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베이다팡정의 대부 왕쉬안
왕쉬안은 상하이 출신으로 베이징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부친은 국제무역을 담당하는 고급 공무원이었다.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그는 4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니면서 성장했다. 고향 상하이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그는 베이징대학 수학과에 진학했다. 베이징대학 수학과는 중국에서도 수재들만 모이는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도 항상 1등이었다. 그 무렵 베이징대학 수학과에서는 수학, 역학, 계산수학 등 세 부분의 공부가 주였다. 당시의 풍조는 우등생들은 수학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수학의 정통성을 잇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쉬안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학문인 계산수학을 택했다. 그가 계산수학을 택한 것은 컴퓨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당시에 컴퓨터는 생소한 학문이었다. 그는 첸쉐썬이 쓴 <컴퓨터와 우주공학> 후스화사 쓴 <컴퓨터와 국방공업> 같은 새로운 논문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6. 레이저 한자 사식시스템인 ‘화광’의 개발과정
1975년 중국 국가계획위원회 산하의 "748공정" 팀은 한자를 오랜 활판 인쇄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세 가지 중점사업을 추진했다.
첫째는 한자 사진식자 시스템이었다. 즉 과거처럼 한자가 새겨진 납 활자를 하나하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쳐서 인쇄용 필름으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는 한자 정보검색시스템, 즉 5만자나 되는 한자를 찾아낼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든다.
셋째는 한자 통신 시스템과 한자 단말 시스템으로 한자를 명령어로 쓸 수 있는 시스템과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정보센터인 단말 시스템을 개발한다.
그러나 완쉬안은 748공정 팀에 끼지 못했다. 그는 베이징대학에서 그의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를 해나갔다. 그가 착수한 것은 748공정 팀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한자 사진식자시스템이었다. 그가 맡은 한자 사진식자시스템이란 타자기에 카메라를 단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 무렵 중국 내에서는 748공정 팀 이외에도 왕쉬안팀, 중국 과학 연구소 팀 등 5개 팀이 그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다른 연구소의 과학자들도 그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먼저 그 시스템을 개발해내느냐" 경쟁은 치열해졌다. 왕쉬안도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77년 말 베이징대학의 저우페이위안 학장은 궈핑신 국장과 신화사 및 베이징의 각 신문사 책임자를 베이징대학 실험실에 초대, 왕쉬안과 진부인이 개발한 한자 사식소프트웨어 시스템의 실연을 열었다. 내빈들은 손에 고배율렌즈를 들고 출력된 네거 필름을 흥미롭게 보았다. 필름에 나타난 것은 산수화도 영화배우의 사진도 아니었다. 한 줄의 양(羊)이라는 문자뿐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석처럼 그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필름에 나타난 단정하고 아름다운 羊이라는 서체였다.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첫째 문자의 실연은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일단 첫 실험은 성공했다.
다음 목표는 내거필름을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는 출력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최대의 싸움이었다. 1978년 왕쉬안은 모든 시간을 이론 설계와 시스템설계에 쏟아 부었다. 사식제어기는 합해서 20매의 제어 패널이 필요했다. 왕쉬안은 그중 절반을 맡아서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1979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선언했다. 중국에도 해외로부터의 부품 수입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전까지는 대규모의 집적회로가 없었기 때문에 28매의 대 프린트 배선판은 소규모의 집적회로를 채용했고 기억장치(메모리)도 효율이 낮은 것들뿐이었다. 왕쉬안은 뒤늦게나마 선진국의 부품을 가져다 조립했다.
그때 놀라운 뉴스가 발생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모노타이프사가 한자 조판기능을 개발했다며 상하이에서 전시회를 가진 것이었다. 선수를 뺏긴 것이었다. 왕쉬안은 상하이로 달려갔다. 거기서 모노타이프사의 제품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서로 장단점이 있었다. "그들은 장점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장점이 있다." 왕쉬안이 내린 결론이었다.
왕쉬안은 한자의 깊은 뜻은 오직 중국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어서 한자의 인쇄기술을 중국인이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영문 사식시스템은 26자의 영어 알파벳만 가지고도 표현이 가능한 것이지만 많은 양과 복잡한 형을 가지고 있는 한자는 중국인만이 그 의미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자를 잘 모르는 영국인이 먼저 한자 조판기능을 개발해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왕쉬안과 스태프들은 자극을 받아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왕쉬안은 드디어 한자 조판기능을 가진 인쇄 출력기를 개발했고, 3개월간의 악전고투 끝에 기계의 조정을 완료했다. 7월 27일 아침, 베이징대학의 한자 데이터처리 기술 연구실에서는 긴장감이 돌았다. 조용한 실내에서는 오직 키보드 치는 소리뿐이었다. 연구원은 인쇄 출력기를 가동했고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레이저 사식기로부터 1장의 B5 신문 필름이 출력되었다. 왕쉬안은 필름 속의 문자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신문 견본쇄가 인쇄한 B5 소형 신문에는 한자정보처리라는 여섯 개의 문자가 큰 서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크고 작은 10종류의 세체가 나란히 장식되어 있었다. 한자 편집 조판시스템의 첫 작품이었다. 인쇄면은 아름다웠다. 이 B5 신문은 베이징대학이 개발한 한자 정밀시스템의 주요 공정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 소형 신문은 베이징 거리를 진동시켰다.
