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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박해(1827)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하여 주리라.(예레1,8)
면형강학회 2015년 5월 자료
1. 정해박해(1827년 전라도로부터 전국으로 확산)
1) 원인: 교우촌 교우들 간의 갈등과 분쟁- 일상의 사소한 다툼이 전라도, 경상도, 서울 등지의
교우촌 교우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진 사건
전라도 곡성 고을 덕실(현 전남 곡성군 오곡면 승법리) 교우촌은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마을주막이 있었다.
1827년 2월 새로 구운 옹기를 꺼내는 작업을 하던 교우들이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주벽이 심한 한백겸(순교자 한덕운 토마스의 아들)이 자신의 그릇들이 너무 작다고
투덜대었다. 그리고 주막주인 전씨의 부인에게 행패를 부린데서 발단되었다..
신입교우였던 주막주인 전씨는 화풀이로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관아로 가서 한백겸과 평소에 마음에 맞지 않았던 몇 몇의 교우들을 고발하였다.
2) 과정: 곡성 현감은 즉시 체포 명령을 내렸고, 박해는 확산되어 순창, 용담, 임실, 장성,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퍼졌다.
3월에는 전라도 북부 금산, 고산 등지의 신자들도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수효가 240여명이 넘었다.
4월에는 경상도 상주 잣골에 이주해 살고 있던 신태보 베드로가 체포 되었고,
앵무당 마을의 안군심 리카르도가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서울에 살고 있던 이경언 바오로 역시 서울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충청도 단양에서는 유성태 등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었다.
조정의 명령: 7명에게는 사형언도를 명하고 다른 사람들은 죄에 따라 처리.
(이경언, 김대권, 이유정, 이태권, 이일언, 신태보, 정태봉)
《벽위편》, 정해삼도치사(丁亥三道治邪)
전주 감사 이광문(1778-1838)은 다음과 같이 형조(刑曹)에 장계(狀啓)를 올렸다.
경상감사 이학수가 아뢰기를
“박보록 등을 해당 관서에 명하여 아뢰어 처리토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일성록』 순조27년 윤5월2일
“이경언은 그의 형 이경도와 그의 스승 조숙이 처형당했으므로 그가 마땅히 마음 아프게 두려워할 줄을 알아야 하겠거늘, 직접 마귀의 족자를 직접 그려 여기저기로 마구 다니면서 팔았고, 입으로 사설을 외우면서 어지럽게 강습했으며, 차마 유학을 배반하고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했습니다. 김대권(金大權), 이유정(李儒定), 이유진(李儒震) 등 일곱명은 살려 둘 것인지 죽일 것인지는 감히 갑자기 가볍게 의논할 일이 아니오나 김지성 등 여덟 명은 오랜 감옥살이 끝에 회개하였으니 마땅히 사형을 면하여 섬 지방으로 정배하는 법을 시행하시고, 그 밖의 죄인 142명은 모두 실토하였으니 사교에 점차 물드는 데에, 오래되고 오래되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처리하심이 심문을 극진히 하는 도리에 합당할 까 하옵니다.”
이 장계에 따라 형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어미 새를 잡아먹는 올빼미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효경지류(梟獍之類)과도 같은 배은망덕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호남과 영남 사이에 몰래 숨어들어 요사한 책을 번역해 베끼고 추악한 형상을 본떠서 그리며 은밀히 강습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니 그 무리가 실로 번성하여 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고, 흉악한 흔적이 드러난 것만도 거의 한 수레에 가깝습니다. 이를 벌하려 해도 다 벌을 내릴 수 없어서 관대한 법을 따른다면 실로 점점 더 없는 곳이 없게 되어 덩굴처럼 가득 불어나는 근심에 이를 것입니다. 이경언, 김대권, 이유정, 이태권, 이일언, 신태보, 정태봉 등 일곱 죄인들은 손과 다리가 다 드러나고 실상의 자취가 의심할 바 없으니 감사에게 명하여 격식을 갖추어 결안을 받고 아뢰어 처리토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허락하였다.
『일성록』 순조 27년 6월7일
경상감사 이학수가 아뢰기를.... “죄인 가운데 박보록, 김사건, 안사흥, 박사의 등 네놈은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니 끝내 고치지 않고 재범하는 자의 형률에 해당한다는 것은 다시 의론할 것도 없습니다.... 신의 대구 감영에 체포해 가둔 박보록 등 15명은 모두 깨우쳤다고 자복하였으나 그 정황 자취를 자세히 살피건대 경중의 구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두 열거해 의론한 것이니, 해당 관서에 명하여 아뢰어 처리토록 하십시오.”라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박보록, 안사흥, 김사건, 박사의 등 4명의 죄수는 죄를 범한 것이 용서할 수 없으며, 정황 자취가 의심할 것이 없으니, 예에 따라 감사에게 명하여 격식을 갖추어 결안을 받고 아뢴 뒤에 처리토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조선 순교자 비망기》, 다블릐 주교
“1827년 박해야말로 모든 박해 중에서 가장 통탄할 만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여러 가지 점에서 배교자가 많았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3) 결과: 전라감사 이광문과 경상감사 이학수의 박해 방식:
사형언도 받은 교우들의 집행을 시행하지 않고 장기 수감.
옥사 순교자: 김도명, 이성지,이성삼, 이경언, 유성태, 황석지, 안군심, 김세박, 박경화
유배지에서의 증거자: 이 막달레나
가족박해를 당한 순교자: 김호연 바오로
기해년 순교자: 김사건, 이재행, 박사의, 신태보, 김대권, 이일언, 이태권, 정태봉 등
교우촌에 큰 타격과 전라도 지역 천주교의 궤멸 상태 초래.
조선 내의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도 보편교회에서는 선교사 파견을 위한 노력과 대목구 설 정의 움직임이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
유진길, 조신철 등의 밀사들은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2. 순교자들
1) 이 막달레나(이 바오로의 누이, 이명의의 모친, 1830.1.12)
내포 태생으로 17세에 이 안드레아와 혼인 7남매를 두고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 교육시켰다.
정해박해가 일어나 곡성 고을에서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유배되고, 4년 후 즉 1830년 1월12일 유배지에서 53세로 선종. 유배지에서의 행적: 유배지 주민들의 비웃음과 희롱, 학대와 욕설을 참아 받으며 날짜를 세어 기도를 드리고 임종 전 무릎을 꿇고 묵주 기도를 드리며 선종함.
2) 김도명(金道明) 안드레아(1832 경 옥사)
충청도 면천 고을 신자 가정 출신으로 순창고을 신적에서 1827년 2월에 체포되어 전주 진영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1832년 경 나이 50여세로 옥사하였다.
3) 이성지 요한 세례자(1835.4.11.)
충청도 덕산 태생으로 함평 이씨 집안의 삼남매 중 장남으로 집안 대대로 무관으로 관직을 지낸 양반이면서 복자 이시임 안나의 오라버니이기도 하다. 24세에 교리를 배우고 수계를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로 10여년을 고생하다가 부친도 입교하였다. 신앙을 위하여 여러 번 이사를 하였고 전라도 고산에 정착하여 살 때 3월23일 전주 포졸들에게 온 집안 식구 13명이 잡혀 옥에 갇히거나 개인 집에 수감되었다. 문초를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키며 옥중 생활을 하다가 9년 후 옥중에서 병을 얻어 8개월 동안 신음하다가 1835년 4월 11일 58세로 병사하였다.
4) 이성삼 요한(1827.9.14.)
그의 형 이성지 요한 세례자와 같이 체포되어 교회 서적을 필사한 죄로 혹형이 더 가해져 장독으로 1827년 9월14일 33세의 나이로 옥사 하였다.
