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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강의 주제에 어울리는 최근 책자 하나를 소개합니다.
작가 '안드레아 울프'가 위대한 그러나 잊혀진 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추적하여 우리들에게 감동적인 읽을 거리를 선사했네요. 일독을 권합니다.
아마존.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 코스타 어워드 전기 부문 수상작.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발자취를 따르는 환상적인 여행 속에서, 이 잊혀진 영웅을 재조명한다. 훔볼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시대를 너무나 앞서 나갔던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에는 누가 제시했는지 모를 정도로 상식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훔볼트는 자연을 상호연결된 전체로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던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자연’을 발명한 것이다.
------------------------------------------ 목 차 ---------------------------------------------
프롤로그
1부: 출발-떠오르는 아이디어들
1. 어머니의 그늘
2. 상상력과 자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훔볼트
3. 드디어 출발
2부: 도착-아이디어 수집
4. 남아메리카
5. 야노스와 오리노코
6. 안데스를 넘어서
7. 침보라소
8. 정치와 과학: 토머스 제퍼슨과 훔볼트
3부: 귀환-아이디어 분류 및 정리
9. 유럽
10. 베를린
11. 파리
12. 혁명과 자연: 시몬 볼리바르와 훔볼트
13. 런던
14. 다람쥐 쳇바퀴: 원심병
4부: 영향-아이디어 전파
15. 베를린으로 돌아가다
16. 러시아
17. 진화와 자연: 찰스 다윈과 훔볼트
18. 훔볼트의 코스모스
19. 시, 과학, 자연: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훔볼트
5부: 신세계-아이디어의 진화
20. 노아의 홍수 이후 가장 위대한 인물
21. 인간과 자연: 조지 퍼킨스 마시와 훔볼트
22. 미술, 생태계, 자연: 에른스트 헤켈과 훔볼트
23. 자연 보존과 자연: 존 뮤어와 훔볼트
에필로그
훔볼트의 저서들
이미지 저작권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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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폰 훔볼트 (1843년)
Alexander von Humboldt
“훔볼트가 없었다면 『종의 기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 찰스 다윈
아마존·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 코스타 어워드 전기 부문 수상!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는 위대한 그러나 잊혀진 과학자다. 세상 만물에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이름을 딴 것들이 많이 있다. 강, 산, 도시, 거리, 해류, 식물, 동물, 광물 등 많은 것들이 훔볼트의 이름을 사용하여 불리고 있다. 심지어 달에도 훔볼트 바다라 불리는 곳이 있다.
훔볼트는 열대우림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화산을 올랐고, 극한의 시베리아를 가로질렀다. 훔볼트의 탐험은 동시대의 과학자, 시인, 정치인 모두를 고무시켰으며, 심지어 나폴레옹도 그를 질시했을 정도였다. 찰스 다윈은 훔볼트로 인해 비글호 항해를 시작했고, 시몬 볼리바르의 남아메리카 혁명은 훔볼트의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되었다. 괴테, 워즈워스, 휘트만의 시에 영향을 미쳤고, 『해저 2만 리』의 네모 선장은 훔볼트의 저서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미 1800년 즈음에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를 예측했고, 등온선을 고안한 인포그래픽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뮤어의 자연 보존에 대한 아이디어도, 소로의 『월든』도 훔볼트 없이는 나올 수 없었다. 그의 동시대인이 말했듯, 훔볼트는 “노아의 홍수 이후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훔볼트의 발자취를 따르는 환상적인 여행 속에서, 이 잊혀진 영웅을 재조명한다. 훔볼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시대를 너무나 앞서 나갔던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에는 누가 제시했는지 모를 정도로 상식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훔볼트는 자연을 상호연결된 전체로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던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자연’을 발명한 것이다.
“세상은, 자연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시대인들이 ‘나폴레옹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나이’로 여겼던 훔볼트는 당대 최고의 매력과 영감을 지닌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훔볼트는 프로이센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세상의 원리를 깨치기 위해 특권 생활을 스스로 포기했다. 남아메리카로 5년간 탐험을 떠나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기어이 새로운 세계관을 품고 귀환했다.
