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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유래 및 연혁
신라 및 고려 초기에는 가은현에 속했던 이 지역이 고려말 공양왕(1390년경)때
문경현에 병합됨에 따라 가서(加西), 가남(加南)양면이 되었으며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주군 은척의 일부와 화북의 일부를 통합하여 동에 있는 농바위의 이름을 따서 농암면이라 개칭하였다.
농암 전통시장 풍경
- 농암면사무소 홈페이지에서
말바위는 말바우 마을(연천 2리) 앞에 있는 넓이 50여m, 높이 약 20여m 가량 되는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이다.
김명숙님의 말바무 사진
후백제를 건설한 견훤이 어렸을 때 바위 밑 굴에 야생마가 살고 있었는데 성질이 워낙 난폭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 할 수 없는 데다가 농작물에도 피해를 주어 마을 사람들은 백마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죽일 수가 없었다.
야생백마 때문에 어른들의 고민을 본 소년 견훤이 나서서 ″내가 그 놈을 잡아 보이겠습니다.″하고 장담하고 허수아비 하나를 만들어서 백마가 살고 있는 굴 앞에 세워 놓았다. 그러자 백마가 허수아비를 경계하여 공격하여 쓰러뜨렸다. 견훤은 이러한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백마가 허수아비를 경계하지 않게 되자 견훤이 하수아비로 변장하여 백마가 오기를 기다려 백마갈기를 잡아채 백마 등에 올라타고 미친 듯이 날뛰는 백마와 떨어지지 않고 싸워 마침내 길들여져 견훤의 용맹과 지략에 백마가 지고 백마와 함께 무예연습을 하여 견훤이 최고의 명사수가 되었다.
활쏘기 명수가 된 견훤이 하루는 자기의 활쏘기 실력과 백마의 달리기 실력을 견주어 보기로 하고 말바위에서 아차동으로 활을 쏘기로 하였다. 실제로 말바위 연천 상땀 동네 북쪽 원고개,성저리,아차동은 일직선상에 있다. ″백마야, 만일에 화살보다 늦게 달리면 네 목을 베겠다.″ 하고 말한 뒤 활을 쏘고, 백마에게 채찍을 내리쳤다. 백마는 날다시피 달려서 잠깐 사이에 그 산꼭대기에 도착 하였으나 소나무에 어느새 화살이 박혀있었다. 견훤은 분노하여 사정없이 백마의 목을 내리쳤다. 그때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하나가 날아와 소나무에 박히는 것이다. 견훤이 이것을 보고 ″아차″했을 때는 이미 백마의 목이 땅에 뒹굴고 있을 때였다. 소나무에 박힌 화살은 견훤이 전날 연습 할 때 쏘았던 화살인 것이다. - 이로 인해 백마가 살던 굴 바위를 말바위라 하고 견훤이 말의 목을 베고 나서 ″아차″했다 하여 그 산을 아차산 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명유래]
<농암리(籠岩里)>
- 농암∙농암장터∙장터(場基)
평산신씨가 이 마을에 이주 정착하였다고 하는 바 구농바위에 장터가 있었는데 현재의 장터로 장을 옮겨왔으므로 장터라 하고 농암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새장터와는 구분이 되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 앞 냇가에 개 한마리가 지나가는데 종곡리 괴정(槐亭) 뒷산에서 호랑이 한마리가 입을 벌리고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데 맞은편 성지산(城址山) 밑에 있던 사자도 호랑이를 견제하면서 일격을 가하려 하자 서로 개를 잡아먹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자와 호랑이, 개는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하며 현재까지도 그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한다.
- 청룡끝∙청룡등끝
이 곳에 고려말 청룡사(靑龍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청룡끝이라 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의 등 끝에 위치한다고 하여 청룡등끝이라 부르기도 한다.
- 가실목∙가실매기∙찬샘∙가항(加項)∙서원촌(書院村)
1550년경 안씨문중에 사직(司直), 신씨문중에 처사(處士),성씨문중에 추담(秋潭) 등 삼현(三賢)이 이곳에 한천 서원(서원)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던 마을이라 하여 서원촌(서원땀)이라 하고 또 이 마을에 차가운 물이 나는 샘이 있었다 하여 찬샘이라고도 하며, 가은읍과의 경계에 가실목이라는 고개가 있다 하여 가실목, 가실매기 또는 가항(加項)이라고도 한다. 또한 동리 앞 300m지점에 위치한 성지산(城址山)에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 있다 하여 견훤성이라고도 부른다.
