서 소개한 윌리엄 윌버포드의 비전은 결코 혼자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글라팜 섹트라는 아름다운 모임을 통해 비전은 공유되었던 것입니다.
'클라팜 섹트'의 여러 명의 동역자들이 철두철미한 복음적 신앙으로 성경을 같이 묵상하고, 때로는 밤을 세우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할수없다"며 기도를 했습니다. 윌버포드가 의회에 나가서 의안을 제출해야겠다고 하면 자료수집과 기도전략을 세우고, 이를 위해 밤 세우는 걸 보통으로 합니다.
그래서 쿠프레겐드라는 분이 윌버포드의 전기를 쓰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크리스천 정치가들의 형제애라는 것은 정말 유니크한 형상이었다" 이처럼 동역자의 사랑과 형제애로 뭉쳐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영국이 노예무역을 통해 돈이 많아지고 경제가 굉장히 활발해졌는데 그 무역이 금지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노예 무역을 하는 동안 국회의원들이 그들에게서 정치자금을 많이 받아온 관행이 있었습니다.
또 노예무역을 통해 조선업, 보험업들이 크게 성장하였고 선주들이나 보험업주들이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월버포드의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이들이 노력해도 도저히 통과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시민운동을 시작합니다. 프랑스혁명을 연구하여 운동방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프랑스혁명 때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라는 식으로 문구를 돌리던 방법을 배워 "왜 흑인노예들을 해방시켜야 되는가? 왜 이런 무역을 해서는 안되는가?" 라는 것들을 계몽하는 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또 영국인들은 차를 워낙 많이 마십니다. 이 차 마시는 머그잔에 그릇공장 주인이 화가의 도움을 받아서 그림을 그려넣었습니다. 흑인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아래에다 "And I am not your brother"(나는 너의 형제가 아니라)라고 써넣었습니다.
이 잔으로 영국사람들이 차를 마실 때마다 이 글과 그림을 보곤 너무나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양심의 고통이 온 백성들에게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이 교회에 퍼지게 되고 가정에서 화제로 삼게 되어 노예들이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간다는 게 모든 영국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영국 국회의원들이 '만약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다음에 국회의원이 안 되겠구나 선거구민들이 편지를 많이 쓰고 그룹으로 찾아와서 얘기를 하고 압력을 가하니 이거 안했다가는 큰일나겠다' 하는 생각이 들만큼 되니까 국회에서 통과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비전을 이루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전은 여러사람을 공통된 사명으로 한데 묶을 수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클라팜 섹트의 일원들은 각자의 재능과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 비전을 위해 한데 모았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비전과 하나됨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습들이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의 비전
비전의 인물로 주로 거론되었던 사람은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입니다. 아마도 21세기의 한국교계의 최고의 스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분은 영국의 정치가였는데, 정치계에 소망이 없던 시절 한국의 많은 젊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정치가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795년에 출생하였으며 조금 늦은 25세에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회심하고 난 후 자신이 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 믿은지 2년 후인 27세에 노예폐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직업으로 그 사명을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30세에 영국 하원의원에 선출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국의회에서 노예무역폐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48세에 영국의회에서 노예무역폐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예폐지 운동을 시작한지 32년 만에, 또 자신의 비전을 세운지 35년 만에, 그의 나이 62세에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됩니다.
그는 64세에 정계를 은퇴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그의 나이 72세에, 또 그가 노예해방의 비전을 품은지 45년 만에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해방법이 통과됩니다. 그는 노예해방법이 통과된 후, 2개월 후에 사망합니다.
그는 노예해방이라는 한가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뜻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명자였습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참된 비전을 붙들고 세상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이런 멋진 모델들이 한국교회를 통해 나타나서 정치계, 경제계 등 사회 각계를 변화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해요 엘지", 조동완 국장
조동완 국장님은 엘지애드 신우회의 초창기 맴버로 지금까지 신우회에서 사역해오고 있습니다.
