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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 王山世家石藏大同譜總編(김해김씨 왕산세가 석장대동보 총편)
原典 : 1924년 갑자보; 金容植, 金榮灝 主管
謹譯 : 2005. 11. 29. 金順大
◎駕洛國璿源譜(가락국선원보)
一世
太祖皇太王姓金氏諱首露一云靑裔(태조황태왕 성김씨 휘수로 또는 청예)
新羅儒理王十八年壬寅(東漢建武十八年)三月三日誕降于龜旨峰駕洛九干之推戴爲王是月望日遂卽位建國于弁韓之地國號大駕洛(古史或稱伽那迦邏金官駕洛)都金官城封王弟五人爲五伽倻以弁辰十二國爲蕃(地方東至黃山河北至大良州西南際海西北至居陀州百濟爲界)
신라 유리왕 18년 임인(42)년 (동한의 건무 18년) 3월3일 구지봉에서 탄생하시어 가락의 9간들의 추대에 의해서 왕이 되고, 이달 15일에 마침내 즉위하여 변한의 땅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가락 (고사에는 가나/가라/금관가락이라고 칭한다)이라 하고, 도읍을 금관성으로 하였으며, 왕의 동생 5명은 <각각> 5가야를 세웠다. 변한과 진한의 12국이 번[1]이 되었다. (지방의 동쪽은 황산하(낙동강)에 이르고, 북쪽은 대량주(합천)에 이르고, 서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서북쪽은 거타주(진주)에 이르러 백제와 경계가 되었다.)
[1]蕃國; 큰 나라를 받드는 소국
新羅儒理王二十四年戊申(東漢建武二十四年)秋七月丙申迎許氏立以爲后十男二女二男賜母后姓許氏新羅阿達羅王九年壬寅(東漢延熹五年)馬韓五十四國皆來朝賀尊王爲普州皇太王后爲普州皇太后是歲傳位于太子居登王與太后移御于水晶宮(在知品川今山淸王山)
신라 유리왕 24년 무신(48)년 (동한의 건무 24년) 가을 7월 병신일 허씨를 맞이하여 왕후로 세우로 10남 2녀를 낳았는데, 두 명의 남자는 모후의 성인 허씨를 따랐다. 신라 아달라왕 9년 임인(162)년 (동한의 연희 5년) 마한 54개국이 모두 찾아와, 왕이 보주황태왕이 되고 왕후가 보주황태후로 된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에 태자인 거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왕은 왕후와 함께 수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 산청의 왕산인 지품천에 있다.)
新羅奈解王三年己卯(東漢建安四年)三月二十三日薨春秋百五十八歲在王位百二十年在太王位三十八年葬于納陵
신라 내해왕 3년 기묘(199)년 (동한의 건안 4년) 3월23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8세이고, 왕위로는 120년 태왕으로는 38년을 지냈고, 능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一曰首陵今金海府西郭外百步許龜旨峰南子坐 ○漢史金官駕洛國爲弁辰之總王梁書新羅傳新羅以百濟征高句麗不堪戒役襲百濟附庸於伽羅國
구려불감계역습백제부용어가라국
또는 수릉이라 하는데 지금의 김해부 서쪽 외곽 100보 쯤에 있는 구지봉의 남쪽 자좌이다. ○한사에는 금관가락국이 변한의 전체왕이 되었다하고, 양서의 신라전에는 신라가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습격을 받아 백제는 가락국에 의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國初建宗朝于金官城西祀典重孟春三日七日仲夏重五仲秋五日十五日四仲冬至
나라의 초기에 금관성의 서쪽에 종묘를 짓고 제사를 드렸는데, 1월3일과 7일, 5월5일, 8월5일과 15일, 11월 이었다.
○高麗文宗置陵田充享禮知金州事金良鎰撰碑銘云今傳其文無其碑
○고려 문종(1046~1083) 때에 능의 경비를 충당하는 밭을 딸려 주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고, 지금주사인 김양일이 비명을 찬술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글은 전해지고 있으나, 그 비는 없다.
本朝 仁祖丁亥後孫道伯許積竪碑撰銘外裔全榮書 先是士林修會老堂奠香火其後自朝家設備致享 英宗甲午御製致祭文重修祭閣 正宗辛丑壬子並致祭寘陵監春秋二仲降香祝 御製會老堂懸板文
조선의 인조 정해(1647)년 후손인 도백(관찰사) 허적이 비를 세우고 비명을 찬하였으며, 외손의 후예인 진사 전형이 글을 썼다. 이보다 먼저 사림에서 회로당을 수리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그 후 나라로부터 제사에 필요한 비품들을 내려주었다. 영조 갑오(1774)년에 왕이 치제문을 짓고 제각을 중수하였으며, 정조 신축(1781)년과 임자(1792)년에 치제를 하고 능감(陵監)을 두었으며, 봄과 가을 두 번 향과 축문을 내려 주었으며, 왕이 직접 회로당 현판문을 지었다.
至 太王戊寅命建殿設齋室寘寢郎降號 崇善殿竪神道碑後孫判書許傳撰外孫參判趙濟華書後孫 崇善殿參奉金顯{氵柱}篆龜旨峰以王發祥地 隆熙二年戊申竪碑曾曾孫前享官金雲培撰碑陰銘外孫 奎章閣學士閔泳璘書後孫前郡守金鍾應篆隆 熙三年己酉南巡時 命官致祭)
태왕(고종?)이 무인(1878)년에 이르러 전(숭선전)과 재실을 건축하게 명하고 침랑을 두었으며 숭선전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또한 신도비를 세우고 후손인 이조판서 허전이 <비문을> 찬하고, 외손인 참판 조제화가 글을 쓰고, 후손인 숭선전 참봉 김현주가 제목을 썼다. 구지봉은 왕이 탄생한 상서로운 곳이다. 융희2년 무신(1908)년에 비를 세우고 증증손인 이전의 향관(享官)김운배가 비음을 찬하고, 외손인 규장각 학사 민영린이 글을 쓰고, 후손인 전 군수 김종응이 제목을 썼다. 융희3년 기유(1909)년에 <왕이> 남쪽을 순행할 때 관리에게 명하여 치제를 드렸다.)
后普州皇太后姓許氏諱皇玉(후보주황태후성허씨휘황옥)
阿隃陀國王(一云許國君)長公主新羅儒理王九年癸巳(東漢建武九年)誕降駕洛開國七年戊申封后新羅阿達羅王壬寅尊爲普州皇太后誕十男二女新羅伐休王五年己巳(東漢中平六年)三月朔日薨春秋百五十七歲葬于納陵
아유타국왕 (또는 허국군이라고도 한다.)의 맏 공주이다. 신라 유리왕 9년 계사(33)년 (동한의 건무 9년)에 탄생하시어 가락 개국 7년 무신(48)년에 왕후에 봉해졌다가 신라 아달라왕 임인(162)년에 보주황태후가 되었다. 10남2녀를 낳았고 신라 벌휴왕 5년 기사(189)년 (동한의 중평 6년) 3월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였으며 능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龜旨峰東子坐南距大王陵二里許有陵表 ○年十六駕洛開國七年戊申秋七月七日乘大船載石塔而至王親迎爲后
(구지봉의 동쪽 자좌이며 남쪽으로 대왕릉과 2리정도 떨어져 있으며 능표가 있다. ○나이 16세인 가락 개국 7년 무신(48)년 가을 7월7일 큰 배를 타고 석탑을 싣고 오니 왕이 친히 맞이하여 왕후가 되었다.
○后弟曰寶玉仙人或曰長遊和尙嘗來遊金官國如桃山聖母而國人歎其歸也 命其山曰長遊寺曰長遊村曰長遊慕其神聖以慰太后也 王子七人厭世與寶玉仙人入頭流山七佛庵(今河東)化仙云
왕후의 동생은 보옥선인, 또는 장유화상이라 하는데 일찍이 금관국에 놀러왔다가 도산성모처럼 그가 돌아갈 때 나라사람들이 탄식하였다. 그 산을 장유라 하고 절도 장유라 하고 마을도 장유라 하니 이는 신성을 그리워하고 태후를 위로하기 위함이다. 왕자 7명은 세상을 싫어하여 보옥선인과 같이 두류산(지리산)에 들어가 칠불암(지금 하동) 이 되었다고 한다.
○太王戊寅降殿號合享于 崇善殿如舊禮 ○后之渡海 王命留天于望山島神鬼于乘岾以侯之及后舟到泊處曰舟浦村下陸處曰夫人塘(在熊川地)贄送綾袴于山靈處曰綾峴(在金海府南) 塔石今在后陵墻內 隆熙戊申竪碑于夫人塘外裔輔國閔泳韶銘判書張錫龍撰)
태왕(고종) 무인(1878)년에 전호를 내리고 숭선전에서 옛날의 예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고 있다. ○왕후가 바다를 건너올 때 왕이 유천간에게 명하여 망산도로 가게하고,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으로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왕후의 배가 도착하여 머문 곳을 주포촌이라 하고, 배에서 내린 곳을 부인당이라 하였다(웅천땅에 있다).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보내어 산신령께 바친 곳을 능현(綾峴;비단고개)이라 하였다(김해부의 남쪽에 있다). 석탑은 지금 왕후 능의 담장 안에 있다. 융희 무신(1908)년 부인당에 비를 세우고 외손의 후예인 보국 민영소가 비명을 쓰고 판서 장석룡이 찬술하였다.
嗣道王
뒤를 이은 이는 도왕
女永安公主諱玉環下嫁于太師晉陽公裴烈文父昭新羅脫解王朝拜花原公諡文昭 ○子裴肅相國月城文剛公見裴氏 譜
딸 영안공주휘는 옥환으로 태사인 진양공 배열문에게 시집갔다. 그의 부친은 배소로서 신라 탈해왕 때에 화원공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소이다. ○아들은 배숙으로 월성(경주)의 재상(相國)이며 문강공이었는데 이는 배씨의 보첩에서 볼 수 있다.
女新羅昔太子妃(見東京誌)
딸 신라 석태자비 (동경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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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道王諱 居登(도왕 휘거등)
太王長子新羅阿達羅王九年壬寅(東漢延熹五年)承 命代理越三十八年新羅奈解王三年己卯(東漢建安四年)卽位新羅沾解王六年癸酉(蜀漢延熙十六年)秋九月薨代理三十八年在位五十五年(謹按一譜庚辰卽位以 世孫冊封太子一云壽二百三歲)誕道王○陵駕洛國都西野麓
태왕의 장남으로서 신라 아달라왕 9년 임인(162)년 (동한의 연희 5년)명령을 받들어 왕의 대리를 하다가 38년이 지나 신라 내해왕 3년 기묘(199)년 (동한의 건안 4년) 즉위하였다. 신라 첨해왕 6년 계유(253)년 (촉한의 연희 16년) 기을 9월에 동라가시니 대리 38년 재위 55년이었다. (한권의 보첩을 살펴보니 경진(200)년에 즉위하여 세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하고 한편으로는 나이가 203세였다고 한다.) 도왕을 낳았다. 능은 가락국의 도읍의 서쪽들의 기슭에 있다.