- 동바리∙가땀
마을 앞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설치된 동바리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동바리라하고 그 전에는 가땀이라고도 했다 한다. 이 마을은 북실에서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 100m정도 지점으로 농암 장터에서 연천(漣川)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 새장터
구농바위에 5일장이 서고 난 뒤 조선말기에 농암리로 장터를 옮겼다가 1980년 7월 22일 폭우로 인하여 농암장터가 폐허가 되자 현재의 지역으로 시장을 옮겼다 하여 새장터라 부른다.
<종곡리(鐘谷里)>
- 골마
북실마을에서 북서쪽으로 200m정도 올라가면 골마라고 하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골이 깊다 하여 골마라 부르게 되었다.
- 북실
골마에서 200m, 동바리에서 서쪽으로 다리를 건너 100m정도 가면 뒷산이 북 모양과 같은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에 안동김씨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종각이 있었다고도 한다.
- 하느물∙한우물∙한천(寒泉)∙한정(寒井)∙대정(大井)
이 마을은 약 500년전에 안동권씨가 이주하여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마을 한 가운데 수원(水原)이 좋고 물도 차가운 맑은 샘이 있었다 하여 한천, 한정, 대정이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되어 하느물, 한우물이 되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한가운데 있던 큰 우물에 지나가던 스님이 빠져 죽어서 샘을 묻어 없앴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 앞 강변에 500년 이상된 노송(老松)을 비롯하여 많은 나무들이 500m 길이로 숲을 이루고 있어서 대정공원(大井公園)이라 부르고 있다.
- 뒷바리∙승팔(升八)
이 마을은 약 500년전에 김해김씨가 이주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괴정(槐亭)에서 북서쪽 50m지점에 우복산(牛伏山)이 있다. 그 산 모양이 흡사 엎드린 소의 뒷발과 같고, 여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뒷바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괴정(槐亭)
농암교를 지나서 대정 숲옆에 옛날부터 느티나무(槐亭)가 많아 흡사 나무 밑이 정자와 같다 하여 붙여진 동명이다.
- 아랫담∙하담
괴정에서 북서쪽으로 150m쯤 가면 이 마을이 있는데 하느물 아랫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아랫담, 하담이라 하고 1910년경부터 백로(白鷺)떼가 서식하였다 한다.
- 중간담∙중암
아랫담에서 남서쪽으로 100m정도 지점에 위치하고 하느물 중앙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중간담이라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있는 큰 우물 때문에 한우물, 하느물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새터(新基)
중간담에서 서쪽으로 600m 정도 가면 새로 생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했다 한다.
<연천리(連川里)>
- 말바우∙마암(馬岩)
마을 남쪽 200m 지점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준마가 나왔다 하여 마을 이름을 말바우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엽에 말바우에서 나타난 말이 당시 궁터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던 견훤을 기다려서 타게 하였는데 견훤은 말이 빠른가 화살이 더 빠른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활을 쏘며 동시에 말을 달려 가은(加隱)의 아차라는 동리까지 와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이 화살보다 느리다 하여 말의 목을 베는 순간에 화살이 견훤의 앞에와 꽂혀 아차 준마를 잃게 되었구나 하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로부터 말이 나타난 바위를 말바위라고 하고 말을 없앤 곳을 아차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 벌마∙벌땀
말바우에서 동쪽으로 400m지점의 벌판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벌마, 벌땀이라 하게 되었다.
- 상땀∙중땀
동네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상땀이라 하고 동리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땀이라 하며 마을 뒷산인 당재산에는 건천사(乾川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 새터(신基)∙구새터(舊新基)
연천1리에 속하는 마을인데 구새터 앞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하고 새터 마을에서 북쪽으로 200m지점에 동네가 있는데 새터가 있기 전의 새터라고 하여 구새터라고 한다.
<궁기리(宮基里)>
- 고기(古基)∙이터골∙옛터골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시조였던 견훤이 이곳에서 많은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한 곳으로서 본궁(本宮)을 설치하였다 하여 고기라 하고 그 후 속칭 이터골, 또는 옛터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부락은 경북과 충북을 경계로 한 험준한 조항산( 鳥項山:951m)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390년전 충북 괴산에서 경주이씨 일족이 피난하여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 웃땀∙상궁∙상궁기(上宮基)
고기(古基)에서 남동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기(古基)를 비롯하여 이 일대에 견훤이 궁궐도 짓고 군병도 훈련하던 곳이라 하여 궁기(宮基)라 명명하게 되었는데 이 곳 3개의 자연부락 중 가장 상부에 위치하였다 하여 웃땀, 상궁, 상궁기라고 불렀다 한다.
