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미공개 현대사 관련 1차 사료(史料)들을 발굴, 게재키로 했다. 부정기 시리즈로 계속될 이 작업의 첫 회로 박정희, 김종필 등 5.16 군사쿠데타 주역들의 좌익 전력을 추적한 미국정부의 극비 문서를 공개한다. 미 메릴랜드주 소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이 자료는 이제까지 나온 문서중 5.16 주체세력들의 좌익 전력을 가장 광범위하고 집요하게 추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이 문서가 1963년 대통령 선거 직전, 미 국무부로 보내졌다는 점에서 미국이 한국측의 반공태세에 대해 한시도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약 80매에 이르는 전문 번역을 박정희편, 김종필편으로 나눠 싣고,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서울대 박태균 교수(국제지역원 한국학 담당 초빙교수)의 문서 해제 등 3회로 나눠 싣는다. 원문에는 각주와 도표가 있었으나 편의상 번역문에서는 삭제했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수신 : 힐즈먼
발신 : 마샬 그린
주제 : 한국
본 건은 대한민국 군사정부 내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에 관한 그렉 헨더슨의 연구 초안입니다.
25쪽 상단에서 시작되는 결론 부분을 주목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백에 줄로 표시한 구절은 제가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균형있는 판단을 할 만한 적절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김종필은 적당한 때에 한국 정부를 북한에 이양하는 데 헌신적일 수 있는 공산주의자입니다. 아니면 김종필은 잘해 봐야 민족주의와 반미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원칙없는 모험가이며 한국에서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원성을 살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력에 관한 테제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공산주의에 고무되어 발생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즉각적인 우려를 유발시켰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반공주의적인 자세와 정책을 취함으로써 이런 우려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미국은 한국 정부의 반공주의적 성격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15개월 동안 처음의 우려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이런 우려는 한국과 관련 있는 미국 관리와 한국에 정통한 관측통 사이에 점점 심해져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도 없고, 증거 획득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점점 늘어나는 단서는 전반적으로 심각하게 우려할 상황의 발생 가능성에 맞추어져 있다. 한편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해(원문에는 injuries로 돼 있으나 문맥상 inquiries로 해석함) 달라는 의회와 다른 관계 당국들의 요구는 점증해 왔다.
Ⅰ. 개요
한국 군사 정부의 핵심 세력이 과거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였고 혹은 대규모 정부전복 기도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많다. 박 의장 본인은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종필은 대학 재학시절 좌익분자였으며, 그 후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어울려 지냈다. 박 의장과 김종필의 가족 중에는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이 있다. 중앙정보부 내의 김종필 측근들은 좌익이나 공산주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의장의 고문진과 동료들 중에도 과거의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당인 공화당에는 특히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박-김 정권의 운영 방식은 어느 정도 이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속임수, 증거 없는 기습 체포, 공갈, 정치 뇌물, 테러 전술이 자주 동원된다. 여기에는 반미 감정과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꺼리거나 미국의 충고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잠재적인 성질이 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중앙정보부의 지배적인 권력이다. 일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고문진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이 조직은 공화당,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주요 기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역이며 겉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면서 신원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지도부 내의 핵심 세력에 의해 빈틈없이 조직되고 통제된다.