后申氏諱慕貞泉府卿輔女(一云以后遺命火葬東史申輔妻太后出來時媵臣)
왕후는 신씨로서 휘는 모정이고 천부경 신보의 따님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왕후의 유언에 의해서 화장하였다고 하고, 동사에는 신보의 첩은 태후가 올 때 몸종이었다고 한다.)
嗣成王
성왕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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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成王諱(馬品) (성왕 휘마품)
道王子新羅沾解王六年癸酉(蜀漢延熙十六年)卽位新羅儒禮王七年辛亥(西晉元康元年)春二月薨在位三十八年(一云母后本神女琉冕庚辰歲孕王九年戊子誕王五十二年春三月三日與父王離塵同爲上昇有史蹟又云庚戌薨在位三十七年)諡曰成王○陵(无傳)
도왕의 아들로서 신라 첨해왕 6년 계유(253)년 (촉한 연희 16년)에 즉위하여 신라 유례왕 7년 신해(291)년 (서진 원강 원년) 봄 2월 돌아가시니 재위는 38년간이었다. (전하는 말로는 모후는 본래 신녀로서 이름은 류면(琉冕)인데, 경진(200)년에 왕을 임신하여 9년 후 무자(208)년에 왕을 낳고 52년(251년) 봄 3월3일 부왕(선)과 같이 속세와 이별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다른 사적에서 또 말하기를 경술(290)년에 돌아가셔서 재위가 37년이었다고 한다.) 시호는 성왕이다. ○능은 전해지지 않는다.
后趙氏諱好仇宗正監趙匡孫(趙匡妻名慕良亦太后媵臣)壬子薨 ○陵(王陵同原无傳)
왕후는 조씨로서 휘는 호구이며 종정감 조광의 손녀이다. (조광의 부인의 이름은 모량으로 역시 <허>태후의 몸종이었다) 임자(292)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이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嗣德王
덕왕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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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德王諱(居叱彌王) 一云(巨叱今勿)
덕왕 휘(거질미왕) 또는 (거질금물)
成王子新羅儒禮王七年辛亥(西晉元康元年)卽位新羅訖解王三十六年丙午(東晋永和二年)秋七月薨在位五十五年諡德王○陵(无傳)
성왕의 아들로서 신라 유례왕 7년 신해(291)년 (서진 원강 원년)에 즉위하여 신라 흘해왕 36년 병오(346)년 (동진 영화 2년) 가을 7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55년이었으며 시호는 혜왕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阿志阿干我躬孫新羅訖解王丁未薨云 ○陵(王陵同原无傳)
왕후의 휘는 아지이며 아간을 지낸 아궁의 손녀이다. 신라 흘해왕 정미(347)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에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嗣明王
대를 이은 이는 명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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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明王諱(伊尸品王)一云(伊麻)又云(伊尸品懷)
명왕 휘(이시품왕) 또는 (이마) 또는 (이시품회)
德王子新羅訖解王三十六年丙午(東晋永和二年)卽位新羅實聖王五年丁未(東晋義熙三年)夏四月薨在位六十一年 諡曰明王○陵(无傳)
덕왕의 아들로서 신라 흘해왕 36년 병오(346)년 (동진 영화 2년)에 즉위하여, 신라 실성왕 5년 정미(407)년(동진 의희 3년) 가을 4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61년간이었다. 시호는 명왕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眞信司農卿克忠女新羅實聖王丁未薨云 ○陵(二陵在金海陵洞異國兵禍每因金氏陵號而不知葬法疑有古品物寶藏入輒掘陵故蓋致失陵)
왕후의 휘는 진신으로 사농경 극충의 따님이다. 신라 실성왕 정미(40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능 (두 능은 김해의 능동에 있었으나,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김씨의 능호가 붙어 있어서, 장례의 법을 모르고 고 물건이나 보물이 있는 것으로 여겨 도둑들이 자주 능을 도굴하고 다시 덮어 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嗣神王
신왕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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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神王諱(坐知)一云(金叱)
신왕 휘(좌지) 또는 (김질)
明王子新羅實聖王五年丁未(東晋義熙三年)卽位新羅訥祗王四年辛酉(宋永初二年)夏五月薨在位十四年諡曰神王○陵(无傳)
명왕의 아들이며 신라 실성왕 5년 정미(407)년 (동진 의희 3년)에 즉위하였다. 신라 눌지왕 4년 신유(421)년 (송 영초 2년) 여름 5월 돌아가시니 재위는 14년간이었다. 시호는 신왕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福壽大阿干道寧女 ○陵(无傳)
왕후의 휘는 복수이며 대아간을 지낸 도녕의 따님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嗣惠王
혜왕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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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惠王諱(吹希)
혜왕휘(취희)
神王子新羅訥祗王四年辛酉(宋永初二年)卽位新羅訥祗王三十四年辛卯(宋元嘉二十八年)春二月薨(一云庚辰葬)卽位三十年諡曰惠王○陵(无傳)
신왕의 아들이다. 신라 눌지왕 4년 신유(421)년 (송 영초 2년)에 즉위하여, 신라 눌지왕 34년 신묘(451)년 (송 원가 28년)봄 2월에 돌아가시니(또는 경진년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재위는 30년간이었다. 시호는 혜왕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仁德角干進思(一云思申)女○陵(无傳)
왕후의 휘는 인덕이며 각간을 지낸 진사(또는 사신)의 따님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嗣莊王
장왕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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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
莊王諱(銍知)一云(銍智)
장왕 휘(질지) 또는 (질지)
惠王子新羅訥祗王三十四年辛卯(宋元嘉二十八年)卽位新羅炤智王三年壬申(齊永明十年)薨(一云辛未薨)在位四十一年諡曰莊王○陵(无傳)
혜왕의 아들이다. 신라 눌지왕 34년 신묘(451)년(송 원가 28년)에 즉위하여 신라 소지왕 3년 임신(492)년 (제 영명 10년)에 돌아가시니 (또는 신미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재위는 41년이었으며, 시호는 장왕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邦媛父沙干金相女新羅炤智王壬申薨云 ○陵(无傳)
왕후의 휘는 방원이며 사간을 지낸 김상의 따님이며 신라 소지왕 임신(492)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嗣肅王
숙왕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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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肅王諱(鉗知)
숙왕 휘(겸지)
莊王子新羅炤智王三年壬申(齊永明十年)卽位新羅法興王七年辛丑(梁普通二年)薨在位二十九年諡曰肅王 ○陵(无傳)
장왕의 아들이다. 신라 소지왕 3년 임신(492)년 (제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신라 법흥왕 7년 신축(521)년(양나라 보통 3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29년간이었다. 시호는 숙왕이라고 한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淑角干出忠女 ○陵(无傳))○(一云陵在居漆國內山以上八代陵无傳)
왕후의 휘는 숙으로 각간을 지낸 출충의 따님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능은 거칠국의 산에 있다고 하나 이상 8대의 능은 전하지 않는다.
嗣讓王
양왕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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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
讓王諱(仇衡)
양왕 휘(구형)
肅王子新羅法興王七年辛丑(梁普通二年)卽位新羅法興王十八年壬子(梁中大通四年)在位十一年傳位于世子仇亥是爲世宗而世宗卽傳位于世弟武力(史稱傳位于弟者史之傳誤而卽世宗傳位於武力之謂也王曰讓王仇亥曰世宗武力之上諡也)
숙왕의 아들로서 신라 법흥왕 7년 신축(521)년 (양나라 보통 2년)에 즉위하여, 신라 법흥왕 18년 임자(양나라 중대통 4년)년인 재위 11년에 세자인 구해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이분이 세종이다. 세종은 동생인 무력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역사에서 말하기를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하나 역사에서 전하는 것은 틀렸고 세종이 무력에게 전위한 것을 말한다. 왕은 양왕이고 구해는 세종으로서 <세종은> 무력이 선왕을 위해 지은 시호이다.)
王卽與世宗妃嬪奉宗廟樂器移御于太王之水晶宮以終一曰在位四十二年丁丑薨春秋六十九(是在王位十二年在上王位三十一年合歷歲也)晬容一本奉安水晶宮(正宗戊午邑儒閔景元開秘函弓劍若錦袍王之所御也繡裳影幀王與后也有名僧坦瑛所記矣)諡曰讓王
왕(양왕)은 세종과 비빈과 같이 종묘악기를 받들고 수정궁으로 옮긴 뒤 종말을 고하였다. 한편으로 말하기를 재위는 42년간으로 정축(557)년에 돌라가시니 나이는 69세였고 (이는 왕위 12년과 상왕으로서 31년을 합한 기간이다.) 초상화 1점이 수정궁에 모셔져 있다. (정조 무오(1798)년 읍의 선비 민경원이 비밀상자를 열어보니 활과 칼과 약간의 비단 옷이 있었는데 왕의 소지품이었다. 수놓은 치마에 그려진 영정은 왕과 왕후였다. 유명한 중 탄영의 기록에도 나온다.) 시호는 양왕이다.
○陵(在駕洛國知品川王山東庚坐今山淸郡今西面花溪里纍石爲邱四面皆七級制度朴古完築矣)
능은 (가락국 지품천 왕산의 동쪽 경좌에 있으니 지금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이다. 돌을 쌓아 구릉을 만들고 4면에 7층의 계단을 만든 것이 제도(형식)가 소박(朴古)하며 완벽한 축조술이다.)
○按山曰王山臺曰王臺寺曰王山寺卽讓王與世宗二王之遺蹟也 王山有宗廟舊址是知宗廟樂器太子妃嬪移御太王之水晶舊宮也
○생각해 보면 산을 왕산, 대를 왕대, 절을 왕산사라 하는 것은 양왕과 세종 두 왕의 유적이기 때문이다. 왕산에는 종묘의 옛 터가 있는데, 이것으로 종묘악기임을 알 수 있고, 태자와 비빈이 옮겨간 태왕(수로왕)의 수정의 옛 궁궐이었다.
