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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풍류기행기
계사년 첫 풍류기행은 다산 정약용 선생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다산 선생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이며, 역사상 가장 많은 5백여 권의 책을 저술한 대학자이기도 하다. 아직 차가운 겨울바람이 봄기운을 시샘하는 2월 중순! 평소 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 추운 날씨지만 하늘색은 맑고 쾌청했다. 아내와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후 배낭을 둘러매고 버스가 기다리는 당산역으로 향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내 맘속에는 따스한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가는 자유행복학교 풍류기행! 바로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기 때문이리라!
특히 오늘은 나의 고교 친구들이 몇 명 오기로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이 쓰였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회원들이 하나둘씩 모였고 약속한 고교 친구 몇 명도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곧바로 종합운동장역으로 출발했다. 8시 조금 지난 시간에 우리의 버스는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했고 강남 방면에 거주하는 회원들이 환한 미소를 띄우며 버스에 탑승했다. 한달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이제 많이도 친숙해진 느낌이다. 악수를 나누는 손길에 풍류객만이 느낄 수 있는 정겨움과 행복이 묻어난다.
이번 기행지는 남양주에 있는 다산 선생 유적지이다. 거리도 가까울 뿐만 아니라 유적지가 한곳에 모여 있어 탐방하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전에 소양강댐 상류에 위치한 청평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청평사와 다산이 역사속에서 만났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청평사가 다산이 살았던 여유당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아마 다산이 생전에 청평사에 한두 번은 가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평사 가는 길은 두가지이다. 옛날에는 소양감댐 선착장에서 20여분 정도 배를 타고 가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최근에는 버스를 타고 오봉산 뒤쪽을 돌아가는 길이 생겼다. 우리는 버스로 가는 육로를 선택했는데, 오봉산 넘어가는 고개길에는 아직 빙판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 버스가 다니기에 매우 위험해 보였다. 기사님의 노련한 운전 솜씨 덕분에 무사히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청평사로 난 길을 따라 삼삼오오 걷기 시작했다.
청평사 가는 계곡에는 얼음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바위를 휘돌아 노송을 지나온 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 속세의 잡다한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눈이 쌓인 얼음 위를 한번 걷고 싶었지만 얼음의 두께를 몰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가는 길목마다 전설과 설화가 숨쉬고 있고 이 산사를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이 바위마다 새겨져 있다. 입구에서 얼마 정도 오르니 한쪽 팔에 뱀을 칭칭 감고 바위에 애처롭게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이 우리의 발길은 잡는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렇게 혐오스런 뱀을 감고 있나 하고 다들 의아해 하는데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이 그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오래전 당나라 태종의 딸인 평양공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평양공주를 사랑한 어떤 청년이 죽은 후 뱀이 되어 공주 몸에 붙어산다고 했다. 공주는 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곳 청평사로 왔고 결국 뱀은 부처님의 공덕으로 해탈했다는 설화다.
우리는 청평사로 오르면서 공주와 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도 뱀은 청평사에서 수도하는 스님이고 공주를 좋아한 스님이 파계를 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밤낮으로 정진하여 해탈했다는 이야기가 설화로 둔갑한 것이 아니가 생각해 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20여분 걸어 올라가자 드디어 오봉산 품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청평사가 그 멋진 자태를 드러냈다.
청평사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의 오봉산에 있는 절로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광종 때(973년) 세워진 백암선원(白巖禪院)을 문종 22년(1068년) 이의(李顗)가 중건해 보현암(普賢庵)이라 했으며, 1089년 이자현(李資玄)에 의해 절이 크게 중창되었고, 현재의 절 이름은 1550년 보우(普雨)가 극락전과 그밖의 모든 요사채를 새로 지은 뒤에 고쳐 부른 것이라고 한다. 본당인 능인전(能仁殿)은 1851년에 소실되었으며, 6·25전쟁 때 여러 당우가 소실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보전(極樂寶殿), 회전문(廻轉門, 보물 제164호), 소승방(小僧房) 등이 남아 있다.
청평사 입구에는 평양공주를 찾아 나선 뱀이 해탈했다는 회전문이 있다. 우리는 회전문을 지나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갔다. 대웅전 뒤를 보니 오봉산 정상이 대웅전 용마루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 건축물과 자연의 절묘한 배치에 놀랄 따름이다. 푸른 하늘색과 대웅전의 단청색, 그리고 앞뒤로 늘어선 노송과 주목들이 그림같은 조화를 이룬다. 다산 선생도 기록은 없지만 청평사 주변 풍광에 매료되어 분명 이곳에 몇 번은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웅전과 오봉산을 뒤로 하고 우리는 회전문 앞 계단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청평사의 전설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아직 계곡의 바람은 차갑지만 얼음장 밑으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분명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태운 버스는 한시간 가량 달려 청평에 도착했다. 닭갈비의 본고장 춘천 달갈비보다 더 맛있다고 이름난 청평 닭갈비를 먹기 위해서이다. 마침 송어잡기 축제가 열리고 있어 차량들이 식당앞에 늘어서 있었다. 늦은 점심으로 출출한 회원들은 닭갈비가 익기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막걸리부터 찾는다. 닭갈비는 소문대로 정말 맛이 일품이었다. 고기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부드러웠다. 닭갈비에 막걸리 몇잔을 들이키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소문난 닭갈비로 배를 채운 우리들은 다시 차를 타고 다산 유적지가 모여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향했다.
버스안에서 이번 기행의 발표자로 선정된 초암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에 대해 설명을 한다.
