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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천공항에서 9시간 반쯤 걸려 두바이공항에 도착하였다. 2시간 반 이후 요르단의 암만으로 출발해야 했기에 면세점을 둘러보며 두바이공항의 분위기를 느껴보았다.
발이 너무 넓으신 우리 주임교수 김세원 교수님, 인천공항에서 보건복지부 기자였을 당시 알았던 어떤 분이 ‘오! 김기자’ 하고 부르더니, 두바이 면세점에서는 몇 십년 전 대학동창과 해후를 한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별명은 생각나 ‘어? 짱가!’ 하더니 반가워하신다. 참, 아무리 발이 넓어도 그렇지 그 넓은 외국공항에서도 지인을 만나니 정말 마당발이시다. 두바이공항은 정말 크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천천히 걸어가 보니 거의 15분이 걸린다. 인천공항에 들어설 때면 손전화를 로밍하려고 카운터로 걸어갈 때마다 왜 이리 먼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런 최첨단 공항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 남루한 옷을 몸에 두른 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벤치 아래 나란히 누워 아무렇게나 잠을 자고 있는데, 아마도 이주 노동자들이나 순례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만 행 게이트 앞에 있는 take out coffee shop에서 좋아하는 카페라떼를 시키자 생각보다 많은 양이 든 라떼가 나오는데 맛이 참 좋아 기분 좋았다. 시간이 되어 게이트로 들어가자 다시 순환선을 타고 이동을 한다. 열차에서 내리니 다시 버스를 타고 멀리 이동한다. 도대체 이 공항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런데도 부족해서 제3터미널을 짓고 있다 하니 두바이가 얼마나 분주한 도시인지 알 것 같다.
아랍에미리트항공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러 번의 해외여행을 통해 좋은 비행기, 나쁜 비행기를 골고루 타보았는데 에미리트항공은 최고인 것 같다. 일단 시설이 최고요, 스튜어디스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와 비슷하게 친절하나, 그보다는 조종사의 랜딩 실력이 최고인 것 같다. 언제 착륙을 했는지 모르게 땅에 내려앉는 기술은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비행기 중 키 큰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비행기는 세부퍼시픽 같은 저가 항공이다.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의 무릎이 앞좌석에 닿을 정도고, 서비스는 물 뿐이다. 맥주고 뭐고 다 사 먹어야 한다. 필리핀 비행시간 4시간이 아니면 도저히 더 이상 탈 수 없으며 승무원도 별로이고, 무엇보다 키 186㎝의 우리 서교수님이 타기에는 ‘impossible’한 비행기다. 또 하나의 저가 항공이라면 라이언에어를 경험해 보았다. 인도네시아 국내선으로 애용되고 있는 항공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라이언에어 사장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아무래도 싸서 그런지 점점 매출이 늘어난다는 얘기였지만 그 비행기는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시킨다. Head rest 깔개는 비닐로 되어있고, 우리나라 70년대 시내버스처럼 낙서가 가득하고 면도날로 좍좍 그어놓아 보기도 좋지 않고, 뜨지도 않으면서 승객 태우고 1시간 동안 안내방송 하나 없이 에어컨도 안켜고 쪄죽이면서 사과 한마디도 없는 항공이다. 15년전 수마트라에서 자카르타로 올 때는 멋도 모르고 20명 태우고 오는 경비행기를 탔었는데 이게 또 자주 떨어지는 프로펠라라는 소리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어쨌거나 아랍항공은 최고다. 대한항공보다 평가가 좋다고 한다.