5) 복자 정태봉 바오로(1796-1839.5.29)
충청도 덕산 태생으로 복자 정산필 베드로는 그의 사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 얹혀 살았다. 그는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많은 시련을 인내로 견디어 내었다. 장성하여 전라도 용담(龍潭) 고을로 이주하여 살았다. 3년 후 정해 박해가 일어나 밀고자에 의해 천주교인을 잡으러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용담 관아로 끌려가 문초를 받고 전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주뢰와 삼모장 등의 문초와 형문을 당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사형언도를 받고, 12년 이라는 긴 옥중 생활 끝에 1839년 5월 29일 44세의 나이로 전주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6) 복자 이일언(태문) 욥(1767-1839)
안의(安義) 이씨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충청도 홍주 대벌마을 태생으로 부모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신유박해 이전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신유박해 당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모욕과 학대를 받으며 10년을 살았다. 1815년 부인이 유배지로 내려와 1826년 5월까지 함께 생활하였다. 그 후 해배되어 전라도 임실 대판으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 1827년 박해가 일어 다시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옥에 투옥되었다. 사형 언도를 받고 12년 긴 옥중 생활 끝에 1839년 5월 29일 73세로 참수 순교하였다.
7) 복자 김대권 베드로(?-1839)
충청도 청양 고을 수단이 태생이지만 보령 청라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1816년에 순교한 복자 김화춘 야고보는 그이 아우이다. 어려서는 신앙생활에 열심하지 않았으나 양친 사후에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부부간의 사이가 좋지 못한 때도 있었으나 공주 고을로 이주하여 살면서 옹기점에서 일을 할 때 부인의 호환을 당한 후에 크게 뉘우치고 부부애를 찾았다.
동생 순교 후에는 동생이 순교당시 목을 대었던 목침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전라도 고산 고을로 이주하여 살 때 박해를 만나 체포되어 전주 옥에 수감되어 문초를 받고 사형언도를 받았다. 12년 옥고 끝에 1839년 5월 29일 전주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매를 맞아 죽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살과 뼈에 사무쳐 있어서 사지를 자르면 그 하나 하나에 이 생각이 배어 있고, 뼈를 부수면 뼈 한 조각 한 조각에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안됩니다. 만 번 안 될 말씀입니다.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8) 복자 이태권 베드로(1782-1839)
충청도 홍주 태생으로 1790년경 그의 부친 이무명과 두 삼촌과 더불어 신앙을 받아들이고 믿다가 1791년 신해박해 당시 부친과 삼촌들이 체포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하다가 자신도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신유박해가 일어 다시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압송되었고 부친은 전라도로 유배되고 이태권 베드로는 배교를 언표하고 석방되었다. 1802년 2월 두 삼촌이 있는 공주 산중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곤장 30도를 맞고 석방되었다. 1804년 부친은 유배지에서 옥사하여 그곳에 가서 장례를 치려드렸다. 1827년 박해가 일어 다시 체포되어 전주 옥에 수감되고 사형 언도를 받고 12년의 긴 옥고를 치른 후에 1839년 5월 29일 전주에서 58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하였다.
그는1838년 샤스탕 신부의 명에 의해서 「옥중 수기」를 남겼는데 그 중에
“‘저는 더 이상 그것을 행하지 않고, 손을 떼겠습니다’.나는 무척 흥분해 있었고 자연스럽게 내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내 옷을 적시고 있었다. 아! 나는 내 죄도, 구세주의 수난도, 영원한 벌도, 심지어 나와 함께 풀려나지 못하는 내 아버지를 뵈어야 하는 안타까움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으며, 얼마 동안 눈물을 철철 흘리며 갈팡질팡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축하해 주고 또 내 석방을 치하하기 위하여 특별한 음식을 갖다 주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먹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도무지 하지 못하던 내가 한 숟가락도 삼킬 수 없었다. 밤이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갈 순간이 되었을 때, 형과 나 우리는 아버지께 가서 작별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풀어 주었으니 즉시 돌아가서 근심하고 있을 집안사람들을 찾도록 하거라. 나는 유배지로 가야 하기 때문에 가서 노자를 약간 마련해 보거라.’ 헤어지던 그 순간의 애절한 느낌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우리에게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마치 양날검처럼 우리 마음을 후려쳤다. 우리는 망염자실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재회하였다. 가족들은 그래도 우리의 귀환 덕분에 약간은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사흘이 흐른 뒤에 아버지는 이미 유배를 떠나셨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돈을 약간 가지고 가서 길에서 아버지와 상봉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하루를 걸어간 다음에 내가 도저히 걸을 수 없음을 아시자 아버지는 나를 돌려보내면서 내 상처들이 다 아물었을 때 유배지로 찾아오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석달 후 내가 아버지를 찾아뵈러 갔을 때 세 명의 교우들이 같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보았다. 같은 감옥이기는 하였지만 각기 다른 칸막이 안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밤이건 낮이건 하늘을 쳐다 보는 자유도 누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나는 감정을 억누룰 수 없었으며, 너무나 속이 상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수 백리를 걸어 왔는데도 아버지를 아주 잠깐 보는 것만 허용하였으니, 아버지와 아들이 자유롭게 감정을 서로 나눌 수도 없었다. 그때 우리가 느꼈던 감정들을 어찌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라고 그 때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조현범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교회와 역사, 2011.6.7.호)
9) 복자 신태보 베드로(?-1839.5.29)
남인계 학자로 평산 신씨. 교회 창립 초기부터 천주교에 대하여 듣기는 하였으나 믿지는 않았다. 이미 관직에 나가 활동하던 신태보 베드로는 신해박해 이후 양반 교우들의 삼가고 조심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 친척 이여진 요한과만 교류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주문모 신부 입국 이후에는 신부를 뵙고 성사 받으려 애썼지만 만날 수 없었다. 신유박해 때 박해를 면하고 용인에 살고 있던 순교자들의 세 가족들과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수계생활을 하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강원도 산골로 집단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교회 재건 운동에 열성적으로 활동하였고 친척 이여진이 북경 밀사로 갈 때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경상도 상주 잣골로 이주하여 조용히 수계생활을 하던 중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관아로 압송되었고, 문초를 받고 사형 언도를 받아 긴 옥고를 치룬 후 1839년 5월 29일 동료들과 함께 전주에서 70여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하였다.
성 샤스탕 신부의 명에 의해 「옥중 수기」를 남겼다.
-긴 옥고를 견디면서 그 안에서 겪었던 것과 문초의 고통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옥중 수기는 우리들에게 육신의 고통의 강도와 심정을 잘 묵상케 해준다.
(다블릐 비망기 pp.72-74: 212-217)
“1791년 첫 공식적인 금령이 내려졌을 때 나 역시 천주교를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공직에 있었고 전에는 나에게 열성을 쏟던 여러 명의 남인파 양반 교우들이 나를 냉대했다. 더 이상 천주교에 관해서 서로 말하고 천주교 서적들에 대해서 토론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였고, 문을 닫아걸었으며 더 이상은 교류를 가지려는 마음들이 없었다. 나 역시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집행으로 겁에 질려서 더 이상 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비록 마음속으로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자연히 벗들과 접촉을 끊었으며, 다시 일어설 힘이 더 이상 없었다. 매일 기도를 바치는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나는 도무지 어디에다 주의를 집중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행히도 나는 이여진 요한과 모든 것에 관해 협의했다. 친척 관계에 있었던 우리는 같은 스승에게서 천주교를 배웠고, 서로 가까이 살았었다. 한 달 만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부모님을 여의어서 홀로 남게 되자 서로를 위로해야만 했으며, 천주교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의 공직에 있던 한 교우가 있어서 우리 두 사람은 자주 그의 집을 찾아 갔다. 비록 우리는 서울에서 14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지만 한 달에 두세 번씩 이 길을 왕래했고, 그를 보았거나 못 보았거나 결과적으로 특히 천주교에 관한 소식은 거의 듣지 못하였다.