- 불당곡(佛堂谷)∙절골∙절터골
상궁기에서 오른쪽 (500m777山) 자연봉 중턱 폭포가 있는 계곡에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가 조그마한 절을 건립하여 조선 중엽까지 있었는데 이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을 태워버렸다는 전설이 있어 이 계곡을 불당곡이라 하고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 하며, 7∙8가구의 화전민이 생활하다 현재는 황폐화된 곳으로 가끔 기왓장과 주춧돌이 발견되어 옛 자취를 희미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 중땀∙중궁∙중궁기(中宮基)
상궁기에서 남쪽으로 400m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3궁기 마을 중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땀, 중궁, 중궁기라 부른다.
- 새터∙아랫땀∙하궁∙하궁기(下宮基)
중궁기에서 동쪽으로 400m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3개의 자연부락 중 가장 아래에 있다 하여 아랫땀, 하궁, 하궁기라 부르다가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고모재(古毛嶺)∙고모리(古母里)∙고모(姑母)
궁기 뒤편 깊은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북과 충북을 연결 짓는 12㎞의 험준한 준령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모와 부모 없는 질녀가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생활하다가 질녀가 우연히 병사하자 고모는 슬픔을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고 험준한 준령 상봉에 올라가 질녀의 이름을 부르며 수일을 지나자 고모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그 뒤 후세인들이 이 고모의 애처로운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준령의 명칭을 고모재라 하였다 한다.
<내서리(內西里)>
- 광정(光亭)∙광대정(光大亭)
내서리 북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서 역천(驛泉) 송명흠(宋明欽)의 선고인 시요(詩堯) 송좌묵(宋佐默)이 숙종29년에 역천정(역泉亭)을 건립하였는데 영조대왕(英祖大王)이 사도세자를 죽이려 할 때,사도세자의 사부(師父)인 이조판서 송명흠(宋明欽)이 영조대왕에게 미문살자지악(未聞殺子之惡)이어늘 전하하인살자호(殿下何忍殺子乎)이까라고 직언한 후에 이 정자에 은거하여 독서하며 후진을 양성하니 명성이 높은 정자 마을이라 하여 광정(光亭) 또는 광대정(光大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 이곳은 개천과 수석이 아름답고 평산신씨가 주로 살고 있는 마을이다.
- 서당들
약 400년전 이 마을에 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하여 서당마 또는 서당들이라 부르고 내서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경주김씨 4세대가 1800년경 마을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 다락골∙누동(樓洞)
다른 마을에 비하여 다락처럼 높은 곳에 있다 하여 다락골이라 하였다 한다. 약 400년전 이 마을의 개척자 전주최씨도 하늘 아래에서 가장 높고 깊은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다락골이라 불렀다 한다.
- 반달골∙밴대골(고개)∙반월(半月)
약 400년전 이 마을의 개척자 경주김씨가 마을 입구의 산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반달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고개의 형태가 반달모양이라 하여 반달고개라 하다가 후에 변음되어 밴대재(고개)로 되었다 한다.
- 서재∙서령리
서관령 밑에 있다 하여 서재라 하고 다락골에서 서쪽으로 약 5㎞떨어진 마을로 상주군 화북면과 계천 하나를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속릿들
약 500년전 남양홍씨가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하여 속리산 끝에 마을이 생겼다고 속릿들이라 하고 서당들 서쪽으로 내를 건너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이 동리가 있다.
- 쌍룡(雙龍)
옛날에 이 근처에 있는 용초에서 쌍룡이 났다고 하여 동명을 쌍룡이라 하고 속릿들 서쪽으로 약 1㎞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리(華山里)>
- 귀밀∙괴밀∙괴하(槐下)
마을 뒤에 우복산(牛伏山)이 있는데 소의 귀처럼 생긴 산밑에 마을이 있는데서 동명이 유래되었고 율수리에서 내를 건너 북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1700년경에 여흥민씨 4세대가 이주 정착한 마을이라 한다.
- 중리(中里)∙내중리(內中里)
지금부터 약 600여년전 이름 없는 한 승려가 개척하였다 하여 중마을(중리-僧里)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고, 동리가 청화산(靑華山) 밑에 있는 중간마을이라 하여 중리라 했다고도 한다. 이 마을 서쪽으로 약 200m 가면 뒷마가 있고 평산신씨가 1800년경에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발전하였다고 한다.