좌익 핵심세력들이 현재 공산주의 ‘슬리퍼(활동하지 않고 숨어 있는 스파이)’인지, 아니면 우리가 바라듯이, 단지 회개한 과거 좌익분자들의 친목 집단인지는 입증되지 않은 상태다. 어느 경우든, 그 좌익분자들은 문제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과 한국 군사 정부간의 진정한 협조와 이해 합일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양국 관계의 악화와 반목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Ⅱ. 조기 환경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당시 한국에는 지주제도가 확산되었고 지주제도는 통상 총독부와 관련이 깊었다. 공산주의는 한국에서 반일 운동에 가장 효과적인 기제였다. 대도시, 특히 대구와 서울에서는 교사 등의 지식인들이 정부를 비난하거나 내심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교수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컸다. 박정희와 그의 형제들은 대구 근방의 기차 정거장인 구미 근처에 사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김종필과 여섯형제는 대전 인근의 부여 근처에 사는 중간 규모 지주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김종필의 부모는 김종필이 어릴 때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두 사람은 총명했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국가적인 상황을 절망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개인과 국가의 진로를 폭력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일찌기 대구에 있는 사범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박정희를 가르쳤던 교사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공산주의자로 (아마도 전 북한 외교 통상 위원회 부위원장),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현재 간첩 행위로 한국에 수감되어 있는 황태성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일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학생들의 분위기는 적대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절친한 교우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왕학수와 황용주 같은 박정희의 급우나 김종필의 친구들이 지금 박-김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Ⅲ. 박정희 이력의 좌익적인 측면
a. 군사교육
박정희는 1937년에 대구 보통 학교를 졸업했지만,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그가 3년 동안의 공백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좌익 책자를 읽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의 동기 세 명이 나중에 쿠데타에 동참했다. 박정희는 5백명의 동기 가운데 성적 최상위자로 선발되어 자마에 있는 일본 사관학교 제57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이곳은 한국출신의 어린 학생들이 일본이 실시하는 엄중한 전시 통제에 반발해 좌익의 영향을 받기 쉬운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만주 군관학교 졸업생인 강문봉 중장(퇴역)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박정희는 일본 사관학교 제 55기생이자 전 공군 참모총장이며 현 대한중석의 사장인 김창규 중장(한국 공군, 퇴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은 아마도 김창규를 일본파에 반대하는 함경도파의 정치적 브레인으로 생각하는 함경도파의 입장에서 비롯된 듯하다. 김창규는 좌익 영향의 기미를 거의 보이지 않으며, 박정희나 현 정권과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
좌익의 영향력은 박정희가 속한 57기보다 한 기수 위인 56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일본이 패망한 뒤 자마의 사관학교를 폐교한 것과 더불어 일본에서는 끝났다. 박정희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2년 동안 좌익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9명은 박정희의 후배로, 동양적인 제도에서는 특히 그의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이들 후배들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훗날 박정희가 지휘한 공산주의 음모에 개입하게 되었다. 한국 사관학교 교관들로 그와 공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7명은 그 결과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와 그의 동기생들 사이에 좌익 영향의 징후는 생도 시절에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쿄에서 2년제, 혹은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엘리트가 박정희와 더불어 좌익으로 돌아섰다.
b. 공산주의 음모
남한에서는 1947년 말에서 1948년 초까지 남로당 최고 사령부가 활동했다. 그 이후에도 남로당의 일부 주요 지도자들은 1950년 4월에 박헌영의 직속참모였던 이주하와 김삼룡이 체포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북한은 1950년 6월 10일에 남로당의 이 두 요인과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조선 민주당의 당수이며 평안도 지방 민주주의 사상가들의 우두머리인 조만식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 문제는 미 대사관의 정치부를 통해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한국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주하와 김삼룡은 남한이 서울을 버리고 떠날 때 남한 당국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조만식은 북한이 평양을 버릴 때 북한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로당 공산주의자들 중 이주하, 김삼룡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일한 서열의 최고위간부로 이중업(李重業)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33년에 공산주의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그 후 이중업은 박헌영, 이주하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했고 해당 기간(47년말-48년초) 동안에는 남로당의 조직부장(Chief of the Organization Departement) 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 국방경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45년에서 1948년 9월 사이 이 조직에 침투한 것이었다.
이때 이중업은 박정희를 비롯해 많은 장교들과 접촉한 듯하다. 이중업이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중있고, 가장 성공적으로 접촉한 장교는 박정희였다. 이중업과 박정희의 접촉은 박정희가 중국 광복군에서 김홍일과 근무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박정희는 1946년 12월에서 1947년 2월까지 제1연대의 중대장으로서 사관생도들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모집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연대는 당시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1연대 건물에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사관학교)가 있었다. 당시 연대 장교들은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의 교관 역을 겸했다. 당연히 이 장교 양성 과정은 생도 시절의 젊은 장교들에게 사상을 주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사관학교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참모를 많이 포함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박정희는 이런 노력에 앞장 선 듯 하다. 1947년 3월과 4월에 졸업한 제3기생들이 교육을 받은 건 박정희가 이 연대에 있을 때였다. 제3기는 주로 전직 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의 한 고위 장성은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어떤 장교가 자신의 사병들을 장교 연수 과정에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말했다. 현재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한국군의 G-3(작전국)는 300명의 생도들 가운데 절반이 노골적인 불충분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948년 10월 19일에서 27일에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4월에 제주도 제9연대에서 처음 발생한 소규모의 전복기도를 비롯해, 1948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구 제6연대 사건, 1948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제4연대 사건, 1948년 11월에 발생한 대전 제2연대 사건에도 개입했다. 이 사건들의 결과, 많은 장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많은 장교들이 여수 순천 반란에서 목숨을 잃고, 또 일부는 순천과 대구에서 달아나 게릴라가 되어 1949년 4월부터 한국 전쟁이 날 때까지 한국을 유린한 게릴라전을 지도했다.
