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빠직! 빠직! 빠지지직!
염왕채에는 무려 사백이나 되는 수적이 있다. 그 중 이백 정도는 그저 칼질만 할 줄 아는 삼류도 못 되는 자들이고, 남은 이백이 그나마 좀 칼을 쓰는 사람들이다.
지난번 서가장과 싸울 때, 염왕채주는 그 중 삼백 명을 추려서 데리고 갔다. 삼백 명 안에는 삼류 이하의 자들 백오십 명과 그러저럭 쓸 만한 자들 백오십 명을 섞었다.
정가장에서도 백여 명이 참여하기로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다. 그것이 나중에 서가장을 지웠을 때, 정가장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지 않을 방법이라 여겼다.
염왕채의 부채주 등막평은 채주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만일 염왕채의 인원을 전부 투입했다고 해도 그날 싸움은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남궁세가의 좌우쌍위가 존재하는 한 그들에게 승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남궁세가의 좌우쌍위는 정가장의 조력자가 맡기로 했다. 한데 그가 오지 않았으니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덕분에 정가장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염왕채는 그나마 좀 나았다. 절반의 힘만 동원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대부분 쓸 만한 자들이었다.
그날 격전으로 삼류 이하의 수적들은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몽땅 죽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 자들을 채워 넣을 방법이야 무궁무진했으니까.
채주는 아직도 의식불명의 상태였다. 서가장에서 도망 나올때, 그가 업고 오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등막평은 누워 있는 채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소주 사람들에게 강제로 빼앗아온 신선단을 먹이고 신선고를 발랐지만 여전히 깨나지 않는 사람에게 기대를 걸 이유가 없었다.
"채주,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보오."
등막평은 채주를 잠시 더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채주는 수하 몇이 알아서 돌볼 것이다.
더 이상 채주에게 쓸 약은 없었다. 남은 약들이 대부분은 자신이 쓸 것이고, 또 실력이 그런대로 괜찮은 부하들이 쓸 것이다.
"흥, 이 약이 효과가 없다고? 그따위 말을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다니, 날 얼마나 물로 봤으면."
등막평은 정가장 사람이 은밀히 찾아와 해준 얘기를 전혀 믿지 않았다.
채주의 외상이 깨끗이 나은 걸 봤는데 그딴 말을 믿으라니, 멍청한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등막평은 부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최근 며칠 동안 새로운 부하들을 구해 채워 넣었다. 어차피 머릿수를 채우는 거라서 아무나 받아들여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일단 수적이 되면 기본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도 최소한 칼질하는 법은 배워야 써먹을 수 있으니까.
부하들이 수련하는 곳으로 향하던 등막평의 눈에 수하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헉헉! 채주님! 갔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수하의 보고에 등막평이 인상을 쓰려다가 말았다. 채주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왠지 듣기 좋았다. 물론 자신이 시킨 일이었지만.
"가긴 뭐가 갔단 거냐!"
"남궁세가 놈들이 갔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등막평이 눈을 빛냈다. 현재 염왕채에서 그럭저럭 무공을 아는 자가 백 명이었다. 지난번에 백 명이 죽고 오십이 살아남았다.
물론 그 오십 명은 죽은 백 명보다 더 강한 놈들이다. 그리고 어중이떠중이가 다시 이백 명 정도 있었다.
"서가장에 무사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지난번 싸움에 죽은 자들을 빼며 한 칠십 명쯤 된다고 합니다."
"칠십 명이라, 칠십 명......"
등막평은 고민했다. 수는 염왕채가 훨씬 많다. 하지만 서가장 무사들은 실력이 대단하다. 이대로는 절대 승산이 없었다.
"끄응, 뭔가 수가 없을까? 이대로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일단 너는 정가장에 한 번 찾아가 봐라. 다시 한 번 일을 도모하자고 부추겨 봐."
"예."
수하가 달려가자 등막평은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기본적으로 생각이란 것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아왔던 사람이 갑자기 여러 가지를 고민하려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꿋꿋이 생각을 했다. 채주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등막평이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본 채주는 항상 뭔가 일을 앞두고 생각이란 걸 오랫동안 했다.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무영이 수적들에게 당한 모든 사람을 만나는데 걸린 시간은 꼬박 닷새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당했다. 개중에는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무영은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집에 환자가 있으며 그 환자의 병이 나아지도록 조치를 취해 줬다.
그러면서 돈은 한푼도 받지 않았다. 가끔 밥을 얻어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닷새를 지내고 나니 수중에 돈이 깨끗이 떨어져 버렸다. 다시 약이라도 팔지 않는 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굶어 죽겠구나."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약방으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약방을 쓸 수 있는 날이 아직 열흘 정도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열흘 동안 무영은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마무리 해야겠지."'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약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궁세가주 남궁환은 남궁상룡의 모습을 보고 일단 인상부터 찡그렸다.
"대체 그게 무슨 꼴이냐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냐."
남궁상룡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감았다. 차마 약장수에게 당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당시 어떻게 당했는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무영이 뭔가 강력한 외문기공을 익히고 있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에게 빈틈을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놈 절대 가만 두지 않는다.'
남궁상룡은 속으로 복수심을 불태었다.
사실 남궁상룡이 아무리 입을 다물어도 무영이 근처에 떠벌리고 다니면 아무 소용없다. 하지만 남궁상룡은 무영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예 멍청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무영이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퍼져나가면 여러 가지로 곤란해진다. 아니, 목숨을 위협받을 만한 일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절대 함구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머리가 돌아간다면 남궁상룡이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정말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니까.'
남궁상룡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눈을 떴다.
"어떤 놈이 이렇게 만들었느냐? 왜 대답이 없어?"
남궁상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많이 다친 것은 아니다. 의원이 적절히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앞으로 보름 정도 정양하면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염려치 마십시오."
"뭐라? 염려치 말라고? 네가 지금 그 꼴로 돌아왔는데 뭘 염려치 말아! 대체 어떤 놈들이냐! 네가 당할 정도라면 필시 보통 놈들이 아니었을 터! 다른 세가 놈들이냐?"
남궁상룡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들이 왜 절 핍박하겠습니까."
남궁환은 아들이 더 이상 입을 열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잉, 한심한 놈 같으니. 남궁세가의 뒤를 이을 놈이 매나 맞고 다닌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평소에 자만하고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야."
남궁환의 말이 남궁상룡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남궁상룡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남궁상룡의 뇌리에 서하린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강하던 그녀의 무공도 떠올랐다. 그런 여자를 얻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 약장수 놈.'
남궁상룡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직도 자신이 무영보다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따. 하지만 자신을 암습한 그 수가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이럴 때 해결 방법은 하나다.
'압도적으로 강해지면 모든게 해결된다.'
압도적인 강함이 있다면 아무리 더러운 암습이라 해도 정면으로 박살낼 수 있다.
대대로 남궁세가의 가주는 그렇게 배워왔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남궁상룡은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남궁상룡의 눈이 전의로 타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 약장수를 박살내고 당당하게 서하린을 차지할 것이다. 남궁상룡은 앞으로 이 년 이내에 그렇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
"뭐냐?"
남궁환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남궁상룡이 잠시 움찔했다.
"후우, 혼인을 이 년만 미뤄 주십시오. 그리고 그 사이 서소저가 다른 놈과 혼인을 올리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
"뭐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남궁환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 년 동안 폐관수련을 하겠습니다. 관을 깨고 나왔을 때, 그녀가 없다면 전 정말 미쳐 버릴 겁니다."
