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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識別)
―Discernment―
참 영과 거짓 영 식별하기
영을 식별하는 일은 평생작업이다. 쉬지 않는 기도와 묵상의 삶, 하느님의 성령과 깊이 교제하는 삶보다, 더 잘 식별하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헨리 나우웬
제네시 대수도원에서 피정하는 동안 나는 덕과 패덕, 악의 힘을 덜어내고 선의 힘을 포용하는 방법을 다룬 요한 클리마쿠스의 ‘신성한 사다리’를 읽었는데, 기도하면서 읽는 가운데 특히 다음 구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떤 [수도승이] 이전의 나쁜 습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으면서 말로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면, [계속] 가르치게 하라. 단,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들이 스스로 한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마침내 자기가 말한 내용을 실천하게 될지도 모른다.”
딱딱한 책 중간에 나오는 이 부드러운 글 속에 위로와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스토리와 관심이 요약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르치고 설교한 내용을 더 잘 실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 자신의 한결같지 못함을 극복하고 말과 모범으로 영적인 삶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가르친 바를 실천하는 데 실패하고 내가 한 말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에도, 어떻게든지 ‘육의 법’에서 나 자신을 해방하여 ‘영의 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노력이 비슷한 갈등을 겪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사다리’의 요한은 말한다, “진흙탕에 빠진” 사람조차도 남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그는 비록 늪에 빠져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해서 거기에 빠졌는지를 설명해주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전능하신 하느님이 그 사람 또한 진흙탕에서 건져주신다.”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사제서품을 받고 제네시 대수도원에서 수도자의 삶을 시작한 이래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가 하느님의 성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라는 느낌이다. 여러 해 전에 고민하던 같은 문제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도 하고 피정도 하고 친구들의 조언도 듣고 상담도 고해도 자주 했지만, 변한 게 거의 없거나 아주 없는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영적 여정을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불안하고 신경이 날카롭고 격하고 마음이 산란하고 충동적인 인간이다. 지금도 내면의 평화와 일치,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을 찾는 중이다. 바야흐로 인생 만년(晩年)으로 접어드는 마당인데, 영적 성숙의 분명한 미달이 나를 기죽게 한다. 성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고백한 내용이 문자 그대로 내 얘기다. “나는 내가 하는 짓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으니까요.…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원리를 발견했어요. 나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악이 결코 나를 혼자 있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속의 가장 깊은 자아는 하느님의 법에 기꺼이 동의하지만, 내 이성의 법과 싸우는 다른 법이 이 몸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나는 바울로 성인과 함께 기도한다. “누가 나를 이 몸에서 그리고 죽음의 올무에서 건져줄 것인가?” 그리고 감사한다. “오, 하느님, 고맙습니다, 저에게는 저를 구원하실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옵니다!”(로마서 7, 15-25).
영들 분별하기
나는 마치 내가 사람들 가슴을 꿰뚫어보고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잘 안다는 듯이, 사람들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눠놓는 성향이 내게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악과 한계에 접속되어 있고 그래서 자비와 은총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에 수많은 동기들과 선택들이 있음을 알기에, 영들 식별하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식별은 사람들의 동기를 판단하는 게 아니다. 해로운 메시지에서 선한 안내를 가려내고, 악한 영들(evil spirits)에서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려내는 것이다. ‘영들 분별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본질적 분류(sorting)가 의도하는 바는 우리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심판하려는 게 아니다.
‘식별’(discernment, 판단, 이해, 평가, 견적, 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diakriseis)은 선물로 받는 것이면서 훈련으로 얻는 것이다. 그에 대한 언급이 로마서 12, 2; 고린토전서 1, 19; 4, 4; 11, 29; 11, 31; 12, 10; 히브리서 4, 12절에 있다. ‘식별하는 영’이란 말은 신약에 세 번 등장하고, 고린토전서 12장 10절에서는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다. 히브리서 5장 14절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는”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받아야 하는 단련이고, 로마서 14장 1절은 믿음 약한 사람을 받아주되 그와 논쟁하지 말라고 권한다. 종합하면, 서로 반대되는 힘들 사이에서 가려내고 분별하는 정신적 능력이 식별이다. “육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을 거스르니, 이 둘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결국 그대들이 원하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오.”(갈라디아서 5, 17).
식별을 훈련한 사람은 어떤 행위나 메시지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고, 어떤 사람이 참말을 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성 바울로가 준 것이라 해도, 다른 모든 선물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 안에서 실험되어야 한다.