박정희가 이 심각한 사건들과 전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확실하다. 그가 정체를 드러내고 1950년(1948년의 잘못인 듯) 11월에 체포된 것은 이들 사건들, 특히 여수 순천 사건 때문이었다. 박정희 혼자 사관생도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하는 주역을 맡은 건지, 이정업과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이들과 접촉하는 데 적극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와 이중업은 이 기간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이들은 워싱턴 주재 현 한국 대사인 김정열 중장에게 각각 친분 사실을 증언했고, 최경록 중장(퇴역)은 이들이 이중업이 즐겨 찾던 명월관에서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더라고 회상했다.
박정희와 장교 양성소와의 관계는 이렇게 짧은 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47년 9월에서 1948년 9월까지 육군 사관학교에 있는 학생 파견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중요한 직책에서 그는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교관들로 참모진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로 생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김창룡 중위(나중에 중장으로 진급)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독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김창룡은 맹렬한 반공주의자로 일본군 시절에 헌병 사병을 지냈고, 그 자신 역시 육군 사관학교 제3기생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생도들에게 접근하는 수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광범위한 조사를 받고 김창룡 수사대의 주무기인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의 동창생들이 육군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박정희는 그 뒤 김창룡 수사대의 수사에 합류했으며, 공모자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가기도 했다. 그가 직접 폭로한 사람의 숫자와 신원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10여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그의 부하 장교들도 있었다. 자신의 체포가 바로 조직 지도자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폭로했고,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폭로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지켜보았던 관측통은 아마도 수 백 명의 좌익분자들, 주로 군 장교들이 이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중업도 여기에 포함되어 1949년 4월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중업은 그해 7월에 딸이 간수를 유혹하여 대한민국 헌병복을 입혀 북한으로 인도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했다. 이중업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해서 한국 군내의 정부 전복 기도는 제거되었으며, 이 음모가 진행되었다면 한국 전쟁 초기의 혼란 이상의 혼란상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부참모총장, 특히 G-2(정보국)의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 구명을 탄원했고, 그 결과 박정희는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으며, 그 후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를 G-2 분야의 문관으로 고용했다. 이런 위치에서 박정희는 1949년 봄에 졸업하는 제 8기생들 가운데 똑똑한 젊은 장교들을 G-2 분야에 추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종필을 비롯해 젊은 시절에 좌익 성향을 지녔던 일부 장교들이 박정희의 후원으로 G-2에 들어갈 수 있었거나, 적어도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분명히 박정희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김종필은 1949년 5월 이후 계속 G-2에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의 성실한 근무에 만족했고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즉각 그의 한국군 재입대를 추천했다. 박정희는 충성심을 갖고 열심히 싸웠으며 진급에 진급을 거듭, 1954년 1월에는 장성이 되었다.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과거 엄청난 공산당 음모를 꾸미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에게 고문과 죽음을 안겨준 그의 성격 역시 드러났다. 음모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지만, 박정희는 그 음모를 주도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전 미국 외교관
발굴-현대사 뒷모습 <3>이 문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朴 사상 의심한 미 정부 일각에서 주도"
2001-11-19 오전 10:03:33
1962년 3월 15일 저녁, 정동에 있는 미 대사관저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동년 2월 27일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미국의 요구와 압력에 의해 눈물을 흘리면서 발표한 '민정불참‘과 ’8월 15일 민정이양‘ 선언이 나온 직후였으며, 군사정부가 요구하였던 2,500만 달러의 추가원조를 미국이 수용하기 직전의 시기였다. 이날 파티에는 버거 주한 미국대사, 킬렌 USOM/K 처장, 멜로이 유엔군사령관, 박정희 의장, 김재춘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하였다.