남궁상룡의 말에 남궁환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표정도 온화하게 바뀌었다.
"허허, 거 참......"
남궁상룡의 재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재능만 믿고 노력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남궁상룡이 드디어 자만의 틀을 깨고 날아오르려 한다. 어느 부모가 가만히 있겠는가.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내 뭐든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남궁상룡은 가볍게 인사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일단 지금은 몸의 회복이 가장 중요했다.
남궁상룡은 눈을 감은 채 또 이를 갈았다. 눈만 감으면 서하린과 무영이 아른거렸다. 자신이 없는 이 년 동안 둘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꼭 약속하셔야 합니다."
남궁상룡은 다시 한 번 부친에게 다짐을 받고 싶었다. 남궁환은 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걱정 말고 얼마나 큰 성취를 얻을 것인지만 생각해라."
남궁환은 벌써부터 이 년 뒤가 기대됐다. 남궁상룡은 그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으니까.
무영은 품에 신선단 두 알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지난 열흘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약이었다. 그 중 하나는 서하린에게 줄 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칠의 동생 소소에게 줄 약이었다.
일단 오늘은 이 약을 두 사람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으로써는 계속 이곳에서 약을 팔아도 되는지조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최근 무영에게 벌어진 일들은 너무나 급격했다. 그간 겪어왔던 산에서의 생활이나 스승을 따라다니며 약을 팔던 경험과는 꽤 동떨어진 것이었다.
'하긴, 그때도 싸움이 있긴 있었지만.'
스승과 생활할 때도 무림인이라 부르는 자들과 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그 무림인들은 사실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산적에 더 가까운 자들이었다.
힘을 가진 산적은 상당히 두려운 존재다. 일단 나쁜 짓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고, 힘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 약한 존재들은 심하게 당하기 일쑤였다.
스승은 그런 자들을 볼때마다 단호하게 단죄했다.
'나도 그때의 스승님처럼 될 수 있을까?'
무영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해야만 한다. 스승 역시 그것을 바랄 것이다.
'후우, 스승님은 왜 내게 산을 떠나라 하셨을까.'
무영은 그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스승은 틈날 때마다 무영에게 사람들이 사는 곳에 깊이 들어가 살라 하셨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당신이 만든 것을 능가하는 신선단을 만들 수 있을 거라 하셨다.
"후우,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반드시 해야지."
무영은 결연한 눈으로 앞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꼭 할 것이다. 스승이 자신에게 바라고 원한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무영은 어느새 소칠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집은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무영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습니다."
이미 몇 번 찾아왔었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아마 이 시간이면 소칠은 없을 확률이 높다. 소칠은 정말로 열심히 일을 했다.
"오셨어요?"
문이 살짝 열리며 안에서 소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침저녁으로 신선단을 복용한 덕분인지 소소의 얼굴에는 약하게나마 혈기가 돌았다. 시체의 몰골에서 이제 조금 사람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소소가 힘겹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좀 어때?"
무영의 질문에 소소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좋아졌어요."
무영은 그것을 보며 슬쩍 웃었다.
소소의 나이는 열여덟, 무영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다. 몇 번 얼굴을 보면서 이제는 익숙하게 말을 놓았다.
소소는 무영을 볼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피골이 상접해 얼굴의 윤곽이 너무나도 보기 흉했기에 그녀를 보려고 하는 사람조차 없없는데,
성심성의껏 자신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마음이 열리는 것도 당연했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무영의 말에 소소가 안으로 들어가 침상에 누웠다. 무영이 올 때마다 진맥을 받았다.
지금까지 의원에게 진맥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무영이 해주는 진맥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업었다.
무영은 침상에 누운 소소를 보며 평소와 마찬가지로 한 손을 머리에 다른 한 손을 아랫배, 단전에 갖다 댔다.
끈끈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소소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무영이 소소의 진맥을 모두 끝낸 것은 꼬박 한 시진이 지나서였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능숙해진 것도 있지만, 소소의 몸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소소의 몸에서 손을 뗀 무영은 숨을 골랐다.
"후우, 이제 대충 된 것 같구나. 본격적인 치료를 할 수 있겠어."
무영의 말에 소소의 눈이 커졌다.
"본격적인 치료요? 그럼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는 진짜 치료를 위한 바탕을 만든 거야.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치료 자체가 불가능했거든."
무영의 말에 소소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는 상당히 영특했다. 지금까지 무영이 자신에게 해준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또 무영이 자신에게 먹이는 약이 얼마나 대단한 약이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데 그 모든 것이 진짜 치료를 위한 준비를 불과하단다. 그렇다면 진짜 치료는 얼마나 어려울 것이며, 또 얼마나 귀한 약이 필요할 것인가.
소소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무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 병을 물리칠 것만 생각해."
소소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무영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신선단을 꺼냈다. 서하린에게 줄 신선단과 바뀌면 곤란했기에 몇 번이나 다시 확인을 했다.
"자, 이게 약이야."
소소는 떨리는 손으로 무영이 건네주는 신선단을 받아 들었다.
"이, 이것이......"
"신선단이야."
무영의 말에 소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선단이라면 제가 계속 먹었던 약이 아닌가요?"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것도 신선단이야. 그리고 이것도 신선단이야. 신선단은 같은 방법으로 만들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약효가 조금씩 달라지거든.
이건 소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신선단이야."
무영의 말에 소소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손 위에 있는 신선단을 바라봤다. 평소 먹던 것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었다.
"일단 누워서 먹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조금 치료를 도와야 하거든. 약만으로는 치료하기 쉽지 않은 병이라서 말이야."
"네."
소소는 서둘러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무영의 지시에 따라 신선단을 입에 넣었다.
맛도 그동안 먹던 신선단과 똑같았다. 심지어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스르르 녹아 목구멍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 버리는 것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조금 달랐다.
갑자기 목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확 퍼져 나갔다. 그 기운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갔다.
무영이 정수리와 단전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손에서 뇌기가 일렁였다. 빠직대는 뇌기가 소소의 단전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끈끈한 기운이 정수리에 얹은 무영의 손으로 조금씩 빠져나왔다.
소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그 열기가 뜨거움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아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무영의 모습 때문이었다.
무영의 얼굴을 땀투성이였다. 고통을 꾹 눌러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눈앞에 두고서 앓는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소소는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고통을 참아냈다.
결과적으로 고통을 꾹 참고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훨씬 치료에 득이 되었다.
소소나 소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병은 그 어떤 명의가 와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소소가 앓고 있는 병은 구음절맥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영양 공급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온몸의 혈맥이 말라비틀어져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처음 무영이 그녀를 확인했을 때의 상태가 그랬다. 그래서 함부로 치료를 할 수 없었다.
무영은 그녀의 말라비틀어진 혈맥을 어느 정도 살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강렬한 기운을 혈맥이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했다.
너무 오랜 세월 혈맥이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혈맥 자체가 퇴화되었고, 그렇게 퇴화된 혈맥을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 해야 했다.
무영이 조금 전에 먹인 신선단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선단이라는 것이 사람의 혈맥에 쌓인 탁기를 제거하고 혈맥을 튼튼히 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혈맥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킬 수 있었고, 본격적인 치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영은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치료시간은 상당히 길었고, 그 긴 시간 동안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무영의 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뇌기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는 것이었다.