90년대초반 사내에서 신앙을 가진 형제들끼리 작은 기도모임으로 출발한 엘지애드 신우회는 그 기도와 찬양과 나눔의 귀한 시간을 사모하여 많은 이들이 함께하였습니다. 국내신우회중에서 인포멀그룹으로 등록되어 사내에서 지원이 나오는 신우회는 드물지만, 엘지애드 신우회는 그 영향력을 통해 인포멀그룹으로 당당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광고대행사의 특성상 이동이 잦고 업무량이 많아서 활동하기 상당한 제약이 있지만 변함없이 늘 같은 자리에서 섬기며 나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아래 뉴스앤조이에 난 기사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주보의 변화에 대해 극구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십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작지만 큰 변화"
조 목사 얼굴·교회건물 대신 말씀 형상화한 디자인 채택
여의도순복음교회(조용기 목사)가 올해부터 교회 주보 디자인을 대폭 개편했다. 주보 표지의 조용기 목사 사진과 교회 전경 사진을 빼고 성경말씀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도입한 것.
여의도순복음교회 주보표지는 지난해까지 세계최대 규모의 웅장한 교회 건물과 예배 후 쏟아져 나오는 교인, 도로를 가득 메운 교회버스를 클로즈업시킨 사진 속에 조용기 목사가 설교하는 모습이 원형으로 삽입됐다.
이같은 디자인의 주보는 순복음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크고, 조용기 목사는 세계최대 교회를 이끄는 탁월한 카리스마를 가진 목회자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대형화된 교회 모습과 특정 목회자가 갖는 권위 등이 지나치게 감안된 디자인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올해부터 주보 표지가 성경말씀을 전면에 배치하고 그 말씀에서 연상되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대폭 바뀌었다. 이런 디자인은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대신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감동을 잘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주보 디자인은 앞으로 월마다 새롭게 바뀌고, 부활절, 교회 창립일, 크리스마스 등 주요 절기 때도 그 절기에 맞는 디자인으로 단장된다.
"교회 전경이나 조 목사의 얼굴이 빠지는 것에 대한 일부 반발이 있었으나 조용기 목사의 전격적인 승낙이 있었다"고 말하고 "새롭게 바뀐 주보 디자인이 교인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달이 바뀔 때마다 어떤 디자인이 주보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 교인들이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주보 디자인의 쇄신은 과거의 교회 규모나 특정 목회자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중요시하는 한국교회 풍토에 잔잔한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또 성경 말씀 중심의 주보 디자인이 교인들의 정서와 신앙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교회들에서도 비슷한 주보 디자인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뉴스앤조이 이승균기자-
뉴스앤조이가 극구 칭찬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주보작품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로 계시면서...광고대행사 엘지애드 조동완 CD 팀장으로 계신 조동완국장님의 작품이랍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경쟁PT로해서 상업적으로 거래를 체결하자고 한것을 그렇게 하면 절대 하지않겠다고 끝까지 우겨서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조동완국장님은 20년이 넘게 광고계의 한우물만 파온 실력자이십니다. 조동완 국장님은 우리 광고계에 참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들을 많이 나타내셨죠.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사랑해요 엘지" 이 광고 캠페인을 만드셔서 그해 광고상이란 상은 죄다 휩쓰셨습니다. 그리고 019 가족시리즈 아시죠? 또, 최근 담당한것으로는 광고 캠페인 대한항공 기업PR "하늘 가득히 사랑을" 편과 LG전자 디지털LG 기업광고"돼지털" 편을 만드셨습니다.
