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지역: 원평마을(가재마을)-수정봉-입망치-입망봉-여원재-고남산-통안재-유치재-매요리
일 시: 1997년 11월 22일-23일
대 원: 강대춘,박영배(탐사)/이은경(지원)
아침 8:10분에 주촌리 노치마을(가재마을,원평리)을 출발했다. 2구간 때보다는 10분 이르다. 2구간보다 긴 코스이므로 배려한 것이다. 노치마을 뒤를 오르면 바로 산신당이 나온다. 산신당에는 또 수많은 표지기가 달려있다. 우리 이웃인 포항 한마음산악회 표지기의 등장으로 포항셀파산장 표지기가 더 이상 외롭지는 않다. 처음부터 오르막이라 숨이 가쁘지만 견딜만 하다. 수정봉 가기전 대간능선의 죄우측 해발고도 차가 매우 심하다. 능선좌측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쪽은 고도가 700m나 되어 고산특유의 아침 운해가 너른 품으로 깔려있고 능선 우측 주촌리 덕산리 쪽은 해발고도 300m 정도로 동네 뒷산을 연상시킨다. 수정봉까지는 봉우리를 여러개 넘어간다. "하이텔69동 「뒤집어도 같은 마을」< 산골에 산적> 20대 마지막 8월에. 김춘현 외 9명"이라는 표지기가 눈에 띈다. 10명이 가는 걸로 봐서 우리한테 추적 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9: 10분에 수정봉에 섰다. 수정봉(804.7m)에서는 지나온 대간 마루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앞으로는 입망봉이 보이고 여원재지나 멀리 고남산 중계소도 보인다. 서둘러 여원재로 향하니 입망치에 9:40분, 입망봉(700m)에 10:9분 도착이다.
입망봉에서는 바로 여원재로 내려가는데 30분 쯤 내려가면 좌측에 큰 바위가 서 있고 큰 바위를 우측으로 돌아서면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한 100m쯤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능선에 붙어야 한다. 여원재 바로 직전, 소나무 숲에 갇힌다. 대간 종주팀때문에 생긴 길인 모양으로 겨우 겨우 비집어 몸을 빼내면서 싸움하기 근 10여분, 10:55분에 여원재로 떨어진다.
여원재는 남원에서 함양간 24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서 길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남원과 운봉,더 나아가 영남과 호만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고개인 여원재(480m)는 전략적으로도 가치가 있어 임진왜란이나 신라와 백제,동학란등 항상 쟁탈의 대상이 되곤 했다. 고려의 이성계장군이 이 곳까지 진출한 사상유래없는 대규모의 왜구를 대파한 황산대첩 승전의 현장이며,동학란 때는 김개남이 1만의 동학군을 끌고 이 여원재로 진격하여 영남으로의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운봉사람 박문달장군이 이끄는 관군들에게 무참히 대패했던 곳이기도 하다.영남으로 진출을 실패한 동학군은 결국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던 것이다.
오전 11시 25분 여원재를 출발한다.버스정류장에서 남원쪽으로 잘려진 나무 울타리가 있는 곳이 대간 진입로다.마을에서는 합민성터와 고남산 정상 통신시설물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데 막상 산길로 접어들면 길이 없다.고남산 가는길은 논두렁,밭두렁,심드렁이다.간신히 독도로 길을 이어 가다보니 드디어 고남산 오르는 길을 찾아낸다.한참 오르다 보니 산불감시원 아저씨가 서슬퍼런 얼굴로 내려온다.아차싶어 선수를 순간적으로 쳤다. 공손히 인사를 하고 길을 묻고 산불감시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다고 상대방이 대꾸할 틈도 없이 달아붙여 얘기해 댔다. 멍청하게 당한 감시원은 이것 저것 가르쳐 주고는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 법이다.오후 1시 40분, 고남산(846.4m)정상에 서자 갑자기 핸드폰이 터졌다.총무 김해욱이었다.연점산 정상이란다.다음 정기산행지 답사였다.이종률이도 같이 있다고 했다.그들은 정말 애를 많이 쓴다.저런 뒷받침으로 우린 대간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이다. 고남산 정상 바로 넘어 커다란 중계소가 나온다. 사진을 찍자니 간첩같은 기분이 든다.중계소는 대간능선에 차지하여 길을 뭉개버렸다.중계소를 억지로 돌아 나오니 큰 도로가 생겼다.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통안재에서 다시 능선에 붙는다.통안재는 신경을 써서 찾아야 하지만 도로따라 내려가다 보면 수많은 표지기가 능선길을 가르쳐 준다.704봉에 내려서는 능선이 여러개라 대간길을 잘 찾으면 그 다음부터는 탄탄대로이다.매요리 가기전에 왼쪽으로 사당이 나오고 유치재도 지난다.그리고 매요리까지는 계속 평탄하게 간다.매요마을에서는 대간의 주릉이 마을 집들의 돌담과 뾰족지붕인 교회건물을 지나 이어진다.매요마을에 오후 4시 30분에 도착한다 해놓고 3시 20분에 도착했으니 지원조가 올 때까지 시간보내기가 걱정이다.마을 가게에서 덜덜 떨면서 막걸리 한잔하니 대간나그네들 대부분이 여기서 우리와 같았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여원재에서 고남산을 지나 매요리까지 뻗은 대간은 운봉뜰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운봉은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홍보가"의 배경이 된 성상마을이 있어 판소리의 고향이라고 한다.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홍록선생도 조선말기 운봉 화수리 비전 마을에서 태어났다.우리는 매요리를 떠난다. 이제 또 교통전쟁을 치러야 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