무오(1798)년 음력 12월 아주 추운 밤, 나는 그의 집에서 잤다. 닭이 울자 흰 눈이 들과 산을 덮었는데 이 친구가 일어나서 서랍에서 어린아이의 양말을 한 켤레 꺼내서는 나에게 주며 신으라고 했다. 그것을 보니 아이도 신을 수 없어 보이기에 깜짝 놀란 내가 말했다. ‘왜 어른한테 아이의 양말을 신으라고 하는 거요? 장난이 짓궂습니다.’ 그가 내게 대답했다. ‘천주교는 지극히 공정해서 천주교 앞에서는 어른도 아이도 없고 양반도 상놈도 없습니다. 천주교는 유연하고 탄력이 있어서 어른이나 아이에게 다 맞는 이 양말과 같습니다. 조금 힘만 들이면 큰 발도 잘 들어가는 이 양말처럼 천주교에서는 열심만 있으면 신부님을 볼 수 있습니다.’ 벌써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자 밖에서는 사람들이 눈을 쓰는 소리가 났고, 내가 조금 힘을 쓰니까 과연 양말을 내 발에 신을 수 있었다. 그것은 유럽에서 온 양말들이었다. 양털로 만들어진 그것들은 그것을 신는 사람의 발에 맞게 늘어났다. 그때 나는 신부님에 관해서 많은 것을 물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내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에게 한 말로 충분합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그날로 나는 사방으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진상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어디를 가도 대답을 얻지 못했다.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병자처럼 되어서 이리저리 돌기도 하고 내달리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런 희망도 없이 집으로 돌아와 내 친척 이 요한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다음날로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가 거의 보름 만에 돌아와 하는 말이 ‘분명 무슨 내막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열흘 후에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나의 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냉랭해 보였고 모든 것을 숨겼으며, 내가 입을 여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더 이상 찾아볼 곳도 물어볼 곳도 없는 나는 한 친구의 집에 가서 며칠을 묵으며 제발 무슨 말 좀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대답했다. ‘어쩌면 지금 성사를 받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신부님을 볼 방법은 전혀 없다. 내가 볼 때 자네가 여기에 머물러 봤자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니 자네 집으로 돌아가서 좀 기다리고 성사 받을 준비를 하게나. 그것이 제일 좋은 결정일세. 그게 아니면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나는 다시 내려와서 기쁨과 한숨을 섞으며 내 친척에게 모든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일곱 내지 여덟 번 서울을 왕래했지만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서울에 정착해서 일이 돌아가는 사정을 보아야만 되겠다고 결정했고, 곧 이 요한이 식구를 일부 지방에 남겨놓은 채 돈을 조금 마련하여 서울에 정착하러 갔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신부님을 뵙는 위로를 얻을 수가 없었다. 후에 신부님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회한과 비탄은 더할 뿐이었다..... ”
10) 복자 이 경언(종회) 바오로(1792 - 1827.6.27)
부친 이윤하 마태오가 세상을 뜨기 바로 전 179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경언 바오로는 복자 이경도 가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이다. 1793년 부친이 세상을 뜨자 홀로 된 어머니 안동 권씨는 남편과 함께 믿던 천주교를 믿으며 자녀들을 키웠다. 1801년 큰형 이경도와 누님 이순이가 순교하였다. 22세에 중인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서울에서 살았다. 모친과 둘째 형의 가족은 충청도 연풍으로 이주하였다.
순탄하지 못한 아내와의 가정생활을 인내로 살면서 수계생활을 하였고, 전교에 힘썼으며 애긍(哀矜)시사(施舍)와 자신의 부족함을 주님 안에서 고치려고 노력하였다. 순교로써 자신의 죄를 갚아야 한다고 늘 말했고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였다.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서적을 필사하거나 상본을 모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의 활동으로 경비를 마련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 전주 포졸들에게 서울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문초와 형문을 당하다가 옥사 순교하였다. 모친과 가족들에게, 부인에게, 명도회원들에게 보낸 옥중 편지와 심문기가 전해져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적 삶의 지표를 제공해 준다.
이경언 바오로의 〈심문기〉 중 문초 과정과 은총(2014년 11월 전주지역 성지순례 자료집 참조) :
-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길을 가셨는데 내가 왜 이 길을 걷기를 두려워 한 단 말인가.
아니 나는 예수를 한 발 한 발 따라 가겠다.
- 전주 감영에 이르러 영장 앞에 끌려 나가고 그곳에 관솔불이 환히 빛을 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니 우리 주 예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붙잡히시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 전주 감영에서 1801년 순교한 누님이 생각나서 ,“그렇다. 나도 누님의 뒤를 따르리라. 참말이지 누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게 아닌가” 생각하니, 내 마음에는 비애 섞인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 내 온 몸이 입술로 변한다 하여도 어떻게 넉넉히 천주의 찬미를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경언 바오로가 어머니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1827.5.14. 전주 옥중에서)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 김진소 편저,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어머니, 누님, 형님, 형수님 그리고 아내에게 드립니다.
집을 떠난 후 붙잡힐 때까지 13년 동안에 두 번 밖에는 가서 문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저로서 큰 불효입니다. 36년 동안 저는 크고 작은 허물없이 지낸 날이 없었으며 효도의 본분을 어기기만 했는데, 오늘 뜻밖에도 천주께서 비상한 특은으로 죄악이 가득한 이 사람을 영생의 신락(神樂)에로 부르십니다. 이것이 부끄럽고 가슴 떨리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 분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 아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놓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겁이 나는 것은 제 구원의 일로 보아 30여 년이나 되는 세월을 허송한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지금도 저는 열심하지 않고 통회(痛悔)도 없고, 완전한 애덕(愛德)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천주와 성모 마리아의 끝없는 인자하심만을 믿고 있으니, 저를 저버리실 수가 있겠습니까. 천주께 그분의 모든 은혜를 감사하여 주십시오.
누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같은 동생에게서 누님은 사실 아무런 우애(友愛)의 표시도 얻어보지 못하셨지요. 이제는 누님과도 영이별이군요. 이 세상에서는 다시 뵙지 못하게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덕을 닦고 공을 많이 세워서 천주 대전에서 영원히 같이 즐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제 어머니께 대한 아들의 본분이나 누님께 대한 동생의 본분을 채울 길이 없겠으니, 우리 마음과 기도와 노력을 합하는 것 만으로라도 영원한 복락 가운데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님께는 무슨 말을 할까요. 형님같이 착하고 덕이 많은 분이 쓸모없는 동생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형님은 무엇보다도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조약돌에서 튀기는 불꽃같이 빨리 지나가는 이 세월을 긴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머니의 노후를 정성껏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자매 등 온 집안이 영원한 나라에서 한데 모여 우리의 공번된 아버지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저와 같이 큰 죄인이요 악인(惡人)에게도 천주께서 이렇듯 큰 특은을 내려 주시니 본성이 착하고 바른 형님께서야 조금만 힘을 쓰신다 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근실히 닦아 선종(善終)의 은총을 받으실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저는 형님께 걱정만 끼쳐 드렸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제 아내와 두 자식은 아무 의지할 데가 없게 되니 형님 말고 그 누구에게 그들을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짐이 무거우신 형님이 어찌 이 일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딱해서 가슴이 사뭇 미어집니다.