一曰興武王遺蹟址則非也興武乃追諡也 豈有王號於山名射臺也 又非復國則焉有創始祖廟哉 陵東距金官三百里久失傳至朝鮮正宗戊午始復陵自營邑報京司越六年 純祖癸亥京鄕雲仍建陵齋講堂廟舍門樓有司禁樵焉
한편으로 말하기를 흥무왕의 유적이라 하나 이는 아니다. 흥무는 추봉된 시호인데 어찌 왕호를 산에 있는 사대에다 이름붙이겠는가. 또 나라를 되찾지 못했는데 조상의 사당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능은 동쪽으로 금관과 300리가 떨어져 있고 오래전에는 잃어버렸다가, 조선의 정조 무오(1798)년에 처음으로 능을 복구하고 읍에서 서울에 보고하니 6년 후 순조 계해(1803)년 서울과 지방의 후손들이 다시 능의 부속건물을 짓고 유사를 두어 나무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按讓王辛亥冬燕子樓鳴驚動長安王命毁有太祖王牒曰燕子卽壬子傳國於羅王不逆天此乃禪位而啓傳國之兆云
○살펴 보건대 양왕의 신해(531)년 겨울에 연자루에서 우는 소리가 나서 장안(나라의 수도, 김해?)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왕이 연자루를 부수어 버리라고 명했다 한다. 태조왕(수로왕?)의 글에서 말하기를 연자는 임자(532)년에 나라를 신라에 주는 것은, 왕이 하늘을 거스르지 않고, 이에 선위하여 나라를 보전할 조짐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한다.
又按王之傳位誣以革鼎先之者三國史法興王本紀繼之以輿地勝覽玆後作史者因之尤之者禪坦瑛掇俚訛爲秘函而三王考趙鎭寬王陵碑序銘李秉鼎撰王陵祠碑及畵像碑銘誣岡天人誣斷王統三史僞誕可勝誅哉國史有錯家譜正之者竊有望於來賢也
또 생각해보면 왕(구형왕)이 왕위를 <신라에> 전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나라가 다시 바뀐 것이다. 옛 사람들이 삼국사기의 법흥왕 본기[1]를 계승하여 여지승람에 어렴풋이 나타내었으나, 후세의 역사가들이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2]. 더욱이 중 탄영이 속된 것과 거짓을 가려내어 써서 비밀함속에 넣어 삼왕고 라는 책 속에 실렸고, 조진관이 쓴 왕릉비명의 서문과, 이병정이 찬술한 왕릉사 비와 화상비명도 거짓으로서 하늘을 속이고, 사람들은 거짓으로 왕통을 끊어버리고 삼국사가 허위로서 한탄스러우니 다 없애야 할 것이다. 나라의 역사서에는 착오가 있고 가정의 보첩이 올바르니 가만히 현명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王山尋陵記洪儀泳撰王陵記府使成大中撰三王祠碑銘判書趙鎭寬撰畵像碑判書李秉鼎撰王山寺記僧坦瑛撰水晶宮懸板記承旨金寗漢撰
○왕산심릉기는 홍의영이 찬하였고, 왕릉기는 부사 성대중이 찬하였고, 삼왕사비명은 판서 조진관이 찬하였고, 화상비는 판서 이병정이 찬하였고, 왕산사기는 승 탄영이 찬하였고, 수정궁 현판기는 승지 김녕한이 찬하였다.
后諱桂花父分叱水伊叱女一云丁卯薨晬容一本與大王同爲奉安于水晶宮 ○陵王陵同原云未詳
왕후의 휘는 계화이고 분질수이질의 따님이다. 한편으로 정묘(54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초상화 1장이 대왕과 같이 수정궁에 봉안되어 있다. ○능과 왕릉은 같은 언덕에 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嗣世宗
세종이 대를 이었다.
嗣武力王
무력왕이 대를 이었다.
男武得(官角干○一云官角號義卿封金寧君伐首若西州漢山享于觀晶洞伯仲祠故三忠公云配金氏父護軍伊湌改物○子孫无傳)
아들은 무득이다. (관직은 각간이다. ○또는 관직은 각이고 호는 의경으로서 금녕군에 봉해지고 서주의 한산정을 정벌하였고 관정동에 제사를 모시니 백형(세종=구해), 중형(무력)과 같이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삼충공이라고 한다. 부인은 김씨로서 호군을 지낸 이찬 개물의 따님이다. ○자손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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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
世宗諱(仇亥)一云(奴宗)
세종 휘(구해) 또는 (노종)
讓王長子新羅法興王十八年壬子(梁中大通四年)受禪位(凡稱讓王傳位于弟仇亥弟字卽子字之訛誤今正之)及讓王移御于太王水晶舊宮時仍卽傳位于世弟武力奉宗廟樂器及妃嬪侍讓王入水晶宮以終武力王上諡曰世宗○陵(无傳)
양왕의 장자로서 신라 법흥왕 18년 임자(532)년 (양나라 중대통 4년)에 왕위를 물러받고 (무릇 말하기를 무릇 말하기를 양왕이 왕위를 동생인 구해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나, 제(弟;동생)라는 글자는 자(子;아들)라는 글자를 잘못 기록한 것이니 지금 바로잡는다.) 또 양왕은 태왕(수로왕)의 옛 궁궐인 수정궁으로 옮기었다. 이때 세종은 동생인 무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종묘악기와 비빈을 거느리고 양왕을 모시고 수정궁으로 들어가 종말을 고하였다. 무력왕은 선왕을 위하여 시호를 올렸는데 세종이라고 하였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无傳
왕후는 전해지지 않는다.
男率友(一云率支配鷄林金氏墓所及子孫幷无傳)
아들은 솔우(또는 솔지라고 하며 부인은 계림 김씨아고 묘소와 자손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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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
武力王(무력왕)
讓王第二子新羅法興王十八年壬子(梁中大通四年)受禪於世宗至新羅眞興王二十二年壬午(陳天嘉三年)傳國于新羅眞興王侍以賓禮以其國爲食邑以金官國爲金官郡(東國遺史曰周保定壬午傳位于新羅)
양왕의 둘째 아들로서 신라 법흥왕 18년 임자(532)년 (양나라 중대통 4년)에 세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신라 진흥왕 22년 임오(562)년 (진나라 천가 3년)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자 신라 진흥왕이 손님의 예로서 맞이하여 그 나라를 식읍으로 주어 금관국이 금관군으로 되었다. (동국유사에서 말하기를 주나라 보정 임오(562)년에 산라에 나라를 주었다고 한다.)
自駕洛紀元元年壬寅歷年五百二十一年(編年國紀云秋大伽倻謀復國羅將異斯夫擊之諸臣皆死於是駕洛平通典云新羅襲滅駕洛任那諸國是歲古寧伽倻亦亡此駕洛與高靈壬午幷亡之證也)
가락기원 원년인 임인(42)년으로부터 521년이 지났다. (편년국기에서는 가을에 대가야가 나라를 다시 찾고자 모의하였으나, 신라의 장수 이사부의 공격으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죽었다. 이로서 가락을 전부 평정되었다고 한다. 통전에서 말하기를 신라가 습격하여 가락과 임나의 여러 나라를 멸망시키니, 이해에 고령가야도 역시 멸망하였다. 이것을 가락이 고령과 임오(562)년에 같이 망했다는 증거이다.)
王 旣傳位于新羅官至大總管大都督角干(一譜云武力王遜位于新羅賜爵新州大總管角干又慶州金氏璿源譜武力王固以王駕洛之國君新朝之長相一位而曰王曰角干固其眞傳也 ○又一譜云在位七年因迭史而在位之年傳之失實之文)
왕은 이미 신라에 나라를 넘기고 관직은 대총관/대도독/각간에 이르렀다. (어떤 보첩에서 말하기를 무력왕이 신라에 왕위를 넘기고 신주대총관/각간의 관작을 받았다고 하고, 또 경주김씨 선원보에는 무력왕이 진실로 왕으로서 가락의 국군으로 새로운 조정의 장상 중 제일 높은 벼슬을 지냈다고 하고, 왕이었다거나 각간이었다거나 하니 진실로 이는 그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또 어떤 보첩에서는 재위가 7년이었다고 하니, 지나간 역사로서 재위의 연수는 전해지지만 그 글은 잃어 버렸다.)
新羅眞平王元年庚子(陳大建十二年)十月十六日薨(一云死節) ○陵(鷲山下癸坐石物賜牌地建鷲山寺云疑今梁山通度寺後附近而未詳何地)
신라 진평왕 원년 경자(580)년 (진나라 대건 12년)10월 16일 돌아가셨다. (또는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고 한다.) ○능은 (취산아래 계좌이고 석물과 전답이 딸려 있었는데, 전답에 취산사를 지었다고 하나 의심스럽다. 지금 양산 통도사 뒷쪽 부근이나 상세하게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
后朴氏巴刀夫刀弟 ○附王陵云
왕후는 파도부도의 동생이다. ○왕릉과 부장하였다고 전한다.
男舒玄(見下上系編)
아들은 서현이다. (라래 상계편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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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 王山世家石藏大同譜總編(김해김씨 왕산세가 석장대동보 총편)
○上系(상계)
十二世 <武力王 子>
舒玄(서현) <子 庾信, 欽純, 女新羅文明王后,寶姬>
二子二女○舒一云庶云新羅角干梁州都督按撫諸軍事 ○謹按一譜都督伐任羅伽倻萬弩國封萬弩郡太守陞角干蘇判己丑伐高句麗娘臂城公之子庾信斬將奮擊遂拔之梁州今陜川娘臂城今淸州忌九月十九日
2자2녀를 낳았다. ○서(舒)는 한편으로 서(庶)라고 한다. 신라에서 각간/양주도독/안무제군사를 지냈다. ○삼가 어떤 보첩을 살펴보면 도독이 임라가야를 정벌하니 만로국에서 만로군의 태수로 봉했다가 각간/소판으로 승진했다고 되어 있다. 기축(629)년에 고구려 낭비성을 정벌하고, 공의 아들인 유신이 적의 장수를 베고 공격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양주는 지금의 합천이며 낭비성은 지금의 청주이다. 기일은 9월 19일이다.