훔볼트는 자연을 전 지구적 힘(global force)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여러 대륙들이 서로 대응하는 기후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력(natural force)들 간의 내적 연결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창안한 것이다. 자연은 하나의 생명망(web of life)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개념과 동일하다. 훔볼트는 기후를 대기·대양·대륙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시스템으로 이해한 최초의 과학자로,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최초로 경고하였다. 그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이슈는 환경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노예제·단일 재배(monoculture)·착취에 기초한 식민지는 불평등과 환경 파괴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노아의 홍수 이후 가장 위대한 인간, 훔볼트”
잊혀진 영웅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귀환
이 책은 훔볼트라는 비범한 인물과 우리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을 추적한다. 훔볼트는 동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제퍼슨은 그를 ‘당대 최고의 걸출한 인물 중 하나’라고 불렀다. 찰스 다윈은 “훔볼트의 『신변기』를 읽는 것만큼 내 열의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고 한 것도 모자라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메리카를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킨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는 훔볼트를 “신세계의 발견자”라고 불렀고,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훔볼트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깨달은 것이, 나 혼자 몇 년 동안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훔볼트는 우리의 집단기억에서 거의 잊힌 존재가 되었다. 저자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하나는 훔볼트가 콜럼버스나 뉴턴처럼 신대륙이나 물리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세계관은 마치 삼투현상처럼 우리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그 아이디어는 너무 자명하여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인물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생겨난 반(反) 독일 감정이다. 불과 50년 전 수천 명의 인파가 거리를 행진하며 훔볼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던 클리블랜드에선 시민들이 독일 책들을 모아놓고 소각했으며, 신시내티의 공동도서관은 독일 책들을 제거했고, ‘훔볼트 거리’는 ‘태프트 거리’로 개명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광풍 속에 '위대한 독일의 지성'에 대한 기억은 차츰 잊힌 것이다.
이 책은 훔볼트라는 존재를 다시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오늘날의 환경주의자, 생태론자, 자연주의 작가들은 훔볼트의 비전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예측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훔볼트는 이미 오래 전 인간의 비행(非行)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다고 경고했으며, 심지어 1801년 발표한 글에는 “인류는 이미 지구에 그렇게 했듯이, 먼 별을 유린하여 척박하고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고 썼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훔볼트의 비전과 경고를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훔볼트를 다시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훔볼트라는 정신과 훔볼트라는 사람의 이면 사이
한편 훔볼트는 양면성을 가진 인간이기도 했다. 식민주의를 맹렬히 비판하고 남아메리카의 혁명을 지지했지만, 두 프로이센 왕들의 신하였다. 미국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 개념에 감탄하면서도, 노예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항상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폭넓은 지식 때문에 존경받았지만, 날카로운 말솜씨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저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십여 개의 언어로 출판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큰 돈을 벌지 못하고 가난하게 죽었다. 허영을 부릴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돈을 가난한 젊은 과학자에게 주려고 했다. 이 책은 훔볼트의 활약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 면모까지 아우른다. 훔볼트는 하나의 정신으로 시대를 풍미했지만, 그는 평생 자유를 열망하고 모험을 즐기되,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제약을 직면하고 수용한 고독한 인간이기도 했다.
훔볼트의 발자취를 따르는 환상적인 여행으로의 초대
훔볼트는 베네수엘라 열대우림지역의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깊숙한 곳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갔으며, 안데스산맥에서 활화산을 관찰하기 위해 고지대의 암벽 사이를 따라 기어들어가기도 했다. 예순 살이 되어서도 러시아 오지로 들어가 1만 6,000킬로미터 이상을 강행군했다. 이 책의 저자 안드레아 울프는 훔볼트의 발자취를 따라 베네수엘라의 열대우림, 침보라소 산, 독일 예나의 해부학 실험실, 훔볼트의 베이스캠프였던 에콰도르의 키토, 소로의 윌든 호수 등을 방문하고 각종 자료를 취합하여 이 책을 썼다. 그리고 아메리카와 러시아 등의 탐사 지도, 14컷의 컬러 도판, 68컷의 본문 도판 등을 활용하여 훔볼트의 세계를 생생하게 구현한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훔볼트라는 위대한 인물을 하나의 생생하고도 감동적인 서사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 훔볼트에 대한 찬사들
찰스 다윈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에는 훔볼트를 존경했지만, 이제는 그를 숭배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훔볼트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깨달은 것이, 나 혼자 몇 년 동안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신선한 물줄기를 끊임없이 뿜어내므로, 우리는 그 밑에 꽃병을 갖다대기만 하면 된다.”