형수님, 안녕하십니까. 저를 길러 주시고 품에 늘 안아주시고 지금까지 그렇게도 제 걱정을 해주시고 제 처지를 안타까와 하시던 형수님이 이 편지를 읽으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그 한량없으신 인자(仁慈)로 천주께서는 이 불쌍한 동생에게 십자가의 길로 예수를 먼발치라도 따라갈 수 있는 은총을 주시려 하십니다. 순교하신 형님과 누님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행복을 얻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천주께 감사를 드려주십시오. 한 가지 청을 드릴 것이 있는데 저의 이 마지막 청을 물리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아들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아이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 아이를 아주 양자로 삼아 가르치셔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 주십시오. 제 일생이 제게는 후회의 근원입니다. 형수님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한 적이 너무나 많았고 말씀을 너무나 안 듣고 그 밖에도 말씀드리지 못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5남매 중 셋이 순교자입니다. 천주님으로부터 이보다 더 큰 은총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성인들과 형님과 누님에게는 이런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이 얼마나 큰 특은입니까.
그리고 아내여, 나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주시오. 나와 같은 나쁜 남편은 다시없으며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은 이루 글로 다 쓰지 못할 거요. 13년을 같이 사는 동안 나는 한시도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당신에게 근심 걱정만 끼쳤을 뿐이오. 이제 갑자기 죽음을 대하게 되니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리까. 이제 다시는 이 세상에서 같이 살지 못하게 되었소. 그러나 과거에 대한 약은 있을 수 없고 남느니 오직 회한(悔恨)뿐이오. 비록 내가 남편의 본분을 잘 채우지는 못했어도 천국에 올라가는 은혜를 얻게 되면 당신에게 착히 살고 착히 죽는 은혜를 얻어주기 위하여 전구(轉求)하겠고, 또 나 자신이 천주께서 당신에게 내려주시기로 된 행복을 전하는 사자(使者)가 되어 당신에게 마주 와서 손을 이끌어 영복(永福)을 누리는 곳으로 인도하겠소.
간절히 부탁하니 모든 일에 천주성의(聖意)를 따르고 지난 모든 일을 뉘우치고 이 세상을 일장춘몽으로 알고 영원한 나라를 당신의 참 본향으로 여기시오. 아아! 나는 어떻게 이렇듯이 허무한 세상을 그리 중하게 여길 수가 있었던고. 며칠 후면 모든 것이 결말이 날 것 같소.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마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모두 천주의 성의에 달렸고, 사람들이 계획하는 바는 허사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뉘우침조차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짓이오.
어머님은 아직 이 세상에 계십니다마는 얼마나 더 사실런지요. 이 세상에 낳아주신 어머님의 자식들이 하나씩 둘씩 순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진실한 통회를 발(發)하도록 힘쓰시고 선종(善終)하는 은총을 받도록 하십시오. 형님과 누님이 최후에 남기신 말씀은 정성과 효성이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여쭙더라도 그것을 익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형수님도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고 말구요. 제가 형제자매 중에 누구에게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형수님이 저를 위해 당하신 수고와 들어주신 시중은 어머님의 수고와 시중 다음으로 으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어머님 다음으로는 형수님을 탁 믿고 의지하였었습니다. 몇 해 전에 연풍에 갔을 적에는 형수님을 뵙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만 번 후회가 됩니다마는 이제 와서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니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만나 뵙시다.
내 아들딸아, 내가 주의 은혜로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마는 내 죄가 중하기 때문에 본분을 타당히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또 너희들이 철도 들기 전에 내 생명의 줄이 끊어지게 되는구나. 너희들에게 물려줄 덕도 없고 재산도 없으니 다만 몇 마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자 한다.
천주의 성의를 충실히 따르고 어머니께 효도의 본분을 지키도록 하여라. 다른 모든 사란들에게 대하여도 공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라. 그래서 이 세상에서 착한 길을 따르면 분명히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나는 불쌍한 죄인이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마는 그래도 나는 아버지니 아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내 본분이다. 또 옛 어른들의 이 지혜로운 격언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주기를 부탁한다. 즉 비록 가벼운 잘못이라도 절대로 저지르지 말며, 또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선(善)이라도 항상 힘써 행하라는 것이다. 다른 분들에 대하여도 쓸 말이 많으나 종이와 붓이 모자랄 뿐 아니라 또 다시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아랫도리를 쓸 수가 없고, 근20근도 더 되는 큰 칼을 쓰고 있어 정신이 얼떨떨하고 팔이 떨린다. 그래서 더 글쓰기를 계속하지 못하겠다. 무엇보다도 특히 착하게 살고 착하게 죽기를 힘쓰기 바란다.
정해년 5월 14일 죄인 이 바오로
〈이경언 바오로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1827년 5월 15일 전주 옥중에서)
정의 어머니에게
우리가 혼인한 후 13년 동안 우리는 둘이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을 지내지 못하고 가지가지 곤경을 겪었소. 그러다가 갑자기 이별을 하여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
내 일평생의 행동과 수많은 죄를 생각해 볼 때에 당신에게 대하여 잘못한 것을 특히 뉘우치오. 용서하여 주시오. 내가 죽은들 당신을 잊을 수가 있겠소.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의지가 될 것으로는 정의와 그 누이동생이 남아 있으니 그 애들을 잘 기르고 가르쳐서 내 뒤를 따르게 하시오.
당신으로 말하면 만약에 모든 일에 천주 성의에 복종하고 주님의 벗이 된다면 그것이 참된 행복이 아니겠소. 우리가 서로 이별한 뒤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겠소. 이런 생각이 들 적에는 가슴이 찍어 눌리오. 그러나 다음에는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고 불안을 가라앉히오. 무엇보다도 모두 선종하도록 힘쓰기 바라오.
연풍에서는 모슨 소식이 있었소. 아아, 어머님이 내 처지를 아시게 되면 어떻게 되실까. 나도 순교자가 된다면 어머님에게도 큰 영광이 될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억제할 수가 있겠소. 이제는 당신을 아주 하직해야겠소. 이제는 종이도 없고 간수의 눈이 번쩍이니 당신에게 이 몇 줄 글을 써 보내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을 몰래 이용해야 되오. 이 편지를 집안에 두루 읽히기 바라오. 형님은 어떻게 지내시며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된 형수님은 어떻게 계시는지.
내 희망은 우리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 함께 즐기는 것이오. 내가 여기서 죽을는지 혹은 서울에 가서 죽게 될런지는 알지 못하오. 만일 여기서 죽게 된다면 누님과 같은 장소에서 순교의 영광을 받게 될 터이니 얼마나 큰 은혜겠소!
천국의 천사 성인들과 전 세계의 모든 교우들이여,
나를 위하여 천주께 감사하여 주십시오. 환경 하나 하나가 모두 내 사랑하는 누님 순교자의 편지 사연을 회상케 해 주는데 내 일생에 누님만큼 천주를 사랑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이제는 천주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싶지마는 이미 늦었으니 어쩌겠소.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조이는 느낌이오. 그러나 한편으로 내 죄가 무수하다면 또 한편으로는 천주의 자비도 끝이 없으니 이것이 내 오직 하나의 희망이오. 내 힘만 가지고는 한 순간이라도 꿋꿋이 견디지 못했을 거요. 참말이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힘은 아무 것도 아니고 천주의 보호하심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인정하오.
