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성장
요즘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돌아간다.
예전엔 몇 시간, 며칠, 몇 달 걸렸을 일도 즉각 해결된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나서 편지는 당팽이 우편이라고 펌하된 지오래다.
방대한 전보를 클릭 한 번으로 얻을 수 잇으니 도서관에 갈 일도 없다.
은행 업무와 쇼핑도 온라인으로 해결된다.
뉴스는 어떤가, 하루 종일 각종 매체를 통해 뉴스가 쏟아지니 이제는 신문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전자레인지 덕분에 즉석식품을 데우기만 하면 식사 준비도 끝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시간을 절약해 주는 기술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기술은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기다릴 일이 많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참을성도 차츰차츰 없어진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조급함은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피정이든 책이든 어떤 영적 체험이든, 하룻밤에 우리를 바꿔줄 뭔가를 찾는다.
즉각적인 해결책을 바란다. 우리는 성경에 나온ㄴ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말에서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교회는 이 사건을 기념하며 해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생각도 들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삶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처럼, 나에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
나에게도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놀아운 일이 생기면 좋을텐데...
그러나 바오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 사건을 통해 그의 신앙 여정이 시작되었을 뿐 완성은 저 멀리 있었다.
회심 사건이 있은 뒤에도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으며 그 과정은 투쟁이라고 자주 언급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보면 선한 싸움, 경주, 몸의 가시, 채찍질, 아직 얻지 못한 상(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상)을 얻으려 달려감 등의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우리 여정도 그럴 것이다.
사실 바오로 사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삶에도 하느님께서 극적으로 개입하신 적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번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경험이 여전히 우리에게 강력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칙 있으리라 희망한다.
우리의 체험은 분명 하느님의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극적인 경험은 끊임없는 훈련과 인내와 끈기로 예수님을 따르면서 체험한 가장 빛나는 순간일 뿐이다.
하루아침에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 한편에서 그렇게 되기를 종종 희망한다. 특히 사순시기가 되면 그러한 바람은 더 커진다.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특별히 더 노력을 기울인다.
친구 사제가 한 마ㅏㄹ에 따르면 사순 시기는 휘대한 유산의 시기다. 그 기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사순시기가 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힘든 훈련을 자청해 시작한다.
이런저런 것을 포기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매일 미사를 드리는 등 여러 가지를 실행한다.
그리고 얼마 동안 이 결심을 잘 지키다가 오래지 않아 지치고 좌절한다.
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베어 물었기 때문에 영적 소화불야에 걸린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위대한 도약이 아닌 걸음마에도 만족해야 한다. 미터가 아니라 센미터로 우리의 성장을 측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때때로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고 심지어는 퇴보하는 듯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고 성장하기 어려울 거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싶을지언정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둘째, 하느님은 우리가 희망을 잃는 걸 원하지 않기에 우리가 좌절하길 바라지 않으신다. 희망없는 삶은 지옥과 같다.
셋째,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참아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를 참아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무너지거나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아주 천천히 우리를 이끄신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인내심을 과소평가하기 쉽다.
우리 자신이 인내심이 없다 보니 하느님도 우리와 같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분명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았거나 더는 견딜수 없는 한계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중세의 유명한 신비주의자인 노리치의 줄리안은 하느님을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는 당신 집에..
한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신비스런 멜로디와 함께 거하시는 분으로 묘사했다.
우리가 가끔 떠올리는 가혹하고 인내심 없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에 더해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은 그분 것이다.
바로 이런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거룩해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참 다행이다.
예수님이 눈먼 이를 고쳐주신 일화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눈먼 이의 눈에 손을 얹으시자 그가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그가 똑똑히 ㅂ게 된 것은 예수님이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고 나서였다.
예수님이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하신 걸까? 그래서 다시 손을 대셔야 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신앙 여정에서 빠른 해결책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눈먼 이가 당신의 시선으로 보도록 예수님은 그의 눈에 두 번 손을 얹으셔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 눈에 더 여러 번 손을 얹으셔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은 우리를 인내하시며, 우리에게도 인내심을 가지라고 청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