1. 요르단 도착
두바이에서 암만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반이 걸리는데 잠이 오질 않아 아랍지도를 그리고 공부를 했다. 암만에 내리니 허름한 공항이 인상적(?)이다. 비자 대행을 하는 현지 가이드가 온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 사람이 늦어도 한참 늦는다. 모두가 불평한다. 이놈들이 왜이리 안 오는 거야… 한 30분도 더 기다렸을까? 이번 여행단에 가장 책임을 느끼고 계실 서교수님이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신다. 막 화가 터지려는데 어디서 노란옷을 입은 이쁘고 키크고 날씬한 여자가 다가온다. 그 여자가 비자 대행 현지 가이드라고 한다. 갑자기 서교수님이 화를 거두시고 웃음을 지으신다. 우리는 모두 그 모습을 보고… 우와 뭐야, 교수님 여태 화내시다가 이쁜 여자가 나타나니까 태도를 바꾸시네… 등뒤로 교수님의 말소리가 들린다. 역시 세상은 여자 남자가 같이 살아야 한다 뭐 그런 말이었을 거다.
짐을 찾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장인환 상무님의 짐이 안 나온 것이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내일이나 되어야 호텔로 도착한단다. 어디를 경유할 땐 꼭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 그런데 장상무님 정말 사람 좋으시다. 화도 안 내시고 A! C라는 말도 한마디 없으시니 어찌 호인이 아니랴… 짐을 찾아 나오니 한국인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다. 이쁘지는 않지만 중동에서 가장 날씬한 이수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참말 살이 많던데 중동에서 가장 날씬하다고 한다.ㅎㅎ 어찌 이런 먼나라 요르단에도 한국인이 살고 있는지 정말 한국인은 대단하다. 이 아가씨, 가이드 생활 몇 년인지 전달력 좋은 발음으로 참 설명을 잘한다. 물론 처음엔 다 외운 것이겠지만, 외운 것이 하도 외워 완전히 자기 것이 된 모습은 감탄할만 했다. 비 스마트 식으로 하면 shadowing이 완벽히 된 것이다.
요르단은 지중해의 동남쪽,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로써, 동쪽으로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 유역의 인류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인접하여 있고, 서쪽으로는 고대 인류문명이 번창했던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를 접하고 있는 주요통로의 요지이다. 또한 세계의 3대 단일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회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요르단의 면적은 91,880㎢로, 요르단의 북쪽과 동쪽에는 거의 사막에 가까운 요르단 고지가 자리잡고 있다. 서북쪽은 이라크, 동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접해있다. 요르단 대지는 빗물에 의한 협곡이 많지만, 시리아 국경 방면은 거친 풍토이며, 남쪽은 표고가 1,727m에 달한다. 동요르단의 고원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요르단 지방의 산들이 양떼처럼 뻗어있는 것이 보인다. 그 서요르단 지방과의 경계선을 달리는 것이 구르지구대로 이곳은 요르단 강 골짜기, 사해, 아라바지구로 뻗었다가 마지막으로 홍해에 이르고 있다. 반면 요르단 강 서쪽은 현재의 이스라엘이다. 국토의 5분의 4가 불모의 산으로, 풍부한 것은 광물자원 뿐이다. 사해의 칼리염, 암만지방의 인산염 등이 중요한 수출품이다. 이밖에는 직물, 가죽, 시멘트업 등이 발달되어있다.