토머스 제퍼슨
“당대 최고의 걸출한 인물”
시몬 볼리바르
“모든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에서 한 일들을 다 합해도, 훔볼트 한 사람이 한 일보다 적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훔볼트의 입에서 나오는 매혹적인 음성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왕궁 대폭포분수의 대리석 사자상이 뿜어내는 물줄기 같다.”
랄프 왈도 에머슨
“훔볼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이따금씩 세상에 나타나 인간 정신의 가능성, 재능의 힘과 범위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인간의 한 예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나의 관찰 및 서술 방법은 훔볼트의 『자연관』에 기초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노아의 홍수 이후 가장 위대한 인물”
조지프 뱅크스
“훔볼트의 책은 지금껏 발간된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명 깊은 책”
조지 퍼킨스 마시
“훔볼트는 위대한 사도(apostle)였다.”
찰스 라이엘
“나는 훔볼트의 기후이론을 지질학에 적용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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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책갈피
P.22~23 : 침보라소를 오르며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훔볼트는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스스로 터득했다. 세심한 관찰을 통해 그는 식생대(vegetation zone)가 차곡차곡 층상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즉, 계곡에서는 야자나무와 촉촉한 대나무들이 숲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숲속으로 들어가 보니 울긋불긋한 난초들이 나무에 착생(着生)하고 있었다. 좀 더 위로 올라가니, 유럽의 숲과 비슷하게 침엽수, 참나무, 오리나무, 관목성 매자나무가 보였다. 그 다음으로는 고산식물과 지의류가 나타났는데, 전자는 스위스의 산지에서 채집했던 식물과 비슷하고 후자는 북극권과 라플란드에서 채집한 표본을 연상케 했다. 그런 식물들을 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훔볼트는 식물을 좁은 분류 범주(classification category)로 간주하는 대신, 위치와 기후에 따른 유형으로 파악하려 했다. 즉, 자연을 전 지구적 힘(global force)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여러 대륙들이 서로 대응하는 기후대(climate zone)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개념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생태계 이해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_프롤로그
P.61 : 그 후로 몇 년 동안, 훔볼트는 예나와 바이마르를 가능한 한 규칙적으로 방문하려고 노력했다. 훔볼트와 괴테는 오랫동안 함께 걷고 식사도 함께했다. 두 사람은 예나의 새로운 식물원에서 실험을 하고 관찰도 했다. 활력이 넘치는 괴테는 여러 주제들 사이를 쉽게 넘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시를 고치고, 잠시 후 훔볼트가 방문하면 관찰일지를 꺼내 개구리 해부 결과를 논의했다. 괴테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훔볼트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나를 아찔하게 만드네. 머리 회전이 너무 빨라, 어떤 때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들어. 나는 지금껏 그처럼 다재다능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네.”
_ 2. 상상력과 자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훔볼트
P.72 : 괴테는 심혈을 기울여 1808년과 1832년 각각『파우스트Ⅰ』과 『파우스트Ⅱ』를 발표했는데, 『파우스트』를 집필하던 시기는 훔볼트의 방문 기간과 겹치는 때도 있었다. 파우스트는 (훔볼트와 마찬가지로) 지칠 줄 모르는 지식욕과 조바심 때문에 열병을 앓던 인물이었다. 『파우스트』 집필에 몰두하던 괴테는 훔볼트를 가리켜 "고도의 전문적인 작업들을 그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건 바로 파우스트를 두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우스트와 훔볼트는 모두 ‘맹렬한 활동과 탐구가 이해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고, 자연계에서 힘을 발견했으며, 자연의 통일성을 믿었다. 훔볼트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자연의 숨겨진 힘’을 모두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파우스트는 1장에서 “나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힘을 찾아낼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묶어주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선언하는데, 그것은 마치 훔볼트가 말하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파우스트 속에는 훔볼트가 있고, 훔볼트 속에는 파우스트가 있다'는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1808년 『파우스트Ⅰ』이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파우스트와 훔볼트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_ 2. 상상력과 자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훔볼트
P.103 : 발렌시아 호수에서 수면이 급강하하는 원인을 알아낸 후, 훔볼트는 범위를 확대하여 삼림 벌채가 전 세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렌시아 호수의 사례를 토대로 하여, 그 시대의 농업 기술이 충격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전 세계에서 인류가 자행하고 있는 행동이 미래 세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그는 발렌시아 호수에서 목격한 재앙을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에서 시작하여 페루 남부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줄줄이 목격했다. 심지어 몇 십 년 후 러시아에서도 그런 재앙을 목격했다. 그는 인류가 기후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경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
