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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꿈꾸는 의식과 그 미적 공간
- 표순복 시집「특별하지 않는 날의 주절거림」에 부쳐
이충이
꿈꾸는 의식
우리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오늘의 시는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시로 기록했던 이후, 시는 오늘날까지도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정시는 사람다운 삶에 대한 비전을 언어의 압축으로 드러내는 문채文彩가 되어 있다.
표순복은 자연과 그 풍경 속의 풍경과 사물을 모두 의미가 있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일련의 시에서 사유적 체험이 솔직한 자기표현의 결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과 세련된 정서로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완강한 관습의 시로부터 벗어나서 사람다운 삶을 위한 순간들을 만나고 있다.
대부분의 시편들이 우리에게 심미적인 훈련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객관적인 정서와 세련된 감각으로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감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없지만 그것이 인간생활과 깊이 관련된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나 일상에서 뭔가 다른 사유를 하도록 한결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를 읽어가면서 하늘의 달을 보는 사람마다 마음이 다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였다. 달을 보는 사람의 감각과 태도에 따라 다 가늠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을 보는 인식이 각각 다를지라도 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꿈꾸는 의식 속에서 손의 인식으로 시가 다듬어지고, 사유의 문채文彩가 이루어지고 빛나고 있다.
남과 다른 문채文彩를 만드는 손과 머리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표순복은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사유한다. 밤하늘에 달과 별을 보며 사유할 때나 우주의 신비에 빠져들 때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함께 있다. 시인은 어디에서나 몸과 마음을 통해 세상과, 그리고 우주와 만난다. 시인은 자신을 통해서 쓰여진 언어가 아니고는 아무 것도 그려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표순복은 시대의 현실에서 꿈을 간직하고, 그것에 대하여 나름대로 꿈꾸는 의식을 펼치고 있다. 그의 시편은 우리의 왜곡되고 훼손된 삶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우리 현실은 가진 자들에게는 쾌락의 시대가 분명하다. 반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절망의 시대이다. 이런 절망의 시대에서 삶을 진실하게 그려내고 있는 책무를 담당하고 있다.
어쩌든 여러 가지 시의 객관적 성취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통해서 미적 공간을 획득했다. 고창高敞이라는 두 마디 말속에 숨겨져 있는 모든 아름다운 진실을 찾아냈다. 고창말을 고창사람들이 미처 다 깨닫지도 못하고, 미처 얼마나 소중한 지도 다 알지 못하는 사이, 외롭게 서있거나 걷고 걸으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의 추구를 넘어섰다.
미적 공간
시는 본래 사람들 사이에 경험과 그 정서를 나누어 가지는 의사소통의 한 형식이다. 그러나 시는 오래도록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시가 적지 않은 세월에 걸쳐 선택된 사람들의 특권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의 시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으므로 천상의 언어가 아니고 비로소 몸의 언어가 되었다.
어느 날 이른 저녁
시간의 느슨함을 반기며
무심코 뒤적거리던 잡기장 속에서
2년 전 같은 날의 흔적이 잡힌다
우연이라고 한다면 삶은 성글다
오늘은 모처럼 이른 귀가다 라며
일기는 주절거리고 있었다
2년 후인 오늘도 잡기장에
며칠만의 이른 귀가라고
막 첫 줄을 쓰려던 참이었다
2년 전 그 날도 이즈음의 삶이었고
해마다 비슷한 보폭으로 시간을 밟아가고
해마다 비슷한 그물코를 손질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안도감보다는 씁쓸함이다
기쁨보다는 허전함에 가까운 일이다
모처럼 이른 귀가
넉넉한 여유가 느슨한 몸 주체하지 못하고
헐렁해진 시공 속에서 무중력으로 유영하고 있다
딱 세 줄로 마감 지은 행간
열심히 살지 못한다고 주절거리는
하루만의 핑계만이 습관처럼 무성하다
-「특별하지 않는 날의 주절거림」전문
이 시는 반복하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일상에 대한 내면의 풍경을 전개했다. 화자는 지루하고 '느슨'한 일상에 대하여 '주절거리'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오늘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이미 상실된 언어이다. '시간'은 이미 잃어버린 기표이다. 어쩔 수 없는 '주절거림'은 지루한 오늘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끝이 없는 질문이다.
모든 일상은 피곤하게 느껴지는 속의 삶으로 가까스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 부딪치는 현실에 지쳐서 두덜거리며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무리 속에 묻혀 살아간다. 이런 삶의 이미지가 일상의 아쉬움으로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우리는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바라는데, 일상은 지루한 반복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역설적 현실이다.