요르단 주민의 대부분은 아랍인으로 약간의 아르메니아인 등 소수 민족이 섞여있다. 또한 수니파이슬람 교도이지만 소수의 기독교인도 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때 대량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요르단 서안에서 동안으로 이동하였으므로 정확한 인구와 분포는 알 수 없으나 60만명 이상이 이스라엘 점령의 서안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동안에 있는 주민도 대부분은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서안에서 이동한 팔레스타인이고 동안에는 유목민도 많다. 언어는 아랍어이다.(여행사 사전자료)
요르단의 수도 암만은 아라비아 고원의 서쪽끝, 높이 약 800m의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암만은 요르단강과 인접해 있어 BC 5세기부터 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다. 성서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하나, 유적으로는 몇 개의 분묘만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테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고, 그 후 로마 비잔틴 시대에는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아밀 압둘라가 이곳에 정부를 수립하고 수도로 정했으며, 팔레스타인 전쟁 때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세력의 중심지로 아랍군단이 주둔하기도 했다. 로마시대 유적이 많으며, 특히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과 헤라클레스 신전 및 해안에 있는 님프의 폐허가 유명하다. 유적은 대부분 석조건물로 이는 도시의 남서쪽에 있는 대리석 채석장과 연관이 있다. 예로부터 성지 메카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숙박지로 발달하였다. 현지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포함하여 성지를 돌아볼 수 있는 순례철도가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여행사 사전자료)
2. 사해 (Dead sea)
암만공항에서 한 2시간 넘게 걸려 우리는 dead sea, 사해에 도착했다. 사해체험을 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다. 온갖 맛난 음식이 있어 다이어트를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건 전통음식이니 먹어봐야지, 이건 특이하니 먹어봐야지,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먹어봐야지, 한국에서 안먹는 맛있는 빵 디저트니까 먹어봐야지 이러면서 많이 먹고 말았다. 요르단은 모든 동남아도 그렇듯이(더운 나라는 그런 것 같다) 음료는 다 사먹어야 한다. 아침에 호텔에서 물과 커피가 무료로 제공되지만 점심, 저녁은 모두 마시는 거라면 사먹어야 한다. 우리는 커피 빼고 물을 사먹었다. 결코 날씬하지 않은 가이드는 우리에게 디저트 초콜렛무쓰가 맛있다고 권한다. 지난 4개월간 6㎏을 빼는 대장정에 성공한 나의 다이어트 지론은 맛있는 것을 한 번 자제할 때마다 살이 빠진다는 것이다. 살을 뺀 달콤한 결과를 아는 사람은 다시 살찌기 힘들다. 뱃살이 별로 없어 움직이기 가뿐한 느낌을 알면 절대 초콜렛무쓰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리라.
점심을 먹은 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사해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해는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에 있는 호수로서 해면은 해발 418m이고, 지표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동아프리카를 구분하는 대지구대 북단에 있는데 사해를 포함한 요르단 계곡은, 백악기 이전에는 바다와 연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해저의 융기에 의해 팔레스타인 부근에 고원을 형성했고, 동시에 요르단 계곡 부분에 단층을 일으켜 생겼을 것이라 한다. 일반적 해수의 염분 농도는 6%이나 사해는 25%이다. 1리터 속에 230~270g의 염분이 들어있고, 밑바닥은 300g을 초과한다고 한다. 흘러나가는 물은 없고, 1년내내 물이 증발한다. 내륙의 거대 호수의 특징으로써 주위의 토양에 포함되어 있는 염분이 흘러들어가 호수에서 응축되어 염호가 형성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해의 경우엔 그 밖에 염분이 섞여있는 요르단강 주위의 온천에서 염분이 공급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 사해의 풍부한 염분에서 채취되는 염화칼륨을 이용한 화학비료의 생산이 활발했으며, 주변에 천연가스가 매장되어있다. 요르단은 1990년 이후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여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국이 관광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사전)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둥둥 떠 있어 나는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떠 있는 줄 알았으나 거기서는 정말 모두가 둥둥 뜨는 것이다. 가이드가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으나 바닷물이 눈에 들어가고 말았다. 와~ 얼마나 대단히 쓰라리고 아팠는지 당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20분쯤 사해의 진흙을 바르고 바다에 떠 있다가 샤워를 하게 되었다.
