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정보는 '크메르의 세계'가 기획한 <21세기 대중음악 사전>을 구성하는 항목으로서,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전편을 먼저 읽으려면 '여기'를 클릭하라.
일렉트로닉 뮤직의 역사 (2-2) : 발전기 [1940년대~1950년대] ㊥
Electronic music
2.4. 일본의 전자음악
옹드 마르트노(Ondes Martenot), 테레민(Theremin), 트라우토니움(Trautonium) 같은 전자악기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일본에서 아주 조금만 알려져 있었고, 시바타 미나오(Minao Shibata, 柴田南雄: 1916~1996) 같은 일부 작곡가들만이 당시에 그런 악기들을 알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몇년이 지나자 일본의 음악가들은 전자음악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몇몇 가장 주요한 시도들은 작곡가들에 대한 제도적 후원을 통해 이뤄졌고, 작곡가들은 그런 제도를 통해 최신 음향녹음 및 음향처리 장비들을 이용한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들은 새롭게 출현하던 장르에 아시아 음악(Asian music)을 혼융시키는 형태를 보여줬고, 그 결과 이후 수십년간 일본이 음악 테크놀리지(기술)의 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기반을 닦아주었다.(주37)
1946년 전자회사인 '소니'(Sony, ソニー株式会社: 당시 명칭은 '도쿄통신공업'[東京通信工業, Tokyo Tsushin Kogyo K.K.])가 설립됐고, 작곡가 타케미츠 토오루(Toru Takemitsu, 武満 徹: 1936~1996)와 시바타 미나오는 1940년대에 각기 독자적으로 전자기술을 음악에 이용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곡들을 작곡했다.(주38)
(사진) 타케미츠 토오루.
타케미츠는 1948년에 기술(테크놀로지)이 "잡음(노이즈)을 혼잡한 작은 관(튜브) 안에서 보다 이완된 음악적 음들을 집어넣어줄 것"임을 인식했다. 그것은 같은 해에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 1910~1995)가 '뮈지크 콩크렛'(Musique concrète, 구체음악, 具體音樂)에서 한 작업과 동일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케미츠는 '뮈지크 콩크렛'을 몇년 뒤에야 알게 된다. 1949년, 시바타는 자신이 정립한 개념인 "매우 고도의 퍼포먼스가 가능한 악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음파라도 합성(synthesize, 신디사이즈)할 수 있어야만 하며, 매우 손쉽게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악기를 통해 음악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주39)
같은 해, '소니' 사는 마그네틱(자기) 테이프 녹음기(magnetic tape recorder)인 'G 타입'(G-Type)을 개발했다.(주40) 'G 타입'은 법원과 관공서에서 인기있는 녹음장치가 되었고, 이후 1951년에 가정용 녹음기인 'H 타입'(H-Type)을 출시하는 데로 이어졌다.(주37)
1950년, 일군의 음악인들이 '소니' 사의 테이프 녹음기를 이용한 실험적인 전자음악을 제작하기 위해 '직켕 코우보우'(Jikken Kobo, 実験工房) 전자음악 스튜디오를 설립하려 했다. 여기에는 타케미츠 토오루, 아키야마 쿠니하루(Kuniharu Akiyama, 秋山邦晴: 1929~1996), 유아사 조우지(Joji Yuasa, 湯浅譲二: 1929~ ) 같은 음악가들이 참여했고, 이들이 최신 음향 기술을 이용할 수 있도록 '소니' 사가 후원했다. '소니'는 타케미츠를 고용하여 자신들의 녹음기에 사용할 견본용 전자음악을 작곡토록 했고, 그의 콘서트도 후원했다.(주41)
'직켕 코우보우' 동인들이 발표한 최초의 전자 테이프 음악은 1951년 아키야마 쿠니하루가 작곡한 <토라와레노 온나>(囚われの女, Toraware no Onna, 사로잡힌 여자)와 <사쿠힘 비>(作品B, Piece B)였다.(주42) 이후 이들이 작곡한 '일렉트로닉 어쿠스틱 테입 음악'은 라디오, 영화, 극장용 배경음악으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영상) 타케미츠 토오루가 작곡한 영화 <타인의 얼굴>(他人の顔) 배경음악. 1966년작.