'시간의 느슨함'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2년 전 같은 날의 흔적'은 결코 아니다. '해마다 비슷한 보폭으로' 지나고 '해마다 비슷한 그물코를 손질하고 있다'. 이렇게 화자의 고통은 어쩌지 못하는 외로운 섬의 고통으로 바뀐다. 반복되는 일상은 '무심코 뒤적거리는 잡기장 속에서' 또다시 반복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 날마다 일어나는 아이러니이다.
외로운 섬은 분명 우리를 가두는 유배지일 것이다. 이 유배지에서는 '지난날의 흔적이 잡힌다'. 화자는 인간의 내면, 즉 사람 사이의 쓸쓸함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시에서 '느순한 시간'의 상상은 내밀한 느낌과 고통이 대면한 일상을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일상 가운데서 겪었던 일들이 '모처럼 이른 귀가' 후까지 '주절거리'고 있다.
일상의 섬은 온갖 소리들과 진짜 상처들과 삶에 찌든 시선까지도 모두 '일기'장에 옮긴다. 이런 순간들의 육체적인 고통마저도 간신히 정신을 지탱해주며, 시로써 자신의 삶을 연출하는 것이다. 무엇 하나 꾸미지 않으며 일부러 장식하지도 않으면서 현실과 고통을 대면한 일상의 인내력을 묘사하고 있다. '2년 전'이나 '그날'이나 '이즈음의 삶은' '해마다 비슷한 보폭으로' 지나간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것이다. 봉사는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어야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는 고단한 몸보다 정신의 안식과 자유에 대한 강렬한 집착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본다.
시의 전개는 무척 감명하고 명쾌하다. 또한 간명한 어법으로 전개되는 정서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쓸쓸한' 흐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주고 있다. 화자는 '모처럼 귀가'에도 '넉넉한 여유가 느슨한 몸'을 '주체하지 못한' 삶의 아득함을 '무정'하게 느끼면서도, 그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의 느낌은 행간의 이음새로 전달되었다.
어젯밤 꿈속에서 누가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오라고 손짓하며 언젠가 와 본 듯한 곳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끝 보이지 않는 아득한 모래밭 저쪽에서 세상을 가득 채운 달빛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쫓아가면 달빛은 더욱 멀어지고 나는 손 저으며 달빛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구시포 앞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어젯밤 달빛에 끌려가듯 나를 부르는 힘에 이끌려 마른 육신 놓아두고 찾아간 구시포 앞 바다는 처음으로 나에게 큰 몸짓을 보였습니다 백사장을 채우고 방파제까지 밀려온 파도가 외침을 시작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가고 있어요 나를 향한 당신의 지긋한 마음을 알고 있지만 이제야 당신 앞에 가고 있어요 오래 전에 시작된 파도의 고백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당신 품안에 넘치고 싶어 바다를 두께로 돌돌 말아 수천 키로 미터를 달려왔습니다
물길 돌고 돌아 흐른다고 무심히 말하지 마세요 모래밭을 휘감고 방파제를 뛰어넘어 파도는 내 앞에 자지러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귀의 문을 열고 파도의 심장소리를 듣습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파도의 고백이 바다를 바라보던 푸른 소나무가 되었습니다. 파도는 이내 잠잠해집니다 이제 우리의 경계는 구분되어야 해요 새벽이 달빛을 거두어가듯 파도는 뒷걸음질하며 자신을 거두어 갑니다.
바다를 비워버린 백사장이 멀어지는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구시포 앞 바다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파도의 고백」전문
이 시의 시각은 이중적이다. 실제 모습에 그대로 접근하면서 동시에 기억을 통해서 절대적인 것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 기억의 대상은 우리의 체험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될 수 없다. '파도'가 밀러드는 순간을 반복하는 패턴으로 서사가 집중되고 있다. '달빛'과 '파도'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그리움이 주는 슬픔을 되새기고 있다.
이것은 대상을 통해서 얻는 현상학적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깨끗한 '달빛'의 얻음과 '파도'의 빛나는 '고백'이다. '파도의 고백'은 시에 대한 비범한 감성과 더불어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파도'는 쉼 없는 희생이 뒤따르고 있다. '누가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어떤 마음에 대한 간절한 갈망일 것이다.