무영은 쉴 새 없이 뇌기를 소소의 단전에 불어 넣었다. 무영이 넣은 뇌기가 신선단의 공능과 맞물려 퇴화된 혈맥을 새로 열어가고 있었다.
소소의 온몸을 가득 채운 뜨거운 열기가 점차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덕분에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차가워졌다. 소소는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느끼는 모순적인 상태가 되었다.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응축된 열기를 무영의 뇌기가 뒤덮였다. 소소는 이번에는 찌릿찌릿하게 감전되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눈도 이미 감은 상태였다. 눈을 뜨고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 콩알만 하게 응축되었다. 그 순간 온몸을 벼락이 꿰뚫고 지나갔다.
꽈르릉!
소소는 마치 머리가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벼락이 온몸을 관통해 머리를 날려 버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쾌해졌다.
"아!"
소소는 결국 입을 벌려 온몸에 가득 찬 환희를 내뱉었다.
"하아아......"
숨과 함께 뜨거운 기운이 빠져 나갔다. 어느새 그녀의 정수리와 단전에 있던 무영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소소는 그대로 잠들었다. 치료를 하는 무영도 힘들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소소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그 피로를 지금까지 병석에 누워만 있던 소소가 견딜 수는 없었다.
무영은 잠든 소소를 잠시 바라봤다. 비록 뼈와 가죽밖에 남징 낳은 보기 흉한 얼굴이었지만 무영이 보기에는 귀엽고 아름다웠다.
"뭐 이제는 잘 먹고 잘 자면 살도 찌고 예뻐질 테니까."
무영은 그렇게 가볍게 말한 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무영이 나간 방 안에는 소소이 고요한 숨소리만 가득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오래 생각하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내기도 한다. 더구나 생각하는 사람이 머리가 그리 잘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런 경향이 더 심하다.
염왕채의 부채주 등막평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정가장은 뭐라고 하더냐?"
"지원할 여력이 없다 합니다. 우리도 자중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등막평의 수하 양조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정가장에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지금 서가장을 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전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양조는 정가장에서 해준 말을 그대로 할 수가 없었다. 등막평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는 눈치 하나로 여기까지 버텨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눈치가 이제 슬슬 염왕채를 떠나라 하고 있었다.
"겁쟁이 같으니."
등막평은 그렇게 정가장을 간단히 평가하고는 양조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이건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훌륭한 계책이었다.
"넌 저놈들을 이끌고 서가장이 관련되어 있는 점포들을 쳐라."
"예?"
양조는 눈을 크게 떴다. 등막평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얼마 전에 새로 충원된 수적들이 보였다. 대부분 삼류 근처에도 못가본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저 횡포를 부리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백오십이다. 그 정면 충분하겠지?"
백오십 명은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 백오십이나 되는 수적이 장사꾼들을 덮친다면 소주 일대가 순식간에 들끓어 오를 것이다.
"채, 채주님. 그렇게 하면 관에서 나설 겁니다."
"그것도 네가 알아서 해결해. 서가장 놈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도록만 하면 돼."
양조는 그제야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비롯한 백오십 부하들을 미끼로 서가장의 전력을 분산시켜 각개 격파를 할 생각인 것이다.
'이런 미친놈!'
이건 정말로 정상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낼 수 없는 계책이었다.
설사 성공을 하더라도 소주의 상권이 무너져 이득을 보기 어려울뿐더러 관부를 개입시켜 몰살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래도 만일 성공만 하면 서가장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지금 서가장에는 싸움이 가능한 무사가 칠십 정도뿐이다. 그 중 절반만 밖으로 끌어내도, 승산이 넘치는 싸움이 될 것이다.
현재 염왕채는 백오십 명의 어중이떠중이를 빼더라도 오십명이나 되는 그럴듯한 수적들과 백 명이나 되는 무공을 익힌 수적들이 있다.
그들이 한꺼번에 서가장에 들이치면 고작 서른 명 정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겠지만. 이 닭대가리는 그런 건 전혀 생각도 안 했겠지.'
양조의 생각에 등막평이 이번 일을 저지르면 이래저래 염왕채는 끝이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적당히 돈을 챙겨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도망가는 건 도망가는 거고 시킨 일은 충실히 할 생각이었다. 소란스러우면 소란스러울수록 도망에 성공할 확률이 높으니까.
무영은 소소의 치료를 끝내고 서가장으로 향했다. 소소의 집과 서가장은 꽤 멀었다.
그 중 가장 가까운 길은 소주에서 상가가 밀집해 있는 번화가를 통과해 가는 길이었다. 무영은 당연히 그 길로 향했다.
"응?"
무영은 한적한 길을 걸어가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살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싸늘한 감정이 무영의 가슴을 헤집었다. 그들은 볼 것도 없이 수적들이었다.
지난번 자신의 약을 사간 사람들을 습격해 상처를 입히고 목숨을 빼앗을 자들이었다.
그들이 또 뭔가 일을 벌이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달려가는 방향은 소주의 번화가였다. 무영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놈들 멈춰라!"
무영은 큰 소리로 외치며 몸을 날렸다. 무영의 몸은 순식간에 수적들 앞을 가로막았다.
수적들은 갑자기 누군가 앞에 나타났음에도 무시하고 그냥 달렸다. 평소의 염왕채 수적들이라면 길을 가로막는 자는 단번에 갈라 버렸겠지만 지금 달리는 수적들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그들은 실력도 모자라고 독기도 조금 모자랐다. 길은 넓었으니 그냥 지나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콰르릉!
어딘가에서 뇌성이 울렸다. 그리고 수적들이 달려가는 길에 뭔가가 떨어졌다.
콰과광!
"으허헉!"
"뭐야!"
앞에서 달리던 수적들은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뒤에서 달리던 수적들은 넘어진 동료들에 걸려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순식간에 절반이나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무영은 그렇게 바닥을 구르는 수적들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수적들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전열을 가다듬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고, 넘어진 게 다였다.
"뭐, 뭐요?"
수적들은 감히 무영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그 정도 위력을 보이려면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디로 가는 거냐?"
무영의 질문에 수적들이 약간 당황했다.
"우, 우리가 어디 가서 뭘 어떻게 하든 무, 무슨 상관이시오?"
앞으로 나선 것은 양조였다. 양조는 일단 다른 수적들을 지휘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야 했다.
무영은 양조의 말에 피식 웃었다. 양조는 무영의 웃음을 보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런 젠장. 잘못 걸렸다.'
양조의 빠른 눈치가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걸렸다고 경고했다. 이 위기를 넘기지 않으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 그러는 협사께서는 어찌 저희 갈 길을 막으시는 겁니까?"
양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조의 어조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공손했다.
무영은 양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영의 표정이 어찌나 차가웠는지 양조는 그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물었다."
양조는 급히 대답했다.
"저, 저곳 번화가로 가고 있습니다."
"거긴 왜 가는 거지?"
"그, 그건......"
양조는 차마 행패를 부리러 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영의 눈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하나 더 묻겠다. 지난번에 사람들에게서 약을 빼앗아 간 놈들이 누구냐?"
무영의 질문에 양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시 가장 열성적으로 그 일을 했던 것이 바로 양조였다.
그런대로 무공도 높은 편이고 욕심도 많아 상당수의 신선단을 빼앗았고, 그 중 몇 개는 자신의 몫으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무영은 양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영이 양조에게 그렇게 물은 이유는 양조의 몸에서 미약하나마 신선단의 향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 누, 누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건지......"
무영이 피식 웃었다.
"왜 모르지? 품에 소중이 간직한 그 약이 바로 신선단인데."