박해의 그악한 바람이 좀 자거든 와서 내 물건들을 찾아다가 아들에게 갖다 주시오. 두 아이들에게 세례를 다시 주게 하오. 그 애들이 받은 세례가 확실치 않소. 내가 빚이 좀 있고, 주문 받은 것을 다 마치지 못한 것도 있는데 거기 대해서 내가 느끼는 것을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소. 다만 천주께서 그것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오. 그러나 당신은 이 모든 것을 힘을 다하여 갚도록 하시오. 어머님께는 따로 상서(上書)할 수가 없으니 이 편지를 베껴서 보내드리도록 하오. 당신도 이 세상에서 살날이 많이 남지 않았고, 영원한 복락이 가까웠소.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그리고 주님 대전에서 영원히 다시 만납시다. 나를 출두시키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리오. 그러면 여기서 붓을 놓겠소.
5월15일 남편 이 바오로
〈이경언 바오로가 명도회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1827년 5월25일)
36년이나 세월을 허송하고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한 나 중죄인은 천주와 동정 성모 마리아께 버림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한 홍은(鴻恩)으로 부름을 받았느니 이것은 나를 우리 회(會)에 받아들이신 다음 그 가장 큰 은총을 쏟아 주시는 우리의 대주보, 죄없이 모태에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의 은혜임을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모든 회원들의 열성과 공로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나 자신과 내 부당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나로서는 내 죄가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을 만큼 큰 것을 생각하고 입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저 분들과 한데 섞일 수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뜻밖에 신앙을 위하여 옥에 갇히고 보니 바로 이것으로 성모 마리아의 뜻이 밝히 드러난 것같이 느껴집니다. 공과 덕이 그렇게도 많은 다른 회원들은 성모께서 옥을 거치지 않게 하시고도 목적하는 바에 이르게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착하신 어머니께서 아셨습니다. 회원 여러분, 나를 위하여 성모님께 감사하여 주십시오.
내가 천만 뜻밖에 잡혔으므로 여러분들은 놀라시고 또 몹시 걱정하셨을 것입니다. 나로 말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어떤 생각으로 항상 연결되어 있는지를 표현 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많은 열성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한 마디만 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우리나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가 어떻게 자라났나 하는 내력을 알고 계시지요. 오랜 세월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한 후 천주 섭리의 특별한 배려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짓고 몇몇 식구를 모아 놓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천후가 좋지 못하여 모진 비바람으로 인해서 그 집이 거의 쓰러지게 된 형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숨이 탁탁 막힙니다. 그렇지마는 착하신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이 집이 보존되리라고 믿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내 집에 가시면 내가 지난달에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달에 우리가 모이는 날이 되면 이제는 여러분들과 영영 갈리어 있기 때문에 고통이 배로 더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남는다 하여도 회를 위하여 큰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지만 여러분이 모이실 적에는 내가 빠짐으로 해서 좀 쓸쓸하고 섭섭한 느낌이 드시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차라리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이 막중한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여 주십시오.
나는 회원 한 분 한 분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는 것 같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제발 내가 방금 말한 작은 집을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존하시고 어김없이 천주의 큰 집에 이르도록 하여 다 같이 즐기도록 하십시다.
두 회장(會長)님들은 안녕하신지요. 각지의 회장님들도 별고 없으십니까. 내가 여러분에 대하여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근심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사서 하십니까. 만약에 서울의 사태가 아주 조용해지면 그 조그만 집과 얼마 안 되는 그 식구들을 보전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천주교가 번성하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여기서 교우를 2백 명 이상이나 보았지만 꿋꿋하게 견딘 사람은 얼마 안 되고 거의 모두가 넘어갔습니다. 천주의 은혜로 몇몇은 다시 목숨을 이어갈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역시 교형들이 전구하여 주신 덕택이 아닌가 합니다.
나의 벗 가롤로,(현석문) 어머니는 어떠십니까. 참말이지 우리들의 우정은 보통 우정을 멀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아니면 아무도 내 결점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지금 곰곰이 생각하면 참으로 형은 내 보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내 청을 받아들여 내 아내와 아이들을 보살펴 주기 바랍니다. 내가 부탁하면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들이 또 있기는 하지마는, 나의 벗인 형이 누구보다도 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알고 있으며 죽어 가는 사람의 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은 빨리 흘러 내가 붙잡힌 지 벌써 달포가 지났습니다. 괴로움으로 말하면 나 자신은 그것을 견디어낼 수가 없고 너무도 연약한 육체가 그것을 이겨내지를 못할 것이니,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면 어찌 한시인들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서울과 지방 교우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했고, 또 내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제는 천주께 간구하여 그것을 탕감해 주시기를 바라는 길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또 내 말을 들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마는, 이 세상은 참으로 한 순간에 지나지 않으니 선종을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고 모든 방법을 쓰십시오. 내 많은 죄가 하늘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이제까지 내게 무수한 은혜를 내려주신 것으로 보아 분명히 나를 저버리고자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갈 수 있게 되면 어느 분이든지 이 큰집에 오실 적에 풍악을 갖추어 가지고 마중 나가 우리 공번된 아버지께로 같이 올라가 그 분을 찬미하고 즐길 것입니다. 아직도 할 말이 천만 가지 있습니다만 그것을 종이에 쓸 수가 없습니다.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육신과 영혼을 고이 간직하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러면 영세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정해년 5월25일
이 경언 바오로 드림.
11) 복자 박경화 바오로(1757-1827.11.15., 대구 감영. 옥사)
刑曺達言...朴甫祿旣已物故論
충청도 홍주 태생. 33세 즉 1790년 경에 입교. 신해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석방. 후에 회개하고 열심히 봉교.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 받음. 가족들과 함께 충청도 단양 가마기로 이주, 정해박해 소식 듣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 그해 4월 예수승천대축일 첨례 지내다가 체포,상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고 옥사.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서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
“내 육신은 관장의 손에 맡기고 영혼은 천주의 손에 맡깁니다.”
“나와 같이 무식한 사람이 내 힘 만으로야 어떻게 그 중을 당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천주와 성모의 도우심만 믿으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걱정하십니까. 그저 나를 위해 기도들이나 해 주십시오.”
“가서 너희들의 영혼을 아무 죄없이 깨끗하게 보존하고 만약에 천주를 거스리는 일이 있거든 진심으로 통회하거라. 항상 성교를 충실히 봉행하여라.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 조선 교우들은 크나큰 기쁨의 자료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부모나 아이들에 대한 분별없는 지나친 사랑으로 분심되게 하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12)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5.26., 대구. 참수) 부자(父子)
부친의 신앙적 모범을 따라 신앙생활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님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진 빚은 내가 혼자 일해서 갚는 것이 마땅하다.”
체포되어 관에서 문초를 당할 때 부자가 함께 형문을 당하였다. 이는 안드레아이 효심에 강동한 관장의 배려였다.
13) 김사건 안드레아(1794-1839.5.26. 대구 참수)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부친은 1815년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 타데오이고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 시몬은 그의 큰아버지이다.
입교 후 재산을 버리고 신앙을 위하여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부친 유배 후 경상도로 이주하여 살다가 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어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대구로 다시 압송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다시 대구로 와서 결안을 받고 12년이라는 긴 수감 생활을 하다가 1839년 5월 26일 대구에서 참수 치명하셨다.
14) 안군심 리카르도(1774-1835 대구. 옥사 )
충청도 보령 태생으로 청년 시절에 입교하였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가족들과 함께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명랑한 성격과 겸손하고 친절한 그는 애덕을 실천하였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면서 1주일에 세 번 대재를 지켰다. 1827년 박해에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835년 긴 수감 생활 중에 이질에 걸려 옥사 하였다.
15) 이재행 안드레아(1776-1839.5.26.대구 참수 순교)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여세에 입교하였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을 모아 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 경상도 순흥 곰직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을 덮쳐 체포하고 안동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곳에서 일차 배교를 강요 당하며 문초를 받고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12년 간 수감 되어있다가 기해년 박해가 일 때 참수 치명하였다.