<<광명일보>>는 이 소식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중국 내의 인쇄업계에서도 칭찬하는 소리가 높았다. 해외의 기업들은 조심스럽게 그 개발제품의 상업성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왕쉬안의 개발완료 소식에 가장 놀란 것은 영국의 모노타이프사였다. 그들은 9월 8일 상하이에서 이미지 세트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1980년대 초 레이저 한자 편집조판시스템의 본체에 이어서 한자 단말 교정시스템의 개발이 성공했다. 그것은 레이저 사식 시스템의 중요 부분으로서 한자 디스플레이, 한자 키보드, 한자문자 창고, 단말 제어기 등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획기적인 한자 기술혁명으로 베이징대학의 무명의 젊은 조교수는 일약 유명해지게 되었다. 왕쉬안의 발명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의 한자는 불가사의한 기능과 생명력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과시했다. 이 한자 레이저 사식시스템은 "화광"시스템 이라 명명되었다.
1981년 7월 중국 최초의 컴퓨터 레이저 한자편집 조판 시스템의 시작품, "화광1형"은 교육부와 중국컴퓨터 공업총국 부클래스의 심사를 통과했다. 당시 평가회는 "화광1형"이야말로 세계의 첨단기술을 리드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75년 5월부터 81년까지 6년간 침식을 잊고 노력한 결과였다.
다시 2년간 보강작업이 이루어졌다. 1983년 여름 "화광2형"의 개발에 성공, 신화사통신이 우선 그 방식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화광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신화사통신은 1985년 2월 1일부터 "화광2형" 레이저 한자 편집시스템을 연속 운행하고 <<신화사신문고>>와 <<전진보>>를 인쇄했다. 4대의 조판 단말기가 원고를 교정하고 단지 몇 사람이 14만자에 달하는 일간신문을 제작할 수 있었다.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1985년 5월 국가경제위원회는 중국의 컴퓨터업계, 신문계, 출판계의 전문가 100여명이 모인 평가회를 개최했다. 왕쉬안은 결점을 보강한 신형 "신화2형 컴퓨터 레이저 한자 편집 시스템"을 보냈다. "신화2형"은 다시 한 번 엄격한 테스트를 받았다. 평가회는 "신화2형"이야말로 중국이 개발한 세계 첨단수준의 중요 과학연구 프로젝트임을 선언했다. 중국 인쇄기술 발전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국의 각 보도기관은 이 중대 뉴스를 보도하고 "화광2형 시스템"이 정식으로 수주 생산체제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활판인쇄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린 보도였다.
7. 중국의 싱크탱크라 불리는 ‘중관춘’
중관춘에는 현재 68개의 대학과 213개에 달하는 연구소가 들어와 있고 롄샹, 베이다팡정, 칭화퉁팡 등 8600개 기업이 있다. 이 중 중국의 이과 명문인 칭화대가 창업한 기업만도 200여개에 달한다.
근래에는 미국의 IBM, GE, 일본의 미쓰비시 등 세계적인 기업들도 130여개나 들어왔다. 가히 첨단 하이테크산업의 세계적인 메카로 떠오른 것이다. 중국정부도 중관춘 발전을 위해 2009년까지 28조원을 투자, 이곳을 세계적인 첨단산업단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에 찬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중관춘 기업들이 2000년도 총매출은 24조원으로 주로 컴퓨터 제조와 소프트웨어 개발로 벌어들인 돈이다. 데스크톱 PC의 제조와 판매, 노트북, IC, IP카드는 물론 전자상거래, 솔루션 등 첨단 소프트웨어의 개발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연간 24조원의 돈이 모이다 보니 중관춘에는 머리가 우수한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능력만 있으면 일확천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관춘에서는 억만장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중국 최고의 인터넷망인 시나닷컴의 왕즈둥이나 왕이닷컴의 딩레이, 소후닷컴의 장차오양, 8848닷컴의 왕쥔타오 등이 그런 경우다. 이 중에 딩레이는 2000년도 중국 부호 순위 20위로 개인 자산이 1억3400만달러나 되었다. 불과 29세의 나이에 머리 하나만 가지고 중국의 억만장자 순위에 든 것이다. 왕즈둥이나 장차오양, 왕쥔타오 역시 비슷한 경우이다. 이들은 모두 중관춘에서 터를 잡아 억만장자로 일어선 경우다.
