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頭谷][머리실]소개
우리마을은 운남면소재지에서 망운면쪽으로약3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하묘리에 소속되어있다 하묘리는[둔전,신촌,팔학,원하묘]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워졌다.
하묘리는조선조 초기에 영광군 고잔면에 속했다가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영광군 망운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1906년에 무안군에 편입되었다가 곧 1910년 목포부에 편입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곡,팔학,도림,둔전,금산을 합병하여 다시 무안군 망운면으로 돌아왔다. 이후 1983년에 운남면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두곡[頭谷]은 하묘1리에 속하는마을로 큰동네와,샘건너,꽃회사마을로 이루워졌다.두곡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가지가있다.
하나는 망운과 운남의 경계지점으로 망운에서 운남으로 들어오는 첫머리에 마을이 있다하여 머리실이라 붙인 이름이고 두 번째는 마을의 지형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동각골, 양각골, 등의 지명이있으며 옆마을 둔전은 풍수지리로 봤을 때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하고 있다고하여 와우정이라고 불리우고있어 이 지역은 소와관련이 깊은 마을들이기 때문이다.
이마을의 입향조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마을유래지의 기록에 의하면 밀양박씨 박화진[朴華鎭 1777년~1852년]이라한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박화진은 원래 경기도 고양에서 정변으로인해 안성으로 유배당했다가 후일 다시전남으로 유배된뒤 말년에 이곳으로 와 터를닦고 후손이퍼져 오늘에 이르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밀양박씨 족보에 의하면 박화진은 사복시[사복시]벼슬을 하였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있다 기록대로라면 1800년대 초기에 이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소린데 이미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두곡이란 마을이름이 나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양각동으로 불렀던 곳에 육종연구소인
꽃회사[flowercompany]를 설립하여 꽃씨를 채취했던 곳을 지금도 꽃화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꽃회사가 설치되었던 자리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부분으로 등성이께로난 도로에서서 보면 양쪽바다가한눈에 들어올정도로 육지의 폭이 좁은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꽃씨를 채종하기에는 최적지라고한다 인본인들이 이곳에서 재배했던 꽃은 다년생 화초로서 금계국으로 부르기도하고 천일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제는 무안지역 어디서나 흔히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특이 꽃회사마을 아래에는 청계만이 연결되어있어 포구가 형성되어 얼마 전까지만해도 운남에서 생산된 고구마를 비롯한 상당부분의 화물을 실어 나르기도했다
배나무정의사연
이마을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던 한국전쟁 때 지역 간 갈등의 대결지를 안고있는 마을이다 이른바 배나무정이 그곳이다
배나무정은 운북과 운남의 경계점에있다 예전에 이곳에 커다란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봄에 배꽃이 하얗게 필때면 멀리 청계면 맑으네 [청천리] 에서도 볼수있을 정도로 장관이었다고한다
배나무정 이란 이름은 이나무아래 정자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한다 배나무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베어 없애버렸다 지금은 파평윤씨 세장산 비가 세워져있다
운남은 지리적으로 외진곳이다보니 주민들이 망운지역에비해 상대적인 소외감을 많이 느꼈던 지역이다 그러한 소외감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한국전쟁 때이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들어 와 70여 일간 운남을 점령했었다 그때 운남사람들은 운북사람들에게 승리감을 맛보았다고한다 그후 인민군이 물러가고 군경에 의해서 운남 지역을 수복하려 할 때 운남 사람들은 격렬히 거부하고 저항하였다 이러한 저항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배나무정싸움이다 운남 사람들은 10대에서50대까지 누구도 가릴것없이 죽창을들고 이배나무정으로 운남을 지키기위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싸웠다 군경과 운북사람들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비 면에서는 애초 싸움이 되지 않았다 우박처럼 총탄이쏟아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져갔지만 운남 사람들은 물러설줄 몰랐다 그리고 지켰다 죽창이 기관총을 이긴 것이다 물론 다음날에는 군경에 포위되어 무너졌지만 그들의 끈질긴 저항과 단결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아픔을 갖고있는 지역이기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곳을 지날때면 운남이나 운북사람들 모두 그곳에 꽃을 꺾어올려놓아 혼백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답니다 지금도 밤에 이곳을 지날때면 귀신이나올까봐 머리털이 쭈뼛해진다고 합니다
마을신창로가 천씨선산에 바윗등이라고 부르는곳에 3기의 지석묘가 있는데 바위가 평평하고넓어 이지역 처녀총각들이 데이트 장소로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소유주가 묘지 공사를 하면서 모두옮겨 가버렸답니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300m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와 인접한 곳에 백자를 구웠던 도요지가있다 마을에서는이곳을 점등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밭으로 개간되어 사용하고있지만 지금도 땅을파면 요백편과 백자편 등이 나온다..
첫댓글 잠시들려 깊은뜻임을 알았습니다.
어린시절 신장로길 지날때마다 귀신나올까봐 많이무서윘던 추억이 새롭네요.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