'직켕 코우보우' 동인들은 콘서트도 했다. 그 중에는 1953년에 행한 <직켕 코우보우>(Experimental Workshop), <제5회 전람회>(5th Exhibition) 공연도 포함되는데, 이 공연들에는 '소니' 사가 개발한 '오토 슬라이드'(auto-slide)라는 장비가 사용됐다. '오토 슬라이드'는 테입에 녹음된 사운드트랙에 슬라이드 쇼를 합성할 수 있도록 한 장치였다. '직켕 코우보우' 동인들은 소니 스튜디오에서 콘서트용 테입 뮤직을 제작할 때도 '오토 슬라이드'를 사용했다. '직켕 코우보우' 동인들의 콘서트와 실험적인 일렉트로 어쿠스틱 테입 뮤직은 그해 말에 나타날 일본의 '뮈지크 콩크렛' 음악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주43)
일본에서 '뮈지크 콩크렛' 장르를 도입한 인물은 1952년에 파리에서 셰페르의 콘서트에 참석했던 마유즈미 토시로우(Toshiro Mayuzumi, 黛 敏郎: 1929~1997)였다.(주42) 마유즈미는 귀국 직후,1952년에 제작된 코메디 영화 <순정의 카르멘>(カルメン純情す)에 사용될 짧은 테입 음악을 통해 실험을 했고,(주44) 1953년에는 JOQR(文化放送) 라디오 방송을 통해 <뮈지크 콩크렛을 위한 작품 X, Y, Z>(ミュージックコンクレートのための作品X・Y・Z)를 발표했다.(주42)마유즈미는 또한 [군국주의자이자 탐미주의자였던] 미시마 유키오(Yukio Mishima, 三島 由紀夫: 1925~1970)가 1954년에 발표한 라디오 연속극 <복싱>의 배경음악용 뮈지크 콩크렛 작품도 작곡했다.(주44)
(동영상) 마유즈미 토시로우가 작곡한 <순정의 카르멘> 삽입곡.
하지만 프랑스 뮈지크 콩크렛의 창시자 셰페르가 갖고 있던 '오브제 소노'(objet sonore, 소리 대상) 개념은 일본의 작곡가들에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마유즈미에 따르면, 음악적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본 작곡가들의 관심은 "인간의 연주 대상이나 한계"의 제한을 극복하는 일이었다.(주45) 이런 경향은 일본의 몇몇 일렉트로 어쿠스틱 뮤지션들로 하여금 음열주의(serialism) 및 12음 기법(twelve-tone techniques)을 사용하게 만들었고,(주45)특히 이리노 요시히로(Yoshiro Irino, 入野義朗: 1921~1980)가 1951년에 발표한 12음 기법(dodecaphonic)의 작품 <실내협주곡>(Concerto da Camera)(주44)이나 마유즈미의 <뮈지크 콩크렛을 위한 작품 X, Y, Z>, 그리고 시바타가 1956년경 발표한 전자음악들에서 더욱 두드러졌다.(주46)
[전편에서 설명했듯이] 1953년 NWDR(북서 독일 방송, Nordwestdeutscher Rundfunk: 1956년에 WDR로 개편) 라디오가 쾰른의 스튜디오 내에 향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해질 일렉트로닉 뮤직 스튜디오를 만든 데 이어, 일본의 NHK도 1954년 도쿄에 국제적으로 선도적인 일렉트로닉 뮤직 시설인 'NHK 스튜디오'(NHK Studio)를 설립했다. 이 스튜디오에는 음원 생성기, 음향가공 장비, 레코딩 장비, 라디오포닉 테입 장비, 옹드 마르트노, 일현금(Monochord, 一絃琴)과 멜로코드(Melochord), 사인파 발진기(sine wave oscillator), 테이프 녹음기, 링 변조기(ring modulator), 대역 필터(band-pass filter), 4채널 및 8채널 믹서 등의 장비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NHK 스튜디오'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에는 마유즈미 토시로우, 시바타 미나오, 유아사 조우지, 이치야나기 토시(Toshi Ichiyanagi, 一柳 慧: 1933~ ), 타케미츠 토오루 같은 이들이 있다.
'NHK 스튜디오'에서 나온 최초의 곡들은 1955년에 발표됐다. 여기에는 마유즈미가 작곡한 5분 짜리 작품들인 <소수비의 계열에 따른 정현파의 음악>(素数比の系列よる正弦波の音楽, Studie I: Music for Sine Wave by Proportion of Prime Number), <소수비의 계열에 따른 변조파의 음악>(素数比の系列による変調波の音楽, Music for Modulated Wave by Proportion of Prime Number), 그리고 스튜디오 내의 다양한 음원 생성기들을 이용한 <구형파와 톱니파의 인벤션>(矩形波と鋸歯状波のインヴェンション, Invention for Square Wave and Sawtooth Wave)도 있었다. 그리고 시바타는 20분 길이의 스테레오(=2트랙) 음악 <스테레오 방송을 위한 뮈지크 콩크렛>(Musique Concrète for Stereophonic Broadcast)을 내놓았다.(주47)
(동영상) 시바타 미나오가 작곡한 뮈지크 콩크렛 곡.
한편, 1947년 당시 16세 소년이었던 카케하시 이쿠타로우(Ikutaro Kakehashi, 梯 郁太郎: 1930~ )는 <카케하시 시계점>(かけはし時計店)이란 수리점을 열었다가, 이후 라디오 수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54년에 '카케하시 무선'(カケハシ無線, Kakehashi Musen)을 창업했고, 이 회사가 성장하여 1960년에 전자오르간을 만드는 주식회사인 '에이스 전자공업'(エース電子工業, Ace Tone)이 되었고, 1972년에 '롤랜드'(ローランド株式会社, Roland Corporation)로 개칭했다.