配慶州金氏萬明新羅宗室肅訖宗女忌十月十一日 ○墓鷲山下癸坐合窆云未詳
부인은 경주김씨인 만명으로서, 신라종실인 숙흘종의 따님이며 기일은 10월11일이다. ○묘소는 취산 아래의 계좌에 합분하였다고 말하나 확실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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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
<舒玄> 子 庾信(유신) <子 三光,元述,元貞,長珥,元望, 施得>
六子○都督公爲萬弩郡太守甲寅歲庚辰日夜夢太白鎭二星下降於己母夫人夢見童子衣金甲乘雲入室尋有娠二十月生隋文帝開皇十五年新羅眞平王十七年乙卯也 背有七星文郡有胎靈山卽藏胎處後號吉詳山
6명의 아들을 낳았다. ○도독공(휘서현)이 만로군[1] 태수로 있을 때인 갑인(594)년 경진일 밤에 꿈을 꾸니, 태백과 진성의 두 별이 내려왔다. 이미 모부인의 꿈에서도 어린아이가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임신한지 20개월만에 아이를 낳으니 수나라 문제 개황 15년, 신라 진평왕 17년 을묘(595)년이었다. 등에는 7개의 별 그림이 있었다. 군(만로군)에 태령산이 있으니 즉 태를 묻은 곳으로서 후에 길상산이라 이름붙였다.
[1]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
都督公曰吾以庚辰日有吉夢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庚與庾字相似 辰與信 聲相近 蓋以命之遂名 庾信
도독공(휘서현)이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에 길한 꿈을 꾸어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를 이름으로 해야 하나, 예기에 따르면 날짜를 이름으로 할 수 없으니, 경(庚)은 유(庾)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이 같으니 대개 이렇게 하라고 명하니 결국 이름이 유신(庾信)이 되었다.
公有大志年十五人已服從號龍華先生香徒嘗入方丈侍陵七載又入中嶽山誓告于天得兵書寶劍各一仍入咽薄山告誓虛角二星光芒下垂寶劍自躍又入月生山試劍斬大石後世名曰斷石山奉毋訓斬馬絶天官
공(유신)은 큰 뜻이 있어서 나이 15세에 사람들이 그의 말에 복종하였다. 호가 룡화선생 향도이었다. 일찍이 방장<산>에 들어가 7년동안 시릉하고, 또 중악산에 들어가 하늘에 맹세하였으며(무엇을?) 병서와 보검 각 하나를 얻었다. 거듭하여 인박산에 들어가 맹세하니(무엇을?) 허성과 각성의 두 별빛이 내려와 보검을 밝게 비추었다. 또 월생산에 들어가 보검을 시험하고자 큰 돌을 자르니 후세 사람들이 이름붙이기를 이 산을 단석산이라 하였다. 모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말의 목을 베고 천관과 절교하였다.
佐新羅太宗與唐將蘇定方伐百濟獲公主歸之後人名其地曰鵲院以白馬釣白龍斬之後人名其江曰白馬江遂滅百濟新羅文武王元年唐龍朔二年壬戌蘇定方伐高句麗不克公提兵往救之
신라 태종을 도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같이 백제를 정벌하고 공주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작원이라 이름붙였다. 백마로서 흰 용을 낚아 베어버리니 후세 사람들이 그 강을 백마강이라 했다.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 문무왕 원년, 당나라 용삭 2년 임술(662)년 소정방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공(유신)이 병사를 제공하여 가서 구해주었다.
新羅文武王七年唐總章元年戊辰授方略於公弟欽純與唐將李勣滅高句麗統合三韓官至太大舒發翰太大角干唐高宗遣使冊公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
신라 문무왕 7년, 당나라 총장 원년 무진(668)년에 방안과 계략을 공의 동생인 흠순에게 주어서 당나라 장수 이적과 같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한을 통합하였다. 관직은 태대서발한/태대각간에 이르고 당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공을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책봉하고 식읍 2천호를 주었다.
新羅文武王十二年咸亨四年癸酉春大星隕地震公寢疾王命禳及篤親臨有遺誥夏六月人見甲士數十人自公宅涕泣而去忽不見七月一日薨葬慶州府松花山金山原忠孝里賜軍樂鼓吹以葬命國子博士薛因宣撰碑文定八戶守墓
신라 문무왕 12년, 함녕 4년 계유(673)년 봄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나자 공이 병이 들었다. 왕(문무왕)이 굿을 지내고 친히 임하니 교훈을 남겨 주었다. 여름 6월에 사람들이 보니 갑옷을 입은 선비 수십명이 공의 집에서 나오면서 울면서 갑자기 없어져 보이지 않았다. 7월1일 돌아가시어 경주부 송화산 금산원 충효리에 장사지냈으며, 군악대의 북과 취주대를 동원하여 장례를 치렀다. 국자감 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8집을 정하여 묘를 지키게 했다.
序始祖太王曰皇帝之孫少昊之胤 此句傳於世碑與全文逸 新羅惠恭王十四年己未有衣甲神將四十餘員擁一位大將至竹峴味鄒王陵有異徵王愕遣金敬臣責躬致祭置享田於鷲山寺新羅法興王元年戊申封公爲純忠壯烈興武大王
서문에 시조 태왕(수로왕)은 황제의 손자인 소호의 후예였다고 하나, 이 구절은 세상에 전해져 오는 것이고, 묘비와 전문은 없어졌다. 신라 혜공왕 14년 기미(779)년에 갑옷을 입은 신장(神將;장수 귀신) 40여명이 한사람의 대장을 모시고 죽현의 미추왕릉으로 간, 이상한 징조가 있어서 왕(혜공왕)이 후회하며 김경신을 파견하여 스스로를 책망하며 치제를 올리고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는 밭을 취산사(삼국사기에는 鷲仙寺)에 두었다. 신라 법흥왕(흥덕왕 임) 원년 무신(828)년에 공을 순충장렬흥무대왕으로 봉하였다.
朝鮮 正宗壬子四月因大王納陵致祭命降香祝致享 隆熙己酉當南巡命官降香祝例 與 崇善殿一體致祭公之史編於彤管 此不重載享于西岳書院香火如鎭川吉祥祠軍威孝令祠江陵花浮祠至今繼續焉
조선 정조 임자(1792)년 4월에 대왕(수로왕)의 납릉에 치제하고 향과 제사에 쓰일 물건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융희 기유(1909)년 당시 남쪽을 순행할 때 관원에게 명하여 향과 축문을 내리라고 명하고 숭선전에서 함께 치제하였다. 공(휘유신)의 사적에 있어서 동관(彤管)에서 있었던 일은 여기에 중복하여 기재하지 않는다. 배향을 서악서원에 모시고 향화도 진천의 길상사와 같이, 군위의 효령사, 강릉의 화부사에 지내게 하여 지금 계속되고 있다.
配慶州金氏新羅太宗第三公主壤郡夫人封興武王后 ○墓公墓同原有智炤舊碑剝落有神道碑大提學黃景源撰
부인은 경주김씨인 신라태종의 셋째 공주로서 훙무왕후에 봉해졌다. ○묘소도 공(휘유신)의 묘소와 같은 언덕의 지소에 있고, 옛날의 비석은 글자가 벗겨지고 떨어져 신도비를 세우고 대제학 황경원이 찬술하였다.
○舊譜開國公妃智炤夫人生五子長曰三光次曰元述次曰元貞次曰長耳次曰元望庶子曰施得 ○新羅太宗歲賜城南租一千石嘉夫人內助之陰功也
○구보에는 개국공(휘유신)의 왕비인 지소부인이 5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삼광, 다음은 원술, 다음은 원정, 다음은 장이, 다음은 원망이고, 서자는 시득이다. ○신라 태종시대에 성남에 1천석의 곡식을 내려, 부인이 내조한 남모르는 공덕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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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舒玄> 子 欽純(흠순) <子 盤屈>
新羅大將軍新羅善德王二年唐太宗貞觀八年甲午與唐將李勣伐高句麗滅之
配與墓所无傳
신라 대장군으로서 신라 선덕왕 2년, 당태종 정관 8년 갑오(634)년에 당나라 장수 이적과 같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1].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1]고구려가 망한 연대는 668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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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舒玄> 女 新羅文明王后(문명왕후)
新羅太宗王妃諱文姬 ○子法敏文武王金仁問金文注幷將軍 老旦智鎧元並角干
신라 태종의 왕비로서 이름은 문희이다. ○아들은 법민이 문무왕이고 김인문, 김문왕은 모두 장군이고 노차, 지, 개원은 모두 각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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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舒玄> 女 寶姬(보희)
東史簒要云文姬兄
동사찬요에는 문희의 언니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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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世
<庾信> 子 三光(삼광) <子 允中, 允文>
二子官伊湌新羅文武王五年唐乾封元年丙寅唐帝勅召三光爲左武衛中郎將仍令宿衛三年新羅文武王七年唐總章元年戊辰合唐兵滅高句麗
두 아들을 두었다. 관직은 이찬으로 신라 뭄무왕 5년, 당나라 건봉 원년 병인(666)년에 당의 황제(당의 고종)가 칙령으로 삼광을 불러 좌무위 중랑장으로 삼고, 숙위하도록 명령하였다. <건봉> 3년이자 신라 문무왕 7년, 당나라 총장 원년 무진(668)년 당나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按東史新羅文武王五年丙寅四月遣奈麻漢林三光如唐宿衛漢林天存之子三光金庾信之子王旣平百濟欲請兵滅高句麗故遣之唐帝以三光爲武衛翊府中郞將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문무왕 5년 병인(666)년 4월에 나마(벼슬명)로서 한림과 삼광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숙위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림은 천존의 아들이고 삼광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왕(문무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병사들을 빌려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황제(당의 고종)에게 삼광을 파견하니 삼광은 무위익부 중랑장이 되었다.
及還唐帝贈詩曰燦燦文星海東天飄揚才德子能全一振高名滿帝都三千躍馬向華邊
또 돌아올 때 당황제가 시를 써 주었는데 그 내용은 ‘빛나고 빛나는 글이 별과 같이 바다의 동쪽(신라)에 태풍과 같이 떠오르는구나. 재능과 덕망은 능히 모든 나라안을 진동시켜, 고귀한 이름이 황제의 서울에 널리 알려졌구나. 3천마리의 뛰어노는 말이 영화로운 변경을 향해갔다.’고 하였다.
羅史文武王八年戊辰夏六月唐遼東行軍劉仁軌奉唐帝勅與宿衛沙湌金三光到党項津王使金仁問備禮迎之仁問羅王子
配位與墓无傳
신라의 역사에는 문무왕 8년 무진(668)년 여름 6월, 당의 요동행군 유인궤가 칙령을 받들고 숙위하던 사찬 김삼광과 같이 당항진에 도착하니, 왕(문무왕)이 김인문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환영하라 하였다고 한다. 인문은 신라왕의 왕자이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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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元述(원술)
官蘇判文武王時有功於國封菁陽君食邑于花開鄕始籍晋陽
관직은 소판이었다. 문무왕 때 공을 세워 나라에서 청양군에 봉하고, 화개를 식읍으로 주니 진양에 살기 시작하였다.