3. 제라쉬 (Jerash)
말로만 듣고 책으로만 보았던 사해를 둘러보고 다음은 제라쉬로 향한다. 제라쉬는 암만에서 서북쪽으로 48km 떨어져 있는데,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면서 도시로 성장하다가,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장군인 Pompey에게 다시 정복되면서 로마의 속주가 된다. 로마제국의 동방 거점으로 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번성하다가 쇠퇴하기 시작, 5세기에 그리스도 비잔틴에 속하게 되었다. 614년에 페르시아에 정복당하고, 636년에 아랍에 정복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줄고 쇠퇴했다. 지진으로 도시가 함몰되면서 잊혀졌다가 19세기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에 의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거대한 열주와 로마광장, 대형 목욕탕, 완벽한 하수시설 등 로마 도시 흔적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문화유적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여행사 자료) 사실 제라쉬로 향하면서 가이드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비행기에서 거의 잠을 못 잔 나는 피곤하여 눈을 감고 있다가 많은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제라쉬에 도착하니 전통 물건들을 파는 상점을 거쳐 포장되지 않은 거리를 먼지 풀풀거리며 한 1㎞를 걸어간다. 여기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개선했던 개선문이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로마의 황제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서기 117년 8월 9일부터 138년 7월 10일까지 재위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9권 ‘현제의 세기’에 있고,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본국 로마에 머물렀던 것은 겨우 7년, 나머지는 모두 속주를 돌아보느라 외국에서 보내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공정한 세제를 실시하려고 애쓰며 빈곤 가정의 자녀들에게 주는 양육 자금인 ‘알리멘타’, 중소규모의 농업이나 수공업에 지원해 주는 저리융자, 원로원 계급에 속하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한 이들에 대한 원조, 그리고 곤궁한 모자가정에 주는 원조 등을 창설한다.(로마인이야기 9권) 현재 있는 이 모든 것이 로마시대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선조에게 배워야 함이 마땅하며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은화와 동전을 발행하여 그런 통화에 관용(Pietas), 화합(Concordia), 정의(Justitia), 평화(Pax)를 새겨 넣었다.(로마인이야기 9권) 이미 이런 단어도 그 당시에 흔히 있던 말이었나 보다.
시오노나나미에 의하면 그녀는 로마사를 접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로마인들의 일관된 지속성이라고 한다. 아피아가도가 그 전형인데 예를 들면 아피우스가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가도를 건설하면 그 뒤를 이은 사람은 카푸아에서 베네벤토까지, 그 다음 사람은 베네벤토에서 타란토까지, 그 다음 사람은 타란토에서 브린디시까지 가도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아피아가도인데 완성된 뒤에도 로마인의 일관성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제라쉬를 돌아보면 로마인들이 닦은 길이 있다. 돌을 넙적하게 늘어놓아 길을 닦는 것인데 제라쉬의 이 길을 보니 언제나 가는 곳마다 길을 닦고 보수에 힘썼던 로마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얼마나 튼튼하게 잘 닦았으면 2천년이 지나고도 여태 쓸 수 있을까… 그들은 유지보수도 신축 못지않게 훌륭한 공공사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가 점령한 요르단에 와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가 제국 각지를 순행한 목적은 방위선을 돌아다니며 쓸모없다고 판단된 것은 폐기하고, 필요한 것은 살려서 제국의 안전보장체제를 정비하고 재구축하는 것이었고, 같은 맥락에서 법령을 모아 정비하고 로마사회의 규범인 로마법을 재구축했다. 131년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법대전을 완성한다. 시오노나나미는 하드리아누스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제국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4년전 오랜 시간을 걸려 읽은 15권의 <로마인이야기>가 이제와 여기서 새로운 느낌을 주리라고는 정말 몰랐다. 대형 목욕탕의 흔적도 있다. 목욕탕을 짓는다는 것은 상수도를 정비한다는 것이니 문명의 흔적이다. 커다란 교회터와 커다란 원형극장도 있다. 원형극장의 가운데 서서 말하면 그 말소리가 사방에 잘 들리도록 설계되어있다. 마이크가 없던 그 시절에는 잘 울리는 목소리나, 큰 목소리를 가진 자가 장군도 하고 정치가도 했을 것이다.
제라쉬를 돌아볼 때 D사장의 구찌가방을 돌아가며 들어주는 K사장님, L사장님의 동료애에 감동먹었다.ㅋㅋ 귀중품은 버스에 놓지 말라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귀중한 구찌가방을 들고 나온 D사장님은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로 ‘오빠, 이것 좀 들어 줘!’ 한다. 그러면 우리 연약하고 연세든(?) 오빠 사장님들이 꼼짝 못하고 그 가방을 들어준다. 여자 가방을 팔에 끼고 다니는 폼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다.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사해의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비누며 팩 등 목욕용품과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물건들을 돌아보았다. 암만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막을 유유히 걷는 낙타들과 양떼들을 보며 내가 요르단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요르단의 집들은 모두 꾸미지 않은 사각형 시멘트 벽돌집이 주를 이룬다. 그 안은 더 허름하다고 한다. 어떤 집들은 베두인들이 목축을 하러 사막을 돌아다닐 동안 비어있다가 겨울이 되어야 주인을 찾는다고 한다. 건물의 색깔이 주로 시멘트 색이니 국민들의 정서도 메말라 있을 것 같다.