파티가 끝날 무렵 박정희 의장은 버거와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다음 날 ‘군정연장’과 관련된 선언이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2.28 선언을 통해 민정이양을 선언한 박정희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열린 파티가 곧 군정연장을 내용으로 하는 3.16 성명의 전야제가 되었던 것이다.
침묵을 지키던 워싱턴은 3월23일 국무부 대변인 화이트의 공식논평을 통해 4년간 군정을 더 지속시킨다면 한국정치에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3월29일 국무부는 또 한차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박정희와 케네디 사이에는 군정연장과 민정이양을 둘러싼 편지가 3월 말부터 4월 초사이 몇 차례 왕래하였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요구한 2천5백만 달러의 추가원조를 사실상 거부하였고, 한국군 감축이 이루어질 것이며 미국원조가 감소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시기 미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활동했던 이가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다. 한국의 정치와 관련된 유명한 저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박행웅, 이종삼 번역, 한울아카데미, 2000, 원제: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의 저자이기도 하다.(이 책은 이후 현재까지 외국인이 본 한국정치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성과로 이용되었다. 수많은 미국의 학자들, 외교관들이 한국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이용하였다) 헨더슨은 불법적인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의장과 쿠데타 주체세력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구 민주당 관계자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이 한창이던 1963년 봄, 합동통신사의 리영희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박정희의 민정이양 번복을 이유로 잉여농산물 원조를 보류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이 소식은 곧 도하 신문에 특종으로 발표되었고, 군사정부 측에서는 미 대사관에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박정희를 달래서 민정이양을 성사시키려고 했던 미 대사관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헨더슨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헨더슨은 본국에 돌아간 이후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에 관한 테제'는 바로 그레고리 헨더슨이 작성한 문서이다. 정확한 작성일자를 알 수는 없지만, 1962년에 쿠데타 핵심세력과 관련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비밀 인터뷰 작업을 통하여 1963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황태성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 있고, 그가 남한에 파견된 사실을 미국이 파악한 것은 1962년 말경이다) 문서의 내용 중 한국전쟁 시기 각 지역에서의 활동이나 부역과 관련된 내용은 인터뷰 없이는 정리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정보문건으로서는 드물게 각주를 달고 있다는 것은 이 문서를 작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또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문서의 내용이 사실임을 방증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서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헨더슨 개인이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문서일 뿐만 아니라 미 국무부 내에서도 이 문서의 신빙성에 대한 정확한 논평을 달지 않았다. 물론 헨더슨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러한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지는 않았겠지만, 군사정부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그로서는 부정적인 내용의 자료들을 주로 이용하여 문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정적으로 누가 이러한 정보를 제공했는가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국무부 내부에서 회람되는 문건이었고, 공개되지 않는 문건이었다면 굳이 취재원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는 당시 군사정부와 미국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문서는 당시 군사정부 주체들에 대한 미국의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쿠데타 직후부터 미국은 군사정부의 주체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 국무부 사이의 전문들을 수록한 795B 문서들(7은 정치, 95B는 남한을 가리킴)과 당시의 중요한 문서들을 공식적으로 편집한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1963의 한국 파트에 있는 문서들에는 이와 관련된 문서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5.16 직후 미국은 한국 밖에 있는 한국인 군인들, 예컨대 정일권, 송요찬(이상 미국), 백선엽(당시 주대만 대사) 등을 통해 군사 쿠데타 주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이들은 대체로 박정희가 좌익의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박정희를 둘러싸고 있는 ‘젊은 장교들(young officers)'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육군 정보국에서 근무한 이들이 공산주의의 이론과 북한의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에 관한 테제”와 같은 문서가 나온 데에는 1962년 한해동안 이루어진 군사정부의 활동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중앙정보부의 초법적인 활동, 4대의혹 사건, 통화개혁, 황태성 사건 등은 군사정부와 미국 사이에 갈등을 빚어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러한 활동이 쿠데타 주체세력 중 일부 젊은 군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이들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초기에 비밀에 붙여졌던 황태성 사건이 미국에 알려지면서 박정희에 대한 조사도 함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의 군정기간동안 미국의 문서들 속에는 ‘민족주의적(nationalist)', 또는 ’사회주의적(socialist)'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등장하며, 이 형용사들은 주로 ‘젊은 장교들’과 박정희를 둘러싸고 있는 ‘비밀연구소 직원들(backroom boys)’를 수식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군사정부 인사들에 대한 미국의 보편적인 인식은 아니었다. 