文武王納高句麗叛衆又據百濟古地唐高宗大怒命將來討王遣將軍義福等禦之于帶方之野敗績公欲戰死爲淡陵所止及還父公曰元述不惟辱王命亦負家訓可斬也
문무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자,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며 장차 가서 <신라를> 토벌하겠다고 하고 장군 의복 등을 대방의 들로 보내었다. 계속 <신라가> 패배하자 공이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담릉이 말려서 돌아왔다. 부친인 공(휘유신)이 말하기를 원술은 생각없이 왕명을 욕되게 하고 또한 가훈을 어겼으니 죽여야 한다고 했다.
王赦之公慚愧不敢見父公遁於田野父卒見母夫人夫人曰汝父以汝不以爲子吾焉 得以汝爲子終不見公歎曰爲淡陵所誤至於此極乃入太白山後唐兵來攻買蘇川城公欲雪前恥力戰有功賞以不容於父母憤恨不仕以終其身
왕이 사면하여주자 공(휘원술)이 매우 부끄러워하며 감히 부친(휘유신)을 보지 못하였다. 공이 시골에 숨어 지내다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모친을 뵙고자 하였으나 모친이 말하길 너희 아버지는 너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 나도 너를 자식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고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담릉이 잘못한 것이 이렇게 까지 되었다 하고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후에 당나라가 매소천성을 공격해오니 공이 이전의 부끄러움을 씻으려고 힘을 다해 싸워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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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元貞(원정)<子 王巽>
官海干
配與墓所未詳
관직은 해간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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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長耳(장이)
官大阿湌
配位與墓无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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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元望(원망)
官大阿湌
配與墓所无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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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信> 子 施得(시득)
謹按東史則興武王庶子施得天官夫人所出也 入唐有功唐封臨郡公羅朝官上將軍史有施得譜有軍勝似是譜誤故以諱施得正誤又舊譜以伊得系軍勝下皆誤錄也
동사를 살펴보면 흥무왕의 서자인 시득은 천관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우니 당나라가 임군공으로 봉하였고, 신라의 조정에서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역사책에는 시득이 있고 보첩에는 군승이 있어 서로 비슷하나 보첩이 틀렸으니 그 휘를 시득으로 고친다. 또 구보에는 이득(伊得)아래에 군승을 이었으나 모두 틀린 기록이다.
○朝鮮歷代史略文武王十五年唐高宗儀鳳元年丙子冬十一月沙湌施得與唐將薛仁貴戰於所夫里州克之先是王納 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使人守之唐帝大怒時王弟仁問在唐帝立爲王使歸國仍拜鶴林大都督開府儀同三司以劉仁軌爲鶴林道大總管發兵伐之
○조선 역대사략에 문무왕 15년, 당 고종 의봉원년 병자(676)년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 소부리주에서 싸워 이겼다고 되어 있다. 이보다 먼저 왕(문무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자 당의 황제가 크게 화를 내었다. 이 때 왕의 동생이 인문이 당나라에 있어, 황제가 그를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또 학림대도독 개부의동 삼사에 봉하였다. 유인궤(劉仁軌)를 학림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仁軌先進克七重城今積城革屬漣川王遣使謝羅唐赦之仁問行至中道聞之還之唐唐改封臨海郡公先時王益多取濟地遂抵麗南境爲州郡唐兵與契丹靺鞨數來侵奪我兵皆克之至
유인궤가 먼저 공격해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에게 이겼다.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혁에 속한 연천이다. 왕(문무왕)은 사신을 보내 사죄하니 당나라가 용서하였다. 인문은 오던 중간에 이 소식을 듣고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당은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이보다 먼저 왕(문무왕)은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여러 번 침략해 왔으나 우리 군사가 모두 이겼다.
是施得又以船兵與仁貴戰始不利更進與戰二十餘皆捷斬首四千餘級自是唐兵遂不至
이 때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으나 처음에는 불리하였고, 다시 나아가 싸워 20여회의 싸움에서 적들을 모두 사로잡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 때부터 당나라 병사는 마침내 다시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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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純> 子 盤屈(반굴)
新羅太宗庚申秋七月唐將蘇定方伐百濟時從開國公次于南川亭上四戰不利公力戰死之
配與墓所无傳
신라 태종 경신(660)년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개국공(휘유신)을 따라 남천정 위로 가서 4번을 싸웠으나 불리하여 공(반굴)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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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
<三光> 子 允中(윤중) <子 長淸>
一云元述子 ○官大阿湌東史新羅聖德王三十二年唐開元二十一年癸酉九月唐以渤海靺鞨入寇唐詔曰新羅舊將金庾信孫允中之賢可謂將入送仍賜允中金帛於是王命允中及其弟允文等將兵會唐軍伐渤海因天大雪而還
또는 원술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우리 역사서에 신라 성덕왕 32년 당나라 개원 21년 계유(733)년 9월에 당나라에 발해와 말갈의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황제(당의 현종)가 조서를 내려 말하되 ‘신라의 옛 장수인 김유신의 손자인 윤중이 현명하여 가히 장수로 될 수 있으니 들어오게 하라.’하고 또 윤중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다. 이에 왕(성덕왕)은 윤중과 그의 동생 윤문 등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여 당나라 군사와 같이 발해를 정벌하라고 하였으나 눈이 많이 내려 돌아왔다.
新羅惠恭王十四年唐大曆十四年己未王以允中庾信嫡孫擢爲大阿湌寵遇之王之親屬頗嫉之王嘗登月城與從臣置酒爲樂召允中與焉左右曰今宗室戚里豈無可人而獨召疏遠之臣何也 王曰今吾與卿等共享泰平皆庾信之功若遐棄之非善善及子孫之義賜允中座語庾信勳烈賜絶影島山馬一匹
신라 혜공왕 14년, 당나라 대력 14년 기미(779)년에 왕(혜공왕)이 윤중을 유신의 적손으로 발탁하여 대아찬에 임명하고 특별히 총애하자 왕의 친속들이 약간 시기하였다. 왕이 일찍이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같이 월성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며 윤중을 부르자 좌우에서 말하기를 ‘지금 종실의 친척(戚里)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홀로 관계가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내가 경 들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은 모두 유신의 공로이다. 만일 이를 돌보지 아니하면 선이 아니며 또 자손에게 해야 하는 도리가 아니다.’하였다. 윤중을 옆에 앉히고 유신의 공적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절영도의 산에서 가져온 말 한 마리를 주었다.
配李氏墓所无傳
부인은 이씨이고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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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光> 子 允文(윤문)
官上將軍 屢立戰功奉王命與伯兄允中提帥會唐兵伐渤海官及配位墓所子孫无傳
配位與墓無傳
관직은 상장군이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웠고 왕명을 받들어 형인 윤중과 같이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사와 같이 발해를 정벌하였다. 관직과 부인과 묘소와 자손은 전하지 않는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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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貞> 子 王巽(선) <子 巖>
判吏部事
配與墓所未詳
판리부사를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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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世
<允中> 子 長淸(장청)
官執事侍郞角干碑陰允中孫又嶺南譜開國公玄孫執事侍郞長淸作公行錄十卷○開國公長派京世譜只載長淸十六世無傳
配密陽朴氏父中郞將檜出東京誌舊譜无傳○墓與生卒未詳
관직은 집사시랑을 지냈다. 각간(휘무력?)의 비음에는 윤중의 손자라고 되어있다. 또 영남보에는 개국공(휘유신)의 현손인 집사시랑 장청이 공(휘유신)의 행록 10권 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개국공(휘유신)의 장손파인 경세보에는 다만 장청은 16세이고 무전이라고 되어있다.
부인은 밀양박씨로서 중랑장을 지낸 박회의 따님이라고 동경지에 나오나, 구보에는 무전이라고 되어 있다. ○묘소와 생졸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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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巽> 子 巖(암) <子 瑱>
官執事侍郞司天太博士京世譜與輿地勝覽允中庶孫名載史傳
관직은 집사시랑/사천태박사를 지냈다. 경세보와 여지승람에는 윤중의 서손으로 되어 있고 이름이 역사서에 실려 전한다.
○開國公事蹟篇長文子孫錄允中次曰允文庶孫曰巖聰敏 好方術少壯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術遁甲立成法師曰不圖明達至此還國爲司天太博士 執事侍郞鎭浿江敎六陣兵法人皆便之嘗有蝗蔽野 百姓憂懼巖登山頂 焚香祈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滅
○개국공(휘유신) 사적편의 긴 글인 자손록에는 윤중의 다음이 윤문이고, 서손으로서 암이 있다고 한다. 암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방술을 좋아하여 어려서 당나라에 숙위로 가 있을 때, 스승으로부터 음양가법술과 둔갑입성법을 배웠다. 스승이 말하기를 이렇게 까지 빨리 달성할 줄 몰랐다고 하여 국내로 돌아와서 사천태박사/집사시랑이 되었다. 패강을 진압하고 육진병법을 가르치자 사람들이 모두 편해 하였다. 일찍이 메뚜기 떼가 들을 뒤덮어 백성들이 근심하며 두려워하여, 암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자 갑자기 바람과 비가 많이 내려 메뚜기 떼가 전부 없어져 버렸다.
後聘日本 王知其賢欲留之會 唐使高鶴林來 相見甚懽王以巖爲大國所知不敢留乃歷代史略新羅惠恭王十四年唐大曆十四年己未遣金巖聘日本
이 후에 일본에 방문하였을 때, 일본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그를 머물게 하고 싶었으나, 마침 당나라의 사신인 고학림이 그를 보고 아주 기뻐하여 왕(일본왕)은 ‘암은 대국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인데 감히 머무르게 하지 못하겠다.’하고 돌려보내었다. 또 역대사략에는 신라 혜공왕 14년 당나라 대력 14년 기미(779)년에 김암은 일본을 방문하였다.
巖庾信曾孫性聰敏少爲伊湌入唐宿衛下文同此以曾孫載也 京世譜只載子瑱餘無傳有附錄按甲戌歲井邑金德埰家有正德舊本自巖以下四十餘代聯故仍以載錄焉
配 與墓未詳
암은 유신의 증손으로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젊어서 이찬이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는 글에서 이와 같이 증손이라고 적혀있다. 경세보에는 다만 아들이 진이라는 것 외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부록을 살펴보니 갑술(1754)년에 정읍의 김덕채 집에 정덕구본이 있는데, 암으로부터 이하 40여대를 연계했다고 하니 이를 재록한다.
