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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의 文化史 스크랩 中國 美術史
시너먼 추천 0 조회 89 13.01.31 09: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 역대의 회화·조각·공예 등 각종 예술 분야.

은·주·춘추전국 시대

  중국회화의 시원은 은·주·춘추전국 시대로까지 소급된다.

그러나 은·주 시대의 작품은 극히 적으며

 

춘추전국시대의 작품 역시 많은 편이 아니다.

 

따라서 옛 문헌에서 보이는 당시의 회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전국시대의 청동기 중에는 그 표면에 정교한 금은상감을 입힌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후세의 묵선을 연상케 하는 유창한 선의 움직임이 있으며,

정교한 추상화와 적절한 사실성이 혼재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회화의 미적 수준과 양식을 유추할 수 있다(선진미술 ).

 

선진미술 [Pre-ch'n fine arts, 先秦美術]

중국 진대(秦代) 이전에 있었던 노예제 사회의 미술.

  청동기

  문헌기록에 의하면 노예제 사회의 형성시기인 하대(夏代 : BC 23~18세기)에

"구리로 무기를 만들고, 정(鼎 : 세발솥)을 주조하여 사물을 본떴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하대의 물질문화는 이미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발견된 청동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허난 성[河南省] 옌스[偃師] 얼리터우[二里頭]에서 출토된 것으로,

꺾창(戈)·척(戚)·작(爵)이 대표적이다.

이들 청동기는 종류가 많지 않고 비교적 작으며, 무늬도 아직 발달하지 않은 것들이다.

 

  은대(殷代 : BC 18~12세기)는

중국 노예제 사회의 중요한 발전단계였다.

이 시기에는 청동의 주조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도구와 무기뿐만 아니라 청동제 예기(禮器)도 많이 만들어졌다.

 

은대 전기의 청동기는 허난 성 정저우[鄭州] 얼리강[二里岡]과 두링[杜嶺],

후베이 성[湖北省] 황피 현[黃陂縣] 판룽청[盤龍城] 등지에서 출토된 정·가(?)·유(?)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은 모양새에 짜임새가 있고 몸체도 얄팍하면서 고르며, 무늬는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은대 후기의 청동기 주조기술은 더욱 정교해졌으며,

청동기의 종류도 많아지고 모양도 품위있고 견고해졌으며,

복잡하고도 웅장한 무늬가 매우 특이해졌다.

 

자주 보이는 무늬의 도안으로는 도철문(??紋)·운뢰문(雲雷紋)·기문(夔紋)과

사람얼굴·용·호·코끼리·봉황·매미 등의 무늬가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허난 성 안양[安陽]의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 : 높이 133㎝, 무게 약 875㎏)·

녹면방정(鹿面方鼎)·우방이(偶方彛), 안후이 성[安徽省] 푸난[阜南]의 용호문준(龍虎紋尊),

후난 성[湖南省] 닝샹[寧鄕]의 사양방준(四羊方尊)·봉문과유(鳳紋戈?)·인면방정(人面方鼎) 등이 있다.

 

서주(西周 : BC 12~8세기) 초기는

노예제 사회의 최고 번영기로서,

이 시기의 청동기도 은대 후기의 것을 본떠서 품위있고도 전아한 풍격을 지녔다.

 

그러나 주기(酒器)는 줄어들고 식기(食器)는 늘어났으며,

그릇 표면에 긴 명문(銘文)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청동기 가운데, 산시 성[陝西省] 춘화 현[淳化縣]에서 출토된

수수세대정(獸首?大鼎 : 높이 117㎝, 무게 226㎏)은 모양이 장중하고 무늬가 깔끔하며 새롭다.

 

또한 메이 현[?縣 : 또는 縣 : 치산(岐山)]에서 출토된 대우정(大盂鼎),

시안[西安] 신왕[新旺]의 수면구련문정(獸面勾連紋鼎),

랴오닝 성[遼寧省] 커쭤[喀左]의 반룡수면문뢰(蟠龍壽面紋?)