쿠데타의 공약에는 분명히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점이 있었으며, 미국과 접촉하는 군사정부의 인사들은 쿠데타 주체들이 명백하게 반공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 역시 쿠데타가 발생한 지 보름이 지난 이후에는 군사정부를 지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또한 당시의 미국문서들은 박정희만은 믿을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가의 중심에는 버거 주한미국대사가 있었으며, 그의 주위에 있는 인물들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박정희를 중심으로 정치세력들을 재편할 경우 한국 내에서 안정된 정치상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1965년 버거는 베트남 대사로 가기 직전 자신이 한국에 있는 동안 군사정부의 주체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결론적으로 미국 행정부 내에서는 군사정부 내의 인사들에 대하여 상반되는 인식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경우는 분명하지만, 전력이 분명하지 않은 쿠데타 주체세력 중 육사 8기생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던 반면, 반공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한미관계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문서가 그린을 통해서 힐스만에게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그린은 쿠데타 당시 주한미국 대리대사로서 장면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던 인물로 홍콩주재 총영사로 있다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헨더슨이 왜 이 문서를 국무부장관에게 보내지 않고, 그린에게 보냈을까? 그린은 이 문서를 국무장관이나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서 받은 것일까, 아니면 헨더슨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일까? 만약 그린이 헨더슨으로부터 이 문서를 직접 받았다면 국무부 내에서 군사정부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 이 문서가 작성되고 회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당시 국무부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군사정부 내 인사들의 사상에 대한 신뢰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힐스만에게 이 문서를 보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힐스만은 국무부의 조사국장(Director of the 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으로 있다가 1963년 극동담당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인물이다. 국무부 조사국은 다른 나라의 상황을 상세하게 조사하는 곳으로 각국정보평가(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를 CIA와 함께 작성하는 기관이다.
익명의 한 연구자는 이 시기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에 정치공작을 시도하였으며, 그 핵심에는 힐스만이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필자는 1998년 메릴랜드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와 케네디 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 힐스만과 관련된 자료를 열람하려고 하였지만,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료들이 공개되지 않았으며, 힐스만 개인의 인터뷰(Oral History)는 공개금지로 되어 있었다. 과연 이 문서는 왜 그린으로부터 힐스만에게 전달되었을까? 혹시 그린이나 힐스만이 박정희를 지지하고 있었던 버거대사나 국무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헨더슨에게 정보를 파악할 것을 지시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첫댓글미국은 이런 식의 문서를 가끔 발간하지여..사실 이 정도는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도여..그들은 자기 나라에 반정부세력의 망명자와 그 경쟁자 모두를 함께 안고 있습니다..즉 어느 때든 어느 쪽이든 이용하겠다는 것이고 실제 그런 의도는 (미국정부의 묵인하에) 민간인들을 통ㅇ해서나 미 정부당국에 의해서 나타남니다..
즉 박정희는 양지만을 쫓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해바라기 인생"이였다는 것이 보통의 평가입니다...그는 쿠데타 뒤에 말했습니다..반공을 국시로 한다고여...!!그런데 미국이 왜 그런 ..물론 이 글에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그 정도 수준이지만여..그런데 마치 박정희가 어찌고 어찌고..이상한 생각을 만...
공산주의 전복을 기도한 군인놈들이 박정희에게 나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사람인데 우리 집단에 가입하시오라고 미쳤다고 말하겠나? 박정희는 군내 친목 모임인줄 알고 가입했으나 형이 죽은 사실로 인하여 그 일을 파악하던 중 공산주의집단의 실체를 발견, 상세히 조사하게 된다. 그래서 닥치고 있다가 확 그냥 다 불어
텬웅님// 역사적 사실을 파헤칠 때 당사자가 진실을 말할 수 없을때는 증인이나 당시 문건, 상황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런데 님의 의견은 객관적이질 못합니다. 박정희가 친목모임인 줄 알고 가입했다고 하는 건 후세의 박통 찬양자들이 하는 말이지요. 박통은 죽었으니 사실여부를 알 길이 없고...