Le Meridien 호텔에 도착한 요르단에서의 첫날 밤, 저녁식사 후 9시 20분에 323호에 6명의 사장님이 모였다. 어젯밤 기내에서부터 버스에 이르기까지 잠을 못자고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고 있기에 너무 피곤했는데 또 모이고야 말았다. 나머지 분들은 도저히 참석 불가능인 것 같았다. 나는 전혀 잠을 못자 비몽사몽 하다가 기억나는 말이라곤 나이 얘기를 하다가 50대 중반을 넘겨 반올림하면 60이 되신다는 J사장님이 열심히 살다보니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고… 그러자 순발력 있는 D사장이 ‘나는 열심히 살지 말아야지’했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피곤해서 일찍 도망 나와 잠을 청했다.
4. 페트라에서 (Petra)
10월 12일은 요르단의 페트라 행이다. 호텔에서 아침 8시 20분에 출발하게 되었다. 페트라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해발 950m의 산악도시로 최고 높이 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역로의 교차지점에 있어서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며 번영을 누렸다. 시가지 입구는 동쪽의 시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3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뛰어난 기술로 세워진 건축물과 수로드의 유적이 남아있다. 페트라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도 ‘인디애나 존스’ 3편을 찍은 곳이라고 하면 ‘아하!’ 하고 아는 곳이다. 이들은 서기 106년까지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면서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고 발전시켜 절정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서기 106년에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고, 로마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영예로운 시기는 점차 막을 내렸다고 한다.(여행사 사전자료)
후기 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화되면서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요르단과 남부시리아의 종교적 중심도시로 자리하다가 서기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은 서기 313년임이 기억난다.
똑똑한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페트라는 BC 7세기에 시작되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인 야곱과 에서 중, 에서의 후손이 정착한 곳이었다고 한다. BC 6세기에 나바테인들이 정착하게 되어 알려지게 되었으며, 나바테인들이 페트라의 주도권을 가진 BC 1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통행세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페트라로 가는 여정 중에 앞에서 말했듯이 다마스커스에서 시작되는 철도를 보게 되는데 성지순례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용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요르단에 관한 영화 5편을 소개하는데 ①인디애나 존스 3편, ②미이라 2편, ③Kingdom of heaven, ④아리비안 로렌스, ⑤Exodos가 그것이다.
로마가 106년에 들어오며 페트라를 지배하게 되자 무역로는 시리아 쪽으로 변하게 된다. 여행사에서 준 자료에, 가이드의 이야기에, 내가 찾은 자료를 더하면 어느 정도 깔끔한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나바테인들은 무역로를 상실하며 사라지게 되고, 비잔틴시대가 도래하고 AD 7세기에는 페트라의 입구를 봉쇄하게 된다. 나바테인들은 무덤을 견고하게 만들고 중요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이는 사람이 영원히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라진 페트라는 1816년에 재발견되게 된다. 스위스의 부룩하르트라는 독일 유학생이 유럽 탐험대가 발족함에 따라 터어키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며 왕들의 보물찾기를 하는데 우연히 아랍 제사행렬에 참여하며 유적을 발굴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물은 발견되지 않아 아마 도굴되었을 것이라는 설과 왕의 보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페트라 이전의 지명은 셀라라고 하는데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고, 성경에는 셀라라고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이 역시 바위라는 뜻이다.