영을 식별하는 일은 평생작업이다. 쉬지 않는 기도와 묵상의 삶, 하느님의 성령과 깊이 교제하는 삶보다, 더 잘 식별하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그런 삶이 우리 안에서 내적 감수성을 조금씩 발전시키고 육의 법과 영의 법을 분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쉰 살 생일이 다가올 무렵 나는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볼리비아로 갔다. 내게 주어진 하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찾는 중이었다. 신학교에서 총명하고 장래성 있는 학생들을 계속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 것인가? 일상생활에서 감지되는 영들을 분별하려고 내 딴에는 노력하고 있었다. 코차밤바에서 파괴적인 힘들에 에워싸인 느낌이 들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성경이 “힘과 주권자”라고 부르는 나의 감수성이 다른 날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날 자전거로 시내에 갔다가 길모퉁이에서 다음 영화 상연 시간을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책방에 들어가서 폭력, 섹스, 가십, 끝없는 광고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날아온 읽을 필요도 없는 기사들로 가득 찬 잡지들을 뒤적거렸다. 그때 나보다 훨씬 강한 힘에 포위당한 느낌과 함께 죄악의 유혹이 나를 휘감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염시킨 끔찍한 현실―참혹한 굶주림, 핵무기, 고문, 약탈, 강간, 어린이 학대, 온갖 형태의 억압 등―을 뒷받침하는 악과, 그것이 어떻게 사람 가슴에서 아주 미약하게 때로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시작되는지를 흘낏 보았다. 악령은 하느님의 일을 무너뜨리거나 집어 삼키는 방법을 끈질기게 모색한다. 나를 에워싼 세계의 어둠을 그날 나는 강렬하게 느꼈다.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머물고 있는 숙소 근처 작은 카르멜 수녀원으로 자전거를 탔다. 친절한 자매 한 분이 나를 기도 채플로 안내하였다. 그녀의 얼굴이 기쁨과 평화, 그렇다, 빛으로 환하게 눈부셨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비추는 빛에 대하여 말 한 마디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하느님께서 오묘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잘 들으면 평화와 안심이 뒤따라온다고 가르친 아빌라의 테레사와 리지외의 데레사 두 분 성인의 조상을 보았다. 갑자기 두 분 성인이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사랑을 나에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작고 아담한 채플에 무릎을 꿇고서 나는 그곳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거기에서 밤으로 낮으로 드려지는 기도 때문에 채플은 빛으로 충만하여 어둠의 영이 문턱을 넘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다.
카르멜 수녀원 방문은 나로 하여금,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서 악의 부재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사랑과 생명의 창조하는 힘과 증오와 죽음의 파괴하는 힘 사이에서 언제나 선택해야 한다. 나 또한 스스로 거듭거듭 선택해야 한다. 그 누구도, 하느님까지도, 나를 위해서 그 선택을 대신해줄 수 없다.
묵상을 계속하면서, 내가 어둠과 빛의 차이를 알고는 있지만 그것들의 이름을 용감하게 부르지 못할 경우가 자주 있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해졌다. 거기엔 어둠을 빛인 것처럼 대하고 빛을 어둠인 것처럼 대하려는 유혹이 있다. 예수를 알고 그의 말씀을 읽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악과 선, 죄와 은총, 사탄과 하느님을 더욱 선명하게 밝혀준다. 그 선명함이 겁내지 말고 곧장 빛의 길을 선택하라고 나를 부른다. 투명하고 솔직한 삶은 그 안에서 가슴과 머리와 배알이 하나로 되어 빛을 선택하는 삶이다.
어둠에 저항하여
무엇이 가장 큰 유혹인가? 돈, 섹스, 권력? 그것들 모두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 또는 그 모든 것에 쉽사리 사로잡힌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남녀 수도자들에게 가난, 순결, 복종을 서약시킴으로써 돈과 섹스와 권력의 유혹에 저항하여 예수의 길을 따르도록 돕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러 해 동안 삶의 경험을 통해서 가장 크고 파괴적인 유혹은 자기-배척(self-rejection)이 아닐까 싶다. 저 모든 탐심과 욕정과 성공의 매력 밑바닥에 자기가 충족되지 못하거나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되지 못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아닐까?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거나 자기와 남의 한계를 배척하지도 판단하지도 않고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에 자기 자신을,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 그런 짓을 한 자기를, 비난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다. 그럴 때 내 속의 어두운 무엇이 말한다, “너는 틀렸어. 옆으로 밀려나고 거절당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놈이야.” 자기-배척이야말로 영성생활의 가장 큰 적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부르시는 성스러운 음성에 맞서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존재로 사는 것이 우리 실존의 핵심적 진실이다.