무영의 말에 양조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 자신이 신선단을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약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게 너로구나."
무영의 말에 양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것은 그렇다고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무영은 차가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번화가로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했느냐?"
무영이 한 발 앞으로 걸으며 물었다. 양조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수적들은 양조와 무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의 눈에도 무영의 모습은 정말로 심상치 않았다. 무영의 몸에서 은은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그 기세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듣지 않아도 뻔하지. 수적들이 할 수 있는 게 강도짓 말고 또 뭐가 있나. 아니면 또 사람을 죽이려 했나? 어차피 나쁜 짓만 하며 살아갈 인생. 내가 지워주지."
무영의 말에 양조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무영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질 거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영이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수적들은 그와 동시에 일제히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무영이 그 광경을 보고 피식 웃었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양조는 크게 소리쳤다.
"쳐라! 적은 한 놈이다!"
양조는 그 말을 하며 뒤로 몸을 뺐다. 한껏 긴장된 상태에서 양조의 외침을 들은 수적들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무기를 휘둘러 무영을 맞추기만 하면 될 것 같은 묘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수적들의 눈이 흉흉해졌다.
무영은 수적들을 공격시키고 몸을 빼서 도망치는 양조의 등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리고 주먹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무영의 주먹에서 뇌기가 일렁였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뇌기가 점점 커졌다. 뇌전이 마구 튀어나와 무영의 주먹을 감싸고 돌았다. 마치 주먹에 벼락이 모여든 형상이었다.
수적들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수적들과 무영의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 정도였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빠직대는 뇌전이 수적들의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그, 그것을 어쩌실 생각이신지......"
수적 중 하나가 공손하게 물었다. 무영은 대답하지 않고 주먹을 앞으로 쭉 뻗어다.
꽈르릉!
"으허헉!"
수적들이 동시에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마치 눈앞으로 벼락이 몰려드는 것 같아 눈도 질끈 감았따.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수적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수적들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기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무영의 모습 때문이었다. 무영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눈을 떠라."
무영의 말에 수적들이 동시에 눈을 떴다. 말을 듣지 않으면 벼락에 맞아 죽을 것만 같았따.
"일어서라."
수적들이 벌떡 일어섰다.
"앞으로 수적질을 그만두고 착실하게 살아라. 다시 수적질을 시작하면 내가 찾아갈 것이다. 어떻게 찾을지는 묻지 마라.
알아서 찾는 방법이 다 있으니. 의심나면 다시 수적질을 시작해라. 그러면 저렇게 될 것이다."
무영은 손을 들어 수적들의 뒤쪽을 가리켰다. 수적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경악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한 사내가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스럽게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끄어어어어!"
빠지지지직!
사내의 몸으 온통 뇌전에 휩싸여 있었다. 뇌전이 사내의 몸을 들락거릴 때마다 사내가 몸부림치며 비명을 토해냈다. 사내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벼락에 맞은 사람 같았다.
"으어어억!
수적들은 가슴이 싸늘히 얼어붙었다.
"그만 가도 좋다. 오늘 일은 잊어라."
수적들의 뇌리에 무영의 마지막 말이 틀어박혔다. 그들은 그대로 수채를 향해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가 수채로 들어가면 벼락에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한 명도 수채로 향한 자는 없었다.
백오십 명의 수적이 그렇게 사라졌다.
무영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양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약을 빼앗기 위해 사람들을 죽인 자다.
게다가 동료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혼자 도망간 놈이다.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수적들은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영은 몸을 돌려 원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양조의 움직임이 점점 잦아졌다. 그리고 이매 멎었다.
소주 외각 한적한 곳에 벼락에 맞아 죽은 시체 한 구가 생겨났다.
등막평은 부하들을 잔뜩 이끌고 서가장으로 향했다. 이번 헤획은 시기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소주에서 수적들이 난동을 피우면 그 소식이 서가장으로 들어갈 것이고, 서가장 무사들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것이다.
그렇게 모든 상황을 정리한 무사들이 다시 서가장으로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이거 두근두근하는걸?"
등막평은 이번 일을 전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서가장 근처에서 대기할 수가 없었다. 서가장에서 이렇게 많은 수적들이 몰려온 것을 알아채면 아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없었다.
즉, 서가장 무사들이 언제쯤 나갈 것인지 정확히 예측을 해야만 했다. 등막평은 그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앗다. 미리 몇 번 부하를 시켜 서가장과 번화가 사이를 달리게 해본 것이다.
양조가 소주의 상인들을 공격할 시기는 정해져 있다. 그렇게 되면 상인들이 서가장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서가장 무사들이 달려갈 것이다.
번화가와 서가장 사이를 몇 번 달리게 해 그 시간을 대충 계산했다. 등막평은 그 계산이 틀리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자, 지금이다. 가자."
등막평은 내심 서하린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하린이 상인들을 도우러 갔다면 훨씬 싸움이 편해질 것이다.
지난번에 서하린이 무섭게 날뛰는 모습을 봤다. 현재 염왕채에서 서하린을 대적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등막평은 미리 서하린과 서무룡을 상대할 자들을 뽑아 놨다.
한 명에게 각각 열 명씩 배정을 했다. 열 명이 협공을 하면 조금이나마 시건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나머지를 정리하면 된다.
등막평은 이 허술한 계획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백오십 명에 달하는 수적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곧장 서가장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중간에 달려오는 무사들과 부딪치지 않려고 무사들이 갈 만한 방향을 피해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등막평을 더더욱 깊은 수렁에 빠뜨렸다.
등막평의 눈에 서가장이 보였다. 등막평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수적들이 무질서하게 그 뒤를 따랐다.
"으하하하! 당당하게 문으로 들어가 주마!"
등막평은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가 둘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최소한 그들보다는 등막평이 더 강했다.
정문을 지키는 서가장 무사들 중 하나가 급히 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불었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하늘을 꿰뚫었다.
등막평은 정문에 선 무사 둘을 무시하고 문에 일격을 날렸다. 그의 도가 바람을 가르며 문을 향해 쇄도했다.
콰과광!
등막평도 나름대로 도기를 발출할 수 있는 고수였다. 그의 도기에 서가장 정문이 산산조각 났다. 등막평은 자욱하게 날리는 나뭇조각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등막평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수적들이 몰려들었다. 정문을 지키던 무사 둘은 각자 세명의 수적에게 둘러싸여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나머지 수적들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또 왔단 말이냐!"
서무룡이 크게 외치며 검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서가장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한데 그 수가 조금 많았다.
등막평은 크게 당황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얼핏 보기에도 삼사십 명은 훨씬 넘어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직도 내원쪽에서 서가장 무사들이 꾸여꾸역 몰려나오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양조, 이 자식!'
등막평은 양조가 일을 실패했거나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이번 작전은 완벽한 실패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별것 아니다! 다 죽여!"
등막평은 그렇게 외치며 수적 둘을 상대하고 있는 서가장 무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등막평의 앞을 서무룡이 가로막았다.
"네놈 상대는 나다!"
서무룡을 상대할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서가장 무사들은 한 명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모두 강했다.
그리고 서하린이 등장했다.
쉬가가가각!
서하린의 검이 사방을 휘저었다. 그녀의 검은 얼마 전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실전을 겪고 며칠 검술을 더 다듬어서 팔성의 경지를 완전히 소화해낸 것이다.
그녀의 검은 두 번 이상 막아내는 수적이 없을 정도였다.