16) 김세박 암브로시오(1761-1828.12.3. 옥사)
한양 역관 집안 즉 김범우의 일가친척으로 천주교가 들어오자마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과 자녀들이 신앙을 거부하고 오히려 방해하자 1791년 가족과 이별하여 교우들을 찾아 다니며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생활하였다. 주문모 신부님이 오였을 때는 성사의 은총도 받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 피신하다가 5월에 안동 관아에 자수 하여 갇히고 대구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수감 기간에 먹는 음식이 백성들의 세금으로 이루어 진 것을 알고 곡기를 끊기도 하였다. 장독과 심한 대재로 쇠약해진 몸으로 옥사하였다.
17) 유성태 라우렌시오(? -1827.12월경이나 1828년 3월경 )
충청도 단양 깊은 골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1827영 5월 외교인 친구의 밀고로 2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단양 관아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관아에서 교우들의 석방을 위하여 일단 배교를 언표하고 석방되었다가 교우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후 다시 관장에게 가서 배교를 취소하고 문초를 받다가 충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사형언도를 받고 형을 기다리던 중 유배형으로 바뀌어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을 갔다. 배소에서 전교를 하다가 쌀가루와 소금으로 반죽한 음식을 먹다가 숨을 거두었다.
유배지 가는 유성태를 두고 “이 자가 도중에 백성 몇 사람을 그 교리로 매혹케 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감시해라.” “나는 도중에서 그저 일만 명만 입교시키겠습니다.”
(조동섬 유스티노와 유성태는 만났을까?)
18) 김호연 바오로(?-1831. 8. 안동)
경상도 안동태생, 20세 이전에 경서와 천문 역학, 불법과 노자에도 조예 깊었다. 그러나ㅠ학문을 닦고 명상을 좋아하며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여 경상도 순흥 지방 태백산 줄기 밑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교우촌의 교우를 알게 되어, 천주교의 진리를 알게 되었고, 서적을 연구한 후 그 교우에게 바오로를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을 가르치고 부친에게도 입교를 권유하며 책을 보여드렸다. 처음엔 호의적이던 부친이 조상제사 금지에 관한 것을 알고 아들에게 천주교인과의 교제를 금지하고 서적을 불사르도록 강요하며 박해를 하였다. 부친의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교우 집으로 가서 몇 개월을 보냈으나 아들을 찾기 위해 교우들을 고발할 것 같은 부친으로 인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 교우들에게 자신이 지은 책 한권과 자신이 지니고 있던 성물들을 교우들에게 맡기면서 “참된 고향에서 다시 만납시다.”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 온 후 부친의 모진 박해를 받으며 지냈고, 이내 중병에 걸렸다. 그리고 부친의 배교 협박은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위협과 본인에 대한 목숨을 끊을 자세로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보리지 않으며 숨을 거둘 때까지 부친과 형의 모진 박해를 받았다. 선종 후 장례와 제사를 지내려 하는 제상이 무너져 보렸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선 치하 2차 시복 시성 대상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셨다.
19) 황석지 베드로(? - 1833.5월초 옥사)
밀사 황 안드레아의 삼촌으로 홍주 당산리 태생이다. 40여세 때에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1821년 부인과 자식들 모두를 잃고 조카 황 안드레아의 집에 얹혀 살다가 1832년 9월 20일 포졸들에게 잡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였다. 옥중에서 다른 외교인 수감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70여세로 옥사하였다.
“내가 입교하기 전에는 여러 교우들이 순교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적에 그것은 지나친 열광이요, 너무 흥분한 상상력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은 아주 버렸다.”
“황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때에 이 옥 전체가 환한 빛이 비치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 나갔더니 그분의 감방에 불이 비치고 있기에 들어가 보니, 비둘기 한 마리가 그 분 위에서 빙빙 돌고 있겠지요. 그 후 몇 분 안 있어 그 분은 숨이 넘어 갔습니다.”
2차 시복시성 대상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셨다.
3. 보편교회의 위기와 희망의 증거.
1622년 교황청 포교성성 설립: 교황대리 감목의 설정
1633년 교황청 포교성성에서 일본, 중국, 통킹, 샴 교구 설립
1658년 프랑스 뤼드윅에서 빨리(F. Pallu)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MEP)설립
1742년 중국 의례논쟁 종료(교황 베네딕도 14세 칙령)
1789년 불란서 혁명(1789.7.14 - 1799.11.9) : 성직자 공민 헌장, 교회재산 몰수,
파리외방전교회 해산, 나자리스트 선교 수도회 해산
1791년 비오6세 선서자 파문.
1798년 불란서 로마 점령.
1808년 7월: 교황 비오7세 감금, 유폐. 1814년 로마 귀환
1815년 파리외방전교회 재건
1831년 그레고리 16세 교황(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 즉위.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리 감목구 설정
* 파리외방전교회: 1658년 재속사제 선교 단체창설 .선교방법: 정치문제에 간여 하지 말고 종교 적 활동에만 전념. 상업 활동 금지. 포교지 국가의 관습과 전통문화 존중. 방인사제 양성.
* 교황청 포교성: 그레고리15세 교황에 의해 1622년 국가의 선교보호권 체제에서 독립하여 선교 사업을 직접 관장하기 위해 설립.
* 선교지에 교구와 대목구 설립, 재정적 지원과 선교사 양성을 위한 노력(울바노 대학 설립)
4. 조선 대목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1793 - 1835.11.1. 몽고 팔가자)
1792. 2. 12 프랑스 남부 나르본 읍 레삭에서
자작농 프랑수아와 테레즈 부부의 열한 번째의 자녀로 탄생.
1805-1814 나르본 소신학교, 카르카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수학
1815.12. 23 사제서품. 10월부터 카르카손 소신학교 교사로 재직.
1819년 카르카손 대신학교 교수로 취임, 카르카손 주교좌 성당 명예 참사위원으로 임명
1825. 9. 17 파리외방선교회 입회. 4개월 반 동안 아시아 연수 과정을 이수
1826. 2. 5 삼(현 타이) 선교지 파견 (파리출발-보르도항을 통해 선교지에로 항해)
1829. 6. 29 주교성성과 말레이시아 반도 서쪽 페낭에서 선교.- 동료들, 교황님께 보낸 서한
1831. 9. 9 조선 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
1832. 8. 4 페낭섬 출항, 싱가포르. 마닐라를 거쳐 10월 18일 마카오에 입항.
1833. 8.26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교구 관할 책임을 맡음.
1834. 1. 3 중국인 사제 유(여)항덕 파치피코 신부 조선 입국.
1835. 10. 19 네이멍구 자치구 마차아즈(팔가자) 교우촌 도착
1835. 10. 20 선종(43세) - 11월 21일 모방 신부가 장례,
1931. 10. 15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주교의 유해 용산 성직자 묘지 이장.