어떻게 우리는 “겸손하여라.”는 음성과 “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음성을 식별할 것인가? 겸손과 자기-배척은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깊은 자기-존중(self-respect)이 있을 때에만 당신은 참으로 겸손할 수 있다. 자기-배척은 겸손한 삶의 바탕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을 불평, 질투, 분노 그리고 폭력으로 이끌 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가장 위험한 유혹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를 쓸모없고 가치 없는 인간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로 경험할 때마다 나는 소외와 어두운 감정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 자신에 대한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발견할 때에만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나 자신의 어둠 속으로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희망이 나를 피해가는 그런 때가 있다. 자기에 대한 절망에 빠져있는 상태로 어떻게 가슴으로 가슴에 희망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느낌이나 감정을 거의 통제 못하는 인간이다! 그것들이 나를 통과하여 지나가게 하고 내 주변에 아주 오래 머물지는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무엇을 식별할 필요가 있을 때 하느님의 선하심을 주목하라는 성 테레사의 권고가 절망, 자기-배척, 두려움의 악령들과 싸우고 하느님의 힘으로 어둠의 힘을 이기도록 나를 도와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내가 듣고 경험하는 것이 하느님의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하느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solo Dios basta)라는 성 테레사의 기도로 기도했다. 이 기도를 천천히 큰 목소리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과 평화가 있는, 하느님의 현존 속으로 나는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
아무것도 너를 겁주지 못하게 하라.
하느님께 매인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아무것도 너를 겁주지 못하게 하라.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
빛을 찾아서
악과 죽음에 대한 저항은 선과 생명에 접속될 때에만 가능하다. 악의 힘을 직접 상대하여 싸우려 할 때 나는 너무나 무력해서 생명의 근원에 닿을 수 없는 나를 느낀다. 내가 상대하여 싸우는 바로 그 힘의 희생자로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죽음과 싸우는 일에 내 모든 관심이 쏠릴 때 죽음 자체가 그것과 싸우는 나보다 더 많은 관심의 대상으로 될 수 있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현자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지혜가 있다. “악령과 맞상대로 싸우지 마라!” 악의 힘에 직접 맞서는 것이 완전 성숙된 영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사막의 현자들은 알았다. 그래서 어둠의 왕자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빛의 주님께 집중하여, 간접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어둠의 힘을 무찌르라고 제자들에게 권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어둠과 나약함 속에서 겁내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테레사 수녀의 도반이던 십자가의 성 요한은 밝은 빛, 너무 밝아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 신성한 빛 안에서 우리는 존재의 근원을 본다. 그 빛 안에서, 비록 그것을 파악하지 못할 때도,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느님의 현존이 당신의 모든 영광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날을 기다리며, 그 빛이 우리를 해방하여 모든 악에 저항하고 어둠 속에서도 성실히 살게 해준다.
나 혼자서는 빛을 보거나 하느님의 빛 안에서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신앙공동체의 형제자매들로부터 사랑과 지원을 받아야 한다. 다른 누군가의 중보기도 없는 영성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고,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많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그러면서 자주 피곤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지고 과연 내가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우울해진다. 그럴 때는 기도도 안 된다. 빛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내 안에서 쉼을 찾을 수 없다. 한번은 내가 원하는 선(善)과, 어둠 속에서 나를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식별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열두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앞으로 얼마 동안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 영혼의 메마름과 내면의 불안을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까지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자신의 기도가 메마른 사막처럼 되었을 때도 나는 기도의 네트워크가 나를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나를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 영적 가정에 내가 속해 있음을 알았고 내가 살아있는 기도 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몸으로 느꼈다. 마치 누가 내 기도방석에 앉아서 기도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아무 걱정도 되지 않았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가능한 일이었고, 나를 심판할 줄 알아서 두렵던 이들이 친구들이었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던 유혹들이 일시적인 마음의 흔들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기도하는 벗들의 존재를 실감하였다. 이제 나는 나를 에워싼 기도들이 나를 살려준다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성인들에게 하는 기도
어려운 시절에 나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잊지 않은 친구들로부터 받는 기운 말고도 나는 교회 전통 안에서 나에게 조언을 하고 힘을 주고 필요한 안내를 해주는 여러 성인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였다. 힘든 싸움을 해야 할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그러면 그들은 제대로 식별하면서 영성생활을 계속하라고 나를 격려해준다.
비록 우리가 성인들을 거룩하고 경건한 위인들로 생각하여 머리에 둥근 후광을 그려놓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훨씬 친근한 사람들이다. 아직 살아있든지 아니면 죽어서 “구름 같은 증인들”에 들어가 있든지, 그들은 필요한 때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선배들이다. 우리와 똑같은 남자와 여자로서 보통 문제들로 씨름한 보통 사람들이다. 그들을 성인으로 만든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에 집중된 그들의 맑고 흔들리지 않는 시선이다. 성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들로서, 자기네처럼 되라고 우리를 부른다.