및 언후우(?侯盂), 베이징[北京] 팡산[房山]의 우두문백구역(牛頭紋伯矩?),

상하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덕정(德鼎) 등도 서주 초기의 전형적인 청동기이다.

 

서주 중·후기에는 노예제가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청동기로는 보(?)·수(?)·이(?)·종(鐘)·박(?) 등의 새로운 종류가 나왔고,

모양과 무늬도 날로 간단해져갔다. 도철문은 이미 많이 쓰이지 않게 되었고,

환대문(環帶紋)·절곡문(竊曲紋)·중환문(重環紋)이 널리 유행했으며,

긴 명문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청동기는

푸펑[扶風]에서 출토된 대극정(大克鼎)·장반(牆盤)·중의부령(仲義父), 메이 현의 녹방이(?方彛),

구궁[故宮]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추궤(追?),

상하이 박물관에 있는 사호박(四虎?) 등이다.

 

  춘추시대(BC 770~476)에는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노예제도는 점차 무너졌다.

이 시기에 제후국에서는 청동기 주조가 늘어나 각 지역에 따라 다른 풍격을 이루었다.

 

춘추시대 중기 이후에는 모인법(模引法)과 실랍법(失蠟法)을 받아들여

채색이 화려한 반훼문(蟠?紋)과 반리문(蟠?紋)이 유행했다.

 

연(燕)·조(趙)·채(蔡) 등의 제후국에서는

청동기에 홍동(紅銅)을 끼워넣거나 금을 섞어넣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다.

 

그리고 오(吳)·월(越)·초(楚) 등의 제후국에서는

화려한 전자체(篆字體)의 명문이 나왔다.

 

허난 성 신정[新鄭]에서 출토된 춘추시대 후기의 연학방호(蓮學方壺)는

구상이 참신하고 모양이 정교하며 무늬가 생동감이 있어서,

거대한 변혁기의 사회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전국시대(BC 475~221)의 청동기는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정교한 그릇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금·상감·조각 및 금이나 은의 혼합 등의 장식기법도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의 수렵, 활쏘기,

뽕나무 따기, 연회, 전쟁 및 누각·정자 등의 도안이 유행했다.

조소

  선진시대의 조소(彫塑)는

옌스 현 얼리터우에서 출토된 양·호랑이·거북·두꺼비 모양으로 만든 토기에서

그 초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은대 전기의 작품으로는

정저우 얼리강에서 출토된 돼지 모양의 토기,

허베이 성[河北省] 가오청 현[蒿城縣] 타이시[臺西]에서 출토된 사람얼굴 모습의 토기인 개(蓋)가 있다.

 

  은대 후기의 조소는 종류가 다양한데

은허에서는 칼이 씌워진 노예 토우(土偶), 돌로 만든 올빼미·소·호랑이가 출토되었다.

이들의 형상은 예스러우면서도 질박하고 장식미가 농후하다.

옥으로 조각한 인물상 및 두상(頭像)은 사실적이며 생기가 있다.

또 옥으로 만든 코끼리·봉황·용·호랑이 등의 작품은 색깔과 광택이 아름다워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된 효준(?尊)과

후난 성 리링[醴陵]에서 출토된 상준(象尊)은

은대 후기의 청동제 조소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서주에서 춘추시대에 이르는 동안의 조소작품 가운데 중요한 유물로는

뤄양[洛陽]에서 출토된 서주시대의 옥인(玉人),

바오지[寶鷄]의 서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사슴·말·물고기 모양의 옥패(玉佩),

코끼리·새·호랑이 모양의 청동제 준(尊),

산둥 성[山東省] 린쯔[臨淄]에 있는 춘추시대 말기 무덤에서 출토된 소형토기 무녀용(舞女俑) 등이 있다.

 

  전국시대에는 사람을 죽여서 무덤에 함께 묻는 순장(殉葬) 대신에

인형을 묻었기 때문에 사람 모양의 조각작품이 빨리 발전했다.