근래에는 조선족 출신 벤처 기업가들이 500여명이 중관춘에 대거 진출,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터넷 서비스업체 "Z시대"의 이승옥, 전자상거래 전문 업체인 이허왕의 한문, 민안컨설팅의 박대호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안철수연구소가 중관춘에 진출했고, e삼성, SK글로벌 등이 현지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펼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런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중국정부 당국이 1980년대 초반부터 개인기업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 후 16년이 지난 2001년 중국의 개인기업 수는 무려 2900만개에 달하고, 민간기업도 980만개나 된다. 여기에 종사하는 인구만도 1억6000만명이다. 이들은 중국 국내 총생산의 60%, 수출의 50%를 담당하면서 중국의 고도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이런 상황을 간파하여 2001년 7월 1일 장쩌민 주석이 이른바 "7.1담화"를 발표했다. "7.1담화"의 골자는 기업가들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그간 중국 정부는 오토바이 생산부문의 세계 1위인 춘란그룹의 총재 타오젠싱 등의 극소수 자본가를 제외하고는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지 않았다. 보수파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중국의 기업가들은 법률적으로는 사유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 중국이 복잡한 점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민간기업이 분명 존재하고 있고, 국가 이익창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장쩌민 주석의 "7.1담화"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1978년 덩샤오핑이 중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제일 먼저 불러올린 인물이 상하이 제일의 자본가 룽이런임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전혀 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룽이런은 덩샤오핑의 지시에 의해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를 설립했고 그것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에 뛰어든다는 신호탄이었다. 그 회사는 오늘날까지 홍콩 증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고 있다.
장쩌민의 7.1담화가 발표된 몇 달 후인 11월 28일 선전시에서는 "중국 민간경제논단"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돤융지 총재를 비롯한 중국을 대표하는 민간기업가 100여명과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인 후치리 등 중국정부 당국자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돤융지 총재는 기업가들을 대표해서 장쩌민의 7.1담화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한편, "중국 민간기업 선언문"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민간기업은 중국경제의 첨병으로 국유기업 근로자 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출구이므로 중국정부 당국은 민간기업들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사유재산 보호를 위한 개헌이었다. 기업가에게 중국공산당 입당이 허용되고 사유재산 보호를 위한 헌법개정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돤융지가 중국의 민간기업가들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8. ‘중국국제투자신탁공사(CITIC)’ - 중국 정부의 금융 대외창구
1) 1979년 개혁개방의 첫 케이스 1979년 덩샤오핑은 중국을 개혁개방하기로 결심하고 그 시범케이스로 룽이런을 불러 북경으로 불러올린다. 개혁개방의 골자는 중국 인민의 굶주림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서양의 자본과 신기술을 끌어들여 한시바삐 중국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자본을 들여오기 위해서 덩샤오핑은 "죽의 장막"을 걷고 중국이 진정한 개혁개방에 나섰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덩샤오핑이 그를 제일 먼저 부른 것은 중국의 경제인 중에서도 그가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이었다.
룽이런의 집안은 3대에 걸쳐 기업을 이끌어 오면서 경영이 무엇인지를 체득했다. 또 뛰어난 상술을 가지고 상당한 부를 축적해본 경험이 있었고, 일찍이 영어에 눈이 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화교계에도 발이 넓어 그가 움직이면 화교계가 들썩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문호개방에 그보다 더 나은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해서 룽이런에게 시범을 설립하여 운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한 배경하에 1979년 10월 4일 룽이런은 자본금 3억위안, 직원 30명으로 중국국제투자신탁회사를 상하이에 설립한 뒤 스스로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서방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중국 자신도 개혁개방에 나선 것이다. 이것이 개방화된 중국 최초의 민영기업이자 개혁개방의 시범 케이스 1호 회사였다.
화교 재벌과도 친교가 깊은 룽이런은 화교자본을 끌어들여 덩샤오핑의 기대대로 그 후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면서 국제투자신탁회사를 중국 제일의 금융회사로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국제투자신탁의 출발이다.
