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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진산에는 아름다운 경치말고도 값진 문화유산(文化遺 産:장래의 문화적 발전을 위하여 후대에 이어져야 할 과거의 문화)이 많은데 그중 하나인 여래석불(如來石佛:석가여래의 석불상)은 4백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가학정(駕鶴亭)으로 가는 길목 깍아지른듯 한 높은 암벽(岩壁:바위벼랑)에 미소를 짓는 자비(慈悲)로운 얼굴의 석가모니 여래상(釋迦牟尼 如來像)이 새겨져 있다. 그속에 쓰여진 불당일월(佛堂日月) 용진수석(聳珍水石)의 글씨가 또한 명필이며 그 밑에 열길 낭떠러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한여름 무더위를 말끔히 씻어준다. 그리고 가학정으로 오르는 계단 밑에 길다란 푸른소가 있는데 물가에 갈대풀이 우거지고 물속에는 순채(蓴菜:수련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물풀)의 둥근잎이 점점히 뜨고 연분홍빛 어린꽃잎이 무늬처럼 물위에 깔려있다. 거기서 꼬불꼬불 좁은 오솔길을 20분쯤 오르면 가학정에 이른다. 용진산 북쪽 산허리에 자리한 이 가학정(駕鶴亭)은 임진왜란때 벼슬도 없이 선조임금을 모시고 북행(北行)에 따라가 공을 세운 죽산박씨(竹山朴氏) 중시조(中始祖:집안을 다시 일으킨 조상)인 박경(朴璟)에게 선조임금이 죽림처사(竹林處士)라는 시호와 지팡이를 내리고 나라돈으로 짓게한 정자로 황룡강 맑은 물이 정자밑을 흐르고 그곳에 이르는 길목에는 백년묵은 노송(老松)을 비롯하여 비자나무, 싸리나무, 상수리나무, 산비장이등 갖가지잡목(雜木)이 우거진 푸른숲을 이루며 곳곳에 층암절벽(層岩絶壁:여러층으로 쌓인 바위 낭떠러지)이 솟아있어 마치 소금강(小金剛:작은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용진산 남쪽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한 용진정사(湧珍情舍)는 한말의 대학자이며 애국지사(愛國志士)이기도 한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선생이 국난(國難)과 세상의 티끌을 피해 숨어살면서 후진(後進)을 가르친 곳이다. 집뒤에 기암괴석(奇岩怪石: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이 서있고 자연과 산뜻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정사(情舍:학문을 가르치려고 마련한 집)에는 이지방 광산,나주 출신의 한말의병들의 근거지(根據地:행동의 기지로 되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 당시의 이름난 학자이며 의병장(義兵將)이기도 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선생을 비롯하여 전해산(全海山), 김태원(金泰元), 오상렬(吳相烈), 오성술(吳聖述)장군등 쟁쟁한 의병장들이 오준선 선생을 찾아 드나들며 항일전략(抗日戰略)을 세우고 의논한 곳이기도 하였다. 그 후 백년의 세월이 흘러 악독했던 일제도 물러가고 어진 선인(先人)들의 늠름한 자태는 찾을 길이 없으나 이 정사(精舍)를 둘러싼 중국매화(中國梅花) 치자나무 벚나무의 울창한 숲에서 그 옛날의 남아있는 향기가 풍겨오는 것만 같다. 용진산 서쪽 왕동저수지(旺洞貯水地)는 높은 산골짜기에 고즈너기 자리한 넓은 못으로 얼핏 우리나라지형(地形)을 닮은 호숫가에 안늑한 마을과 전원(田園)이 펼쳐지고 이곳 명물(名物)인 오골계를 삶아 파는 가게도 몇집 있으니 도시인(都市人)들이 하루의 행락(行樂)을 즐기기에 알맞는 곳이다. 용진산은 그 주봉(主峰:가장 높은 봉우리)의 하나인 석봉(石峰)은 이름그대로 온산이 큰 바위로 이루어져 그 정상은 마치 붓끝처럼 뾰족하고 그와는 반대로 또하나의 주봉인 토봉(土峰)은 곁으로 보기에는 바위하나 없는 미끈한 흙과 우거지 짙푸른 숲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두 주봉을 둘러싼 크고 작은 연봉(連峰)들은 흡사 바위에 부딪치는 거센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아무튼 구 임곡면 사호동(林谷面 沙湖洞)에서 시작되어 본량면 내왕산(本良面 內旺山) 마을로 끝나는 용진산 일대의 산과 물을 고루 갖춘 빼어난 풍경은 우리 광산구가 갖는 평야지대(平野地帶)에서는 드문것이며 광산군이 광주광역시로 편입된 후 광주시민 공원(光州市民公園)으로 지정되는등 각광(脚光:사회적으로 큰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일)을 받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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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무성한 풀로 뒤덮여 세월의 무성함만 느끼게 하지만 산정상에는 봉화대터가 남아 있다. 멀리 서북쪽을 보면 마치 흰 광목옷에 짚신을 신고 개나리 봇짐을 메고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옛 서울 길 관문 희어재가 보인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전쟁 중에 만나 사랑을 키워오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간 그가 다시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간 한여인이 애틋한 전설을 떠올리다 보면 희어재에 흰 소복차림의 한 여인의북풍에 옷자락 머리자락 휘날리며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잘 정비된 등산로, 악수터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정상으로 이르는 등성을 따라 몇 발짝 걸으니 희귀한 모양을 한 새가 눈앞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보금자리를 뺏기지 않겠다는 듯 이쪽을 감시하며… 주봉에 가까워질수록 수풀은 더욱 우거지고 울울창창한 황룡강쪽 숲은 사람의 발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듯 싶었다. 가을의 정취와 함께 주봉을 돌아 다른 등산로로 내려오다보면 하늘을 덮은 뻑뻑한 시누대발 등산로가 색다른 느낌을준다. 약1시간 여 동안 그렇게 복룡산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다시 용동 마을로 돌아와 있다.