장내는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무영은 서가장으로 향하며 상념에 잠겼다. 최근 있었던 일들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길지도 않았던 시간인데 그동안 사람을 둘이나 죽였다.
스승과 지내면서 사람을 안 죽여 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살리려다가 실수로 죽인 경우도 있고, 산적들과 싸우다가 산적을 죽여본 적도 있다. 하지만 무영은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흡혈광마를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팠다. 사람은 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될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으니까.
"후우,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무영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서거장에 다가가던 무영은 희미하게 번지는 피 냄새를 맡았다. 얼마 전 서가장이 습격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이런! 또!"
무영은 다급히 움직였다. 무영의 신형이 마치 안개처럼 흩어져 빠르게 쏟아져나갔다.
무영은 순식간에 서가장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싸움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무영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막 등막평의 몸이 쓰러지는 중이었다. 그를 쓰러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서무룡이었다.
무영은 심각한 얼굴로 장내를 살폈다. 수적들이 무더기로 죽어 있었고, 다친 채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서가장 무사들도 다친 사람들이 만이 보였다.
무여이 서가장 안으로 들어서자, 무사들을 비롯해 서무룡과 서하린이 그를 발견했다.
"헉!"
다친 무사들이 무영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 중 그리 크게 다치지 않은 사람들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그 고통 심한 무영의 약을 바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심한 사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크윽."
그들은 눈물을 머금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을 겪어야 살아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때마침 잘 왔네."
서무룡이 무영을 반겼다. 이럴 때 무영의 존재는 정말로 든든한 힘이 된다. 다친 무사들을 말끔히 고칠 수 있지 않은가. 서가장 무사들 중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다친 사람은 무영이 모두 고쳐줄 것이다. 즉, 전력 손실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으하하하! 염왕채가 끝장났으니, 이제 더 이상 소주에서 우리 서가장에 덤벼들 놈들은 없겠군. 으하하핫!"
만일 염왕채가 정가장과 힘을 합해서 쳐들어왔다면 정말로 위험할 뻔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염왕채 혼자서 쳐들어왔고, 결국 그들은 완전히 몰락했다.
서무룡은 무영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자네의 도움을 받고 싶은데 괜찮겠나?"
서무룡은 부드럽게 말했다. 무영의 기분을 거슬러선 안 된다는 것을 지난번 남궁세가의 좌우쌍위가 직접 보여주지 않았던가.
서무룡의 말은 꽤 정중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들의 상처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린, 도와줘."
서하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무영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모습을 서가장 무사들이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서무룡은 다치지 않은 무사들을 모두 모았다.
"이대로 염왕채로 간다. 이번 기회에 그곳을 완전히 정리한다. 소주에 평화가 올 거야."
서무룡의 말에 무사들이 전의를 불태웠다. 비록 힘들었지만 염왕채를 정리할 힘은 남아 있었다.
수십 명의 무사들이 서가장을 나섰다.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서무룡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뒤에 서가장의 총관이 따라갔다. 총관이 따라가는 이유는 염왕채를 정리하면 필연적으로 나올 재물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서가장에는 내장을 끊어내는 듯한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고, 염왕채는 완전히 사라졌다.
6.입 맞춰 주세요.
남궁세가의 가주 나궁환은 좌우쌍위에게 자세한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갑작스런 폐관에 든 남궁상룡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고, 소주에서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약사라고?"
"예. 그렇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약을 만드는 약사입니다."
남궁환은 남궁철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약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자일 것이다.
무인들은 싸우다가 상처를 입는 일이 다반사다. 한데 그 상처를 말끔히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힘을 발휘하겠는가.
게다가 의원도 아니고 약사다.
약을 만들어 도움을 줄 수 있다. 먼 곳에서 싸움을 벌이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런 구명줄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깊은 세가나 문파에는 대대로 금창약이나 요상단의 제조법이 전해진다. 문제는 그것을 만드는 방법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약재를 구하는 것도 문제고 그것을 조합해 약을 만들어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은 물론이고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다.
"정말로 구미가 당기는군. 하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서가장 외에는 없나?"
"현재로써는 그렇습니다.
소주 방면에 소문이 조금 돌고 있긴 하지만 소문이란 게 원래 그렇듯 약사가 사라지면 그저 떠돌다가 사라지거나 전혀 다른 소문으로 와전되기 마련입니다."
남궁환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를 영입하도록 하게."
남궁환의 허락에 남궁철과 남궁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가주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세가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 남궁세가의 힘과 재력이라면 그깟 약사 하나쯤 영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남궁환은 의욕에 불타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빛냈다.
속으로는 그 약사를 그렇게 대단하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좌우쌍위가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남궁세가에도 금창약과 요상단의 비법이 전해진다. 물론 약재를 구하기 힘들어 만들 수 있는 양이 적긴 하지만 매년 꾸준히 만들어왔다. 게다가 효과도 뛰어나다.
굳이 새로운 약사를 영입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정말로 소문대로 그렇게 대단한 요상단과 금창약을 마구 찢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남궁환은 기본적으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금창약이나 요상단을 만들기 위해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약재가 얼마나 비싸고 귀한데...... 말이 안되지.'
남궁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흐뭇해졌다.
'저 두 사람이 저렇게 불타오르는게 정말 얼마 만인지...... 그때 이후 처음인가?'
남궁철과 남궁혁이 가장 불타올랐던 때가 바로 좌우쌍위가 되기 위한 시험을 거쳤을 때였다. 좌우쌍위가 되기 위해 두 사람이 펼친 노력과 열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두 사람이 다시 열정을 되찾은 것 하나만으로 이번 일은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남궁환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라버니, 그 약은 또 뭐예요?"
서하린의 눈에 기대가 어렸다. 지난번에 무영이 준 약을 먹고 운룡검법이 단숨에 팔성으로 뛰어올랐다. 한데 또 약을 주니 왠지 기대가 되었다.
"지난번에 준 건 의미가 담긴 거고. 이건 약효가 조금 더 강한 거야."
무영의 말에 서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영은 약간 쑥쓰러운 듯 입을 열었다.
"저번 신선단은 내가 처음으로 만든 약이거든. 너한테 주려고."
서하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럼 이거는요?"
"먹어 보면 알거야."
무영의 말에 서하린이 가부좌를 튼 후,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약을 입으로 가져갔다. 약을 입에 넣는 순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깨끗이 녹아 목으로 넘어갔다.
"헉!"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치 몸을 터트려 버릴 듯한 압박감도 동시에 가져다줬다.
"흐윽......"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을 꾹 눌러 참았다. 애써 약을 만들어 준 무영을 생각해서라도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억지로 이를 무는데도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몸으로 퍼져나간 기운은 마치 어딘가로 숨어 버리듯 그렇게 흩어져 버렸다.
대부분이 흩어지고 남은 약간의 기운이 온몸을 휘돌랐다. 약간의 기운이긴 하지만 그것은 처음에 비해서 미약할 뿐 실제로는 상당한 양이었다.
서하린은 그 기운을 통제하는 것만도 힘겨웠다.
결국 그 기운을 한 바퀴 돌린 후, 단전으로 갈무리했다.
서하린이 눈을 떴다.
번쩍!
찬란한 고아채가 뿜어져 나갔다. 그 광채는 사방을 한 번 밝힌 후, 눈동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후우우......"
무영은 숨을 고르는 서하린을 보며 빙긋 웃었다. 서하린의 몸을 힘차게 휘도는 기운이 느껴졌다.
