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7호에 들어서며
H아파트 807호 현관문 앞이다. 비밀번호를 누르니 “띠리릭” 열림 소리가 난다. 손잡이를 가만히 당긴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를 입 밖으로 밀어낸다.
“누가 계십니까?”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내심 누군가 대답을 할 것 같아 겁도 난다. 당연히 807호에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 이곳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집이다. 아무도 없는 현관문을 마저 밀치고 들어선다.
이상한 일이다. 방금 807호를 떠나온 길인데 다시 들어선 집이 807호다. 이상한 것은 또 있다. 현관 비밀번호가 남편의 휴대전화기 중간 번호와 일치한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지만 신기하다. 이 곳이 나의 집이 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이랄까.
남편은 역마살이 있다. 그런 남편 때문에 결혼을 하고 이년 혹은 삼년마다 어딘가로 옮겨 다녔다. 집을 옮기는 것은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 거기다가 이사 할 때마다 꼬박 꼬박 지불해야 하는 세금과 부동산 수수료와 이사비용은 또 얼마인가. 이사하는 것이 취미라고 한다면 아주 비싼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도 이사를 가고 싶어 탈모가 일어날 정도면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옮겨야 한다. 사람이 상하면 돈도 집도 모두 의미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사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힘이 든다. 시간이 많은 내가 집을 팔기위해 사람을 상대하고, 또 살 집을 보러 다녀야 한다. 체력이 약한 나에게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 보상으로 이사를 할 때마다 내가 마음에 드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내가 선택한 곳이니 나는 가는 곳마다 잘 적응하고 만족하며 지냈다.
남편은 달랐다. 이사를 하면 처음에는 집 여기저기를 꾸미며 콧노래를 불렀고 가끔 주말에는 혼자서 대청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콧노래와 대청소도 일 년이면 충분했던 모양이다. 일 년이 지나고 나면 남편의 어깨는 점점 내려앉고 웅크러져 갔다.
밤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편이 누웠던 베개에는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있기가 일수였다. 그러고는 이웃집이 쓰레기를 내 놓는 것이 마음에 안 드네, 자잘하게 울리는 위층의 소음에 가슴이 쿵쿵 거리네······. 불평은 흔했다. 즉 이사를 갈 때가 되었다는 징조였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지나왔던 행적을 그대로 답습하며 말수가 줄어들었다. ‘하아’ 저음으로 길게 내쉬는 숨소리는 마치 내 귀에 똑똑히 들어가라는 듯 확실했다. 한숨의 이유는 집이 대로변에 위치해서 너무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자동차 소음에 여름에 창문도 열어놓지 못하고 사는 것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편리한 생활을 하려면 도로가 넓은 곳에 살아야 한다. 도로가 넓은 곳에는 대형 마트가 흔하고 지하철을 비롯해 버스정류장도 가깝다. 그러니 자동차 소음은 도시에 살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이다.
남편의 속이 보였다. 부부생활 이십 년인데 ‘척’하면 ‘착’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부부다. 남편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이사는 당연히 가야했다.
집은 매물로 내 놓자마자 팔렸다.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니며 남편은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당신이 원하는 집으로 할게. 대신 이번에는 오래 살아야 해” 그 말에 남편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대충 몇 개의 살고 싶은 아파트후보지를 정했다. 원래 H아파트는 후보지에 없었다. 허나 부동산과 약속을 잡는 과정에 시간이 조금 남았다. 자투리 시간에 그냥 있기 무료해서 구경삼아 H아파트에 매물을 보러갔다.
H아파트 807호에 들어섰을 때 썩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그곳이 807호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현관을 지나고 중문을 지나 화장실과 작은 방 두개를 둘러보았다. 내부는 어두운 색으로 꾸며져 있어 칙칙했다. 방마다 벽에 못이 쌍을 이루며 이쪽저쪽 박혀 있었다. ‘요즘에도 벽에 못을 박는 사람이 있구나.’ 그것이 집의 첫인상이었다.
부동산 중개인이 친절하게 설명을 하여 그냥 예의상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을 지나 거실 창 앞에 섰을 때였다. 남편의 입에서 짧고 희미한 감탄사가 재빨리 튀어나왔다. 창밖에 회색빛 숲이 놓여있었다. 적막한 겨울의 숲! 도심 속에 이런 풍경이 존재하다니······. 그곳에서 앙상한 가지사이로 회색바람이 수수수수 우리 부부의 마음속으로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때였을까. 집의 정령이 우리의 발목을 잡은 순간이.
숲 풍경을 본 후 다른 아파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H아파트 매물은 흔했다. 여러 집을 둘러보았다. 가는 곳마다 창밖에는 회색의 숲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딱히 “여기다” 싶은 곳은 없었다. 많은 집을 둘러봐서 뭘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남편과 나는 잠시 머리를 비우고 한 박자 쉬어가기로 했다.
보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 어디쯤에서 우리는 다급한 노크소리에 생각 없이 반응하듯 계약금을 보내고 계약서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받아든 계약서에 H아파트 807호 라는 글자가 더욱 크게 눈에 들어왔다.
‘집은 다 주인이 있다’는 말이 있다. 가만히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집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 의해 선택 당한다는 뜻도 숨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807호의 정령이 우연이라는 복면을 쓰고 우리부부를 불러 들였던 것인지 모른다. 분명 우리부부는 그 집의 정령에 의해 선택 당했다. 그것을 필연이라 하지 않던가.
뒤돌아보면 남편과의 만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꾀죄죄한 행색에 앙상한 얼굴을 가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냥 스쳐가는 인연인 줄 알았다. 그러니 한 번의 만남이 두 번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남은 반복되었고 결국 부부라는 인연의 줄로 묶여버렸다.
우연이란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가는 모든 일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필연이라는 운명의 그물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역마살이 있는 남편을 만난 것이나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것도 모두 내가 받아들여야 할 필연인 것이다.
807호는 지난 이년 나의 집 이름이다. 그 집을 떠나왔고 도착한 집에 같은 문표가 있다. 다시 807호! 여기는 또 다른 필연이다. 반드시 살아야 하는 곳이라면 이곳에서는 남편의 콧노래 부르는 날이 오래가기를, 무엇보다 남편의 역마살이 숲의 정령에 의해 잠재워지기를 희망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