여인은 돌덩이처럼 차갑게 그저 장군의 요청에 굴종하고 있을 뿐이었다. 장군원상은 그 메아리 없는 짝사랑에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점장이에게 그 까닭을 알아보게 한즉, 그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사내가 있었는데 원상장군에게 대적하는 지방민병의 수괴로활약하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 사내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설 때 그 여인에게 끼워준 옥가락지가 있었는데 그 원혼이 붙어 그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원상장군은 즉각 옥가락지를 그녀의 손에서 뽑아 버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까지 하기는 싫었다. 그후 세월이 흐르고 왕건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후백제의 국운이 기울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애첩 아사가 장군에게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생각에 망설이고 있으니 그녀는 전에 없이 방긋방긋 웃으며 겨울이 되기 전에 꼭 돌아오겠다고 하며 연로한 부모와 죽은 남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사내아이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랑하는 여인의 간청을 끝내 물리칠 수 없어 "그럼 네 손에 있는 옥가락지를 나에게 맡기고 갔다 오라"고 하니 그녀는 서슴없이 옥가락지를 뽑아 장군에게 건네주면서 "제가 돌아오면 돌려 주셔야 하옵니다"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아사는 황룡강 물가에 성엣장처럼 얇은 얼음이 깔리기 시작한 어느 초 겨울날 돌아왔다.
"고향에 무슨 변고는 없었는가"하고 장군이 정겹게 묻자 그녀는 "저에게는 전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내아이가 하나 있는데 제가 떠나올 때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저를 쳐다 보았습니다"고 말하고 두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내가 그 아이로부터 너를 빼앗은 셈이 되었구나"하자 "그렇습니다. 그 아이는 중병을 앓고 있는데 지금쯤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으면 까마귀가 되겠다 하더군요" "까마귀가 되왜 하필… "저는 장군님과 약속을 지켰으니 가락지를 돌려 주세요"라고 말하자 장군은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더 좋은 것으로 사준다고 하였다.
힘있는 자는 언제나 약자에 대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아사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그 뒤로 후백제의 견훤군은 왕건군사에게 패하여 복룡산 앞 황량한 들판에는 시체들이 낙엽처럼 뒹굴었다. 그가운데 단 하나 숨이 붙어 움직이는 인간이 있었는데 그는 온몸이 창으로 찔리고도 호주머니 속에서 옥가락지를 꺼내 석양에 비춰보고 있었다.
원상장군이었다. 그때 어딘선가 까마귀 소리가 들리더니 새까만 그림자가 그 주위를 뒤덮었다. 널려있는 시체들에 달려들어 눈깔부터 쪼아먹던 까마귀는 그 수가 점차 늘어만 갔다. 원상장군은 겁이나서 몸을 버둥거렸지만 손발이 말을 들지 않았다. 그때 아까부터 고목 위에 앉아 그만을 노려보고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쏜살같이 그에게 달려들어 장군의 한눈을 쪼아 문드려 버렸다. 그리고 또 남은 한 눈도… 그 때 장군의 귀에는 아사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래요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저에게서 빼앗은 건 당신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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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는 길 양 옆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고 우거질 대로 우거진 숲속에서 들리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든다. 송학동 방향에서 오르다 갑자기 나타난 정상의 입구에는 수백년 묵은 팽나무가 그우람한 자태를 나타내는데... 처음에는 느티나무가 아닌가 착각을 하나가까이 가서 보면 어른 두사람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희귀한 팽나무가 수십개의 가지를 뻗고 있다. 저렇게 희귀한 팽나무가 왜 보호수로 지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뒤로하고 그위로 몇발짝 더 가면 새로운 천지가 펼쳐진다. 산정상에는 수백평의 구릉지대가 펼쳐지고 절이 산에서 모아진 정기를 듬뿍 받고 들어 앉아있다. 암만봐도 천하의 명당자리다 .사방이 작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마치 부처의 품안에 들어있는 듯하고 번듯한 대웅전은 없지만 수도장 보다는 사람사는 냄새가 진해 오랬동안 머물고 싶은 곳이다. 긴 턱수염의 온각주지스님 에게 느껴지는 것은 엄숙한 수도승의 모습이 아니다.수 많은 고행으로 단련되어 그무엇도 초월한 해탈자의 모습이다. 속세의 중생에 의지해 절을 번창시키는 것 조차도 버거워 내몸 움직여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면 굳이 신도에 의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절 터 옆에는 사슴, 흑염소, 오리농장이함께 있고 거기서 행하는 노동은 수행의 한 방편이다. 정상에 있는 농장을 살짝 비켜나 여기가 이산의 정상이거니 하고 저만치 있다. 이것이 이산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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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석문산에 한번 꼭 가보고 싶어지네요....
우리시댁 뒷 산이 용진산이고 앞산이 어등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