2) 조부 때부터 재산형성 룽이런은 1916년 생으로 본래 고향은 장쑤성의 우시이다. 상하이에서 서쪽으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곳은 중국의 화둥지방으로 상하이 인근인데 예부터 상인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상하이 상인들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들이 놀란다"고 할 정도로 화둥지방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고, 부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곳 사람들은 첫인사가 "돈 많이 벌었느냐"일 정도로 경제에 민감하다. 베이징 사람들은 돈보다는 권력이 있는 귀족이 되고 싶어 하지만 상하이 사람들은 귀족보다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베이징 사람들은 산보를 가도 한적한 숲길이나 물가를 찾는 데 비해 상하이 사람들은 거리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길 좋아한다. 말하자면 뭐 돈 좀 벌 거리가 없나 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이걸 상하이 말로 당마루라고 한다. 그만큼 실용적이다. 상하이 사람들은 세상 이치에 밝고 처세가 매끄러우며 여러 얼굴을 지녔고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스타일로 꼽힌다. 말하자면 이재에 밝은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있는 것이다.
본래 상하이라는 도시의 이름 자체가 "돈 벌러 바다로 나아가자"는 뜻이다. 상하이 인근의 닝보 사람들은 이미 고려시대 때 개성 상인들과 거래했을 정도로 일찍이 상술에 밝았다. 그런 연유로 상하이 사람들은 예로부터 중국의 거부들을 많이 배출했다. 1860년대 중국 남부의 돈을 몽땅 쓸어 담았다는 거부 후쉐옌이나 무빙위안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우시가 고향이었던 룽이런 가문도 그 부류이다. 룽이런 가문은 이미 그의 조부인 룽시타이 때에 운송업으로 어느 정도 재산을 축적했으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두 아들 룽더성(루이런의 아버지)과 룽중징(룽이런의 백부)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형인 룽더성이 14세, 동생인 륭중징이 12세 되던 해에 인근의 대도시 상하이로 나갔다.
전당포를 차리고, 밀가루 공장을 세웠고, 면사공장을 세워서 나날이 번창했다. 두 형제는 밀가루대왕이라는 별명 외에 "면사대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다. 일본군에 의해 공장이 폭격되고 남경까지 내려온 일본군은 두 형제의 공장을 접수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것이다. 이 와중에서 형 룽중징은 홍콩으로 피신했으나 그 이듬해 현지에서 사망하고 동생이 혼자 고향을 지켰다.
3) 룽씨 가문의 차세대 주자 룽이런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동생 룽더성은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폐허가 된 밀가루공장의 재건에 나섰다. 영국에서 새로 기계를 도입하여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장을 만들었다. 방직공장도 다시 가동시켰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점심 먹고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30분이었다. 근무시간 중에 화장실에 갔다가는 지배인에게 몽둥이로 맞기 일쑤였다. 가혹한 조건 속에 공장은 다시 돌아갔다.
이때 룽이런은 29세였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시작했다. 우선 상하이 삼신은행과 함풍기업 사장에 취임해서 직접 경영일선에 나섰다. 그 후 몇 년간 룽이런은 성공적으로 기업을 운영해 나갔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호사를 했다. 자동차는 미제 세단인 뷰익을 타고 다녔고, 상하이의 대저택에는 중국요리와 서양요리를 맡은 주방장이 따로 있었으며, 집안 곳곳에는 골동품과 유명화가의 그림들이 즐비했다.
1949년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자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공산당 정부는 모든 사유재산을 압류했다. 1953년 중국 공산당은 룽이런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개인재산을 허용하지 않는 공산당정부의 방침 때문이었다.
1957년 41세의 나이로 그는 마오쩌둥의 특별지시로 상하이 부시장이 되었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섰을 때 홍콩으로 피신하지 않고 고향에 남았다는 것이 공산당 정부에 의해 인정을 받은 것이다. 아울러 기업을 경영해 본 경력도 참조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불었다. 문화대혁명은 경제정책에 실패한 마오쩌둥이 실각 위기를 느끼자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감행한 일종의 정치 극이었다. 이때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자, 경제인들이 대거 실각했다. 2000만명이 정신개조를 위해 도시에서 농촌으로 하방되었다. 룽이런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93년 3월 7일 룽이런은 제8기 전국인민대회에서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제7기에 부주석으로 선출된 사람은 왕전이었다. 사이좋게 부주석자리를 승계한 셈이다. 중국국제투자신탁회사를 그의 자식들이 힘을 합쳐 끌고나가듯이 두 집안은 정치적으로도 동지인 셈이다.
전인대에서 장쩌민 국가 주석은 "북경중신사장이자 백만장자인 룽이런을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한 것은 중국 영도자들이 전 세계를 향한 변함없는 시장개혁 정책을 밀고 나갈 것임을 널리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룽이런의 공로에 대한 인정이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 당시 홍콩 영국총독부에서 거행된 반환 식에는 영국을 대표해서 찰스 황태자가 참석했고, 그의 옆에는 룽이런이 부주석 자격으로 첸치셴 외교부장과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