그러나 '손을 저으며 달빛을 따라가'며 마모된 시간을 복기한다. 여기에는 과거의 만남과 헤어짐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의 '꿈속'에서 분별되어 불발된 열정이 오늘의 쓸쓸한 잔상으로 비추고 있다. 어쩌면 만남과 헤어짐의 그물망 속에서 오래 전부터 그저 혼자일 뿐이라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구시포 앞 바다'라는 미적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초시간성을 획득한 부분이 대단한 결과이다. 가까스로 '파도'가 일으키는 시간을 끌어안는 마법에 빠져 드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파도'와 한 몸이 되었다고 사실이다. 그것은 흘러 오가는 과거와 이제 과거형이 되어버린 어제라는 현실을 통과한 통로를 지나 미래에 대한 '외침'을 듣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고 있어요'라는 반복은 프루스트와 유사한 모티브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에 따라 스스로 삶을 만든다. 화자는 눈뜨는 그리움으로 가슴 뛰는 삶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귀'와 '마음'을 열고 '파도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끝간데 없이 먼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눈뜨는 그리움을 체험하고 있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무엇과 무엇이라는 경계를 넘어 넘나듦과 주고받음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억의 과거와 삶의 현재에 대한 사유를 유도하고 있다. 행과 행간에 그리움과 희망이 길이 보이고 있다. 이 시는 사라지는 기억을 되새기는 형상으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이 시는 읽어 가면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섬세하고 아련한 느낌이 밀려 든다. 아니 누군가가 내게로 와서 나를 흔들어대고 있는 듯 하다.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모래밭에 앉거나 걸으면서 멀어져 가는 수평선 끝으로 빠져든다. 수평선으로 사라지는 하늘 속으로 '파도'는 뒷걸음질하며 자신을 거두어' 간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고 또 떠나가고 기다리는 운명의 고리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문들을 시를 통해서 감동하며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런 고리를 최소한 이해하기 위하여 시인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현재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이런 "파도의 고백"은 비밀스런 삶의 실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파도'는 '물길이 돌고 돌아 흐른다고 무심히 말하지' 말라 한다. '파도'는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 삶에 대한 고리의 비밀을 풀려고 한다. 이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은밀한 슬픔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잃어버린 길을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우리는 일상의 자아에 짓눌려서 감히 길을 찾아 나서지 못한다.
우리는 쉽사리 속을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자아가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막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것은 자신의 일부이자 자신의 적이기도 한 욕망이다. 또한 이것은 집요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파도의 고백'은 어떤 욕망이나 딜레마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시적이다라고 하는 기교나 장치가 무관하게 쓰여졌다.
이 시는 비시적인 다시 말해 역설적인 특징이 개성을 이루고 있다. '파도'는 이내 잠잠해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스스로 하루 하루를 거두고 어쩔 수 없이 고요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낮음과 착함 그리고 겸손과 연민의 원리로써 움직이고 있다. 바다의 '파도'와 사막의 모래는 다르면서 무늬의 패턴이 비슷한 것처럼 삶과 죽음도 비슷한 주기로 반복한다.
이 시의 전개는 어떤 반복성과 대칭성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런 구조는 그리움으로 아파하는 시절의 한 장면으로 떠오르게 한다. 이 시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그리움이 주는 슬픔이 '파도'의 이랑에 넘쳐 나고 있다. 이 넘쳐나는 그리움이 주는 슬픔과 지난한 삶의 빛은 어둠의 끝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사랑은 완결되지 못한 그리움이다
애통하며 울부짖는 부대낌이다
완전한 이룸을 위해
멈출 수 없는 한없는 사랑
붉게 타올라 노을로 졌다
내 눈물 그대 읽을 수 없어도
붉었던 꽃대궁 시름져 누우면
이 몸 없어지고 넌 잎으로 푸르러
붉은 꽃과 푸른 몸 혈혈단신
그대 심장에서 기꺼이 돋아날까
세인들은 우릴 상사화라 불러도
구차하지도 거추장스럽지도 않은
서로를 잇는 한없는 사랑
9월에 들면 붉은 바다
그대 심장에서는 푸른 바다 되었다
-「꽃무릇」전문
이 시는 세상이라는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물거품 같은 삶을 시의 맑은 거울에 비추어 보고 있다. 우리는 아침나절 잠시 내리는 빗속에서 사천문 앞 냇가를 건너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무릇' 밭에 마주 선다. 우리는 거기에서 '완결' 짓지 못한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여러 겹의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사랑'은 언제나 후회와 슬픔과 이별을 원죄처럼 가지고 있다. 사실 자신의 삶이 시작된 곳에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사랑'은 모든 결합을 부정하고 모든 연민을 배척한다. 다시 말해서 '꽃무릇'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뿌리이며 그 희극적 상징이다. 슬픔을 감춘 '사랑'은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에나 '믿을 수 없는 한없는 사랑'은 한 순간에 찬란하게 '붉게 타올라 노을로 졌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존재와 섞이고, '사랑'의 아름다움은 슬픔과 섞여 영원토록 존재하고 있다. 꽃과 잎은 더불어 존재할 수 없는 비극으로 변주되면서 온전해 질 수 있다. 이 시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감추어진 깊은 외로움이나 어쩌지 못하는 관계를 명쾌하게 짚어주고 있다.