훔볼트는 숲이 생태계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최초로 설명한 사람이었다. 나무는 수분을 저장하고, 대기에 수분을 풍부하게 공급하고, 토양을 보호하며, 냉각효과도 발휘한다. 또한 그는 나무가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고도 말했다. “인류가 세상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류가 세상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파괴하도록 방치한다면, 지구는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_ 4. 남아메리카
P.151 : 일행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동안, 고도계를 꺼내 고도를 다시 측정해 보니 5,917미터! 정상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훔볼트는 자위했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심지어 유럽에서 처음으로 열기구를 타던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가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올라온 길과 먼 산들을 바라보며, 지난 몇 년 동안 수집한 정보들을 잇는 끈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 왔는데,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훔볼트는 그날 하루 종일 침보라소를 등반하며 눈앞에 보이는 정보들을 모두 흡수함과 동시에, 과거에 알프스산맥, 피레네산맥, 테네리페 등에서 보고 경험하고 수집했던 정보들(식물, 바위, 각종 측정치)을 떠올렸다. 그동안 관찰했던 현상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깨닫고, “자연은 복잡하게 연결된 생명망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전 지구적 힘”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한 동료는 후에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훔볼트는 만물이 천 개의 끈으로 이어져 있음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이다. 이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게 될 것이다.”
_ 7. 침보라소
P.152~154 : 훔볼트는 자연을 ‘죽은 집합체(dead aggregate)’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전체(living whole)’라고 불렀다. 지구상에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날 때, 그것은 수많은 돌, 식물, 동물, 인간 위로 무작위로 뿌려진다. 훔볼트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생명체가 지구의 모든 곳에 보편적으로 풍부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공기 중에도 생명의 알맹이(예: 꽃가루, 곤충의 알, 식물의 씨앗)가 포함되어 있다. “생명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유기적인 힘은 늘 작동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개별적인 사실을 새로 발견하는 것보다, 그것을 연결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중요한 건 개별 현상이 아니라 전체와의 관련성이기 때문이었다.
열대지역의 자연도는 침보라소의 단면도로서, 자연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묘사함으로써 만물의 연결관계를 한눈에 보여줬다. 훔볼트는 모든 식물들을 침보라소에서 발견한 위치에 정확히 배치했다. […] 자연을 전 지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모든 대륙들이 각각 상응하는 기후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식물을 분류학적 범주 속에 매몰시키지 않고, 기후와 지역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매우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생태계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_ 7. 침보라소
P.182 : “노예제는 자연에 역행한다. 자연에 역행한다는 것은 불공평하고 악하고 타당성이 없다”고 훔볼트는 말했다. ‘흑인은 백인보다 심신이 열등하다’고 믿었던 제퍼슨과 달리, 훔볼트는 ‘이 세상에 우월하거나 열등한 인종은 없다’고 주장했다. “국적, 피부색,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 여러 식물들이 본디 한 뿌리에서 나와 지리적·기후적 환경에 각각 다르게 적응했음을 기억하라. 인간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다른 인종 위에 군림하는 인종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종은 각각 자유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훔볼트의 교사였다. 훔볼트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교훈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자유의 소중함’이었다. “자연은 자유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균형은 다양성에 의해 이루어지며, 다양성은 정치적·도덕적 진실의 청사진이기 때문이다. 가장 보잘것 없는 이끼나 곤충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참나무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자연 속에서 각각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며, 함께 모여 전체를 이룬다. 인간도 자연의 작은 구성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훔볼트에게 자연은 그 자체가 자유로운 존재들로 이루어진 자유공화국(repubic of freedom)이었다.
