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대가야, 다시 세계인의 마음에 살다
김문숙
고령 지산리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분군의 귀한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 보물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 많은 국내인과 세계인이 이곳 고령을 찾을 것이라 생각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낙후된 지역이었다. 그런데 조금씩 발전을 거듭하더니 주산 능선에 자리한 지산리 고분군이 고령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그동안 고령의 전신인 대가야국은 많이 억울하였다.
고령은 5, 6세기경에 강성했던 대가야국의 도읍지다. 서쪽 덕곡면 너머에 신령한 가야산이 있고, 북쪽으로 산성과 봉수대가 남아 있는 의봉산이 있고, 남쪽에 금산이 있다. 금산 맞은편 쪽에 읍내를 향한 모습의 진산 주산이 우뚝 서 있고, 그 뒤로 미숭산이 있다. 동쪽 우곡면 곁에 태백시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흐르고, 가야산에서 고령 쪽으로 흘러내리는 대가천, 소가천, 안림천이 모인 회천은 대가야 읍내를 북동쪽으로 휘두르며 우곡면까지 흘러내려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높을 ‘고高’자에 신령 ‘령靈’자를 쓰고 있는 고령의 이름자는 서기 42년 대가야국, 562년에 대가야군, 고려 초 영천현, 1394년 고령현, 1896년 고령군이 되었다. 2015년 고령읍이 대가야읍으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변천이 있었다. 조선 태종 때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영’을 따와서 고령현으로 이름 지었다. 1읍 7개 면이 있으며, 3만여 명의 인구가 대구에 인접하여 살고 있다. 농업 인구가 많으며 특산으로 고령 딸기. 우곡 수박, 개진 감자, 옥미, 메론과 기와, 도자기, 토마토, 돼지고기가 있고, 한우농장도 다수다.
운수면 쪽에서 보면 두 팔을 활짝 펼쳐 고령군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는 듯한 가야산은 고대 대가야국의 건국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가야산에 살고 있는 산신 정견모주는 바르고 아름다웠다. 천신 이비가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예부터 정견모주의 설화가 있는 가야산을 이곳 사람들은 고령을 지켜주는 정신적 의지처로 신성히 여긴다.
대가야국은 42년에 건국한 시조로부터 16대 도설지왕까지 520년 동안 16대 왕이 존속했다. 이 지역의 고대 시대 변한과 반로국에서 전환된 대가야는 전기 가야맹주였던 금관가야가 힘이 유약해지자 5, 6세기경부터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가 되었다.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합천야로, 고령쌍림 등지에 품질 좋은 철산지가 있었고, 군사에 필요한 갑옷이나 투구와 무기들을 좋은 기술로 제작하여 무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군사들이 뛰어났다. 고대는 군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위세가 대단했다. 철의 왕국으로 불려질 만큼 풍부한 철은 경제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도읍지에 배를 건조했던 조선소가 있었고, 낙동강 곁 개진면에 가혜진加兮津으로 불리는 나루터가 있었다. 가야산 너머 위 지방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고, 북쪽 성주는 물론이며, 전라도로 향하는 거창에 길이 트였으며 낙동강을 끼고 있으니 남쪽으로 내려가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사통팔달의 입지였다. 철로 만든 무기, 농기구제품들과 농산물, 대가야 도요지에서 나는 토기들이 낙동강을 따라 왜와 중국으로 나갔을 것이다. 육로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교역도 활발했다. 신라에게 낙동강을 빼앗겼을 때 심지어 섬진강까지 세력을 넓혀 이 강을 따라 다시 바닷길을 열었다.
맹주로서 한창 위세를 떨칠 때는 나라의 지도가 가야산과 고령을 중심하여 남쪽 의령, 진주, 함안, 지리산은 물론 하동, 구례, 순천, 광양, 여수와 섬진강 유역을 세력권에 두었다. 백두대간을 넘어 북쪽으로 장수, 진안, 무주로 올라갔으며 이웃의 합천, 거창, 함양, 남원, 곡성, 임실, 순창까지 뻗었다.
서로 뺏고 뺏기는 고대古代인지라 영토를 넓히는 것은 국력이 왕성했기 때문이다. 환경적인 요인으로 경제적인 부국이 되면서 왕은 연맹체 수장들에게 문화물을 적당히 분배하며 지역적 화합도 다져 나갔다. 479년 6대 하지왕 시대는 멀리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남제에 사신을 보내 하지왕이 보국장군본국왕 輔國將軍本國王 작위를 수여 받기까지 했다. 신라도 중국과는 교역이 별로 없던 때였다.
가실왕은 음악을 정치에 유용히 썼다. 왕이 우륵을 불러들여 중국의 쟁錚을 참고하여 가야금을 만들게 했다. 가야금 모양에는 우주를 본떠 하늘과 땅과 공간의 의미가 들어있다. 괘의 높이에도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하며. 가장 소중한 개념이 깃들어 있다. 열두 줄은 사계절을 뜻했다. “제국의 방언이 각각 그 소리 내는 것이 다르니 하나로 할 수 없겠는가?”라며 우륵에게 대가야국 도읍지가 내용인 「상가라도上加羅都」가 포함된 가야금곡 12곡을 짓게 했다. 완성된 곡은 연맹 12소국의 방언을 일원화 시키고, 이 중 10곡이 연맹나라의 지명이 들어있다. 이 곡은 가실왕이 가야연맹을 단일화하기 위한 노력과 고심의 산물이다.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우륵과 3대 악기인 가야금과 대가야국의 상징 중의 하나인 가야금곡이 있었다. 연맹을 잘 통치하려는 포부에 찬 대왕도 있었다. 풍부한 철로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독자적인 아름다운 물결무늬의 토기와 함께 빛나는 문화를 가졌지만, 주변의 강국들이 세력을 넓히려 넘보고 있었다. 금관가야를 532년에 멸망시킨 신라가 30년 후 신라 진흥왕(23)때 대가야국을 멸망시켰다. 562년이었다.