카케하시는 1955년부터 전자악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단선율을 창조해내는 장치를 목표로 했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테레민, 옹드 마르티노, 전자 키보드를 생산했고, 1959년에는 하와이안 기타 앰프 및 전자 오르간도 생산했다.(주48)
(주37) Holmes, Thom (2008), Electronic and Experimental Music: Technology, Music, and Culture (3rd e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p.106.
(주38) Holmes, Thom (2008), 앞의 책, p.106 및 p.115.
(주39) Fujii, Koichi (2004), "Chronology of Early Electroacoustic Music in Japan: What Types of Source Materials Are Available?",Organised Sound9: 63~77,pp.64~66.
(주40) Fujii, Koichi (2004), 앞의 논문, p.66.
(주41) Holmes, Thom (2008), 앞의 책, pp.106~107.
(주42) Holmes, Thom (2008), 앞의 책, p.107.
(주43) Fujii, Koichi (2004), 앞의 논문, pp.66~67.
(주44) Fujii, Koichi (2004), 앞의 논문, p.64.
(주45) Fujii, Koichi (2004), 앞의 논문, p.65.
(주46) Holmes, Thom (2008), 앞의 책, p.108.
(주47) Holmes, Thom (2008), 앞의 책, p.108 및 pp.114~115.
미국 일렉트로닉 뮤직의 역사는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 우측사진)가 <가상의 경치 1번>(Imaginary Landscape, No.1)을 발표했던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가상의 경치 1번>에는 각기 회전수가 다른 턴테이블 2대, 주파수 변조 녹음들(frequency recordings), 약음기를 장착한 피아노(muted piano), 심벌이 사용됐다. 케이지는 1942~1952년 사이에 총 4곡의 <가상의 경치>를 작곡했는데, 모든 곡에 전자적 요소들이 사용됐다.
1951년, 훗날 존 케이지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되는 모톤 펠드먼(Morton Feldman: 1926~1987)이 <경계의 교차>(Marginal Intersection)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곡에는 목관과 금관악기, 퍼커션(=타악기), 현악기, 2대의 사인파 발진기, 음향효과가 사용됐고, 악보도 펠드만이 고안한 그래프 방식의 표기법이 사용됐다.
(동영상) 존 케이지의 <가상의 경치 1번>.
(동영상) 모톤 펠드먼의 1951년작 <구조들>(Structures).
1950년대와 1960년대 뉴욕 문화예술인들의 동인 모임이었던 '뉴욕 스쿨'(New York School)에는 존 케이지, 얼 브라운(Earle Brown: 1926~2002), 크리스티안 울프(Christian Wolff: 1934~ ),데이빗 튜더(David Tudor: 1926~1996), 모톤 펠드먼 같은 작곡가들이 함께 했는데, 이들은 1951년에 '자기 테입용 음악 프로젝트'(Music for Magnetic Tape Project)를 결성하여,(주49) 이후 1954년까지 존속했다. 케이지는 이 협동작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따라서 사회적 어둠 속에서 얼 브라운, 모톤 펠드먼, 크리스티안 울프는 계속해서 밝은 빛을 보내고자 했다. 왜냐하면 표기법, 퍼포먼스, 청취, 행위 등의 몇몇 요소들에서 도발적이었기 때문이다."(주50)
케이지는 '자기 테입용 음악 프로젝트'와 함께 일하는 가운데, 1953년에 <윌리엄스 믹스>(Williams Mix)를 완성했다.(주51) '자기 테입용 음악 프로젝트'는 상설 작업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업용 음향 스튜디오를 대여해서 사용했다. 그러한 스튜디오 중에는 [미국 전자음악의 선구자들이었던] 베브 배론(Bebe Barron: 1925~2008) 및 루이스 배론(Louis Barron: 1920~1989) 형제 소유의 스튜디오도 있었다.
(동영상) 존 케이지의 <윌리엄스 믹스>.
(주49) Johnson, Steven (2002), The New York Schools of Music and Visual Arts: John Cage, Morton Feldman, New York: Routledge, p.2.
(주50) Johnson, Steven (2002), 앞의 책, p.4.
(주51) "캐롤린 브라운(Carolyn Brown: 얼 브라운의 아내)은 컨닝햄(Cunningham)의 단체에서 무용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얼 브라운은 존 케이지의 '자기 테입용 음악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중략) 이 작업의 재정은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가 후원했다. 1953년에 발표한 <윌리엄스 믹스>는 윌리엄스에게 헌정된 것이다. 폴 윌리엄스는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와 마찬가지로 '블랙 마운틴 대학'(Black Mountain College)의 학생이었다. 존 케이지와 컨닝햄은 1948년 여름에 이 대학을 최초로 방문한 바 있었다." ----- Johnson, Steven (2002), 앞의 책, p.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