금기된 '사랑'은 아픔을 안고 누군가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박혀서 정제되고 정제된다. 여기저기 무리 지어 반기는 '꽃무릇'은 선운산 골짜기 바람 속에서 붉은 손수건을 흔들어댔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나오면서 대웅전 석탑 앞 흑백사진의 한 장면과 그 쓸쓸함을 한 손에 구겨 담아 흐르는 냇물에 뿌렸다. 얕은 냇물은 한 순간 슬프게 반짝이는 빛을 내었다.
우리는 삶의 흔적과 상처를 지우려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9월의 하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삶은 언제나 이렇게 순간마다 재발견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꽃무릇'은 삶의 더께를 아침이슬 같은 눈물로 벗겨내서 미묘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로를 잇는 한없는 사랑'은 '붉은 바다'가 되었다가 마침내 '푸른 바다가 되었다'.
이 시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낯섦이다. 우리는 이런 낯섦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어떤 외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장면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을 보기 위해 과거를 선택한다. 우리는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9월 어느 날 이야기를 듣고 있다.
어느 해 10월 3일 단풍이 시작되는 산 해는 저물었다 저마다 행복한 얼굴로 내려오는 사람들 그들을마주하며 느지막한 시간 산에 오른다 9월의 꽃무릇 아직 건재하고 우린 반가움에 몇 장의 사진을 남긴다 계절의 쓸쓸함은 아예 묻으며 앞만 보고 살아왔다고 감상에 젖은 그가 너로 인해 외로움을 몰랐다니 그 말을 믿고 마애불까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되짚어 내려오는 길 붉은 물 이르게 몇 잎 나뭇잎에 감아들었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선운산 손잡고 팔 걸며 애인처럼 다정 하자고 또 찾아오자고
월 17일 한층 깊어진 산만큼 쓸쓸함 깊어 사람의 발걸음 분주하다 깊어 가는 가을밤도 아무렇지 않다는 그가 몇 달 후면 둘이 남아 산은 더욱 가까워 질거라 흐릿한 말을 남긴다 어제 내린 비에 촉촉한 산길 신선한 공기가 내 안에 오래 머문 감기바이러스 무색해 떠날 거라고 서울사람 안부를 전해온다 감기 떠나보내고 머무는 계절의 두통이 맑음 안에 접어지고 있다 늦여름 내 온 몸을 적시어 나뭇잎 선명히 산은 곱게 다가서고 나의 온 몸에 붉은 수를 놓아 그들과 함께 가을산에서 본다
월 20일 마지막 단풍 볼 수 있을까 가을의 늦 얘기 남아 있을까 억지 시간을 만든다 한껏 줄어든 인파에 불길하다 기대를 걸며 얻어낸 시간 모든 잎은 이미 떨궈져 황량하다 옷 벗은 나목裸木들 가볍게 겨울 날 채비를 서두르고 낙엽 진 거리 사람의 발걸음에 재가되었다 나의 걸음은 천근만근 하산이 급해졌다
-「가을산」전문
이 시는 우리의 쓸쓸한 마음을 비추며 '가을산'의 꿈을 나타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성숙한 그리움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을 선명하고 아름다운 '가을산'으로 색칠을 했다. '가을산'은 쓸쓸한 자의식의 언어로 채워졌다. 시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깨달음으로 감동과 발견의 아름다움을 제시했다. '어미니 품처럼 포근한 선운산'에 안기자 자신의 삶이 아프게 다가온 것이다.