그의 크리에이티브들은 한결같이 포근하고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들이 그의 일을 통해서도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 곳곳에 이러한 탁월한 그리스도의 향기들이 퍼져나가 직장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인공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근대음악의 아버지 '바하'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명이 열살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 남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저의 아내가 교회음악을 전공하기 때문에 물어보았습니다. 음악사적으로 가장 신앙이 깊었던 일류음악가가 누구였냐고 물었습니다. 주저함없이 바하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바하에 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삶을 조사해보았습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하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 4대째 내려오면서 배출된 음악가는 50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바하는 지금까지 그의 가문의 풍습에 따라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0세에 부모를 잃은 그는 오르가니스트인 그의 형의 집에서 지냈는데, 그 곳에서는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어라는 악기를 배웠습니다. 그는 마침내 명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바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명예를 얻게 한 것은 라이프 치히에 있는 동안 작곡한 종교에 관한 곡들입니다. 이 기간 중에 그는 수많은 성가, 칸타타와 수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대위법의 작법에기반을 두면서도 여기에 화성적인 수법을 가미시켰습니다. 말하자면 화성적인 복음악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토멘은 그를 가리켜 화성의 아버지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 음악으로서 신에게 봉사하는 데에 그 생애을 바쳤습니다. 그의 풍부한 멜로디와 절묘한 대위법의 취급에 의해 한없는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기교의 밑바닥에는 종교적인 신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을 그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만민의 죄를 홀로 감당하시고 누구든지 못박혀 돌아가신 구주만 믿으면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믿음과 확신은 특별히 마태 수난곡에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예술의 최고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곡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친히 계시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받으신 고난에 대한 마태의 음악적 묘사는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으로 향해 가시는 것을 보고 있던 무리들의 마음 속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사랑에 대한 감격이 바로 바하의 심령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흐는 성경적인 세계관과 자신의 신앙을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의 영역에 적용하였습니다. 음악을 통해 탁월함과 영성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한 가운데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바흐와 헨델의 시기에 교회음악은 극도의 클라이막스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자마자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이끄는 고전주의 음악이 들어서면서 음악은 인본주의 음악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흐가 현대음악의 아버지로 모차르트나 베토벤에게 간접적인 스승이었지만, 신앙과 세계관은 물려주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쪽방동네 거지왕초 김응룡
KBS에서 방송된 '이것이 인생이다'에서 쪽방동네 거지왕초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 주인공인 김응룡씨는 쪽방동네 사람들의 대부이며, 서울역주변 노숙자들과 생활보호대상자들을 돕고있습니다.
그는 한때 동냥과 구걸로 서울거리를 헤매던 노숙자였습니다. 그러나 목욕탕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은 후, 자살하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밑바닥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어느 누구도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교회를 찾아갔고 거기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그 교회 목사님께서 "젊은 사람이 이렇게 살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그를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숙식을 제공해주고 이발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고, 그는 넥타이를 매어보고 싶은 소원을 가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은행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서 노숙자들이나 어렵게 사는 사람이 보이면 늘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이고 함께 잠도 자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인해 가정은 늘 힘들었고, 자녀들도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자신 또한 병에 걸려서 콩팥을 이식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빗나가서 소년원에 갔던 자녀도 뒤늦게 아버지의 이러한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의 도움을 받고 새 인생을 살게된 노숙자들이 서로 콩팥을 주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지금도 어렵고 힘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렵고 힘들었던 때를 늘 잊지 않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돕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델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가장 힘이 들고 어려웠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내었다면 바로 그것은 동일한 아픔을 겪고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동일한 아픔과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좋은 모델로써 자신의 삶을 보여주어 위로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유리 고 최태섭 회장
6촵25 전쟁 당시, 9촵28 수복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났는가 싶던 때였습니다. 페허가 되다시피한 서울 땅에서 3청년 최태섭은 친구로부터 단무지를 군대에 납품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청년들을 위해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으로 그는 덜컥 그 일을 해보마고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거래하던 은행에서 얼마간의 돈을 빌어 조그만 단무지공장을 차렸습니다. 열심히 단무지를 만들어 팔다 보니 약간의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 갑자기 전세가 급변하여 압록강까지 올라간 우리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이 다시 짐을 싸고 하나 둘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태섭은 짐을 꾸리기 전에 은행으로 부랴부랴 달려갔습니다. 은행은 이미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피난을 떠나고 한 사람만이 남아 뒷일을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매우 초조한 기색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최태섭이 다가오는 지도 몰랐다. 최태섭은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빌린 돈을 갚으러 왔소이다."
그제서야 은행직원이 별사람 다보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이 난리통에 돈을 갚으로 왔다구요? 지금 보다시피 은행업무가 마비됐으니 다음에 오시오."
은행직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최태섭은 얼른 그의 팔을 붙들었다.
"나도 피난을 가려는 중이요. 이 전쟁에 내 목숨도 어찌될 지 모르는데… 그러니 일단 돈부터 받아두십시오."