4.1 브뤼기에르 신부가 카르카손 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보낸 서한
(1826말-1827초.바타비아)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정양모, 윤종국 역, 가톨릭 출판사 PP 137 -143
... 중국 동북쪽에 ‘조선’이라는 왕국이 있습니다. 19세기 초에 북경에서 개종한 조선인 청년의 열성으로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동포들의 사도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습니다. 그 열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순교했습니다. 조선의 신입 교우들은 사목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를 보내달라고 북경 주교에게 간청했습니다. 북경 주교는 신부를 파견했는데, 그는 조선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잠입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붙잡혀 순교했습니다. 그 이후 조선 교우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베이징으로 교우 대표를 보내어 성직자를 요청했지만 늘 성과가 없었습니다. 북경 주교는 매년 조선 교우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1817년 조선 교우들은 같은 목적으로 교황님께도 서신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올해 다시 교황님께 서신을 올렸다고 합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만나 뵌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경리부장 이 새 서신에 관해 제게 언급했습니다. 경리부장은 매우 열심하고 용감한 프랑스 신부가 조선으로 갔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을 많이 개종시키고 몇 해 안 되어 순교의 영예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여러 번 있었지만, 제게 맡겨진 소임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으로 가려고 제 소임을 버리는 것은 변덕스러운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
4.2 브뤼기에르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1827.2.4. 페낭)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정양모, 윤종국 역, 가톨릭 출판사 PP 137 -143
... 신부가 순교한 이래 조선 교우들은 성직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열심한 신입 교우들은 매년 밀사를 보내어 성직자를 보내달라고 북경 주교에게 간청하지만 북경 주교는 이제까지 그 간청을 들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선 교우들은 같은 내용의 서한을 로마로 보냈습니다. 제가 착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황님께 올린 두 번째 서한입니다. 조선인들은 중국인들 보다는 일본일들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처럼 조선인들도 쾌활하고 영적이며 호기심이 강하고 일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신앙심이 요지부동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점에 동의합니다. 어째서 저 불쌍한 조선 교우들을 돌볼 사제가 온 유럽에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4.3. 브뤼기에르 신부의 동료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1829.5.19. 방콕)
1.우리는 기금이 적다.
2. 우리는 선교사가 없다.
3.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4.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 져서 시초부터 용감한 순교자와 순결한 동정녀들을 그렇게도 많이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 사도시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을 바쳤던 것과 비길만한 일을 한 저 새로운 교회, 귀양살이와 종살이를 하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도 망나니들의 도끼날 밑에 서 아직 복음을 전하고 신입교우의 수효를 끝없이 불려가는 용감한 증거자들을 아직도 수많이 가지고 있는 저 교회, 그래 저 교회가 버림을 받아야 합니까.
5.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는 마지막 이유:
위험한 사업을 맡을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내가 하겠습니다.
4.4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성하께 보낸 청원문
“저는 조선 교회에 대하여 전과 다름없는 심경을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도를 받지 않은 소원이 있고, 사람의 눈에는 바른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길도 있나이다. 성하께서는 ‘당신들은 가서 모든 사람을 가르치시오’하고 말씀하신 분의 대리자가 되셨으니, 성하께서 저의 성소를 검토하시기를 간청하나이다. 그래서 저의 성소를 승인하시면 저에게 출발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성하의 의향을 알게 될 때까지는 제가 지금 있는 포교지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어야 할 사람 모양으로 여기서 제 직무를 채우기를 힘쓸 것이오며, 그러면서도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 모양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겠나이다.
4.5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 주재 라자로회 라미오 신부에게 보낸 서한(1829년 5월 29일 방콕)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정양모, 윤종국 역, 가톨릭 출판사 PP 137 -143
예수 마리아 요셉, 존경하올 동료 사제 귀하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영광과 후세의 구원을 얻어내기 위해 한결 같이 노력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윌 교회에 유익한 일에 관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신부인의 지식과 충고가 필요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베이찡에서 오랜 기간 체류하시는 동안 신부님은 조선 선교의 시작과 발전을 알게 디셨을 것입니다. 필경 조선의 열성적인 신입 교우들 중 몇 명도 만나 보셨겠지요. 베이찡 교회와 새로 생긴 조선 교회가 서로 연락하고자 취한 온갖 소통을 진행시키기 위해 사용된 모든 방법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교훈이 되는 새 서한집』 제 5권 조선 내용에 있는 조선 선교지에 관해 조선 선교지에 관해 흥미로운 지적을 해주신 분도 신부님이십니다. 조선 교우들의 여러 편지들을 번역하기로 자청하신 분도 주석을 달아 주신 분도 신부님이십니다. 그리고 제가 영광스럽게도 마카오에서 만나 뵈었을 때 조선 신입 교우들에 대해 매우 좋게 이야기해주신 분도 신부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 사항들에 관해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첫째 베이징으로 편지를 보내 조선 교우들에게, 선교사 한 명이 곧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할 방법이 있습니까?
둘째 조선으로 가려는 유럽인 선교사가 매우 조심하면 베이징에 들어 갈 수 있을까요?
셋째 유럽인으로서 황제의 도시에 몰래 잠입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베이징 외곽의 교우들이 살고 있는 어떤 읍내나 마을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넷째 그 방법 역시 실천에 옮길 수 없다면, 산시나 쓰촨으로 사거 거기서 조선 교우들을 기다리는 것 은 어떻겠습니까? 베이징으로 미리 편지를 보내 선교사의 주소를 알려주고서 말입니다.
다섯째 이 두 지방, 그러니까 산시와 쓰촨 중에서 약속 장소로 가장 적당해 보이는 곳은 어디인가요?
여섯째 조선 교우들이 이 두 지방 중 어느 한 곳으로라도 오는 것이 노무 멀거나 어무 어렵다면 만리 장성까지 안내할 중국인 안내자를 구할 수는 없는지요? 그래서 만리장성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저희가 서로 알아보게끔 미리 어떤 신호나 표식을 합의하고서 말입니다.
일곱째 바다를 통한 여행이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만 어렵다는 것입니까? 덜 위험하게 항해할 방법이 없을까요? 가령 아무 짐도 없이 승선해서 약속한 장소에 당도한 뒤 운임비를 지 불하면 어떨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바다에서 버림받지 않을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때 짐 과 돈은 상인으로 가장한 중국인 혹은 조선 교우에게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짐과 돈 을 맡은 사람은 다른 배를 타고 선교사보다 앞질러서 약속 장소로 가는 것이지요.
여덟째, 바다를 통해서 조선으로 간다고 할 때, 마카오에서 혹은 광둥에서 혹은 푸젠에서 출발하여 조 선에 상륙하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아홉째, 조선에 장사하러 가는 사람은 중국인들밖에 없는지요? 조선 사람들이 무역을 하기 위해 어디 가 되었든 중국의 항구로 오는 일은 도무지 없습니까?
열째, 조선 교회 심부름꾼들을 중국 대륙을 거쳐 광둥이나 마카오까지 오게 하려는 계획은 절대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까? 저는 ‘불가능’이라고 했지만, 현재로서는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까지도 모 두 시도해야만 합니다.
열두째, 위에서 제가 제시한 것보다도 쉬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신부님이 직접 알아 보아 주십 시오.
이상 많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어떻든 저는 신부님이 이 질문들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줄 수 있는 모든 위로를 여러 해 동안 받지 못하고 있는 조선 교우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가 부족한 교황님께서는 아직도 적절한 선교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조선 선교지를 우리 회에 맡기고자 했지만 우리 회는 이 제안을 수락하기 전에 기다려 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 회가 이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으나, 특히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조선 교우들이 제공하는 조선 잠입 방법이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와 관련된 정보들을 얻고자 이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샴 교구장 플로랑 주교와 상의해 주교의 동의를 얻어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 계획이 성공하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교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자 신부님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그 계획을 언급할 것입니다. 그는 신부님이 생 쉴피스 신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1829년 5월 29일 방콕에서 갑사 주교 바르톨로메오 브릐기에르 드림
4.6 조선 대목구장 임명 소칙서(1831.9.9.)
