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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본문 / 딤전 1:12~17
지난 시간에는 당시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므로 교회가 혼란해지고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말씀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목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죄인 된 인간이 그 말씀을 악용함으로 인해 마치 율법이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버렸다는 거였습니다. 자신이 지킨 율법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 다는 다른 교훈들이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마치 칼이 요리사나 의사의 손에 들려 있으면 맛있는 음식이 나오고 사람을 살려 내는 도구가 되지만 강도의 손에 칼이 들려 있으면 사람을 죽이는 곳에 사용하기도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면 오히려 사람을 구속하고 속박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만든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말씀이 됩니다.
사실은 이런 일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었다고 오늘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고 15절에서는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하게 되었다고 합니까? 본문 12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가” 14절에서는 “주의 은혜가” 복음을 전하도록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근거를 다시 이렇게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변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변하게 했다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신앙으로 권면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과거를 통해서 지금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반대하며 목숨을 걸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자였습니다. 이런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변화된 것은 예수 믿기 전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 어떤 자였는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지금 현재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과거의 실체인 ‘내가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것을 바로 아는 자만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구원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받고 구원 받은 자는 과거의 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그렇죠! 내가 전에는 예수를 비방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 심지어는 죽이는데 앞장섰던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함께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바울을 사도 바울로 이끌어내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표현할 때 왜?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했는지를 알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살았던 2000년 전 로마 사회로 돌아가서 종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노예제도는 있어서는 안 되지만 당시 로마 제국은 노예제도가 없다면 사회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한 제도였습니다. 로마제국 인구의 약 5분의 1이 노예였다는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노예는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평 없이 살아갔습니다. 오히려 노예들은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거처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주인이 어떤 부당한 대우를 하고 일을 시켜도 쫒아내지만 않으면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시에 나도는 말에 ‘당나귀는 말을 못하고 노예는 말을 하는 것 외에는 노예와 당나귀는 다른 게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노예는 마치 짐승처럼 주인의 소유물이고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노예의 존재 목적은 주인에게 충성스럽게 순종함으로써 오직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노예는 한 가지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신실한 노예는 그 보상으로 자유를 얻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주인들은 이걸로 노예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는 동기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종에 대한 제도가 2천 년 전 고대 로마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미 만들어 주셨습니다. 출 21장에 가보시면 종의 대한 규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종은 주인을 6년간 섬겼으면 7년째는 자유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종들은 6년간을 참고 기다리면 속박에서 벗어날 자유의 날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이때 어떤 종들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속박에서 벗어날 7년째가 되었는데도 주인을 모시고 주인의 종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그러면 주인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하겠지만,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 주인이 종에게 얼마나 사랑으로 잘 대해 주었으면 나머지 인생을 주인과 함께 하는 종이 되겠다고 하겠냐는 겁니다. 어떤 종은 주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평생을 종이 되어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나타납니다. “주인님! 제가 6년 동안 이 집에 종으로 있으면서, 주인님의 인품과 인격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이 더 좋습니다. 저 떠나지 않겠습니다. 자유요? 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머지 인생이 주인과 함께 한다면 기꺼이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 사실은 이게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세상에서 이것저것 다 해보며 살았지만 세상의 자유요? 잠깐 있다가 없어질 자유와 물질, 그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요 주님 곁에서 주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겠습니다. 나머지 인생이 주님과 함께 한다면 기꺼이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받아 주실까요? 거절하실까요? 너무너무 좋아하시면서 ”그래! 나도 기다렸다. 오서 오거라!“ 하시며 반기시지 않을까요?
이게 신15:16~17절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밖에 나가면 자유는 있을지 모르지만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 걱정하며 사느니 주인님의 사랑과 은혜 아래서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판단한 종도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이런 종은 주인의 은혜를 잊지 않고 목숨 걸고 주인을 섬기지 않겠나요? 주님의 사랑 대한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이러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지금의 시각으로 받아 드리면 안 됩니다. 바울 당시 고대 로마시대에는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잡혀왔거나 돈을 갚지 못해서 자기 몸을 판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는 수단입니다. 전쟁에서 죽었어야 할 목숨이 포로가 되어 죽지 않고 노예가 되어 있고, 빚을 갚지 못해 죽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자기 몸이라도 팔 수 있어서 빚을 갚게 되었으니, 노예가 되는 게 그나마 천만 다행인 겁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보면 백번 죽어도 모자란데 그런 자기를 긍휼히 여기어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으니 목숨을 내어 놓고서라도 그 은혜를 갚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나는(자원한) 그리스도의 종(노예)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을 하고 하나님 앞에 섬기는 모든 행동은 억지나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자원하는 것입니다. 이 노예는 이제 사랑에 메인 노예에요. 은혜와 사랑에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을 사랑해서 사랑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얻어낸 구원이 아니오, 율법을 지켜서 얻어낸 은혜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어 마땅한 자신을 살려 주신 그 은혜가 복음을 전하게 하는 사도 바울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는 다른 교훈이 들어와 율법을 믿고 지키는 것이 구원을 이루어낸다고 하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망가지게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주님께 무조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입니다. 앞서서 말씀 드린 것처럼 내가 전에 어떤 자였는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지금 현재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과거의 실체인 내가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것을 바로 아는 자만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도 아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첫 번째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이후에 가보시면 이게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현장입니다. 7:58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리고 8:1절은 "사울은 그가 죽임을 마땅히 여기더라" 3절에서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9:1~2절을 보시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죄인 중에서도 괴수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죄의 대한 주님의 처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대반전의 시작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 까닭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먼저 찾아오실 때까지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 여러분들의 수고와 땀과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사실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뒤에서 끝까지 오래 참고 기다려주신 주님의 긍휼과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온갖 죄로 인해 심판 받았을 텐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의 기다려 주심입니다. 심판에서 건져 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기다림임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있게 하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고 목숨이 백 개라도 죽어 마땅한 자신에게 주님이 하신 것이 오래 참으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 놀라운 사실은 주님의 종으로 삼아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그만 사울이 예수님께 붙잡혀 평생 주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벌하시지 않고 살려주신 것만도 몸이 가루가 되도록 충성해도 못 갚을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누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극히 주관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죄가 사도 바울만큼은 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은혜로 토해냈고 저와 여러분들은 그보다 더한 죄를 토해내지 않고 꾹꾹 감춰 놓은 차이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함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 은혜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표현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일 때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사도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고백한 것처럼 여러분들 이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17절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찬송가 305장의 가사가 그래서 더더욱 다가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여러분들 안에 들어 있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깨닫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인정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오래 참음과 구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복된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