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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빛의 창조
2016년 12월 28일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방영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3-5)]
지금 4번째 시간인데 이제 첫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뭐를 했습니까? 첫 번째 시간에는 성경은 성사이다. 성사는 성체성사를 생각하면 됩니다. 성사는 믿음이 있어야 보인다. 성체는 믿음이 있어야 아, 저것이 예수님의 몸이구나 하고 보이는 것처럼 성경도 자신들이 믿는 믿음으로 해석합니다. 즉 유다인은 유다인 나름으로 해석하고 개신교는 개신교식으로 해석하고 우리는 우리 믿음 안에서 해석한다고 그랬습니다. 저희들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해석에 의해서 모두 그것만은 아니지만 제가 성경도 하고 교의 신학도 했기 때문에 특별히 교의 신학적인 교회 가르침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창세기 1장 1절에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거기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된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지를 발견해내지 않으면 그냥 윤리책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하느님 땅은 인간인데 인간이 하느님께 불순종해서 처음의 하늘과 땅의 그 질서 창조는 이제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새 하늘은 예수님, 요한 묵시록에 하느님의 어린양, 새 땅은 천상 예루살렘 교회 바로 여러분입니다. 교회와 한 몸이 되어서 혼인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여러분은 혼인한 사이 『그리스도는 교회의 하늘이자 신랑』 2절은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인간들은 땅인데, 우리들은 처음에 태어날 때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누구든지 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냥 꼴을 갖추지 못한 채 살다가 그냥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꼴을 갖추지 못한 인간은 요한복음에 전형으로 나오는 사람으로 눈을 갖지 못하고 형체도 없이 텅 빈 채로 태어난 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더니, 물이 있었고 그 위에 영이 떠돌고 있었다. 물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아시게 됩니다. 물속에 나 자신을 죽이고, 파라오의 군대가 물속에 빠져죽은 것처럼, 그다음에 다시 나와서 성령님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생 소경을 고쳐주시다(요한 9,1-12 참조). 진흙으로 눈을 만들어주시는 것도 창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완전하게 태어난 우리를 세례를 통해 완전하게 해주신다』
물속에서 나 자신을 죽이고 다시 올라와서 영을 받는 것을 교부들은 모두 세례로 해석을 합니다.
질문 : 성경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성경 공부를 하면서 이번에 신부님과 함께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전에 제가 알고 있던 내용과는 많이 다르며, 신부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교부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알려주시는데 이러한 성경 공부를 왜 이제야 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참 궁금합니다.
답 : 네, 각자가 공부한 것을 각자의 시각대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구약 시편의 논문을 썼는데, 거기에서 분명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하고 또 성모님을 모델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성경 내에서 그렇게 막 나가면 ‘이것은 학문이 아니다.’ 라는 것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학문이 ‘교의 따로 성경 따로’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이렇게 범위를 넘나들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은 교의를 좀 잘 모르고 교의 신학하시는 분들은 성경에 대해서 모르고, ‘칼 라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칼 라너의 두꺼운 책을 보면 성경을 인용한 것은 한 두 군데 밖에 안됩니다. 모두 사변적인 것으로 서로서로가 통교가 안됩니다. 예전에는 토마스아퀴나스 때는 성경을 모두 공부하고 교의도 모두 공부하고 그래서 서로서로 통합이 되는 것으로 그래서 조금 더 편안하게 이해가 되었다는 이러한 내용도 나중에 나올 것입니다.
야곱이 누구누구와 혼인을 합니까? 레아와 라헬하고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헬을 좋아했으나 레아를 거치지 않고서는 라헬과 혼인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사실 둘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은 많이 단절되어 있고, 성탄 때 성당에서 성탄트리를 매년 장식을 하면서 전에는 모르던 것을 교의를 공부하다가 보니까 성경과 관계가 있는 생명나무로 그것이 예수님의 몸이었다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아, 이것이 서로 통합될 때 우리들도 훨씬 더 처음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간과 공간이 없으신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처음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런이런 계획들을 세워놓으셨구나. 라고 하는 그런 시각으로 읽으니까 1장 1절부터 믿음이 막 샘솟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함께 나누려고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문자적인 해석이나 이런 것들을 또 무시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본적으로 공부를 하고, 여기에서는 더 영적인 것으로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하시면 풀이 먼저 창조되었을 것 같습니까? 태양이 먼저 창조되었을 것 같습니까? 태양이 당연히 먼저 창조되었어야지요. 하늘의 큰 빛물체 태양은 넷째 날 창조되었습니다. 풀은 우리 생각으로는 당연히 태양 다음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셋째 날 창조되었습니다. 태양의 다음에 풀이 창조되어야 하는데 하고 그것을 두드려 맞추려고 태양도 없는데 풀과 나무들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들어났다. 라고 억지로 끼워 맞히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가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첫째 날에 당도했으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찾아내어야 하고 도대체 우리가 빛을 통해서 정말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나는 빛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말씀하시기를’ 신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빛이 생겨라’ 하니까 빛이 생긴 것이죠. 생각만 하고 계시면 빛이 안생깁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생각만하고 있으면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먼저 말했습니까? 누군가는 먼저 말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표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중에 표현과 가장 가까운 분은 아버지를 보여주시는 성자입니다.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니까? 아버지의 표현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께서 표현을 해주시는 것인데, 보이면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보이면 안됩니다. 아버지를 봤다고 하는 분들은 다 속았거나 속이려고 하거나 하는 분들입니다.