"어때?"
"괴, 굉장해요. 이런 굉장한 약을 제가 막 받아도 되는 건가요? 이거 정말로 귀한 약인 것 같은데."
서하린은 무영이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이렇게 대단한 약을 만들려면 엄청난 약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약재는 하나하나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약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대단한 효능은 불가능하다.
서하린은 약의 극히 일부분만을 녹인 상태였다. 나머지 대부분의 기운은 온몸 구석구석 흩어진 상태였다.
만일 나중에 그 모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정말로 엄청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별것 아냐."
무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실제로 들어가는 재료는 별로 대단한 것이 없었다. 오로지 정성으로 만든 약이었다.
그리고 시간도 꽤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약은 언제라도 다시 만들 수 있었다.
"지난번에 먹은 약도 정말 보통이 아니었는데......"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건 아냐. 저번에 그 약은 그렇데 대단한 게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그 약을 먹고 제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올랐는데요!"
무영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하린이 원래 대단했기 때문이야. 혈맥을 튼튼하게 하고, 탁기를 태우고, 원기를 약간 북돋아 주는 약이었어.
하린이 뭔가를 얻었다면 그건 하린의 노력을 얻은 거야. 신선단은 그저 약간의 촉매 역할을 한 것뿐이야."
무영의 말에 서하린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효능 역시 보통 약으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역시 그 약 덕분이에요. 운룡검법을 팔성까지 올리려면 영약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거든요. 예전 조상님 중 한 분도 영약 덕분에 운룡검법을 대성하셨다고 해요."
"아마 그분 역시 영약이 촉매역할만 했을 거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서하린은 분명히 영약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룡검법은 운룡심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운룡심법을 팔성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정말로 영약의 힘이 필요했다.
'아마 아버지도 지금 그 상태이실 거야.'
서무룡도 운룡검법이 칠성에 머물러 있다. 그것을 벗어나려고 무던히 애써왔지만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 무영이 주는 신선단 한 알이면 서무룡도 팔성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예? 아, 아니에요."
생각은 했지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영에게 받은 도움이 너무나 컸다. 또 그런 약을 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로 염치없는 짓이었다.
'내가 너무 속물이 된 것 같아. 그냥 순수하게 무영 오라버니를 만나서 좋을 뿐이었는데'
서하린은 일부러 밝게 웃었다. 무영은 그저 서하린의 웃음이 좋았다. 서하린은 자신의 웃음을 보고 좋아하는 무영을 바라보며 더 환하게 웃었다.
염왕채가 몰락하면서 소주의 판도가 완전히 정리되었다. 소주는 서가장이 완전히 장악했다. 정가장이 아직 건재했지만 염왕채가 없는 상황에서 서가장을 견제할 방법이 없었다.
서가장은 정가장이 움츠린 틈을 타고 소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정가장이 쥐고 있던 약간의 상권과 이권을 얻었고, 염왕채에 얽혀 있던 여러 가지 이권들도 모조리 챙겼다.
서가장에 쳐들어갔던 수절들은 싸우던 도중 칠 할이 죽었다.
그나마 남은 자들도 크게 다쳐 더 이상 거동이 힘들 정도였다. 서가장은 싸움이 끝난 후, 그렇게 부상을 당한 수적들까지 모두 고쳐 주었다.
그 수적들은 그에 감격해 서가장의 힘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졌다.
수적들을 바로 서가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기에 남은 수적들이 따로 작은 방파 하나를 만들고 그 방파를 서가장이 운영하는 식으로 정리를 했다.
앞으로 서가장을 위협하려면 먼저 염왕채 수적들이 개심해 만든 정심방(正心幇)을 상대해야 한다.
과거를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그런 이름을 택했다. 실제로 모두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줬다.
당시 수적들이 개입한 모든 이권을 고스란히 서가장에 넘긴 것도 그들이었다.
정심방 덕분에 서가장은 훨씬 더 큰 힘을 얻었다. 그리고 소주에 행사하는 영향력도 더욱 커졌다.
정가장은 그렇게 서가장이 훌쩍 뛰어 오르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힘을 키워 다시 서가장을 도모하기 전까지는 죽은 듯 지낼 수밖에 없었다.
"총관, 무슨 방법이 없겠나?"
정일지는 심각한 얼굴로 총관을 닦달했다. 하지만 총관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설마 염왕채가 그렇게 일을 벌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멍청한 것들. 그렇게 말렸는데 사람 말을 우습게 알더니...... 쯧."
정일지는 혀까지 차며 그들을 욕했다. 총관은 그런 정일지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분께 한 번 도움을 요청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정일지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 연락할 방법이 없네. 그 복면인이 나타나지 않는한, 그냥 우리가 알아서 일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네."
정일지의 말에 총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그 수적 놈들이 왜 서가장에 붙은 걸까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서가장은 또 뭘 믿고 그놈들을 받아들이고, 방파까지 세우게 내버려 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게 궁금하네. 그건 그렇고 그놈들과 연락은 취해 봤냐?"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우리와 연락을 담당하던 놈들이 모조리 죽어서 더 이상 그놈들과 연결할 끈이 없습니다.
새로 통로를 만들어 보려고 했느넫, 그놈들 심지가 아주 굳습니다. 마치 배신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습니다."
정일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 악명 높던 수적들이 이제는 나서서 착한 일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놈들이 개심한 걸 믿으라고? 차라리 개가 고양이와 그 짓을 한다는 말을 믿고 말지."
정일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총관을 쳐다봤다.
총관은 정일지의 눈을 슬며시 피했다.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저 남몰래 힘을 키우다가 그분의 도움으로 한 방에 역전을 하는 수밖에 없다.
"끄응. 구대흉마라도 한 명 오지 않는 한, 이 상황을 뒤집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총관의 말에 정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라면 구대흉마 정도는 와야 한다. 새삼 예전에 도와주러 왔던 흡혈광마가 아쉬웠다.
"그놈은 대체 왜 벼락에 맞아 가지고......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은색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가만히 서서 그의 발아래 부복해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것이냐?"
"그렇습니다. 은왕(銀王)이시여."
은색장포의 중년인 은왕은 부복한 사내 뒤에 누워 있는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은왕의 손이 슬쩍 올라갔고, 시체가 둥실 떠올랐다.
시체는 미끄러지듯 움직여 은왕 앞에 멈췄다. 공중에 둥둥 뜬 상태로 멈춘 시체는 괴기스러웠다.
은왕은 시체를 유심히 살폈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안으로 기를 흘려 넣기도 했다.
"벼락 맞은 시체로군. 너도 그렇게 판단했나?"
"그렇습니다. 은왕이시여."
사내의 말에 은왕이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시체는 그 손짓에 따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마치 누군가 들고 나르는 것처럼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일어나라."
은왕의 말에 사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엄밀히 말하면 아직 은왕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조력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은왕 아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건 이미 정해진 바였다. 결정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윗사람들이 하는 것이니까.
"네 생각을 듣고 싶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슷한 장소에서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두 명이나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왠지 석연치 않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우연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놈들은 나쁜 짓을 일삼던 놈들이고, 하늘이 벌을 내렸을 수도 있지 않느냐?"
은왕의 지적에 사내의 말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나쁜 짓을 한다고 하늘이 벌을 내린다면 이 세상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위적인 냄새가 너무 많이 납니다."
"인위적이라?"
은왕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은왕은 진심으로 사내의 말이 흥미로웠다.