페트라로 가는 버스에서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본다. 지평선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죽어도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그 사막을 보며 양들은 뭘 먹을까 궁금했는데 사막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사하라 같이 모래만 있는 사막이 있는가 하면, 양들이 먹는 약초가 나있는 사막도 있다고 한다. 물론 양들은 약초가 나있는 사막에서 풀을 뜯으며 살아간다. 베드윈족은 많이 줄어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양같이 순하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양은 너무나 순해서 목자의 말을 너무나 잘 들으며 따라서 아무리 많은 양을 쳐도 목동은 하나밖에 없다. 양들은 앞의 리더가 절벽에서 떨어지면 같이 떨어질 만큼 순종적이라고 한다. 양떼들 뒤에 따라가는 목동은 말을 탔으며 아무 걱정없이 양들의 뒤를 따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웅다웅하고 사는 우리와, 양떼를 치며 사막의 목초와 물만 필요한 목동들의 삶이 교차되었다. 그 와중에 가이드가 요르단의 결혼제도에 대해 얘기해 주는데 요르단에서는 결혼 때 2가지의 계약서를 만든다고 한다. 주로 중매결혼을 하며 중매인은 부족장 등이 된다고 한다. 계약서는 약혼식 계약서, 결혼식 계약서인데 이 내용은 이혼하면 위자료, 양육비 등을 준다는 것이다.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문화에서 여성을 위함이라 한다. 결혼 비용은 암만의 상류층은 2,500만원에서 7,000만원, 유목민은 200만원에서 800만원이며 3일간 피로연을 연다. 25,6세가 결혼 적령기라고 한다.
요르단에는 2개의 십자군 성지가 있어, 페트라 가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십자군을 언급함으로서 잠시 십자군전쟁을 돌아보게 되었다. 십자군원정은 서방교회가 비잔틴을 도와주며 1차부터 8차까지 일어나게 된다. 셀주크터키가 1078년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빼앗긴 성지를 찾는다고 십자군이 결성된다. 제1차 십자군원정은 1099년에 시작되는데 이때의 승리가 유일한 승리이다. 십자군전쟁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해도 안가면서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그저 외우기만 했으므로 외우고 잊어버리고 외우고 잊어버리기 일쑤다. 비 스마트 가족의 여행계가 계속 추진되어 우리가 내년쯤 여행을 하게 되면 어디를 가든, 그리스가 되든 로마가 되든 동로마와 서로마는 나올 것이고(서로마 멸망 476년은 얼마나 중요한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는 구분점이다.), 십자군원정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가야만 하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페트라 가는 길은 서너 시간이 걸리므로 10시 반쯤 휴게소에 들르게 되었다. 가이드는 휴게소의 물건은 중국제가 많아 살게 없고, 질도 별로 좋지 않다고 귀띔을 하며 커피나 홍차를 팔아주라고 한다. 아무 것도 안팔아 주면 자기가 힘드니 차를 마시자고 한다. 그냥 커피를 달라고 하면 아라비아 커피를 줘 그걸 먹고 이틀 동안 잠 못잔 사람도 있으니 꼭 네스카페를 달라고 하란다.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카푸치노 먹고, 인도네시아 호텔에서 카푸치노 먹고 하루밤씩 꼬박 새워본 적이 있는 나는 절대 토종 커피는 안마신다. 그래서 네스카페를 달라고 했는데 이것도 어찌나 강한지 서너번 물을 섞어야했다. 휴게소 화장실을 사용할 때는 차를 마시지 않으면 험한 인상을 가진 아저씨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인상을 쓰기 때문에 돈을 내야 한다고 한다. 휴게소에서 나와 1시간 후쯤 페트라 근처의 메리어트 호텔에 도착하였다. 점심식사가 준비되어있어 맛있는 점심을 먹었는데 참 이상한 것은 외국에 나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김치가 빠지면 허전한 것이다. 한국 사람은 모두 그럴 것이다.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는 김치를 외국 나가면 꼭 찾게 되는 것…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 일행 중에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최진실의 목소리로 유명한 권희덕 성우가 계신데, 여행 중 이 언니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 먹을 것이 나온다. 술이 있으면 멸치가 나오고 스팸이 나오고, 밥을 먹으면 김치가 나오고 아마 그 언니의 트렁크는 우리를 먹이려고 바리바리 싸온 온갖 신토불이 음식으로 가득찬 것 같았다. 가이드는 성우 언니가 싸온 김치를 먹으며 누구에겐가 전화를 하며 자랑을 한다. 나 지금 김치하고 밥 먹고 있거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뜬금없이 김치 같은 마누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남편은 한국에서 별로 안하던 말을 여행중 문자로 보내왔는데 definitely miss you…라고 ㅎㅎ. 그래… 내가 있을 때는 많이 못 느낄 거야. 하지만 외국에 나가고 없으면 이 여자가 잘 있나, 아프지는 않나 하며 몹시 걱정되고 그리워지는 것이다. 매끼 있어야 하는 김치처럼… 그래 김치가 되는 거야. 남편에게 맛있는 김치가 되어 평소에도 없으면 섭섭하고 매일 식탁에 올라와야 하며,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없으면 밥을 못 먹는… 김치 같이 맛있고 꼭 있어야 될 존재가 되자… (너무 유치했나?)