이 일을 길이 기억하기 위하여
1. 천주의 높으신 섭리로 본인의 어께에 메어진 사도직의 의무로 주의 모든 양떼의 책임을 맡고 있는 본인은, 가톨릭의 통일의 중심이 죄어 있는 이 교황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는 양들을 특별히 더 부지런히 보살펴, 영원한 목자가 강림하실 때에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할 것처럼 사도적인 보살핌으로 그 양들이 참 우리 안에 들어 있어 천상양식을 먹으러 오라고 불리 우고 거기까지 복되이 인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특히 교황파견 선교사들이 어느 날이고 마침내 조선 나라에 들어가서 그곳에 사는 교우들의 딱한 사정을 도와주고 주의 포도밭의 그 쪽 부분을 포교와 성사 집행으로 가꾸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적지 아니 비치고, 위에 말한 지방의 주민들이 중국의 다른 지방들과 연락을 취하기가 아주 드물고 또한 극난한 일이므로, 본인은 포교사업을 주관하는 로마 성교회의 공경하올 추기경 형제들의 권고로 지금 당장 조선 나라를 새로운 교구로 설정하고, 거기에 북경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교구장을 세우는 것이 적당한 줄로 생각합니다.
3. 그러므로 본인은 자진하여, 그리고 확실한 지식과 깊은 고려 끝에 교황의 충만한 직권을 가지고 이 교황 교서로써 조선왕국을 지금 당장 새교구로 설정하는 바이며, 이 교구에 북경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교구장을 세울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중국 각 지방이나 중국에 인접한 지방에 있는 교구장들에게 관례적으로 부여되어 온 특권을 모두 또한 일일이 교황청에서 간택할 이런 교구장에게 전기한 본인의 권한으로 부여하는 바입니다.
4. 이 편지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결정적이요 유효하고 효과적인 것이 되고, 그 전적인 효력을 받아 향유할 것을 결정하며,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관계 당사자들이 전적으로 도움을 베풀어 주며, 모든 사람들이 틀림없이 지킬 것을 결정합니다. 또한 모든 상임 혹은 위임재판관과 교황청 관계자들도 이 친서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여야 하며, 누구든 어떤 권위로나, 알고 혹은 모르고 이 친서와 다르게 행하려고 하는 일이 있으면 그 것은 무효하고 쓸데 없는 것이 될 것임을 결정하는 바입니다.
5. 이 친서의 효력은 이왕에 있은 교황의 규정과 법칙으로 이 친서의 정한 바와 반대되는 것의 계약을 받지 않으며, 그 밖에 특별하고 명백하게 언급되고 제한되어 마땅한 다른 규정과 벌칙으로도 제약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 마리아 대성전에서 어부의 지환(指環)을 찍어
1831년 본 교황 재위 제1년 9월 9일 반포함
4.7 조선 교구의 설정과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교황 그레고리오 16세)
1831년 9월 9일자 교황 친서: 공경하올 형제 갑사 주교 발도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보냄(1831.9.9.)
경애하올 형제여, 인사와 교황축복을 받으시오.
하늘에서 본인에게 맡겨진 목자의 직분은 본인으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천주의 계명의 길로 인도되고, 또 자기들의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얻는 데 있어 적당한 도움을 받도록, 천국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연구를 하여 돌보도록 밀어 줍니다. 그러므로 샴의 교구장인 소조뽈리스 주교의 보좌주교이며 공경하올 형제인 그대가 조선 나라에 들어가 조선 교우들의 궁핍한 사정을 고려하고 또한 샹의 교구장은 자기 보좌주교를 삼을 만한 적당한 신주를 따로 구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이유를 생각한 끝에, 추기경들의 의견에 따라 그대의 청을 너그러이 들어, 아무 지장이 없는 한 새 포교지로 떠나기를 허락하며, 이 일을 다행히 또한 복되게 끝내도록 나의 이 친서로서 지금 그대를 본 일과 교황청의 자의로 조선 나라의 교구장으로 선택하고 임명하고 정하여 중국 지방과 중국에 인접한 지방에 관례적으로 부여되는 모든 특권을 부여하는 바입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한 포교성성의 추기경들의 권위는 언제나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관련이 있거나 관련이 있을 모든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이 일에 있어서 그대에게 흔연히 순종하라 하였고, 또한 그대가 주는 유익한 교훈과 명령을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효과적으로 이행 하도록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불복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대가 정당하게 내릴 선고나 벌을 재가할 것이며, 주의 도우심으로 만족할 만큼 어김없이 지켜보도록 하였습니다. 이 친서의 효럭은... 제한을 받지 않으며...
로마, 마리아 대성전에서 어부의 지환을 찍어
1831년 본 교황 재위 제1년 9월9일 베르넷디 추기경
4.8 포교성성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님께 보낸 서한(1831년10월1일 로마)
지극히 공경하옥 주교님
조선인 교우들을 위해 대단히 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모습을 역력히 알아 볼 수 있는 주교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난관은 조선에 있는 새 영세자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고, 성사가 거행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것입니다. 포교성성은 겸손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폴리 신학교의 중국인 신학생 두 명이 조선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으며 또한 주교의 인호를 지니고 그들의 일을 지도하고 주교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럽인 선교사도 확실히 선발될 것입니다.
포교성성의 판단은 조선을 다른 어떤 주교든지 그의 예속으로부터 독립시켜 조선에 새로운 대목구를 설립하자는 것이고, 이 새로운 감목 직분을 주교님께 맡기시는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 교황이신 그레고리오 16세 성하께 달렸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소칙서 형태로 사도서한을 인준하시어 발송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칙서에는 사도적 권한으로 새로운 교황대리 감목구가 설립되어 귀하께 그 임무가 맡겨지며, 귀하께는 중국의 교황 대리 감목과 동일한 권한이 부여된다는 구절도 들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마카오의 경리인 라파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맡겨집니다. 포교성성은 필요한 것을 준비하도록 할 것입니다. 미 모든 것은 복음의 찬미가가 조선에서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덕분으로 주교님과 함께 떠날 중국인 신학생들 가운데 한 명은 유 파치피코로, 지난달인 1월에 나폴리 신학교에서 떠났고, 다른 한 명은 같은 신학교 학생인 주 요셉으로 산시 대목구 소속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교님께서 포교성성의 담당자와 함께 일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때 주교님께 맡겨져 시작된 사업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마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교님께서 건강하시고 복되시기를 하느님께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로마 포교성성에서. 1831. 10.1
부재중이신 장관 추기경을 대신하여 지극히 성실한 당신의 형제인 비서 드림
4.9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첫 서한(1832.11.18. 마카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교황님께서 여러분이 서한을 통해 청한 유럽인 주교를 어떤 중국인과 함께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있는 양들에게 목자가 없다는 소식이 여러분들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우리는 조국을 떠나 다른 대목구를 맡고 있었으나, 교황님께 서한을 올려 빵을 청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쪼개어 나누어 줄 사명을 지닌 주교들과 사제들을 파견해 주실 것을 줄곧 청해 왔습니다.
그러니 빨리 우리에게 오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출발하였고, 여행길에서 여러분이 우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확실한 신호를 보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도움을 믿고 복되신 동정녀와 성 요셉의 전구와 성 미카엘 대천사의 보호를 청하십시오. 그러나 길에서 원수들에게 간파당하지 않도록 거듭 주의하십시오.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위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매일 기도 중에 복되신 동정녀와 모든 천사들의 보호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구원의 해 1832년 윤9월 26일,
조선의 교황 대리 감목
〈공지사항〉
1. 6월 모임은 성지순례입니다.
날 짜: 6월 28일 주일
순례지: 양근 관아, 순교터,
한양 조씨 세거지
(조동섬 유스티노, 조상덕 토마스 순교자, 조숙 베드로 복자 생가 및 유택)
일정: 양평성당 (10시 30분 미사 참석) → 양근 관아 → 순교터 → 능말 부락으로 이동
서울 출발: 용산역에서 8시30분 출발(8시20분까지 용산역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