이들 중에는 산시 성[山西省] 창즈[長治] 분수령(分水嶺)에 있는

전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소형 토기 시녀용(侍女俑)·무녀용이 있다.

 

이외에도 허난 성 뤄양과 신양[信陽], 후베이 성 장링[江陵], 후난 성 창사[長沙] 등지에서 출토된

납·청동·나무로 만든 인형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후베이 성 쑤이 현[隨縣]의 증후묘(曾侯墓)에서 출토된

편종(編鐘)의 틀 위에 있는 '종거동인'(鐘?銅人)으로, 가장 큰 것은 75㎝ 정도이다.

비례가 정확하고 모양이 사실적인 이 조각품을 통해

인상(人像)의 조각기법이 점차 성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 동물조각의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는 유물들도 각지에서 출토되었다.

회화

  선진시대의 회화는 초상화가 주류를 이룬다.

서주의 명당(明堂) 벽화에는

요(堯)·순(舜)·걸(桀)·주(紂) 등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어,

군주의 선악에 따른 흥망의 교훈을 나타냈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묘당(廟堂) 벽화에는

천지신령의 진기하고도 신비스러운 모습과 옛 성현들의 기이한 행적을 그렸다.

 

남아 있는 선진시대의 그림 유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창사의 초묘에서 계속해서 출토된 2폭의 백화(綿畵)이다.

이는 각각의 무덤 주인인 남녀가 용을 부리거나 용과 봉황의 인도를 받으면서

천국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밖에 증후묘의 옻칠한 널[棺]·상자, 신양의 초묘에서 출토된 금슬(錦瑟),

창사 초묘의 사방 벽 등에 그려진 신비한 그림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전국시대의 진기하고도 신비한 그림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진·한 시대

  진·한 시대는 이미 그 전 시대부터 원시적인 단계를 벗어나고 있었으며,

입체감이 나타나는 공간표현이나 인물 등 대상의 생동감과 미세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후한말에는 채옹(蔡邕) 등 서화(書畵)에 능한 인사가 나타나 문학적인 제재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시대가 되면서 회화 유품의 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화상석과 화상전에는 단순히 인물뿐만 아니라 자연경치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 시대의 화제(畵題)는 일월성신·복희(伏羲)·여와(女)·신선·4신(四神)·영수(靈獸)로부터

3황5제·공자·노자 또는 유교적 감계도(鑑戒圖)와 풍속도까지 확장되었다.

특히 공신상으로 대표되는 초상화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고도의 사실성이 요구되었다(진한미술 ).

위·진·남북조 시대

  위·진 시대에는 제재·묘사 형식에서 한대 회화의 전통을 계승·지양했다.

유교적 성격이 강한 감계도가 여전히 많이 제작되었는데, 사전설화도(史傳說話圖)와 함께

실용적인 회화로서 성행했다. 또한 불교의 성행과 함께 불화의 제작도 활발해졌으며,

노장사상이 보급됨에 따라 자연애호의 기풍이 높아지면서

산수화가 독립된 회화로 자리잡은 것도 이무렵이다.

 

남북조시대의 회화에서는 산수화의 발달이 특히 주목된다.

불화·초상화 및 궁전의 장식화가 실용적인 회화라면, 산수화는 비실용적이면서

다분히 오락적이고 감상적인 성격이 강하다(위진남북조미술 ).

수·당 시대

  이 시대의 회화는 약 30년간 지속된 수대 이후, 당대를 문학사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초당(618~712)·성당(713~765)·중당(766~835)·만당(836~907)의 4시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통례이다.

 

당대는 중국회화사에서 몇 가지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인데,

첫째, 진·한 이래 묘선의 발달이 정점에 달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발견한 것이다.

 

둘째, 감상용 회화가 완성되어 주로 화조산수화에서 전통형식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셋째, 중국회화사상 최대의 변화인 일격(逸格)의 수묵화법이 발생하여

중국회화의 양식을 다른 지역의 회화와 확연하게 구분시켜주는 단서를 만든 것이다(수·당미술 ).