성 바울로는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을 “거룩한 백성” 또는 “성도(聖徒)”라고 부른다. 그의 서신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진실한 성도들”(에페소서 1, 1)이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밤하늘의 무수한 별 같이 빛나는 하느님 백성의 거대한 네트워크에 속해있다.
성인들 모임에 속한다는 것은 예수의 성령으로 변화된 모든 사람과 결속된다는 뜻이다. 이 결속은 깊고 친밀하다. 어둠 속에 빛을 비추라고 하느님께서 선별하신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이다. 그 안에는 오래 전에 살던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다. 예수의 형제자매로 살던 사람들이, 비록 죽은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다. 예수께서, 비록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우리 안에 계속 살아계시듯이.
세상에서 성인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이 죽었으면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늘 매료당해왔다. 그들의 죽음이 오히려 그들을 육신의 한계에서 풀어놓아, 살았으면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들의 삶과 죽음과 그들에 대한 우리의 추억을 통해서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이웃이 된 사람들이 성인들이다. 프랑스어로 이웃을 ‘프로생’(prochain)이라고 하는데 ‘가깝다’는 뜻인 ‘프로세’인 사람이다. 예수의 성령 안에서 충실하게 산 사람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를 친근하게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프로생’이 되었다. 예를 들어 리지외의 데레사는 생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본받아 거룩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까운 이웃이다. 성 프란체스코, 성 베네딕트,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그렇고 교회에서 성인으로 명부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거룩하게 살다 간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오스카 로메로, 도로시 데이, 마티유 로방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마티유 로방의 중재(仲裁)
당신은 선과 악, 빛과 어둠의 큰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기도해본 적 있는가? 나는 그것을 볼리비아의 한 채플에서 느꼈다. 내가 기도한 채플은 나보다 먼저 거기에서 기도한 이들에 의하여 준비된 채플이었다. 무엇을 식별하기 위해서,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샤토네프 드 갈로르 근처 언덕 위 농가에 태어나 거기 살다가 거기에서 죽은 마티유 로방(1902-81)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같은 것을 경험했다.
1984년에 나는 프랑스 트로슬리에 있는 라르슈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때 공동체의 창설자인 장 바니에의 어머니가 마티유 로방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예수의 육체적 고통과 괴로움을 자기 몸으로 경험한 20세기의 특이한 성인이다. 내가 라르슈에 머물고 있을 때 그녀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중요한 영적 안내자들 가운데 하나로 되었다. 작은 등불 하나가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겨우 비춰주는 그녀의 작고 어두운 방에 무릎 꿇고 앉아있을 때 나는 예수의 큰 싸움을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 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박한 농사군 집안의 여인이 선과 악, 하느님과 사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삶의 순간마다 선택해야 했던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갑자기 성 바울로의 다음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악마의 속임수에 대적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가 대적하여 싸울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 잡은 자와 권위 있는 자, 이 세대의 악한 통치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입니다. 그러니 악한 날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굳건히 설 수 있게 하십시오.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의로움의 갑옷으로 가슴을 가리고 평화의 복음 전할 준비를 갖춤으로 신발을 신고 언제든지 악마의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도록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십시오.”(에페소서 6, 11-13).
한 번 그곳에서 기도한 뒤로 나는 좀 더 자주 그리로 돌아가 더 깊이 더 오래 기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마티유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안내자들 가운데 한 분이다. 그녀가 늘 기도하던 장소와 그녀의 일생을 생각만 해도 악에 저항하고 신성한 지혜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오래 전에 기도하던 곳에서는 기도하기가 쉽고, 사람들이 별로 기도하지 않던 곳에서는 기도하기가 어렵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여기저기 많이 다녀본 경험으로 나는 안다. 열차 객실, 호텔 방, 조용한 서재 같은 곳에서 내 등을 감싸주는 영의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마티유의 방에서 여러 시간 머물며 기도할 수 있었다. 그녀의 특별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다. 그녀의 일생은 사람이 어떻게 악으로부터 선을 분별하게 해주는 기도로 한 생애를 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모범이다.
1918년, 젊은 로방은 예수의 고통에 연루되어 사는 것이 자신의 평생 소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1926년에 그녀의 부모는 자기네 딸이 괴질로 죽는다고 생각했다. 마티유는 리지외의 성 데레사가 세 번 자기에게 나타나, 자기가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 성 데레사의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환영을 보고 나서 곧 온몸이 마비되었다. 더 이상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부모가 그녀를 작은 나무침상에 눕혔고, 그녀는 거기에서 오십여 년을 살다가 죽었다.