부인과 부소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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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德舊譜抄本(정덕구보초본)
一世
雄元(웅원)
新羅憲德王時伊湌唐憲宗元和十四年憲德王十年己亥七月唐鄆州節度使李師道叛憲宗將兵討之徵兵於羅王王以公命大將軍師甲兵三萬助之勝捷後還鄕號金州逸民
신라 헌덕왕(809~826)때 이찬이었다. 당나라 헌종 원화 14년, 헌덕왕 10년 기해(819)년 7월에 당나라의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이 이를 토벌하고자 신라에 병사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헌덕왕)은 공에게 대장군사로 명하고 갑병 3만명을 주어 당나라를 도와서 이긴 후 귀향하였다. 호는 금주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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雄允(웅윤)
憲康朝人
헌강왕(875~886) 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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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雄元> 子 擎柱(경주) <子 成海, 成岱>
新羅文聖王朝使于唐奏對稱之
配金氏 ○墓无傳
신라 문성왕(839~856)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아뢰고 서로 마주 교지를 전하였다(?). 부인은 김씨이다.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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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擎柱> 子 成海(성해) <子 挺喆>
號海陵先生官都觀郞歷事三朝唐天符間與孤雲崔致遠較才入唐奉勅還朝所撰漁樵子詩集文詞入唐行于世
配張氏 ○墓无傳
호는 해릉선생이고 관직은 도관랑에 이르렀으며 3조를 거쳤다. 당나라의 천부(乾符,874~879 의 誤記)에 최고운(최치원,857~?)과 같이 재능을 견주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칙서를 가지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찬술한 어초자 시집에서 당나라에 들어갔던 사실이 세상에 전한다.
부인은 장씨이다.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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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擎柱> 子 成岱(성대)
憲康朝人 헌강왕(875~886) 때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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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成海> 子 挺喆(정철) <子 琇胤, 玉胤>
定康王時値裔萱之叛公以大摠管禦之而卒
配位與墓所无傳
정강왕(886~887) 때에 견훤(867~935)의 반란을 진압할 때 공이 대총관으로서 방어하다가 죽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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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挺喆> 子 琇胤(수윤) <子 天授, 天與>
號逸休齋官御史中侍郞明朝野大亂公明亮知機退去田里有詩曰今日江湖客當時勇退人壺中一片土閑臥守吾天
配完山郡夫人李氏○墓所无傳
호는 일휴재이고 관직은 어사중 시랑이었다. 분명히 조야(나라)에 큰 난이 일어날 것 같아 공이 그 낌새를 알아채고 시골로 돌아갔다. 전해오는 시가 있으니 ‘오늘 강호의 손님이 당시 과감히 물러나 투호병 속의 한 조각 흙 틈에 누워 우리의 하늘을 지킨다.’고 하였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 이씨이다.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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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挺喆> 子 玉胤(옥윤)
舊本無 구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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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琇胤> 子 天授(천수), 子 商佐(상좌)
號西峯先生仕孝恭王朝梁纂唐公奉使未還而卒
호는 서봉선생이고 효공왕(897~912) 때 벼슬을 지냈다. 양나라가 당나라를 빼앗아 공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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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윤의 子 天與(천여) <子 商補>
官至太保
관직은 태보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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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천수의 子 商佐(상좌)<子 浩>
佐高麗太祖與卜智謙裴玄慶等定鼎松岳爲元勳太祖曰商佐等諸人厚我至此推心任之號以國土
고려 태조를 도와 복지겸, 배현경 등과 같이 송악에 나라를 세우고 원훈이 되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상좌 등 여러 사람들이 두터워 나는 이렇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호를 국토라 하고자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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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의 子 商補(상보)<子 潤>
官小保 벼슬은 소보[1]이다.
[1]小保; 1031년에 제정된 고려 때의 태자부(太子府)의 종2품 벼슬. 곧 태자소부(太子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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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
상좌의 子 浩(호)<子 華齋>
號靑巖翰林知製誥享年一百一歲
호는 청암이고 한림과 지제고를 지냈으며 나이는 10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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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보의 子 潤(윤)<子 泰齋>
有德行不就仕宦 덕행이 있었으며 벼슬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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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호의 子 華齊(화제)<子 振酉>
號月簑累擧不就有詩曰浮世功名奚足取莫如江上擲漁竿月笛烟簑趣物表於今得安閑
호는 월사이다.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전해오는 시에서 말하기를 ‘어지러운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 어찌 족하겠느냐. 이를 취하는 것은 강물위에 잡은 고기를 던져버리는 것만 못하니 피리를 불며 풀을 덮고 적막한 것을 즐기니 오늘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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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 子 泰齊(태제) <子 德裕>
官監務 관직은 감무[1]를 지냈다.
[1]監務; 고려의 예종(1105~1122) 때 제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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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
화제의 子 振酉(진유)<子 承意, 繼意, 追意>
號退休齋高麗光宗時仕至知制誥
호는 퇴휴제이고 고려 광종 때 벼슬은 지제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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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제의 子 德裕(덕유)<子 敬意>
官摠郞 관직은 총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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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
진유의 子 承意(승의)<子 天精>
光宗朝爲御使奉使金陵
광종 때 어사가 되어 사신으로 금릉[1]에 갔다.
[1]金陵; 진(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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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의 子 繼意(계의)<子 淵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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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의 子 追意(추의)<子 澤精>
官中書令 관직은 중서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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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의 子 敬義(경의)<子 益城>
官密直使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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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世
승의의 子 天精(천정)<子 恒齡>
登第重大匡兵部尙書諡文忠公使于契丹請和而還
과거에 합격하여 중대광/병부상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충공이다. 사신으로 거란에 가서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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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의 子 淵精(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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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의 子 漢精(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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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의 子 澤精(택정)<子 德齡>
官侍中 시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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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의 子 益城(익성)<子 華岳>
監務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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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
천정의 子 恒齡(항령)<子 洙聖>
號泰平齋神虎衛上將軍 호는 태평재이며 신호위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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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정의 子 德齡(덕령)<子 潙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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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의 子 華岳(화악)<子 光澤>
官典廐署承 관직은 전구서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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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世
항령의 子 洙聖(수성)<子 商欽, 商賢, 商寅>
重大匡戶部尙書與姜邯贊率師拒女眞
중대광/호부상서를 지냈다. 강감찬(948∼1031)과 같이 장수들을 이끌고 여진의 침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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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령의 子 潙聖(위성)<子 商眞>
奉先庫判官 선고판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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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의 子 光澤(광택)<子 東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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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
수성의 子 商欽(상흠)<子 成雨>
顯宗朝爲大司成上疏封崔致遠爲文昌候配先聖廟後爲金州伯大提學
현종 때에 대사성이 되어 최치원을 문창후에 봉하고 최치원의 부인을 선성묘에 모시라는 상소를 올리고 이후에 금주백 대제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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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의 子 商賢(상현)<子 成洙>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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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의 子 商寅(상인)<子 成泗>
按察使 안찰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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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潙聖>子 商眞(상진)<子 佑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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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澤>子 東燁(동엽)<子 兌一>
官代言 관직은 대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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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世
<商欽>子 成雨(성우)<子 日曙>
號甘霖先生官體察使築界長成
호는 감림선생이고 관직은 체찰사를 지냈고 국경의 장성을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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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賢>子 成洙(성수)<子 萬濟>
平壤君贈左贊 평양군에 봉해졌고 좌찬성[1]에 증직되었다.
1]左贊; 1277년 제정된 좌찬덕(左贊德), 우찬덕(右贊德), 좌찬성(左贊成)은 조선시대 관직명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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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寅>子 成泗(성사)<子 陽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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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眞>子 佑鐸(우탁)<子 碩挺>
官司醞署令 관직은 사온서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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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燁>子 兌一(태일)<子 南赫>
官三司副事 관직은 삼사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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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世
<成雨>子 日曙(일서)<子 匡國>
文宗朝使于潦又使于宋奉年號而歸後爲臨海侯
문종 때에 사신으로 요나라에 갔다 오고 또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연호를 받들고 왔다. 돌아온 후 임해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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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洙>子 萬濟(만제)<子 慶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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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泗>子 陽曙(양서)<子 邦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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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佑鐸> 子 碩挺(석정)<子 啓夏>
官都制庫判官 관직은 도제고판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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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一> 子 南赫(남혁)<子 重鉉>
官侍中 관직은 시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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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世
<日曙>子 匡國(광국)<子 宗栢>
宣宗朝翰林集賢殿太提學 선종 때 한림[1]/집현전태제학을 지냈다.
[1]翰林院;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은 관청. 본래 원봉성(元鳳省)이라 하던 것이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뀌었다가 현종(1010~1031년) 때 다시 한림원으로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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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濟>子 慶雄(경웅)<子 道意>
官監務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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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曙> 子 邦寶(방보)<子 兌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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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挺> 子 啓夏(계하)<子 昌海>
官嘉靖大夫 관직은 가정대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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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赫> 子 重鉉(중현)<子 德相>
進士 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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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世
<匡國> 子 宗栢(종백)<子 繡>
號蘭翁與郭處士輿致仕入山有詩曰江湖一竿翁長釣金水東不量生計薄櫛髮渭陽鼠
호는 란옹이다. 곽처사[1]와 같이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가 살았다. 전해오는 시에서 ‘강호에서 피리를 부는 노인이 긴 낚싯대를 가지고 금수의 동쪽에서 살아가니 생계는 어렵고 머리카락을 빗질하니 쥐구멍에 볕이 든다(?).’하였다.