오대· 시대

  당말·오대 및 북송 초기의 화풍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성립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다.

이 시기의 회화양식의 변용은 크게 3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중당의 수묵화풍이 종래의 묘선제일주의의 묘법과 결합한 것이다.

묵법과 선묘법의 결합은 산수화를 비롯한 많은 회화 장르에서 새로운 화풍의 전개를 가능하게 했다.

 

둘째, 화북과 강남 또는 서촉(西蜀)과 남당이라는 지방특색이 산수화와 화조화에 나타나

후대 중국회화의 방향을 결정했다.

묵법의 발달은 보수적인 형호의 산수화를 변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강남 화풍의 창시자인 동원 (董源)과 거연 (巨然)의 산수화에도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북송말에 이르러 중국 화단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소동파 (蘇東坡)·

문동 (文同)·

승중인(僧仲仁) 등의 문인과 승려에 의한

일과예(一科藝)로서의 묵희(墨戱)·묵죽(墨竹)·묵매화(墨梅畵)가 성립되었다.

 

남송의 회화계는 화원화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북송회화에 비해 너무 남송적 분위기에 안주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 많으며,

북송말에 완성된 산수·화조·일과예로서의 묵희를 계승한 것이거나

또는 그 아류로 파악할 수 있다(송대 회화 ).

금·원 시대

  대의 회화에 관해서는 확증할 수 있는 유품이 없어서 전모를 파악할 수 없으나

산수화는 북송의 화북 산수화풍이 계승되었으며, 문인화가의 묵희도 행해졌다.

일례를 들자면 산수화에는 양방기(楊邦基), 묵희에는 왕정균 (王庭筠)이 있다.

 

  원대 회화의 일반적인 경향은 남송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북송회화의 양식을 재인식하려는 기운이 강했으며,

궁정화원제가 없었기 때문에 재야의 문인화가·승려화가·직업화가가 활약했다.

그러나 사회적인 신분 차이가 각각의 화풍 전개와는 결합되지 않았으며,

문인화가의 직업화가 또는 직업화가의 문인화가로의 경향이 뚜렷했다.

원체계(院體系) 산수화는 자연경치와 더욱 유리되어 한층 더 형식화되었으며,

북송회화로의 회귀는 이성 (李成), 곽희와 동원, 거연의 산수화풍을

종종 한 화풍으로 뒤섞는 결과가 되었다.

본래 공간표현과 구도형식 및 원근법 등은 각각의 특유한 필묵기법 및 모티프와 결합하여

이성·곽희, 동원·거연의 두 산수화풍을 형성하고 있지만,

원대의 화가들은 이것을 분해하여 자유롭게 조합하려고 시도했다.

원초의 문인화가였던 조맹부(趙孟)가 그 좋은 예이며,

이같은 화법상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은 이들이 원4대가이다.

이들에 의해 원대회화의 특색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시대는 선승화가(禪僧畵家)에 의한 도석인물화도 활발하게 제작되었지만,

원말의 대표적 선승화가 인타라(因陀羅) 외에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제작 그 자체는 더 정교해졌으나 표현내용은 송대에 비해 빈약해졌다.

이 시기에는 또한 직업화가에 의한 불화 제작도 왕성했다.

 

화조화의 경우에는

원초의 전선(錢選)의 복고주의에 의해 북송시대 조창(趙昌)의 사생주의(寫生主義)가 재인식되기는 했지만, 그후 뛰어난 화조화가가 출현하지 않았으며

원말에는 왕연(王淵)에 의해 묘선본위(描線本位)의 장식적 화조화풍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원대의 화훼잡화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고 문인화가의 수묵이 더 큰 특색을 이룬다.

 

묵죽으로는 이간(李)·양유한(楊維翰)·가구사(柯九思)·고안(顧安)·오진(吳鎭)의 작품,

 

그리고 묵매로서는 오태소(吳太素)·추복뢰(鄒復雷)·왕면(王冕) 등이 일가를 이루었다(원대 회화 ).