식사 후라 다소 졸리지만 비몽사몽간이나마 다산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과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 고문(古文)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다산은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 하였으며 그가 7세 때 지은 ‘산’ 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여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다산은 23세 때(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였으며, 연천 현감 김양직과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였다. 이를 통해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은 포항 장기로 유배되고 셋째형 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의 두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57세 되던 해에 유배 생활을 마친 다산은 그 후 다시는 벼슬길로 나서지 않았고 평생에 걸쳐 쓴 글들을 정리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미쳐 완성을 보지 못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고 <흠흠신서>, <아언각비>, <경세유표> 등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1836년 75세의 일기를 끝으로 죽음을 맞이한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탁월한 학자였으며 게다가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다산의 삶을 반추하는 사이 버스는 북한강 줄기 따라 다산기념관 앞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먼저 다산문화관을 둘러보고 생가인 여유당을 찾았다.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의 초상화와 유묵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물론 사본이지만 방대한 양의 서적들이 나의 무지와 게으름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생가 바로 뒷산에는 부인 풍산홍씨와 합장된 다산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 일행은 횡으로 늘어서서 잠시 참배를 올렸다. 2백년전의 다산이 우리에게 말한다. ‘평생 백성의 고달픈 삶을 어루만지며 조금이라도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을까 늘 고민하고 연구하던 다산의 민본사상과 실학사상은 현재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묘소 참배를 마치고 우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넓은 강가로 나갔다. 해송 선생이 준비한 새총풍류를 즐기기 위해서다. 강쪽으로 종이컵 세 개를 나무 기둥위에 올려놓고 10m 후방에서 새총으로 맞추는 것이다. 침침한 눈으로 종이컵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근데 황학정 사두인 진봉 선생이 쏜 탄알이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역시 활 잘 쏘는 분이 새총도 잘 쏘는 법이다. 20여분 동안 새총풍류를 즐기고 나니 시계는 벌써 4시20분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풍류체험을 하기 위해 넓은 강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으며 이내 도토리묵과 막걸리가 나왔다. 가장 편하고 미더운 분들과 함께 옛 선비들의 풍류와 자연을 찾아 바람처럼 가볍게 떠나는 풍류기행!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풍류는 유희에 불과하다. 매번 풍류기행때마다 술은 있지만 술이 주가 되는 풍류가 아니고 풍류속에 술이 들어 있을 뿐이다.
초암의 사회로 시작된 풍류체험은 먼저 새총쏘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회원에게 시상을 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회원중 유일하게 과녁을 맞춘 진봉 선생과 폼이 멋져 폼상을 받은 지설에게 소형 후레쉬가 선물로 주어졌다. 다시한번 더 폼을 잡아보라는 주변의 성화에 지설이 일어나 새총쏘는 폼을 잡는다. 양궁에서 시위를 당기는 모습과 흡사한 표정에 다들 웃음이 터진다.
새총풍류 시상식이 끝나고 늘상 그래왔듯이 삼행시 발표기 이어졌다. 먼저 삼행시의 대가인 백천 선생이 삼행시의 진수를 선보인다. ‘정약용, 여유당, 다산초당, 목민심서’가 이번 기행의 삼(사)행시 제목이다. 백천 선생의 삼행시는 각 행(行) 각 구(句)에도 같은 음을 적용한 것으로 어려운 단어가 줄줄이 배합되어 이해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정 : 정제된 정수로 정성을 다해 정도로 정무를 정화시킨 정다산
약 : 약관때 부터 약론과 약문으로 약법과 약술을 했다고 약칭되어
용 : 용명하여 용현에 용두되어 용진하셔서 청사에 용립하셨네 <백천 김세현>
백천 선생의 난해한 삼행시에 다들 주눅이 들자, 오늘 처음 참가한 정락용 선생과 함동일 선생이 손쉬운 삼행시를 선언하며 멋들어지게 한 수씩 읊는다.
정 ; 정 따라 인연 따라 풍류기행 참여해서
약 ; 약주 한 사발 단숨에 들이키니
용 ; 용기백배 천하가 다 내 손안에 있도다 <정락용>
정 ; 정해 놓고 갈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약 ; 약된다며 권하는 풍류기행 못 이겨 왔더니
용 ; 용봉탕보다 더 좋은 약이 분명함을 알았네 <함동일>
다음은 풍류객의 기본소양인 시서화 가무악(詩書畵 歌舞樂) 중에 가(歌)에 출중한 영소님이 여유당으로 운을 불러달라고 한다.
여 ; 여유를 갖고 생각해 보니
유 ; 유유히 흐르는 것이 강물뿐이랴
당 ; 당당한 내 인생도 유유히 흐르네 <영소 안경숙>
학교장인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삼행시 한 수로 분위기를 돋군다.
목 ; 목민심서 책을 들여다보면
민 ;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고
심 ; 심금을 울리며 감동도 주면서
서 ; 서둘러 청렴세상 만들자 하네 <인봉 윤진평>
삼행시 외에도 은봉 선생이 낭낭한 목소리로 멋진 시를 낭송하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번에는 영소, 지설, 이범석 선생이 차례로 애창곡 한곡씩을 뽑낸다. 음풍소요(吟風逍遙)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예정된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3월 풍류기행을 약속하며 아쉬운 뒷풀이 시간을 끝냈다. 겨울과 봄의 중간 지점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중 한분이신 다산 선생을 찾은 오늘의 풍류기행! 차를 타고 오면서 그분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실학을 완성한 대학자 정약용! 18년의 유배지 생활! 유배지에서 풀려 고향땅에서의 18년! 파란만장한 그의 삶속에서도 변치않은 한가지는 바로 늘 백성을 걱정하는 애민사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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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월 풍류기행때도 다산 선생은 다시 포함됩니다! ^^
다산 기행기를 읽노라니 즐거운 시간들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집필에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