멸망한 나라는 그 문화마저 사라지고 백성도 흩어지게 마련이다. 문화를 대표하는 음악과 우륵, 철을 주조하는 수준 높은 기술과 세공술, 뛰어난 조형미와 유려한 곡선미를 나타내는 도예 기술은 신라에 흡수되었다. 한창 나라를 크게 키우고 독특한 문화를 지니며 세력을 굳게 다져가는데 더 강성한 신라에게 맥없이 목줄을 잡혔으니 왕과 백성들은 한을 품었을 것 같다. 더구나 신라의 압제로 이렇다 할 기록도 변변히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잊혀져야 했다. 대가야국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이 나라는 신비에 싸여 고대의 시간 속에 묻혔다.
산 위에 무덤을 축조하는 것은 국력이 강성했을 때부터였다. 대가야는 지배자가 천신天神의 후손이라는 권위와 국력신장을 나타내기 위해 주산 남쪽 능선을 따라 지배계층 대형무덤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로 1천 여기가 넘는 중소형 무덤이 산재한다. 20세기에 들어 연구자료 확보와 복원 정비 전제하에 2012년까지 고분 440여기를 발굴 조사했다. 최초 발굴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해 11기를 도굴했다. 그러나 쏟아져 나온 유물들은 대가야국이 고대 일본문화의 선구였음을 증명했다. 해방이 되어도 도굴은 계속됐고, 나머지는 1977년부터 정식으로 발굴조사를 했다.
출토된 유물은 장신구인 금동관, 금동관식, 철제관식, 금·금동·은·동제귀걸이, 구슬목걸이, 팔찌, 휴대용 숫돌이다. 무장구는 판갑옷, 투구·마갑 등이며, 무기류는 고리긴칼류의 긴 칼과, 검, 소도, 도자, 창, 화살통장식 및 화살, 유자이기有刺利器, 도끼들이다. 생활용구는 방추, 야광패제국자, 청동합 등이며, 마구는 안장, 등자, 재갈, 행엽, 운주, 십금구〔띠연결구〕, 교구, 각종 말띠 장식 등이다. 이밖에 나무곽에 사용한 꺽쇠, 쇠못이 있다. 어느 봉분의 출토물인지 확실하지 않은 대가야 금관이 있다.
토기는 긴목항아리, 중경호中頸壺, 짧은목항아리, 대호大壺, 유대호有臺壺, 파수부호把手附壺, 유공소호有孔小壺, 각종 그릇 받침류〔器臺類〕,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대부완(臺附碗) 뚜껑들이며, 일부 토기에는 닭뼈, 누치뼈, 바다고둥 등의 식용품이 들어 있었다.
44호분에서 대규모 순장묘가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순장자를 위해 37인 이상이 순장된 왕릉이었다. 이 고분은 문헌으로 전해오기만 하던 고대 순장묘를 최초로 실증하였고, 순장 인원이 최대였다.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다른 곳의 가야 고분군보다 최대 규모인 지산리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찬란했던 대가야국의 고대 문화를 드러냈다. 역사의 공백으로 있던 그 나라가 세상에 나온 유물로 하나씩 시대의 빛나는 옷을 입으며 위상 높은 대가야국의 존재를 증명했다. 아직 많은 것을 더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분명한 이 나라의 실체를 알려야 한다.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대가야 읍내를 굽어볼 지산리 고분군은 군민의 안녕을 살피는 것처럼 느껴진다.
伽倻古國山連塚
月器荒村亡且存
小草斑斑春帶色
一年銷却一村魂
가야국 옛 무덤은 산 위에 이어지고
월기(지산리)쓸쓸한 마을은 없어졌다 다시 사네
어린 풀은 아롱아롱 봄기운이 한창인데
겨울이면 말랐다가 이듬해 그 혼 다시 돋네
-남명 조식 「월담정시月潭亭詩」 전문
이 시는 16세기 조선 중기 때 합천군이 고향이었던 조식 선생이 지산리 고분군을 찾아보고 한탄하며 지은 시이다. 또한 희망이 내재한 시이기도 하다. 합천군은 옛 대가야국의 땅이었다. 남명 선생의 시처럼 1400년이 흐른 21세기 지금, 신라에 멸망했던 대가야인의 혼이 스민 빛나는 문화가 한을 풀며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지산리 고분군이 문화재청과 관련기관, 애향심 강한 고령인들 노력이 더해 한국에서 16번째로, 다른 6개 가야 고분군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이제 대가야국은 발굴된 유물들과 함께 멸망할 때의 절망인 그 암흑에서 벗어났다. 앞으로 세계인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살며, 모두가 아껴야 할 찬란한 보배로 변신했다. 이 경사를 그 옛날 대가야인들은 하늘에서 축복해주고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 신라본기, 악지, 지리지
고령 대가야 박물관, 고령문화, 주산 시비
김새기 학술논문
가야, 잊혀진 이름 빛나는 유산
디지털고령문화대전,
문화재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고고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