_ 8. 정치와 자연: 토머스 제퍼슨과 훔볼트
P.210~211 : 훔볼트의 『식물지리학에 관한 고찰』은 '자연을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는데, 그가 이처럼 독특한 시각을 갖게 된 것은 탐사 여행 때문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남아메리카만큼 자연의 연결성(natural connection)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5년간 개발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여, 좀 더 광범위한 개념을 생각해냈다. 예컨대, 그의 옛 스승 블루멘바흐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연결된 힘(interconnected forces)을 가진 생물’이라는 생명력 이론(theory of the vital forces)을 주장하고, 그것을 자연 전체에 적용했다. 그러나 훔볼트는 생물만을 바라봤던 블루멘바흐와는 달리, 식물, 기후, 지리 간의 총체적 관련성에 주목했다. 다시 말해서, 식물을 분류 단위가 아닌 기후와 지역에 따라 그룹화했다. 훔볼트는 『식물지리학에 관한 고찰』에서 ‘지구 전체에 걸쳐 있는 기다란 밴드(long band)’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건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식생대 개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는 서양 과학에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
_ 10. 베를린
P.229 : 나폴레옹도 열등감을 억누르고 『신대륙 적도지역 항해』를 읽었으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심지어 워털루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훔볼트는 나폴레옹에게서 공식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훔볼트를 스파이로 의심하고, 비밀경찰을 시켜 편지를 검열하거나 세탁물을 뒤지고 방을 수색하게 했다. 훔볼트가 베를린에서 파리로 온 직후 나폴레옹은 ‘야심 많은 프로이센 과학자에 관한 비밀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810년 나폴레옹은 뚜렷한 이유 없이 훔볼트에게 24시간 이내에 프랑스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훔볼트가 겨우 파리에 머물 수 있게 된 건, (당시 원로원에서 재무장관을 하던) 화학자 장 앙투안 샤프탈이 개입하고 나서부터였다. 샤프탈은 나폴레옹에게 “훔볼트와 같은 유명한 과학자를 파리에 모시는 것은 프랑스의 영광입니다. 만약 그분을 강제로 추방한다면, 프랑스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_ 11. 파리
P.250~251 : 훔볼트의 저서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명확하게 정리했다. 첫째, 식민주의는 남아메리카의 주민과 환경에 재앙을 초래한다. 둘째, 식민사회는 불평들에 기초하고 있으며, 원주민들은 이방인도 야만인도 아니다. 셋째, 식민지인들도 유럽인들만큼 과학적 발견을 할 수 있으며, 예술과 기술을 익히고 연마할 수 있다. 넷째, 남아메리카의 미래는 단일경작이나 광산이 아니라 자급농업(subsistence farming)에 기초해야 한다. 훔볼트는 뉴스페인 부왕령을 중점적으로 서술했지만, 그 데이터를 유럽, 미국, 다른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비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식물을 서술할 때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고 전 지구적 패턴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주의, 노예제, 경제를 서술할 때도 세 가지 시스템 간의 상호작용에 중점을 두면서 포괄적으로 접근했다.
_ 12. 혁명과 자연: 시몬 볼리바르와 훔볼트
P.258~259 : 볼리바르는 「침보라소에서의 섬망」에서 훔볼트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장엄한 침보라소를 오르는 동안, 침보라소 화산을 식민지 해방 투쟁의 이미지로 사용했다. 침보라소를 계속 오르며, 그는 훔볼트의 발자국을 뒤로하고 자신의 발자국을 눈 위에 찍었다. 그 이후로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희박한 공기와 싸우며 시간에 대한 환상을 경험했다. 고열을 동반하는 섬망 속에서, 그의 눈앞으로 과거와 미래가 오버랩되며 지나갔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는 영겁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손을 위로 뻗어 영겁의 세월을 붙잡는다. 내 발밑에서는 지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발아래에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보며, 볼리바르는 침보라소를 이용하여 자신의 인생이 남아메리카에서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는지 가늠했다. 그는 (자신이 새로 건국한 나라인) 그란콜롬비아인 동시에, (식민지의 구세주인) 해방자였다. 볼리바르의 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었다. “침보라소의 눈 덮인 경사로에서, 콜롬비아의 커다란 음성이 나를 부른다.”