1930년에 그녀는 예수님이 자기한테 “모든 일에서 나처럼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셨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고난당하실 때 겪으신 육신의 통증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도 경험해보라는 초대였다. 마티유는 그 신성한 초대에 간단히 “예”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매주 목요일에서 월요일까지 그녀는 예수께서 게쎄마니와 갈보리에서 겪으셨던 고뇌와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통과 부활의 기쁨에 연루된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화요일과 수요일은 방문객들을 만나 그들의 삶에 대해서 아이같이 천진스럽고 단순한 이야기를 나누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는 것을 일러주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소년과 소녀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학교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피정센터나 공동체를 설립하라고 권했는데 그것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안내와 중재를 청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했다.
1936년 2월 10일, 마티유는 자기를 방문한 조르쥬 피네 신부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티유는 자기 몸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뜻을 일러줄 수 있는 여인이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신부님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시네요. 너는 샤토네프에서 포와이에 드 샤리뜨(피정의 집)를 열어라.”
피네 신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교구 소속이 아니오.”
“하느님이 원하시는데 그게 무슨 문제인가요?”
“아, 미안합니다. 그 생각은 못했네요. 그런데 내가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
“할 일이 많아요. 특히, 피정을 지도하세요.”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모릅니다.”
“알게 될 거예요.”
“이박삼일 피정을 할까요?”
“아니, 사흘로는 한 영혼이 바뀔 수 없어요. 하느님은 닷새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 닷새 동안 무얼 하나요? 토론? 생활나누기?”
“아니오. …완전 침묵.”
“완전 침묵이라고요? 여자들과 소녀들을 어떻게 침묵시킬 수 있겠어요?”
“하느님께서 그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피정을 어떻게 알리지요?”
“아무 말 마세요. 하느님이 피정할 사람들을 신부님께 보내실 겁니다.”
이런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마티유 생가 근처 샤토네프 드 갈로르에 설립된 피정센터를 방문해보라고 처음 나에게 권한 84세 된 피네 신부한테서 직접 확인했다. 위와 같은 한두 마디 대화로 비롯된 피정센터가 전 세계의 평신도를 위한 피정운동으로 확장되어 현재 쉰일곱 군데에서 수백 명의 평신도들이 피정하러 온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자기들이 받은 성령의 선물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마티유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었기에 마음이 열리고 믿음이 성실한 신부에게 하느님의 지시를 전했던 것이다.
독자들 가운데 이 대목을 얼른 읽어치우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유혹을 경험한다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기도한 사람의 이야기를 지나쳐버리기 쉽다. 하지만 마티유에게는 하느님이 자기를 통하여 사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관(管)으로 자기 몸을 바쳤다.
오직 하느님의 선하심에 집중하도록 도와달라고 성 테레사에게 기도했듯이 나는 고통과 혼란의 시절에도 하느님 앞에 굴복하여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라고 말해주는 마티유 로방의 기도를 찾아냈다.
하느님, 제 머리와 그것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제 가슴과 그것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제 지성과 그것이 지닌 모든 능력을
당신의 것으로 취하시옵소서.
그것들로 당신의 더없이 크신 영광을 섬기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뜻 앞에서 제 뜻을 비워드리오니,
그 자리를 온전히 당신 뜻으로 채우소서.
오, 더없이 친절하신 예수님,
더 이상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저를 취하시고… 저를 받아주시고… 저를 이끄소서.
그리고 저를 안내하소서.
당신께 저를 항복시키고 저를 포기합니다.
성스러운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사랑의 기쁨과 거룩한 가슴의 승리를 위하여,
저와 제 주변에서 이루실 당신 설계의 완벽한 성취를 위하여,
사랑과 찬양과 감사의 작은 예물로
저 자신을 당신 앞에 바치나이다. 아멘.
예수와 그의 성인들
물론 현존하시는 하느님 안에 사는 인생의 으뜸 안내자는 예수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당신을 당신 제자들에게 가까이 데려갔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오순절 제자들에게 내려온 예수의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그분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친밀히 성령의 안내를 받아 살게 해주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우리 가슴과 이 세상 안에 있는 빛과 어둠을 식별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에 살던 성실한 신앙선배들이 기도하던 곳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기도할 수 있다. 기도할 말을 잃었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말로 기도할 수 있고 신앙 안에서, 살아있는 이웃들은 물론 죽은 이들과도, 그들의 책을 통해 안내를 받음으로써 더 친근하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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