바로 지금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선운산 도솔암兜率庵에서 마애불磨崖佛의 생생한 얼굴을 다시 본다. 생생한 얼굴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의 착시 현상일까. 새로운 대상과 공간으로 재해석되는 변화는 바로 자신으로부터의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가을산'에서 마지막 조락凋落되는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산만큼 쓸쓸한 깊이'나 '깊어 가는 가을밤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외롭다는 말이다. 화자는 '선운산'이 더 가까워지리라 했다. 나이가 들어 더 고독해졌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소원을 물으면 혼자 있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것은 고독한 내 길을 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 고독한 길을 가며 우리는 '온몸을 수놓은' '가을산'을 만나 함께 떠나가려 한다.
이제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픈 마음을 드러냈다. '가을산'이 막바지로 불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밀쳐내고 기다렸는지를 느낄 수 있다. 다가올 '가을산'을 품에 안고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통감하고 있다. 우리는 오래도록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린다.
나중에 가서는 무엇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기다리는 것이 삶이다. 우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상어고래와 귀신가오리를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리는 무엇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을 뿐인데 말이다. '마지막 단풍' 기다리는 마음은 '가을산'을 영원한 표상으로 남겨두고 있다. 어떤 소중함과 현실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연과 어우러진 매혹적인 삶을 발견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삶의 유배자로 꿈과 상징을 만들며 그 일상과 고통이 뒤섞인 사랑으로 진실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이 의미의 이미지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불꽃으로 빛나고 있다. 이 불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순수한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사람들은 '겨울' '채비'을 하고 만날 사람들도 만나야 하므로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사람들은 때에 따라 무엇인가를 준비해야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므로 결코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가을산'의 숲 속처럼 서로 흔들리며 부딪치며 무리 속에 살아가야 한다. 손을 들어 어깨를 짚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선운산' 골짜기, 그 한편에서 동백나무 숲을 마주친다.
우리는 '선운사'를 다시 떠난다. 우리의 젊은 날을 불태우던 온갖 기억들과 아픈 상처들과 굽은 손과 찌든 시선과 사람다운 삶의 일상으로 사뿐히 내려서고 있다. 이 시는 결론적으로 삶의 자유를 만끽하고 난 다음 어떤 매혹적인 가을의 절정에 당도한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우리는 '가을산'과 다정하게 속삭이고, 아주 조금 고독하고, 쓸쓸한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당신의 간절한 마음 밀물이 되어
순천만 개펄을 찾아오셨군요
늦봄 한 때 푸르게 발돋움할 적
어린 생명 꼭 고창의 청보리 결 같다며
출렁이던 몸짓 바람으로 담아 가시더니
푸른 갈잎 몰고 여기에 오셨군요
갈등으로 뒤척이던 지난 몇 날
그 틈새에 기억하고 찾아와 줘 고마워요
이제 햇빛과 바람의 은총을 입고
제 몸 키우며 갈 빛으로 성숙했답니다
중년의 끝으로 옮겨온 길
노을빛 사치스러워 이곳에 왔습니다
억센 여정 마디마디 삭아 내려
청정한 갈대처럼 뿌리 내렸습니다
빈 몸통 가벼워 서 있는 게지요
어른 되고 세월 지나면 멍에를 벗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고뇌도 덜어주고 싶군요
당신에게 사슬이 있다면 바람에게 주세요
지금 편안합니다 저 아래 생명들이 나를 보며
둥지를 짓고 꿈을 엮고 있거든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천 년이 가도 바닷물 드나드는
순천만에서
-「당신을 기다렸어요 순천만에서」전문
이 시의 '순천만' 갈대밭은 햇살 따라 갈바람에 은갈대와 금갈대와 잿빛갈대로 무리 지어 흔들리는 풍경을 보여준다. 이 갈대밭은 가을을 가장 가을답게 마무리 지으며, 우리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수에 젖게 한다. 갈대밭을 집 삼아 살던 철새들이 떠난다. 봄여름 내내 떠들어대던 개개비나 오목눈이들이 자취를 감추면 청동오리나 고니류들이 자리를 잡는다.
봄날 갈대 잎이 피어나면 '어린 생명'이 '꼭 고창' 공음면의 '청보리밭' 같다. '갈대밭'이나 '청보리밭은 '출렁이는 몸짓'마저 끝간데 없이 아름답다. 봄여름을 지나 갈꽃이 핀 갈대밭은 가을볼거리의 극치이다. 그것은 해꽃의 끝물이 보여주는 황홀한 환상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갈바람 치는 '순천만' 갈대밭에 서 보면 '중년의 끝으로 옮겨 온' 아득한 쓸쓸함을 알 수 있다.