_ 12. 혁명과 자연: 시몬 볼리바르와 훔볼트
P.313~314 : 정치와 혁명에 염증을 느낀 훔볼트는 과학의 세계에 은신했다. 멕시코 정부로부터 “유럽과 무역협정을 맺고자 하는데,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나는 정치에서 손을 뗐으므로, 그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앞으로 자연, 과학, 교육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지적 욕구를 꺼내주고 싶었다. ‘힘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지식에서 나온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지 6개월 남짓 지난 1827년 11월 3일, 훔볼트는 대학교에서 61회 연속 강의를 시작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12월 6일부터 베를린 성악원에 16회 강의를 추가로 개설했다. 그는 6개월에 걸쳐 일주일에 여러 번씩 강의를 했다. 한 번 강의할 때마다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강의는 활기차고 신나고 완전히 새로웠다. 그러나 훔볼트는 수강료를 한 푼도 받지 않음으로써 과학 민주화의 선봉이 되었다. 청중은 왕족에서부터 마부, 학생에서부터 하인, 학자에서부터 벽돌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총망라했고 그중 절반을 여성이었다.
_ 15. 베를린으로 돌아가다
P.332 : 베를린을 떠난 지 석 달 이상 지난 1829년 7월 말, 훔볼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쪽으로 약 3,000km 떨어진 토볼스크에 도착했다. 그곳은 예정된 경로의 동쪽 끝이었지만, 훔볼트는 칸크린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계획을 바꿨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곧장 되돌아가는 대신, 3,200km를 우회하여 알타이산맥을 등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알타이산맥은 러시아, 중국, 몽골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훔볼트가 갑자기 알타이산맥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그가 나중에 회상한 바에 따르면, 알타이산맥은 '비교와 대조'의 개념에 입각하여 선택되었다. 훔볼트는 그동안 남미의 안데스산맥과 비교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산맥을 물색해 왔는데, 인도를 통해 히말라야산맥을 등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히말라야산맥 대신 알타이산맥을 선택했다. 즉, 알타이산맥에서 수집할 수 있는 표본은 히말라야산맥에서 수집할 수 있는 표본과 별 차이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_ 16. 러시아
P.351~352 : 해먹 옆에 놓인 작은 선반 위에는 다윈이 애지중지하는 소지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건 바로 책이었다. 그는 비글호에 승선하기 전에 휴대할 책들을 정성스럽게 골랐는데, 그중에서도 수많은 식물학 및 동물학 서적, 최신 서영사전, 탐험가들이 쓴 여행 서적, 그리고 1830년에 나온 라이엘의 혁명적인 책 『지질학 원리』Ⅰ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질학 원리』 옆에는 훔볼트의 『신변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남아메리카 탐험 이야기가 적힌 일곱 권짜리 전집으로, 다윈이 비글호에 승선하게 된 동기로 작용한 책이었다.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훔볼트의 유명한 『신변기』가 너무 좋아 달달 외우다가, 결국에는 먼 나라로 여향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위대한 비글호의 선원 모집에 박물학자의 자격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_ 17. 진화와 자연: 찰스 다윈과 훔볼트
P.361 : 다윈은 열대지방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훔볼트밖에 없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고향에 쓴 한 편지에서는 “훔볼트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재능에 더욱더 감탄하게 된다”고 말했고, 다른 편지에서는 “전에는 훔볼트를 존경했지만, 이제는 그를 거의 숭배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항해일지에는 이렇게 썼다. “훔볼트는 나의 등불이자 동아줄이다. 내가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다른 각도에서 빛을 비춰 새로운 면을 보게 해주고, 내가 동식물 종을 접할 때마다 다른 동아줄을 내려 보내 그것에 매몰되지 않게 해준다.”
_ 17. 진화와 자연: 찰스 다윈과 훔볼트
P.368~369 : 1839년 5월 중순 『비글호 항해기』 1쇄가 인쇄되어 나오자, 다윈은 그중 한 권을 베를린에 있는 훔볼트에게 보냈다. 자신의 우상에게 책을 보내는 데 신경이 쓰여, 미사여구가 잔뜩 적힌 편지를 한 통 첨부했다. “제가 세계 일주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훔볼트 선생님의 남아메리카 탐험기 때문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신변기』에 나오는 문장들을 수도 없이 베껴 썼더니, 주옥 같은 구절들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각인되었습니다." […]
결과적으로 다윈은 괜한 걱정을 한 셈이었다. 『비글호 항해기』를 받아 든 훔볼트에게서 장문의 답장을 받는 순간, 다윈의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탁월하고 경탄할 만한 책일세. 만약 내 책이 『비글호 항해기』에 영감을 줬다면, 감사할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외려 나일세. 자네는 장래가 촉망되는 과학자야.” 당대에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서른네 살의 다윈을 일컬어 ‘과학의 앞날을 밝히는 횃불’이라고 추켜세운 건 빈말이 아니었다. 다윈보다 무려 마흔 살이나 위였지만, 훔볼트는 그가 자신과 동류(同類)임을 단박에 알아봤던 것이다.