[1]곽여(郭輿, 1058~1130); 고려 전기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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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雄> 子 道意(도의)<子 夢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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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邦寶> 子 兌顯(태현)<子 一興>
官都觀郞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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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夏> 子 昌海(창해)<子 成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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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鉉> 子 德相(덕상)<子 振溟>
官奉事 관직은 봉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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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世
<宗栢> 子 (繡(수)<子 以琢>
號設門齋高麗仁宗朝討誅逆臣李資謙等又西京守匡叛討平之
호는 설문제이고 고려 인종 때 반역신 이자겸 등을 처벌하였고 또 서경의 수령인 광의 반란을 토벌하고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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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意> 子 夢龜(몽귀) <子 旻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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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顯> 子 一興(일흥) <子 世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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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海> 子 成麗(성려) <子 謜振>
進士 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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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相> 子 振溟(진명)<子 萬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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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世
<繡> 子 以琢(이탁) <子 瑞天>
號淸原毅宗朝仕至侍御史鄭仲夫等作亂大殺朝士橫屍滿澤中公奏請歛屍奸黨惡之竄遂以卒
호는 청원이고 의종(1146~1170) 때에 시어사에 이르렀다. 정중부(1106~1179) 등이 난을 일으켜 조정의 선비들을 많이 죽여 시체가 연못에 가득 차자, 공이 시신을 수습하기를 청하였으나 간당들이 무고한 죄를 씌워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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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龜> 子 旻精(민정) <子 嶠齡>
左軍兵馬使 좌군 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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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興> 子 世煥(세환) <子 泳>
密直使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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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麗> 子 謜(원) <子 重文>
都觀郞 도관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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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振溟> 子 萬雄(만웅) <子 德河>
執義 집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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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二世
<以琢> 子 瑞天(서천) <子 陽喆>
公志於雪讐率家奴等討殺仲夫以復其讎
공이 원수를 갚고자하는 뜻을 가지고 집안의 종들을 데리고 정중부를 토벌하여 원수를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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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旻精> 子 嶠齡(교령) <子 天起>
按察使 안찰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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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煥> 子 泳(영) <子 益成>
兵馬使 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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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謜> 子 重文(중문) <子 守仁>
上將軍 상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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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雄> 子 得河(득하) <子 致仁>
右軍兵馬使 우군명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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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雄> 子 成河(성하) <子 致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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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世
<瑞天> 子 陽喆(양철) <子 是秋>
登第翰林寶文閣大提學平章事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보문관대제학/평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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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嶠齡> 子 天紀(천기) <子 命海>
中書注書 중서주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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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泳> 子 益成(익성) <子 尙慶>
按察使 안찰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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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文> 子 守仁(수인) <子 友珏>
監察 감찰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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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河> 子 致仁(치인) <子 聲玉>
上將軍 상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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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夏> 子 致賢(치현) <子 鳴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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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世
<陽喆> 子 是秋(시추) <子 鎭國, 定國>
登第修文殿太學士 과거에 합격하여 수문전태학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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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紀> 자 命海(명해) <子 重有, 德有>
官司徒 관직은 사도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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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成> 子 尙慶(상경) <子 命虯>
武科主簿 무과에 합격하여 주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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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仁> 子 友珏(우각) <子 命秋>
官太保 태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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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仁> 子 聲玉(성옥) <子 重鎰, 大鎰>
中郞將 중랑장을 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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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賢> 子 鳴玉(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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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世
<是秋> 子 鎭國(진국) <子 奎詳>
號鷲嶺三重大匡禮部尙書
호는 취령이고 삼중대광/예부상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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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秋> 子 定國(정국) <子 奎瑞>
號孤軒官密直提學忠宣朝己未元統一國事不平王與叔昌院妃會于金文衍之家引見諸縉紳曰卿等察時事否公對曰宋朝己亡元兵大肆憂國已長矣以此憤發而卒
호는 고헌이다. 관직은 밀직제학[1]을 지냈다. 충선왕(1308~1312)의 기미(1319)년에 원이 통일하여 나랏일이 불안해 지자 왕이 숙창원비와 김문연[2]의 집에서 회동을 하여 공을 만나보고 여러 신하?(縉紳)들에게 말하기를 ‘경 등이 살펴볼 때 어떠한가?’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송나라 조정은 이미 망하고 원나라 병사가 아주 방자하여 나라가 근심하고 있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하였다. 이로서 분통을 터트리며 죽었다.
[1]密直; 1275년(충렬왕 1년)에 추밀원사를 고쳐 부른 이름.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불렸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또다시 밀직사사로 고쳐짐. 따라서 1362년 이전에는 밀직이라는 벼슬이 없었음.
[2]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의 척신. 본관은 언양.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이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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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海> 子 重有(중유) <子 達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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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海> 子 德有(덕유) <子 彦誠>
官監務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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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慶> 子 命虯(명규) <子 景伯>
監務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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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珏> 子 命秋(명추) <子 時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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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玉> 子 重鎰(중일) <子 尙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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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玉> 子 大鎰(대일) <子 慶三>
二十六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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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國> 子 奎祥(규상) <子 道浹>
號竹塢登第翰林大提學
호는 죽오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대제학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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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國> 子 奎瑞(규서) <子 道洽>
仕至閣老宋亡恥胡元年號棄官還鄕
벼슬은 각로[1]에 이르렀다. 이 때 송나라가 망하여 부끄럽게도 오랑캐인 원나라의 연호를 따르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閣老; 일종의 정승급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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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有> 子 達曙(달서) <子 汝虎>
官知製誥 관직은 지제고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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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有> 子 彦誠(언성) <子 鉉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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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虯> 子 景白(경백) <子 文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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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秋> 子 時元(시원) <子 三擧, 重擧>
監務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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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鎰> 子 尙秋(상추) <子 在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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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鎰> 子 慶三(경삼) <子 相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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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七世
<奎祥> 子 道浹(도협) <子 湯雨>
號白巖年老致仕獎進後學
호는 백암이고 늙어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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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瑞> 子 道洽(도흡) <子 聖雨>
監務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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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瑞> 子 道潤(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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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曙> 子 汝虎(여호) <子 致三>
監務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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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彦誠> 子 鉉祚(현조) <子 元禮>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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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白> 子 文淵(문연) <子 處賢>
上將軍 상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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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元> 子 三擧(삼거) <子 世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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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元> 子 重擧(중거) <子 世明,世煌>
密直使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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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秋> 子 在行(재행) <子 鼎夏,鼎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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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三> 子 相恂(상순) <子 成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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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八世
<道浹> 子 湯雨(탕우) <子 萬瑞>
道學高明職在判察
도학에 밝았고 직책은 판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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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洽> 子 聖雨(성우) <子 萬詳>
官密直使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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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虎> 子 致三(치삼) <子 鎭兌>
官司議 관직은 사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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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祚> 子 元禮(원례) <子 世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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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淵> 子 處賢(처현) <子 守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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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擧> 子 世彰(세창) <子 兌豪>
都觀郞 도관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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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擧> 子 世明(세명) <子 兌起>
官奉禮 관직은 봉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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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擧> 子 世煌(세황) <子 兌精,兌憲>
按察使 안찰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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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行> 子 鼎夏(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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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行> 子 鼎禹(정우) <子 淸輿>
仍朝野亂入智異而卒 계속해서 조야가 시끄러워 지리산에 들어가 살다가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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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恂> 子 成八(성팔) <子 處海>
進士 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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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九世
<湯雨> 子 萬瑞(만서) <子 師孟>
同知密直使 동지밀직사[1]를 지냈다.
[1]密直司使; 1275년(충렬왕 1년)에 추밀원사를 고쳐 부른 이름.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불렸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또다시 밀직사사로 고쳐짐. 따라서 유탁의 이전에는 밀직사라는 벼슬이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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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雨> 子 萬祥(만상) <子 麗精>
忠穆朝以門下侍郞 충목왕(1344~1348)때 문하시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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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雨> 子 萬裕(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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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三> 子 鎭兌(진태) <子 秀垕>
官密直使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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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禮> 子 世綱(세강) <子 首行>
官直提學 관직은 직제학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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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賢> 子 守澤(수택) <子 世徵>
進士 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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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彰> 子 兌豪(태호) <子 德禧>
密直使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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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明> 子 兌起(태기)<子 麟禧>
同中樞 동중추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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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煌> 子 兌精(태정) <子 鳳輝>
右軍兵馬使 우군 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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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煌> 子 兌憲(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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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禹> 子 淸輿(청여) <子 虯瑞>
執事侍郞 집사시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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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八> 子 處海(처해) <子 永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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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世
<萬瑞> 子 師孟(사맹) <子 相宙>
登第修文殿大提學忠烈朝元招東國諸賢應擧故對策以還
과거에 합격하여 수문전대제학을 지냈다. 충렬왕(1274~1308)때 원나라에서 동국제현을 초대하여 과거에 응시하라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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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詳> 子 麗精(여정) <子 益遜. 龜年>
恭愍朝元招東國諸賢應擧對策奏賜賞而歸
공민왕 때에 원나라가 동국제현을 초대하여 과거에 응시하라하자 대책을 마련하고 아뢰니 상을 받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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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兌> 子 秀垕(수후) <子 元玉>
同正 동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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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綱> 子 首行(수행) <子 在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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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綱> 子 元行(원행) <子 孝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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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澤> 子 世徵(세징) <子 夏成>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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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豪> 子 德禧(덕희) <子 遇秋>
奉常大夫三司副事 봉상대부로서 삼사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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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起> 子 麟輝(인휘) <子 性弘>
按撫使 안무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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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精> 子 鳳輝(봉휘) <子 性大>
諫議大夫 간의대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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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汝> 子 虯瑞(규서) <子 挺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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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海> 子 영창(永昌) <子 熙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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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一世
<師孟> 子 相宙(상주) <子 邦直>
號竹峯先生仕閣老宋恭帝德祐元年乙亥忠烈王命公使一國禁白衣稱旨戊寅又命公令國內剃頭服元衣冠公極諫
配通義郡夫人羅氏父平章事文玉
호는 죽봉선생이다. 벼슬은 각로에 이르렀다. 송나라 공제(1274~1275)의 덕우원년 을해(1275)년에 충렬왕(1274~1308)이 공에게 나라안에 흰옷을 입는 것을 금하게 하라고 교지를 내렸고, 무인(1278)년에 또 공에게 나라안에 머리를 깎게 하고(변발[1]) 복장을 원나라와 같은 의관으로 하라고 명하자, 공이 극력 간언하였다. 부인은 통의군부인 라씨로서 평장사[2]를 지낸 라문옥의 따님이다.
[1]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당시 원을 다녀올 때 변발호복(辯髮胡服)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는 영(令)을 내려 모두 몽고의 의복과 개체변발(開剃辯髮)을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원하는 일부 지식층만이 호응하였을 뿐 일반 국민 모두가 따르지는 않았다.
[2]平章事; 성종(982~907년) 때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두었던 것을 1275년(충렬왕 1년)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고쳤고 1298년(충렬왕 24년)에 폐지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년)에 다시 내오면서 찬성사(贊成事)라 하였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평장사(平章事)로 바뀜. 따라서 1275년부터 1308년 사이에는 평장사란 벼슬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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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精> 子 益遜(익손) <子 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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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精> 子 龜年(귀년) <子 修德>
官密直使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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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垕> 子 元玉(원옥) <子 夏器>
禮賓郞 예빈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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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行> 子 在道(재도) <子 元錫>
上將軍 상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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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行> 子 孝錫(효석) <子 奇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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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徵> 子 夏成(하성) <子 允秋>
監務 감무를 지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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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禧> 子 遇秋(우추) <子 東寶>
官獻納 관은 헌납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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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輝> 子 性弘(성홍) <子 道彬>
官同正 관직은 동정[1]을 지냈다.