[‘말씀’을 통한 창조 : 말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음 ‘생각, 말, 숨’의 삼위일체적 창조]
내가 말을 하는데 말이 하느님(예수님)이라면 말과 똑같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생각하시는 분이시고 말을 해야 되는데 말을 하려면 힘이 필요하고 힘은 숨으로 나오고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 말로 표현이 안된다. 말을 표현하려고 하는 의지도 있어야 되고 성령의 힘으로 성모님 안에서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처럼 말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92항]에 보면 교회에서는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 업적이다.』
이레네오 성인의 말을 빌어서 보통 사람들이 가르치는데, 태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시고 아드님께서 구원하시고 지금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는 뭐 이런 식으로 성경, 교리를 가르치면 이상한(이단)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찢어 놓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주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창조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구원하시고 지금도 함께 이끄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들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예수님만을 생각해서도 안되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그렇지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창조되고 있다는 것을 보시면 됩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표현을 해주셨으니까 나도 결혼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쉽습니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지금은 쉽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표현을 하면서 다가왔다면 우리는 표현을 해야 됩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표현을 합니까? 우리들도 하느님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우리들도 하느님한테 표현을 해야 합니다. 나도 사랑해요! 이렇게 이야기 안하고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하느님한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저도 주님을 사랑해요! 저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아,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미사에는 안나가, 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나도 사랑을 하지만 표현은 안할래! 나도 사랑은 하지만 결혼은 안할래! 모든 표현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저를 사랑한다고 하고 여기 안나온다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보여주려고 하는 성사와도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표현을 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모습으로 지금 표현되고 살아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 1,4)]
『어둠은 좋아하시지 않으심 빛과 가까워짐이 창조, 빛과 멀어짐이 다시 혼돈으로』
빛이 좋았다는 것은, 빛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어두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빛만 좋아하십니다. 그러면 어둠은 기분이 나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빛만 좋아하십니다. 우리도 내가 낳은 아이랑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랑 똑같이 사랑해! 라고 하면 좀 이상한 분이잖아요.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어떤 노력을 기울이신 것이고 그 빛에 의해서 창조된 우리들만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빛은 무엇일까요? 빛을 통해서 우리를 창조하시려고 하십니다. 창세기의 해설서는 요한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태초에 빛을 창조했다면 요한복음에도 빛의 창조 이야기가 나와야 하겠지요. 빛이 도대체 무엇인지 한번 봐야겠지요. (요한 1,1-5)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라고 똑같이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이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계속 창조하셨는데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창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것인데, 그 말씀이 조금 변합니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제 말씀으로 창조됐는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창조된 말씀을 받아들임 → 빛이요 생명인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곧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는 생명이며 빛이니까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안에 어둠만 있는데, 어둠만 있는 삶은 미움만 있는 사람, 항상 우울해 있는 사람, 항상 지쳐있는 사람, 항상 긴장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빛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빛이라는 것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빛’이시다』
『빛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곧 심판』 빛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니까!
[(요한 3,19-21)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빛이신데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심판이 일어나는지. 19절, 이제 사람들은 빛이 왔다고 빛을 보면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빛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모두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은 크게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은 우리를 점령하시는 분이야!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는 선택을 하시면 점령하시는 분이라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쨌거나 인간의 자유는 항상 존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존중되지 않으면 인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자유를 뺏는다는 것은 이미 너와 나의 관계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려면 우리한테서 자유를 빼앗으면 안됩니다. 공간에서는 빛이 딱 켜지면 어둠은 없어지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은 어둠속에 있는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함이시다』
왜 인간은 그 빛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빛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빛이 들어오면 내가 하는 일이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방은 환합니까? 어둡습니까? 흐트러질수록 어두운 것을 좋아할까요? 밝은 것을 좋아할까요? 죄를 많이 지을수록 사람들을 더 만나는 것을 좋아할까요? 혼자 틀어박히는 것을 좋아할까요?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입니다. 내 삶이 변화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공부를 열심히 했을 때는 시험기간이 기다려집니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내가 노력한 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시험이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하고 놀았으면 그러면 시험기간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시는 데 어떤 사람들은 아, 예수님, 이 세상에 빨리 좀 와주십시오. 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제발 좀 더 살게 해주십시오. 나는 조금 더 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오늘 지구가 망했으면 좋겠습니까? 좀 천천히 와서 더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그런 마음이지요?