페트라에 도착하여 4㎞쯤 걷는다기에 우리는 햇빛을 가리는 모자로 무장하고 가이드를 따르기 시작했다. 다리가 좋지 않은 권희덕 사장님은 나는 못 간다고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동갑내기의 L사장님이 오른쪽, M사장님이 왼쪽 팔짱을 끼고 희덕 언니를 모시고 간다. 완전 쌍두마차다. 그러자 앞에서 오는 요르단인들이 당신의 남편들이냐고 묻는다.ㅎㅎ 오고가는 마차와 낙타들로 먼지가 뿌연 골목들을 지나 마차를 피해가며 가끔씩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길이 있으면 양쪽으론 수로가 파져있다. 물을 공급했던 곳이다. 어떻게 사막에 이런 도시를 세웠을까… 어떻게 바위를 이렇게 깎았을까… 궁금하다. 페트라는 사암으로 되어있어 조각이 쉬운 편이라 한다. 신상도 사람도 낙타도 조각되어 있다. 물론 많은 부분 훼손되어 있으나 그 옛날의 영화를 되짚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여기가 시장통이었어요 라는 설명을 들으니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우글거리며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지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모두 아랍상인들의 복장을 하고 낙타를 끌고 말을 끌고 나와 유유히 지나가며 물건을 흥정하고 지나가다가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을테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겠지… 새를 파는 이도, 말을 파는 이도, 보석을 파는 이도, 빵을 파는 이도 있었겠지… 200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그 시스템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옛날도 지금과 똑 같은 것이다. 이 어찌 재미있지 않으랴…
페트라에는 500여개의 무덤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크고 인상적인 곳이 왕족의 무덤이다. 아니 이곳이 무덤이란 말인가? 바위를 깎아 만들었을텐데 그 바위들이 모두 무지개빛을 띤다. 인공이 아닌데 이런 색을 내는 암석도 있단 말인가? 여하튼 희한한 동네이다. 자유시간을 배정받아 밑에까지 내려가 보았는데 사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어디가 the Silk tomb, the Corinthian tomb, the palace tomb, Sestius Florentinus tomb인지… 그러나 이런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암벽 도시는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집에 가서 좀더 공부할 생각을 한다. 그래야 나중에 비 스마트 식구들 올 때 해줄 말이 더 많겠지…
올라가는 길엔 말을 탔다. 가이드가 말 한 마리당 2불씩 주라고 당부를 하였다. 더주지 말라고… 마부와 영어로 말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니 말도 하지 말라고… 더워 죽겠는데 말을 타고 올라가니 얼마나 행복한가… 나와 K사장님 앞에는 L사장님이 가셨다. 마부는 적당할 때 말을 달리게도 하고 걷게도 한다. 내릴 때 우리 마부가 나에게 5불을 내라고 한다. 내가 말을 타기 전에 2불이라고 했는데 왜 더 달라고 하냐 하자 3불을 달라고 한다. No 하자 앞에 간 몇 명의 당신 친구들은 다 3불을 냈는데 당신은 왜 2불을 주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자 화난 얼굴로 ‘OK, 2 dollars!’ 한다. 앞을 보니 10불짜리 밖에 없는 L사장님이 10불을 뺏긴 채 거스름돈이 없다는 마부에게 인상을 쓰고 있다. 앞에 간 동료들은 왜 3불씩 주었는지 잔돈 없는 동료들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래서 가이드가 꼭 모두 2불을 주라고 했나 보다. 결국 L사장님도 동료들의 도움으로 2불을 주게 되었다. 올라오며 나이든 오빠들 왜 그랬냐고 핀잔을 주자 그 분들 曰, 아, 말이 다르더라구… 더 멋있더라구… (참, 영어가 안되어 그냥 달라는 대로 주신 건 아니고요?)