[1]동정이라는 것은 관직명 뒤에 붙어서 임시직을 나타내므로 동정이라는 관직은 있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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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輝> 子 性大(성대) <子 信彬>
都制庫判官 도제고판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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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虯瑞> 子 挺寶(정보) <子 文孝>
執義 집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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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昌> 子 熙成(희성) <子 洙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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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世
<相宙> 子 邦直(방직) <子 益銛>
重大匡吏部尙書忠肅王朝追封金紫光祿大夫特進上柱國中書省
중대광/이부상서를 지냈다. 충숙왕(1313~1330, 1332~1339)때에 금자광록대부[1]에 추봉되고 상주국 우문중서성에 특진되었다.
[1]金紫光祿大夫; 문종(1047~1083년)때 제정되어 1275년(충렬왕 1년)에 폐지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설치되고 종1품의 윗자리로 올랐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폐지됨. 따라서 1275년부터 1356년 사이에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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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宙> 子 龍直(용직) <子 管>
官舍人 관직은 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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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遜> 子 菫(근)
官侍中 子孫居靈山謂之知制誥公派
관직은 시중을 지냈고 자손은 영산에 살고 있으며 지제고공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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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年> 子 修德(수덕) <子 自玉>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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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玉> 子 夏器(하기) <子 再伯>
登第知制誥 과거에 합격하여 지제고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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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道> 子 元錫(원석) <子 禹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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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錫> 子 奇孫(기손) <子 汝龍, 汝鳳, 汝麟, 汝龜>
諸陵署令 제릉서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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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成> 子 允秋(윤추) <子 德淵>
都觀郞 도관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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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秋> 子 東寶(동보) <子 執一>
侍中 시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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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弘> 子 道彬(도빈) <子 以潝>
進士 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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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大> 子 信彬(신빈) <子 以濂, 以學>
禮儀判書 예의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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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挺寶> 子 文孝(문효) <子 得重>
兵馬使 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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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成> 子 洙亮(수량) <子 敬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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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三世
<邦直> 子 익섬(益銛) <子 柱國>
上將軍 상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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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直> 子 管(관)
版圖判書 판도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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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德> 子 自玉(자옥) <子 有燦, 有煥, 有煜, 有潤>
官副事 관직은 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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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器> 子 再佰(재백) <子 龜瑞, 龍瑞, 麒瑞, 麟瑞>
都制庫判官 도제고판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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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錫> 子 禹鼎(우정) <子 得洄>
監務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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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龍(여룡)
按察使 안찰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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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鳳(여봉)
都評議事 도평의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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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麟(여린)
開城判官 개성판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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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龜(여귀) <子 王貞>
司醞署令同正 사온서령[1]동정[2]을 지냈다.
[1]司醞署; 궁궐 안에서 쓰는 술을 만들고 보관하는 일을 맡은 관청.
[2]同正; 실제 근무하는 벼슬이 아닌 정원외에 주는 명예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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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秋> 子 得淵(득연) <子 台珣>
進士 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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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寶> 子 執一(집일) <子 義哲>
按廉使 안렴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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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彬> 子 以潝(이흡) <子 國瑞>
典理判書 전리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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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彬> 子 以濂(이렴) <子 華玉>
東部參奉 동부참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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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彬> 子 以學(이학) <子 敬玉, 敬臣, 敬輔>
典理判書 전리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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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孝> 子 得重(득중) <子 漢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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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亮> 子 敬文(경문) <子 宇賢, 宙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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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四世
<益銛> 子 주국(柱國) <有三人晢卿牧卿益卿云>
登第大提學知制誥 贈尙書省左僕射
과거에 합격하여 대제학/지제고를 지냈고 상서성 좌복야에 증직되었다.
<有三人晢卿牧卿益卿云 아들 3명이 있었는데 절경/목경/익경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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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玉> 子 有燦(유찬) <子 世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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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玉> 子 有煥(유환) <子 之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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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玉> 子 有煜(유욱) <子 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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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玉> 子 有潤(유윤) <子 尙恭>
麗朝都事 고려시대에 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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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伯> 子 龜瑞(귀서) <子 不比>
密直提學 밀직제학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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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鼎> 子 得洄(득회) <子 一麗>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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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龜> 子 王貞(정) <子 以鐸, 以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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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淵> 子 台珣(태순) <子 彦孝, 芸>
上護軍 상호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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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一> 子 義哲(의철) <子 萬球, 萬珹. 萬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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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洽> 子 國瑞(국서) <子 文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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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濂> 子 華玉(화옥) <子 海柱>
奉靖大夫 봉정대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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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濂> 子 衡玉(형옥) <子 灝>
參奉 참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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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濂> 子 泰玉(태옥) <子 得海, 得河>
參奉 참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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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學> 子 敬玉(경옥)
密直提學 밀직제학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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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學> 子 敬臣(경신) <子 元鉉>
都摠管子孫居金海退隱 도총관을 지냈고 자손은 김해퇴은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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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學> 子 敬輔(경보) <子 元邦>
漢城判尹 配位及墓失傳 한성판윤을 지냈다. 배위와 묘소는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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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重> 子 漢成(한성) <子 擇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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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文> 子 宇賢(우현) <子 德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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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文> 子 宙賢(주현) <子 仁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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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五世
<柱國> 有子三人晢卿牧卿益卿云
아들 3명이 있었는데 절경/목경/익경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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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燦> 子 世傑(세걸) <子 履徵>
都事 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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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燦> 子 之瑞(지서)
承仕郞 子孫居慶州 승사랑을 지냈고 자손들이 경주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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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煜> 子 平(평)
書雲副正 子孫居龍岡 서운부정을 지냈고 자손들이 용강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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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潤> 子 尙恭(상공) <子 添劍>
官都事 관직은 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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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五世
<龜瑞> 子 不比(불비)
版圖判書 子孫居金山新村 판도판서를 지냈다. 자손들이 금산 신촌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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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洄> 子 一麗(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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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貞> 子 以鐸(이탁) <子 德寬>
<王貞> 子 以璋(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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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五世
<義明> 子 彦孝(언효) <子 宗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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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明> 子 芸(운)
開城留守 子孫居淸河蘇洞 개성유수를 지냈고 자손들이 청하의 소동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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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哲> 子 萬球(만구) <子 元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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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哲> 子 萬珹(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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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哲> 子 萬玉(만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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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瑞> 子 文翊(문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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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玉> 子 海柱(해주) <子 麗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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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衡玉> 子 天柱(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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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玉> 子 得海(득해) <子 漪柱, 澤柱>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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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玉> 子 得河(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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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臣> 子 元鉉(원현)
子孫居金海 자손들이 김해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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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輔> 子 元邦(원방)<子 友陽>
府尹 配位及墓失傳 부윤을 지냈다. 배위 및 묘소는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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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成> 子 擇謙(택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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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賢> 子 德休(덕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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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宙賢> 子 仁源(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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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六世
<世傑> 子 履徵(이징)
監務 감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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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恭> 子 添劍(첨검)
版圖判書 子孫居開城 판도판서를 지냈다. 자손들이 개성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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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鐸> 子 德寬(덕관) <子 奇玉>
參議 참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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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彦孝> 子 宗厚(종후) <子 希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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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球> 子 元碩(원석) <子 永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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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珹> 子 貞碩(정석) <子 元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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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柱> 子 려택(麗澤)
直提學 직제학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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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海> 子 漪柱(의주) <子 益謹>
密直使 밀직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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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海> 子 澤柱(택주) <子 益愼, 益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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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邦> 子 友陽(우양)
郡守 配位及墓失傳 군수를 지냈다. 배위와 묘소는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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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七世
<德寬> 子 奇玉(기옥) <子 國重, 國安. 國興>
樞密院事 추밀원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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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厚> 子 希旻(희민) <子 萬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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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碩> 子 永顯(영현) <子 聖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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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漪柱> 子 益謹(익근) <子 碩孫>
注書 주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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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澤柱> 子 益愼(익신) <子 天輿>
=====
<澤柱> 子 益誠(익성) <子 運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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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八世
<奇玉> 子 國重(국중) <子 用萬>
=====
<奇玉> 子 國安(국안) <子 用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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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玉> 子 國興(국흥) <子 用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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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旻> 子 萬鎰(만일) <子 應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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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顯> 子 聖薰(성훈) <子 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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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謹> 子 碩孫(석손) <子 世章>
東北巡撫使 동북순무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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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愼> 子 天輿(천여) <子 起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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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誠> 子 運輿(운여) <子 萬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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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九世
<國重> 子 用萬(용만) <子 乙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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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安> 子 用汝(용여) <子 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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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興> 子 用光(용광) <子 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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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鑑> 子 應玉(응옥) <子 榮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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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薰> 子 鎬(호) <子 克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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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孫> 子 世章(세장) <子 琢, 瑾, 王寬, 球, 璉, 現, 琥>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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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輿> 子 起酉(기유) <子 龍瑞, 麟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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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輿> 子 萬壽(만수) <子 義祚, 德祚, 賢祚>
門下侍中 문하시중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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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世
<用萬> 子 乙棟(을동)
子孫居慶州上薪 자손들이 경주의 상신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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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汝> 子 慶(경)
子孫居慶州蔚山 자손들이 경주와 울산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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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光> 子 虔(건)
子孫居慶州末方 자손들이 경주의 말방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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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玉> 子 榮國(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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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鎬> 子 克胤(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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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章> 子 琢(탁); 文敬公 子孫居羅州 문경공으로서 자손들이 나주에 산다
子 瑾(근); 府使公 子孫居 부사공으로서 자손들이 산다.
子 王寬(관); 翰林公 子孫居長興 한림공으로 자손들이 장흥에 산다.
子 球(구); 忠靖公 子孫居羅州 충정공으로 자손들이 나주에 산다.
子 璉(연); 龍巖公 子孫居靈岩 용암공으로 자손들이 영암에 산다.
子 現(현); 崇祿公 子孫居晋州興德 숭록공으로 자손들이 진주. 흥덕에 산다.
子 琥(호); 休隱公 子孫居綾州井邑 휴은공으로 자손들이 능주. 정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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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酉> 子 龍瑞(용서)
子 麟瑞(인서)
子孫居密陽 자손들이 밀양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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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壽> 子 인(璘)
都事 子孫居臨陂古阜
도사를 지냈고 자손들이 임피.고부에 산다.
<1924年甲子譜附正德舊譜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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