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서 목맨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작품, 대부업체 신세서 미술관에 안착
전지현 입력 2021. 08. 06. 11:15
조각가 권진규. [매경DB]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기획전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에서 온몸이 우둘투둘한 누더기 예수 조각상을 보고 흠칫 놀랐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는 왜 저토록 초라한 '그리스도의 십자가'(1970년)을 빚었을까. 제작을 의뢰한 교회가 작품 구입을 거절했다는 후문에 수긍이 갈 정도였다.
권진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처절한 상태를 사실적으로 표현한게 아닐까"라며 "수천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 옻액을 입히는 건칠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담으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권진규의 또 다른 전시작인 목조 '불상'(1971년)은 희안하게도 불상 몸체와 보살 머리를 결합시켰다. 절에 머물면서 불상을 깊이 연구한 그는 왜 이토록 특이한 미감을 추구했을까. 요즘 사람들도 이해하기 힘든 그의 조각들은 50년전 화단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작품이 잘 팔리지 않아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는 1973년 5월 4일 작업실에서 목을 맸다. 그날 오전 고려대 박물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본 후 귀가해 여동생 권경숙에게 유서와 장례비를 남긴 후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유서에는 '경숙에게, 향후의 일을 부탁한다. 적지만 이것으로 후처리해 주세요. 화장해 모든 흔적을 지워주세요'라고 씌여 있었다.
권경숙의 아들인 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는 외삼촌의 죽음에 대해 "부인이 없고 사회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다. 생활고보다는 우울증 등 심리적 원인이 커서 생을 끝낸 것 같다"고 추측했다.
김 팀장은 "일본에서 부르델 제자인 시미즈 타카시에게 정통 근대 조각을 배워왔지만 당시는 현대추상조각이 대세였다. 시대에 뒤쳐지고 결과물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박형국 무사시노미술대학 교수는 권진규의 자살에 대해 '제작 의욕 상실, 스스로 소멸'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사후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2009~2010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무사시노미술대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려 찬사를 받았다. 일본 국립미술관에서 한국 근대작가 전작전은 처음이었다. 국내 미술 교과서에도 대표작 '지원의 얼굴'(1967년) 등이 실리며 한국 근현대조각 선구자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운의 조각가 작품들은 대부업체 창고 신세가 되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2015년 유족이 춘천에 권진규미술관을 짓는 조건으로 옥광산업체인 대일광업에 작품 700여점을 시세보다 훨씬 낮은 40억원에 일괄 양도했지만 미술관 건립이 미뤄지면서 법적 다툼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진규 작품 일체가 대일광업 관계사인 대일생활건강이 빌린 돈에 대한 담보로 케이론대부로 넘어갔다.
다행히 법정 소송 끝에 유족이 승소해 미술품을 돌려받은 후 지난달 말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기증품은 '자소상'(1968년), '도모'(1951년), '기사'(1953년) 등 조각 96점, 회화 10점, 드로잉 작품집 29점 등 총 141점을 망라한다. 이제 94세가 된 누이 권경숙은 "오빠는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을 내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오빠의 자식들이 있을 거처가 마련됐다"며 "비로소 인생 숙제를 마친 셈"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내년에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준비중이며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할 예정이다. 이제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추모할 시간이 오고 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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