_ 17. 진화와 자연: 찰스 다윈과 훔볼트
P.399 : 미국인들은 과거에 훔볼트의 저서들을 읽지 않았었지만, 『코스모스』가 출간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훔볼트는 미국 전역에서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 되었다. 『코스모스』를 처음 읽은 미국인 중 한 명은 랄프 왈도 에머슨이었다. 그는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훔볼트의 책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출간되어 어느 곳에서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자연에 대해 그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훔볼트의 애독자 중에는 애드거 앨런 포도 있었다. 포는 『코스모스』를 읽고 나서, “우주는 가장 숭고한 시다”라고 외쳤다. 그가 1848년에 발표한 130쪽짜리 산문시 「유레카」는 『코스모스』에 대한 직접적 반응으로, 훔볼트에게 헌정되었다. 「유레카」에는 우주를 탐색하려는 포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데,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를 아우르는 훔볼트의 접근 방법에 영향을 받아 ‘영적 세계’와 ‘물적 세계’를 모두 다뤘다.
_18. 훔볼트의 코스모스
P.413~414 : 옮겨 적기와 밑줄 긋기를 반복하며 훔볼트의 책을 읽는 소로를 보고, 친구들은 ‘손에서 펜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로는 『코스모스』, 『자연관』, 『신변기』와 같은 훔볼트의 베스트셀러들을 차례로 독파한 후, “자연에 관한 책들은 마치 영약(靈藥)과 같다”는 심정을 피력했다. 소로의 관찰일지, 자연관찰 노트, 저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훔볼트의 이름이 주기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하늘이 푸른 날, 소로는 하늘빛이 얼마나 푸른 지를 정확히 측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자신도 모르게 “훔볼트가 사용한 시안계는 어디 있지?”라고 중얼거렸는데, 시안계는 훔볼트가 침보라소 산을 등반할 때 사용한 것이다. 또한 소로는 “콩코드의 개울물 소리는 낮보다 밤에 더 크다”라고 썼는데, 그것은 “오리노코 강의 여울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낮보다 밤에 더 크다”라고 한 『신변기』의 구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소로는 뉴햄프셔 인근의 피터버러에서 하이킹하던 언덕을 안데스 산맥에 비유하고, 월든 호수를 대서양으로 비유했다. 요컨대, 소로의 몸은 콩코드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훔볼트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_19. 시, 과학, 자연: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훔볼트
P.447~448 : 증기선이 5월 중순 미국에 도착하여 훔볼트의 서거 소식을 전달했을 때, 미국의 사상가, 예술가, 과학자들은 모두 비탄에 잠겼다. 처치는 친한 친구를 잃은 것 같다며 슬퍼했다. 훔볼트의 수제자 중 한 명인 루이 아가시는 보스턴 예술과학아카데미에서 행한 추도연설에서, “훔볼트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라고 했다. 1859년 5월 19일 발행된 미국의 신문들은 일제히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 서거했다”고 보도하며, “훔볼트와 동시대에 살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라고 덧붙였다.
훔볼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수십 년 동안 그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1869년 9월 14일, 뉴욕, 베를린, 멕시코시티, 애들레이드 등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탄생 100주년을 축하하며 축제를 벌였다. 훔볼트가 사망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다윈은 그를 ‘가장 위대한 과학 여행가’라고 불렀다. 게다가 다윈은 훔볼트의 저서를 오래도록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1881년 일흔두 살의 다윈은 『신변기』 Ⅲ권을 다시 집어 들었고, 다 읽은 후에는 뒤 커버에 “1882년 4월 3일, 끝”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6일이 지난 4월 19일, 다윈도 세상을 하직했다.
_ 20. 노아의 홍수 이후 가장 위대한 인물
[출처] 주말산책/생각의 힘 - 자연의 발명 http://blog.naver.com/intopkis/220792268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