(1) 삼파수(三派水)의 전설
소재지에서 산간석로(山間石路)를 따라 4㎞쯤 가면 청화산 동쪽 기슭에 큰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앞에 세 갈래로 한 없이 맑게 솟아나는 우물이 있는데 이를 삼파수(三派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 어떤 명풍수(名風水)가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청화산 시루봉 줄기의 영산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에 명당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려와 보니 바로 그곳에서 맑은 정화수가 용솟음 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관은 대명당 터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겨 우물물 줄기를세갈래로 갈라놓았는데 이를 삼파수라 한다. 상류는 식수로, 중류는 농업용수로, 하류는 역시 식수로 이용하였는데 어느날 상여가 이곳으로 지나가니 그렇게 맑던 우물물이 갑자기 누런 물로 변하여 온 마을이 식수난을 격게 되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의 어느 노인이 목욕재계하고 제수를 차려 용왕님께 제사를 지냈더니 맑은 물이 다시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2) 청화산의 전설
소백산맥이 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청화산을 이루고 다시 뻗어 내려 속리산을 형성하였으니 소백산맥중 청화산은 속리산과 함께 2대명산의 하나로 산 높이는 해발 940m이다. 전설에 의하면 청화산이란 이름이 지어진 유래는 수십리 밖 어디에서 바라보나 항상 화려하고 푸르게 빛나고 있으며 시루봉도 장엄한 자세로 그 위엄을 떨치고 있다 하여 청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따라서 이 산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부락 이름들도 청산리 또는 청화동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청화정, 청화연이란 명칭도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 연계동( 蓮溪洞)∙내하리(內下里)
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이고 마을 밑에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연계라 하고 남서쪽으로 내를 건너서 약 300m 가면 중리가 있다.
- 상비치(上飛稚)∙청화(靑華)∙중비치(中飛稚)
꿩이 산쪽으로 나르는 비치우산혈(飛稚于山穴)이 있다 하여 비치(飛稚)라 하고 위쪽에 위치한 마을을 상비치, 남쪽으로 약 1.5㎞지점의 아랫마을을 중비치라고 한다.
- 상삼화(上三花)∙하삼화(下三花)
이 마을 뒷산이 청화산이고 산봉우리에 세송이의 연꽃이 있었다 하여 삼화리(三花里)라 하였는데 동네윗쪽 마을을 상삼화라 하고 200m쯤 떨어진 아랫마을을 하삼화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1500년경에 평산신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註 . 삼화사경(三花四景)
화산청풍(華山淸風) 연계명월(蓮溪明月)
북실종성(北室鐘聲) 비치주양(飛稚走陽)
- 뒷마
중리 마을에서 200m쯤 가면 산기슭에서 동서쪽으로 길게 뻗친 마을이 있는데 중리마을 뒤편에 있다 하여 뒷마라 하고 이 마을 동쪽 끝산 밑에 청화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평산신씨(平山申氏)와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한다.
<율수리(栗數里)>
- 밤소∙밤수(栗數)∙상율(上栗)
이 마을은 1400년경에 평산신씨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하며 마을 앞 방천 밑뒷산에 밤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마을 전체가 밤나무 숲으로 덮여 있어 밤소라 하였으며 후에 밤수, 상율로 개칭되었다.
- 감막∙시막(枾幕)∙하율(下栗)
옛날 동네 앞 들판에 감나무가 많아 움막을 치고 감을 지켰다 하여 감막 또는 시막이라 하였고 밤소 아랫마을이라 하여 하율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이곳은 감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갈동리(葛洞里)>
- 갈골(葛谷)∙갈동(葛洞)
현재 농암면 소재지로부터 2.5㎞지점의 장산(큰산) 밑에 마을이 생겼는데 당시 칡덩굴이 산천을 덮었던 지역의 마을이라 하여 갈골 또는 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웃갈골∙웃땀
갈골에서 남쪽으로 2㎞지점의 마을을 웃갈골 또는 웃땀이라 하는데 마을 입구는 극히 협소하나 들어가면 제법 넓은 들이 있고 뒷산이 상주군 외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농바우∙농암(籠岩)∙구농바우∙농상리(籠上里)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옥황상제가 하늘나라에서 죄를 저지른 선녀를 벌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보낼 때 천마(天馬)에다 바구니 2개를 실어 내려보냈는데 하나는 농바우 마을에 두고 다른 하나는 가은읍 민지리에 두어 바위로 변했다. 농암면쪽 바위가 장롱(欌籠)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 마을을 농바우라 하였으며 뒷날 면(面)의 이름도 이바위(籠岩)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 새동네∙새마
홈다리를 지나서 도로를 따라 300m정도 올라가면 좌측산 중턱에 1980년 7월 22일 가은과 농암지역에 대폭우로 가옥이 유실되자 새 마을터를 잡고 현대식 건물 9동을 건축하여 평산신씨가 이주 정착하게 되었다. 이 때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동네 또는 새마라 부르게 되었다.