은행직원은 하는 수 없이 돈을 받고 영수증을 써주었습니다. 영수증을 호주머니에 넣고 은행문을 나서자 멀리서 쿠르릉 포화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후에 최태섭은 제주도에서 군부대에 생선을 납품하는 원양어업에 뛰어들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도 담보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업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은행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은행장이 1·4후퇴 때 빌린 돈을 갚고 피란을 간 이 기업인을 알아보고 결국 무담보로 2억원을 융자해주었습니다.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만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최태섭, 그가 바로 한국유리의 기적을 이룬 주인공입니다
1957년 3인의 기독교 실업인이었던 최태섭, 김치복, 이봉수씨는 한국유리를 창립하게 됩니다. 6.25직후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판유리생산에 착수하여, 전후복구와 경제개발 초기의 유리수요를 자급할 수 있게 했습니다. 70년대에는 전기 전자 자동차 등에 쓰이는 특수산업용 유리를 개발하여 유리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76년 유리기술연구소를 설립, 超薄板 유리 및 뉴세라믹 등 최첨단유리를 개발, 수출산업으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경련고문 크리스챤아카데미재단이사장 대한적십자사중앙위원 古堂기념사업회재단이사장 어린이재단이사장 고문 등 사회활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한국유리의 창업자이신 고 최태섭 장로님은 참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충실한 사업가이셨고, 좋은 장로님이셨고, 애처가로 소문난 분이셨습니다. 최태섭 장로님이 남기신 어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더 가진 사람은 그것이 힘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적어도 기업이윤의 20%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깨끗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깨끗한 소망을 주는 역할을 하며 살아가기를 꿈꿉니다....
무실역행 도산 안창호
조선의 국운이 다하고 열강들이 서로 다투던 시기에 안창호는 피끓는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서울에 온 그는 정동 새문안교회 안에 있는 구세학당(언더우드학당. 경신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공부, 예수교 장로회에 입교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1897년 독립협회에 들어갔고, 평양에 독립협회 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민중 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여기서 20세도 채 안된 앳된 청년 안창호는 많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준 연설을 했습니다.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의 남녀 공학 점진학교를 세우면서 민족을 교육하여 일깨우는 일에 자신의 비전을 세우게 됩니다.
그는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며 초등학교 과정부터 새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여 기독교에서 경영하는 신학 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까지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재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를 조직하여 퍼시픽 가에서 공립협회 회관을 건립하고 한글판 공립신보를 발행합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교외의 리버사이드시에는 시청 가까운 곳에 마틴 루터 킹목사의 동상이 있고 그 동상과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도산 안창호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2001년 8월에 시장의 협력을 받아 미국 교포들이 55만불의 성금을 모아 세운 동상입니다. 도산선생의 동상이 그곳에 세워진 것은 도산선생께서 1902년 24세 되던 때에 그곳에서 한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오렌지 밭에서 노동일을 하며 지낸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곳에는 700여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도산선생이 지도자로 오기 전에는 술마시고 노름하고 서로 싸움하느라 그 지역에서 신용이 떨어지고 일감도 제대로 얻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런 때에 젊은 지도자 도산 선생이 와서 오렌지를 정성스럽게 따는 것이 겨레사랑의 길이라고 가르치며 몸소 본을 보이며 한인사회를 개조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노력이 열매를 맺어 한인 노동자들의 생각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땀의 대가로 받은 수입 중에서 독립운동에의 자금을 걷어 상해임시정부를 수립 운영하는 일을 뒷받침하기도 하였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에 귀국하여 항일 비밀 결사 신민회를 조직합니다. 결국 개성 헌병대에 잡혀 3개월 동안 온갖 곤욕을 치른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흥사단을 조직합니다. 3촵1 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내무총장촵국무총리 서리촵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힘쓰다가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국으로 끌려 온 뒤, 옥살이 끝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민족의 비극 앞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민족을 위한 비전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디를 가나 우리 겨레를 만나면, "그대가 민족을 사랑하는가? 그러면 '건전 인격'을 가지라."고 당부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결점들, 즉 형식에 치우치고, 게으르고, 얼렁뚱땅하고, 비겁한 성격들을 고쳐야 우리 민족이 잘 될 수 있다는 '민족 개조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분이 말한 '무실역행'(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 또한 그 근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산의 강연을 듣고 남강 이승훈이 늦게 민족교육운동에 뛰어들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3.1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오산학교에서 고당 조만식이 두 차례 교장을 지냈고 기독교적 민족사상가 유영모도 교장을 지냈고 이 학교에서 함석헌과 김소월이 나왔습니다. 도산, 남강, 고당,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신앙과 민족의 얼이 굳게 결합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하나됨을 위한 구심점으로, 교육자로, 개혁가로,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로서 일평생 살아간 그의 아름다운 무실역행의 행하는 믿음이 교회와 우리 사회 속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