갈대밭은 무척 넓어서 이른 아침 갯둑에서 갈대밭을 바라보면 갈대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출렁인다. 이런 장면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물길을 따라 양쪽 갯벌이 무성하다. 갯벌이 넓어지는 바다 쪽으로 더 나가서 갯벌이 차지한다. '아침햇살에' '간절한 마음'이 '밀물 되어' 갈대꽃 목덜미에 부딪힌다. 이때 갈대꽃은 일제히 은빛을 낸다.
이 은갈대가 움직이는 모습은 환상적이다. 한 낮 해가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꽂힌 갈대는 잿빛 색깔을 드러내 재갈대가 된다. 재갈대의 무채색 행렬은 점령군 행렬처럼 황량하다. 마침내 해가 질 무렵 갈대는 금갈대가 되고 해와 함께 어둠으로 물들면 흑갈대가 된다.
시를 읽어 갈수록 쓸쓸함을 지나 아픔이 느껴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점점 절망이 깊어가다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조금씩 시가 살아나듯이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에 빠진다. 사랑과 소망의 나라로 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받아들인다. 나를 찾아 나를 버리고 돌아오는 여행 끝에서처럼 나를 다시 만난다.
'갈대밭'은 언제나 바람과 더불어 있어서 두 생명체가 서로 호흡을 주고받는다. 이처럼 시에서도 호흡에 따라 나름대로 언어의 변주가 잘 어우러졌다. 이런 어울림에서 여러 겹의 삶을 뒤돌아볼 것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은 잘 나거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성실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중에서 인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것은 참으로 오랜 아픔 속에서 나온 말이다. 너무 오래된 외로움인지 어딘지 모르게 슬픈 아픔이 물 너울처럼 다가온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대상에 다가가 내적 상상력으로 내적 구체성을 찾아내는 경지에는 아무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침묵 속에 떠오르는 소리를 건져내는 자기 성찰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는 침묵 속에 뜨거운 혓바닥을 감추고 있다.
덜 쉽고 덜 매끄럽고 소리 없음의 아름다움이 친숙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얼버무려 쉽게 쓰거나 더욱이 감성에 치중하지 않았다. 편안하게 감정과 언어가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지나치지 않게 자기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노을빛 사치스러'운 저녁, 죽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갈대밭'에 서면 황금빛 해가 아득하고 붉게 물들어 넘실대는 장면은 가늠키 어렵도록 켜켜이 시간의 모습으로 영상처럼 지나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는 삶의 길을 찾는 어려움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거쳐온 공간과의 친화력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풍경이나 사람이나 바람이나 새떼들을 말하며 격려하거나 쓸쓸함을 달래주고 있다. '순천만'의 갯벌 냄새와 바람결까지도 오래도록 간직하려 한다. 이렇게 풍경과 풍경 속의 길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한 자의식에서 출발하여 변화하는 풍경 속의 풍경을 묘사하며 무한한 그리움을 제시했다.
비움과 남김, 그 넉넉함의 시
표순복 시집「특별하지 않은 날의 주절거림」을 "꿈꾸는 의식, 그 미적 공간"으로 읽었다. 삶은 환상 속에서 꿈꾸는 과정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꿈은 현재의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가 오늘의 우리를 활기 있게 만든다. 표순복의 '미적 공간'인 고창高敞에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많다. 그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는 미당未堂의 선운사 동백나무 숲이며, 또 다른 하나는 표순복의 시詩 속에서 핀 선운사 동백꽃과 엄마의 품과 같은 선운산이다.
표순복의 시는 "꿈꾸는 의식"을 마음에 비춰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창高敞, "그 미적 공간"은 그의 시詩세계이다. 시의 길은 혼자서 가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이해 즉 새로운 변화는 갈망이 깊은 시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시적 조건이 좋지 않은 데서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표순복 시인은 세월이 지나면 그 때가 행복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길을 간다는 자체가 힘들고 힘들지라도 뜻이 깊다는 말이다. 이렇게 좋은 시를 오래도록 쓰기란 쉽지 않다.「영원의 터, 사랑하는 고창」,「일상·2」,「그의 독백」, 「삼각형 동선 안에 들다」, 「간절하지 않은 것은 꿈이 아니다」등을 읽고 나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신선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시적 진실을 다시 알 수 있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표순복은 과거로 뒤돌아가지 않으며 내일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속에 과거와 내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실에 대한 고마움과 가족의 소중함은 "꿈꾸는 의식"과 더불어 "그 미적 공간"의 존재로 오래도록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