- 홈다리
상신원(相信園) 입구에서 농암면 소재지 쪽 도로를 따라 100m정도 가면 도로 양편에 5∙6가구가 있는데 이 마을을 홈다리라 하며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긴 홈다리를 설치하였다는 이유로 마을 이름이 홈다리가 되었다 한다.
<사현리(沙峴里)>
- 샛골∙봉동(鳳洞)
이 마을 동쪽에 매봉산이 솟아 있고 복치혈(伏稚穴)이 있다 하여 샛골 또는 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주막담에서 동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 사그막∙사기막(沙器幕)
샛골에서 동쪽으로 약 1㎞지점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이 곳에 사기그릇을 굽는 막이 있었다고 하여 사기막 또는 사그막이라 불렀다 한다.
- 바구우지∙바고지(朴古地)
옛날 이 곳에 박씨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여 생활하였다고 하여 바고지(朴古地)라 하였으나 지금은 박우지라 부르며 주막담에서 약 500m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상산김씨가 20가구 정도 살고 있다.
- 주막담∙중앙동(中央洞)
이 곳은 농암, 선곡, 함창방면으로 가는 삼거리 분기점에 위치하여 옛날부터 주막이 있고 사현리의 중앙마을이라 하여 주막담 또는 중앙동이라 부른다 한다. 현재 이 마을에서는 전통 옹기를 굽고 있다.
- 산수골∙산수동(山水洞)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산수골이라 하고 주막담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상신원(相信園)
1954년 4월 1일에 음성나환자촌을 설립하여 동명을 상신원이라 하고 처음에는 50가구였던 것이 현재는 30가구정도 생활하고 있으며 전 주민이 천주교를 신봉하고 양축업을 하며 소득을 높이고 있다. 홈다리 남쪽으로 100m정도 가면 오른 쪽 계곡에 상신원 입구가 있다.
<지동리(池洞里)>
- 못골∙지동(池洞)
뭉우리고개(雲峴)에서 남쪽으로 1.5㎞정도 새로 생긴 도로를 따라 가면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에 못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못골 또는 지동이라 하였다 한다.
- 웃땀∙아랫땀
지동리와 같은 마을인데 마을이 길게 뻗쳐 형성되었으므로 위쪽의 마을을 웃땀이라 하고 의성김씨가 주로 살고 있으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랫땀이라 하고 홍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주업은 농업이고 한때는 양잠업으로 소득을 크게 올렸었다.
- 선바위∙입암(立岩)
1800년경에는 10여개의 바위가 서 있었는데 현재는 다 쓰러졌다. 옛날에 선돌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선바위 또는 입암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선곡리 머지에서 약 800m 떨어져 있으며 상주군 은척면과 농암면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다.
<선곡리(仙谷里)>
- 밀개동
바구지 고개에서 은척방면으로 약 2㎞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 밀개 모양의 마을로서 본래 지동리에 속하였으나 1962년 선곡리로 편입되어 현재 선암초등학교가 위치한 마을이다.
- 멀베이
머지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사현리에서 산 고개를 넘으면 첫 동네이다. 머지마을에서 먼 방향에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 하여 멀베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평산신씨가 많이 살고 있다.
- 머지∙선계(仙溪)
밀개동에서 서쪽으로 100m정도 떨어진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두 선비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을 쳐다보며 뭐지 뭐지 하고 물었다 하여 이 마을을 머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 평산신씨가 많이 살고 있다.
- 큰땀∙상땀
아랫땀 서쪽으로 80m 거리에 있는 마을인데 선곡리 전체로 볼 때 제일 위에 있는 마을 이라 하여 상땀 또는 큰 땀이라 하고 전주이씨, 김해김씨 8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 작은땀∙아랫땀
밀개동에서 남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마을이 작다 하여 작은땀,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아래땀이라 불렀다.
- 압실(鴨室)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을 지나던 고을 원님이 이 마을의 지형이 오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압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머지동에서 1.5㎞남쪽으로 작은 산등을 넘으면 이 동네가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작은 개울의 북쪽은 문경시 농암면 선곡리에 속하고, 개울의 남쪽은 상주시 은척면 남곡리에 속하는 곳이다.
- 문경시청 홈페이지에서
첫댓글 이게 말바우 입니다
와, 말바우가 이렇게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