박통의 가족(박상희)과 이중업을 통해 박통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건 확실하고 여러 정황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고 박통이 여순반란 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확실한 자료가 있는 겁니다. 아마 박통은 이 사실을 왜곡하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미군에 의해 한국군이 양성되던 시기니 미군 정보망에서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는 건 위 문건으로 증명되지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고 해서 가려지는 게 아닙니다.
텬웅님// 단지 그동안 박통의 위세와 계속된 군부세력의 집권으로 이러한 사실이 숨겨져 있었을 따름이지요. 텬웅님께서 존경하고픈 박통이 반민족주의자이면서 빨갱이였다는 사실이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많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스페인 내전 때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정부 편으로 참전했던 사실이 증명합니다. (헤밍웨이의 소설에도 나오지요.) 그러니 박통이 당시 빨갱이라고 해서 당시 분위기로는 크게 매도할 건 아니지요. 그 후가 문제지...
첫댓글 미국은 이런 식의 문서를 가끔 발간하지여..사실 이 정도는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도여..그들은 자기 나라에 반정부세력의 망명자와 그 경쟁자 모두를 함께 안고 있습니다..즉 어느 때든 어느 쪽이든 이용하겠다는 것이고 실제 그런 의도는 (미국정부의 묵인하에) 민간인들을 통ㅇ해서나 미 정부당국에 의해서 나타남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지는 안했지만 중간까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여서...그리고 5.16 쿠데타에 박정희가 형식적이든 어쨌든 쥐휘관은 아니였자나여..장도영이였지여..결국 쿠데타 몆일 만에 박정희에게 제거(역쿠데타) 되었고여..
즉 박정희는 양지만을 쫓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해바라기 인생"이였다는 것이 보통의 평가입니다...그는 쿠데타 뒤에 말했습니다..반공을 국시로 한다고여...!!그런데 미국이 왜 그런 ..물론 이 글에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그 정도 수준이지만여..그런데 마치 박정희가 어찌고 어찌고..이상한 생각을 만...
들게 하는 것 같군여..처음 선포된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건이 있는데 무슨...!!..무엇보다 기존의 연구와 똑같은 사실 의 틀으 벗어나지 않으면서 마치 박정희가 무슨 혁명가, 고난을 받고 그것을 이겨낸 양.. 요지 등에서 실제 내용과 는 다른게 표현이 되어있네여..
공산주의 전복을 기도한 군인놈들이 박정희에게 나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사람인데 우리 집단에 가입하시오라고 미쳤다고 말하겠나? 박정희는 군내 친목 모임인줄 알고 가입했으나 형이 죽은 사실로 인하여 그 일을 파악하던 중 공산주의집단의 실체를 발견, 상세히 조사하게 된다. 그래서 닥치고 있다가 확 그냥 다 불어
버린거다. 쀍~
텬웅님// 역사적 사실을 파헤칠 때 당사자가 진실을 말할 수 없을때는 증인이나 당시 문건, 상황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런데 님의 의견은 객관적이질 못합니다. 박정희가 친목모임인 줄 알고 가입했다고 하는 건 후세의 박통 찬양자들이 하는 말이지요. 박통은 죽었으니 사실여부를 알 길이 없고...
박통의 가족(박상희)과 이중업을 통해 박통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건 확실하고 여러 정황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고 박통이 여순반란 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확실한 자료가 있는 겁니다. 아마 박통은 이 사실을 왜곡하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미군에 의해 한국군이 양성되던 시기니 미군 정보망에서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는 건 위 문건으로 증명되지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고 해서 가려지는 게 아닙니다.
텬웅님// 단지 그동안 박통의 위세와 계속된 군부세력의 집권으로 이러한 사실이 숨겨져 있었을 따름이지요. 텬웅님께서 존경하고픈 박통이 반민족주의자이면서 빨갱이였다는 사실이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많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스페인 내전 때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정부 편으로 참전했던 사실이 증명합니다. (헤밍웨이의 소설에도 나오지요.) 그러니 박통이 당시 빨갱이라고 해서 당시 분위기로는 크게 매도할 건 아니지요. 그 후가 문제지...
박정희를 비롯한 친일파들이 계속 이렇게 살았지요.
그러게요 참 박정희 살려고 공산당 동지들을 버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