성무일도 끝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오늘 당장 죽어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 쪽지 시험을 봐도 나는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1910-1997) 1950년에 인도의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해 이후 평생을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는 세계 123개국에서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무료 급식소, 고아원, 학교 등 610여개의 단체를 운영 중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빈민굴에 들어갔는데 너무 어두웠습니다. 청년 남자 아이가 혼자 살고 있는데, 이 아이가 발에 밟힐 정도로 혼자 널브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찾아보니까 등잔이 있어서 불을 키려니까 청년이 짜증을 내면서 불을 키지 말라고 하는데 마더 테레사께서는 착하겠어요? 독하겠어요? 성인들은 독한 면이 있습니다. 말을 엄청 안듣고 불을 켰는데 밝아지니까 그 방안이 정돈되지 않고 흐트러졌으며 지저분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삶 자체가 흐트러져 있는 것입니다. 마약과 직장도 없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젊은 아이가 일어나서 불을 확 꺼버렸습니다. 성인은 독해서 불을 다시 켰습니다. 젊은 아이가 불을 끄면 다시키고 이렇게 하다가 젊은 이는 열을 받아 창문 밖으로 등잔을 던져서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밖으로 가서 다른 등잔을 다시 사서 새 등잔에다가 불을 켜서 거기다 두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10년 정도 뒤에 다른 수녀님이 그 집을 방문했는데 수녀님은 그런 사정을 모르는 분입니다. 어떤 청년이 수녀님께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합니다. 라고 청년의 말을 전합니다.
그 청년의 집은 지금 아주 잘 정돈되어 있고, 그 청년은 전에는 술과 담배 마약을 했었는데 모두 끊고 지금은 직장에 나가고 있고 그리고 그 키 작은 수녀님한테
『그때 수녀님이 켜 놓아준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좀 전해주십시오. 라고 한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리스도에게서 빛을 받아서 그 빛을 여기에다가 남겨놓고 간 것입니다. 그 빛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면 우리의 삶을 그 빛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게 해서 그 빛과 어긋나면 내가 조금씩 조금씩 고쳐나가든가 아니면 빛을 꺼버리든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의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참 빛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 하나있습니다. 이게 사랑이야! 라고 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아, 저게 정말 사랑이구나. 나도 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 되겠다. 라고 정말 십자가의 삶을 본받고 싶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저게 무슨 사랑이야! 나는 결혼하고 즐기고 이러는 것이 사랑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괜히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고 치욕과 모욕을 당하시며 단명하신 예수님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사이가 멀어지는 것, 이것이 심판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그 빛의 삶을 좋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빛이니까 우리 삶이랑 비춰져서 아, 나는 지금 나만 알고 살아가고 있는데 옆에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저렇게 손발이 멀쩡해가지고 돈을 벌수도 있는데 벌지도 않고 하면서 그냥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겉옷이라도 벗어서 덮어주고 아니면 돈이 없으시면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빛이라는 것은 내 삶에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간섭하시어 내 삶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심 → 내 삶이 변화하는 것』
그렇게 되면 내 안에 빛이 있다는 것이고 아니면 빛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징어잡이 배를 보셨습니까? 오징어잡이 배는 빛이 환합니다.
『우리는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 특징 : 십자가 밑으로 모인다.』
그 오징어잡이 배가 밤에 조업을 하러 나갑니다. 항상 밤에 나가는데 왜, 빛을 좋아하는 것들만 잡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이 온통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징어잡이 배처럼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징어잡이 배가 밝게 빛을 밝히면 그 많은 물고기들이 있는데 오징어만 빛으로 모인다. 다른 고기들은 잠자는데 방해한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숨는데 오징어만 모인다. 이것이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빛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는데, 그 빛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가 좋습니까? 연예인이 좋습니까?, 십자가가 더 좋습니까? 연속극이 더 좋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는 것이 더 좋습니까? TV보는 것이 더 좋습니까?, 점점 말을 못하시겠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삶이 더 좋습니까? 우리 집의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것이 더 좋습니까? 점점 더 대답을 못하시겠지요. 내가 정말 십자가를 더 좋아하고 있고 그것이 끊임없이 나를 간섭하고 있으면 여러분 안에 빛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창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자기는 올바르게 본다고 생각하고 참 빛이신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는데, 참 빛을 교회에서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자 아, 이 세상에서 살던 나의 삶은 다 거짓이었구나! 라고 하면서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말씀을 전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게 빛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빛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도록 매일매일 변화되어가서 십자가의 삶을 살도록 우리들이 변화되어 가면 좋겠습니다.
영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