"이 시체는 벼락을 정수리로 맞은 것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상처의 흐름을 살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추측은 가능합니다. 이자는 등에 벼락을 맞았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등에 맞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 강제적으로 뇌력(雷力)을 등에 밀어 넣었다면 이런 형태의 시체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사내의 설명에 은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아주 흥미로운 분석이로구나.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였겠느냐?"
은왕의 이번 질문만은 사내에게도 난감했다. 도저히 추측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뇌(雷)의 무공을 쓰는 사람이 무림을 통틀어 많지 않습니다."
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기를 다스리는 무공 자체가 많지 않다.
벼락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은 힘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시체를 보면 날이 달린 무기에 당한 것이 아닙니다. 격공장에 당한 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뇌를 다스리며 권장(拳掌)을 쓰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이 조합이 가능한 건 현재 단 한 명뿐입니다."
사내의 설명에 은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굉뢰번천장(轟雷樊天掌, 번자는 임의 변경했습니다.) 강악(姜岳)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내의 추론을 그럴듯했다.
"그럼 강악이 이번 일의 원흉인가? 누군가가 강악을 휘하에 거뒀거나 그를 포섭했겠군."
은왕의 말에 사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강악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누군가를 핍박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강자를 좋아하고, 강자와 싸우는 것을 즐긴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다.
"강악은 최근 삼 년 내에 소주에 간 적이 없습니다."
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지금까지 한 말은 뭔가?"
"권장을 쓰는 고수지만, 강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전혀 새로운 인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
은왕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마치 자신이 놀림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사내는 은왕의 변화를 금세 눈치챘다.
"당시 그곳에서 그에게 당했던 수적들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자는 그 수적들을 이끄는 자였고, 나머지 수적들은 다치지 않은 채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은왕의 눈이 다시 빛을 발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상대는 이십대 초반의 사내였고, 주먹에서 커다란 벼락을 모아 날렸다고 했습니다. 그걸로 봐서 굉뢰번천장은 아닙니다."
은왕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런 무공은 들어본 적도 없군. 벼락을 모아 날렸다라......"
"어쨌든 뭔가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 일을 맡아라. 넌 앞으로 내 사람이다."
그 말에 사내의 눈이 커졌다.
"예? 그, 그 말씀은......"
"넌 앞으로 비천(秘天)이다. 모든 정보는 네 손을 거칠 것이다. 넌 내게 필요한 것만 보고하면 된다."
은왕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쥘 수 있는 자리는 그에게 날개를 단 것과 같다.
사내, 비천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부복했다.
쿵!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사내가 속한 조직에 연락할 필요는 없다. 은왕이 결정한 일에 반발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은왕이 손을 휘젓자, 사내는 슬며시 물러갔다. 은왕은 그가 사라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천이 완전히 사라지자,은왕은 다시 시체를 끌어당겼다.
시체가 공중에 떠서 은왕 앞으로 흘러갔다. 은왕은 다시 시체 곳곳을 살폈다.
"정말로 기묘한 시체로군. 그리고 묘하게 거슬려. 대체 그게 뭘까?"
은왕은 열심히 시체를 살피고 또 살폈다. 하지만 그 거슬림의 정체는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예? 오라버니, 어디를 가신다고요?"
서하린은 난데없는 무영의 말에 깜짝 놀랐다.
무영이 앞으로는 계속 소주에 머물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떠난다고 말하니 겁부터 덜컬 났다. 이대로 떠나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하남에 가봐야 해. 스승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하거든."
"그, 그게 뭔데요?"
"하남에 있는 유가장이라는 곳에 가봐야 돼."
"유가장이요?"
하남 유가장은 꽤 유서 깊은 무가다. 역사가 오대세가에 비견될 정도로 길다. 사실 유가장이라기보다 유씨세가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유가장은 하남 낙양에 있으며 낙양을 비롯해 하남 전역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단한 무가였다.
"유가장에는 무슨 일로요?"
"스승님이 약속하신 일을 대신 하러."
그 약속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곘지만 꽤 중요한 일임은 분명했다. 약사와 한 약속이 뭐가 있겠는가.
"약을 만들어 주기로 하신 건가요?"
무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스승님이 만든 약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무영 스스로 생각하기에 스승님과의 차이는 막대했다. 그 차이를 감안하면 유가장에서 무영의 신선단을 거부해도 할 말은 없었다.
물론 스승님이 다시 나서서 약을 만들어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스승님이 약속한 것은 신선단이었을 테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오라버니의 약은 정말 대단한 걸요."
서하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영의 스승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얼마 전 그녀가 먹었던 그런 약보다 더 대단한 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유가장이라 이거죠?"
서하린이 눈을 빛냈다. 무영은 그런 서하린의 눈빛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른 새벽, 무영은 약방을 나섰다. 무영은 서가장에 머물라는 서무룡과 서하린의 청을 거절하고 계속 약방에서 기거헀다.
오늘이 약방을 빌린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는 더 이상 약방을 쓸 수 없었다.
무영은 그날에 맞춰 하남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갔다가 다시 올 생각이었다. 이곳에는 서가장이 있고, 서가장에는 서하린이 있었으니까.
약방을 나선 무영은 잠시 뒤돌아 약방을 바라봤다.
"다음에 다시 오면 내 약방을 열어야지. 꼭 그렇게 해야지."
무영은 그렇게 자신의 결심을 중얼거린 후 다시 뒤돌아 길을 떠났다.
약방에서 소주를 벗어나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무영은 소주를 벗어나 남경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쪽을 통해 안휘로 들어서고, 안휘를 거쳐 하남으로 가면 된다.
일단 길은 대충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아 놨다. 하지만 들어서 아는 것과 실제 길을 가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처음 이곳 소주로 오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후우,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무영은 힘차게 걸었다. 일단 소주를 벗어나면 조금 빨리 이동할 생각이었다. 힘이야 넘쳐아니 경공을 써서 하루 종일 달려도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막 소주를 벗어나려던 순간, 무영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하, 하린......"
"오라버니, 저도 같이 가요. 유가장에."
"뭐?"
하린의 말에 무영은 깜짝 놀랐다. 설마 같이 가자고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은 새벽이다. 자신이 이 시간에 떠날 것을 어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저 집 나왔어요. 더 기다리면 아버지가 쫓아올 걸요? 그러니 빨리 가요."
"헉!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저 가출했다고요. 남궁세가로 시집 절대 안 가요. 그러니 어서 가요. 오라버니."
서하린은 멍하니 서 있는 무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영은 서하린에게 끌려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자, 잠깐......"
"일단 소주를 벗어난 다음 얘기해요."
서하린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 무영을 잡은 채로 경공을 펼치는데도 상당히 빨랐다. 마치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달려갔다.
그렇게 반의 반 시진 정도 달리고 나서야 달리는 것을 멈췄다. 무영은 그때까지 서하린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끌려다녔다.
아니, 끌려다녔기다기보다는 공중에 뜬 상태로 날아서 왔다. 서하린이 워낙 빨리 달리니 저절로 몸이 공중에 뜬 것이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린이 무영의 손목을 그제야 놔주었다. 무영은 서하린에게 잡혔던 부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직도 서하린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서하린은 무영이 손목을 쓰다듬는 것을 보고 아파서 그렇다고 오해를 했다. 서하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많이 아프셨어요? 죄송해요. 좀 급해서......"
"대체 왜 가출을 한 거야? 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괜찮아요. 걱정 안 하시도록 서찰 써 놓고 왔어요."