호텔에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요즘 치료중이라 밤이면 약을 바르고 있는 얼굴이 사막의 열기에 화끈거려 일찍 자려고 술자리에 합석하지 않자, 빨리 오라고 전화가 여러 번 울린다. 내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더 이상 부르지 않는데 간신히 잠이 들자 어느 분의 전화 벨소리 울려 잠깬 후 1시 15분부터는 전혀 잠을 못 이루었다. 여행 중 가끔 있는 일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고 나의 주량은 딱 맥주 반잔이며, 오로지 커피만을 좋아하며, 좋아하지 않는 술을 억지로 권하는 사람과는 그 날로 웬수(?)가 된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아도 그냥 말로만 해주어도 믿어주었으면 한다. 술을 한 잔이라도 먹으면 바로 두드러기가 난다는 나의 말을 믿어주었으면 한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술을 잘먹는 재주를 주지 않았을까 하고 한탄까지 나올 지경인데 내 후배 김상국은 그런 말을 했었다. “그거 잘해서 뭐하려고? 술을 못먹는 장점도 있구만…” 그래… 자기들이 술을 좋아할 자유가 있으면 나도 술을 먹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을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술을 먹지 않는 이슬람 국가가 좋다.
다음날 10월 14일은 두바이 행이다. 호텔에서 암만공항까지는 40여분이 걸린다. 체크아웃을 하는데 미니바에서 맥주라도 꺼내 드신 분들은 한 캔에 14불씩 주어야했으니 참 술값도 비싼 나라다. 똘똘했던 가이드 아가씨와 인사를 하고 공항에 들어간다. 이상하게도 출국심사는 금방 끝났다. 면세점을 잠시 둘러보고 비행기를 탔다. 2시간 반 동안, 여러가지 생각이 오간다. 비행기가 뜰 때면 언제나 아련하다. 이 나라 언제 또 오지? 아마 못 올 확률이 더 많겠지? 많은 국가가 산도 있고 들도 있는데 요르단은 뿌연 나라다. 거의 사막이므로 비행기가 뜨거나 내릴 때 삭막한 느낌이 드는 나라다. 그러나 요르단은 태고적 신비를 가지고 있는 듯, 제라쉬나 페트라나 완벽하게 보수하지 않고 그냥 둔 모습에서, 유유히 사막을 거니는 양떼에서 낙타에서, 꼭 다시 오고 싶은 나라였고 요르단 일정을 넣어준 고대 국제대학원에 감사했다. 유유하게 차도로 들어왔다가 차를 보고 황급히 도망가던 낙타와 사막의 텐트와 그 끝없는 사막이 눈을 감아도 떠오른다.
권희덕 사장님은 오지 못한 원우들을 위해 요르단 면세점에서 사해의 원자재(?)로 만든 목욕 제품을 산다. 무거운데 왜 한국으로 갈 때 사지 왜 여기서 사시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두바이에서 우리보다 하루 일찍 떠나는 일정이었으므로 아마도 본인 스스로 좋은 선물을 고르고 싶으셨나 보다. 나는 혹시 페트라에서 오는 휴게소에서 보았던 낙타와 양가방을 여기서 살 수 있을까 하고 돌아보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 거기에서 사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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