명대

  명대의 회화는 말기에 이르기까지 원대 회화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말의 혼란에 의해 강남지방이 황폐해지면서 일찍이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부호·사원·도관 등은 쑤저우를 필두로 그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영락연간(永樂年間:1403~24)에 이르러

궁정화원제가 정비될 때까지 명대 화단은 주로 중앙보다는 재야에 있었으며,

그리 두드러지지 못했다.

이 시기가 명대 미술의 제1기이다.

 

선덕연간(宣德年間)에서 천순연간(天順年間)에 이르는 시기(1426~64)는

명대 회화의 제2기에 해당되는데,

화원을 중심으로 하는 절파계(浙派系) 화가가 융성했다.

절파의 회화는 저장[浙江] 지방 형식에 특유의 거친 수묵화법에 원대의 이성·곽희파의 화풍과

남종화법 등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져 필묵의 기운이 거칠고 호방하다.

이것으로 원대 회화의 특색이 더욱 강조되었다.

 

명대 회화의 제3기는

성화연간(成化年間)에서 가정연간(嘉靖年間) 중반 시기(1465~1540경)를 가리키는데,

그 전반기에는 절파와 오파(吳派)가 병존했고 그 후반기에는 문인화파가 융성했다.

특히 오파의 문인화는 성화연간에서부터 홍치연간(弘治年間:1465~1505)까지 활약한

심주(沈周)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졌다고 할 수 있다.

오파 문인화의 형성기에 나타난 원파(院派)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제4기(1567~1643)의 명대 화단은

보수적인 회화활동과 새로운 창작활동이 병존했다.

화풍뿐만 아니라 매화(賣畵) 방면에 있어서도 직업화가와 문인화가의 동질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동기창에 의한 방고주의(傍古主義)와 전형주의(典型主義)가 제창되었다.

한편 문인화가들은 원대의 묵매도와 묵죽도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작을 계속했다(명대 미술 , 명원파 ).

청대

  청조의 문인화파는 관학화(官學化) 경향을 보였다.

청대에는 동기창의 의고주의와 전형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말의 자유로운 회화표현은 후퇴하여 각각 하나의 형태에 꿰어맞추는 경향을 드러냈다.

청대 회화는 강희연간(康熙年間:1662~1722)을 정점으로 형식화가 진행된다.

 

강희·건륭 연간에는 풍속인물화나 산수화 등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화풍이 일률적이며 화가의 개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청조의 화원은 가경·도광 연간(嘉慶道光年間:1796~1850) 이후 급속하게 쇠퇴했다.

다만 재야 화단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누동(婁東)·우산(虞山) 두 파 화가들의 화풍에도 강렬한 개성이 보이지 않으며

진부한 정형화를 드러내고 있다(청대회화 ).

현대

  청말 이후에는 전통화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널리 해외에서 전형을 구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미술전문학교 졸업생에게 많았으며

이들을 학교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신해혁명 이후의 최초의 예술가가 된 치바이스[齊白石]는

전통적인 회화인 국화(國畵)에서 규범을 찾았던 사람이지만,

해파(海派)의 천헝커[陳衡恪:1876~1923]에게 인정받아 국립 베이징예술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서유럽에 유학했던 인물로는 황빈훙 [黃賓虹:1863~1955]·쉬베이훙 [徐悲鴻:1895~1953] 등이 있는데, 이들의 화풍은 현재의 국화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타이완으로 간 저명화가로는

'남장북푸'[南張北溥]로 불린 장다간[張大干]·푸루[溥儒]가 있다.

 

루쉰 [魯迅]의 지도에 의한 목판화의 보급도 주목을 끌지만,

인민공화국의 회화운동을 지탱시킨 것은

1942년의 이른바 〈옌안 문예강화 延安文藝講話〉이다.

화단은 문화대혁명에 의해 한동안 정체되었지만,

위페이안[于非闇]·판톈서우 [潘天壽]·우쭤런[吳作人]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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