"서찰?"
서하린은 대답하지 않고 무영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본 무영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무영의 말에 서하린이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죠? 정말 같이 가는 거죠? 하아, 다행이다. 전 오라버니가 그냥 돌아가라고 할까봐 두근두근했어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서하린이 무영의 팔을 끌어안았다. 무영은 팔에 닿는 서하린의 부드러운 몸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풀썩 웃고 말았다. 그녀의 이런 밝음이 너무 좋았다.
서무룡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서탁 위에 놓여있는 서찰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자는 사이에 놓고 갔다는 뜻인데, 아무리 자고 있었다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서무룡은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몰래 들어온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만일 나쁜 마음이라도 가졌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서무룡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찰을 펼쳤다. 그리고 단숨에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서무룡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런 철없는 것!"
서무룡의 손에 있던 서찰이 와락 구겨졌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총관! 총관은 어디 있나!"
서무룡은 다급히 일어나 총관을 찾았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다.
"총관! 사람을 풀게! 어서!"
서무룡의 다급한 외침에 황급히 달려온 총관은 갑작스런 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멀뚱하게 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린이가 가출을 했네! 어서 사람을 풀어 흔적을 찾게! 어서!"
서무룡의 말에 총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예에? 예, 아, 알겠습니다."
총관은 서둘러 움직였다. 사람을 푸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서하린이 언제 집에서 나갔느냐에 따라 흔적을 찾아 어디로 갔는지 알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총관은 서하린을 찾기 어려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총관은 내심 서하린이 원망스러웠다. 최근 남궁세가로부터 계속해서 연락이 오고 있었다.
서하린을 남궁세가에 머물게 하면서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싶다 했다.
남궁세가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가장 앞서나간다 평해진다. 그런 세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서가장으로서는 막강한 뒷배를 얻게 된다.
'그런 중요한 상황에 가출이라니!'
서하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남궁세가로 가기 싫어 가출한 것이 분명했다.
만일 남궁세가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파혼을 하든지 아니면 서가장에 뭔가 압력이 들어올 것이다.
이래저래 서가장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총관은 그야말로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쾅!
탁자가 부서져라 주먹을 내리친 서무룡이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총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너무 일찍 도망가셔서 목격자가 없습니다. 너무 용의주도하게 움직이셔서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소주를 빠져나간지 오래인 듯합니다."
"허어......"
서무룡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더니 이렇게 결정적일 때 삐끗하고 말았다.
"한데......"
총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잇자 서무룡이 그를 쳐다봤다.
"뭔가?"
"공교롭게도 그 약장수가 소주를 떠났다 합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서무룡의 눈이 커졌다. 이건 뭔가 심상치 않은 얘기였다.
"그 약장수도 오늘 새벽에 소주를 떠났다 합니다."
서무룡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약장수와 서하린이 너무 친하게 붙어 다니는 것 같아 몇 번 주의를 주기도 했다. 한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우리 린이가 그 약장수 놈이랑 도망을 갔다는 말인가!"
서무룡이 경악을 가득 담아 외쳤다. 총관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 그 약장수는 어디로 갔다던가."
"하남으로 간다고 하고 떠났답니다. 정확한 목적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서무룡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하남으로 갔다고? 그 넓은 하남 어디로 갔는지 알고 찾는단 말인가! 지금까지 속 한 번 안 썩히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서무룡은 자신이 정말로 잘못하고 있는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서하린은 계속해서 남궁세가로 시집가는 걸 반대해 왔다.
그렇게 딸이 싫다고 하는 걸 굳이 억지로 강행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어렵구나. 정말로 어려워."
서무룡의 탄식에 총관이 그를 달랬다.
"제가 사람을 더 풀어서 흔적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남에 있는 무가 몇 군데에 줄을 대서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알았네. 수고하게."
서무룡의 말에 총관이 서둘러 물러났다. 서무룡이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서무룡은 총관이 나가자 몇 번 한숨을 더 쉬었다. 생각해 보면 서하린은 똑똑하고 강하다.
운룡검법이 팔성에 오른 이상 그녀를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정도면 후기지수 중에서는 발군의 실력이다.
"너무 예쁜 것도 문제로군."
서하린은 지나치게 예쁘다. 아마 그녀가 얼굴을 드러내 놓고 여기저기 다니면 꼬여드는 날파리가 장난 아닐 것이다. 개중에는 음적도 있을 것이고, 또 예상치 못한 강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다가 정말 명가의 개차반을 만나는 게 제일 문제지."
한 번 걱정을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었다. 서무룡은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서무룡의 한숨에 바닥이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주를 떠난 무영과 서하린은 되도록 육로를 이용해 이동하기로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남경이었다.
서하린은 얼굴에 눈 아래를 모두 가리는 면사를 썼다. 면사를 쓰지 않고 다니면 불편한 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어릴 떄부터 그런 일을 겪어왔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그런 준비는 이제 너무나 당연했다.
"차라리 남장을 할까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실 면사를 쓰긴 했지만 무영에게는 그것이 별 의미 없었따. 얇은 면사 정도야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스란히 무영의 눈에 드러났다.
"남장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무영의 말에 서하린이 허리에 손을 얹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내기 하실래요?"
"내기?"
"제가 완벽하게 성공하면 뭘 해주실 건데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녀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무영이 하참 동안이나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서하린이 답답했는지 나서서 말했다.
"입 맞춰 주세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입을 맞추다니. 그런 짓을 내, 내가 어떻게......."
무영이 심하게 말을 더듬자 서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슨 남자가 그래요? 아무튼 내기 성립이에요."'
서하린은 그렇게 말한 후,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곳에서 남장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조금 큰 마을에 들러 그곳에서 옷도 사고, 몇 가지 준비도 해야 남장을 할 수 있다.
서하린이 걸음을 서두르자 무영이 여전히 붉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어때요? 완벽하죠?"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남장은 꽤 성공적이었다.
아니, 대단한 성공적이었다. 흰 색 유삼을 입고 유생건을 써 머리를 정리한 그녀는 영락없는 서생이었다.
더구나 교묘하게 화장을 해 여성스러움을 크게 죽여 놓았다. 누가 봐도 남자라 할 만했다. 문제는 남자임에도 지나칠정도로 예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더 눈에 띌 것 같은데?"
"어쨋든 내기에는 제가 이긴 거예요. 그렇죠?"
무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린이 눈을 빛내며 무영에게 다가갔다. 무영은 기겁을 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자리에 서세요. 설마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을 셈은 아니시겠죠?"
"아니, 그, 그게, 약, 약속을 하긴 했찌만, 그, 그러니까......"
서하린은 새빨간 얼굴로 당황하는 무영의 모습에 풋 하고 웃었다.
그렇게 당황하는 무영의 모습이 그녀가 보기에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 그렇게 웃지 마."
무영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서하린이 무영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영이 숨을 멈추며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자, 이제 해주셔야죠."
무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눈앞으로 다가와 지그시 눈을 감은 서하린을 쳐다봤다. 정말로 가슴이 터져 버릴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서하린이 갑자기 눈을 떴다. 무영은 서하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서하린의 얼굴이 갑자기 더 커졌다.
서하린의 입술이 무영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무영은 그대로 몸이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서하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제야 무영은 움직일 수 있었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지 별수 없네요."
서하린은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걸어갔다.
무영은 그런 서하린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방금 전의 그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영의 얼굴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첫댓글 ㅎ 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