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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4) 2023. 7. 23
간증의 사람, 느헤미야
느헤미야2:9-20
<치밀한 사람,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의 고난을 못 본 체하지 않은 ‘공감의 사람’의 사람이었습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4개월 만에, 아닥사스다 왕을 만났을 때, 수심이 깊은 얼굴로 왕의 관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철저히 준비된 말을 하였습니다. 왕이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예루살렘’의 ‘예’자도 거명하지 않고, 자신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곳’이 황폐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정치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프레임을 전환).
그러나 사실 왕에게서 자신의 소원을 관철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벽공사를 중지시키는 조서를 내려보낸 장본인이 바로 ‘아닥사스다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4)고 물었을 때,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에 앞서, 짧은 시간이지만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얼마나 떨렸을까요?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왕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또 다른 준비된 요구도 덧붙입니다.
1) 행정적인 배려입니다(7). 자신이 유다에까지 가는 동안 거쳐야 할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들에게 협조를 얻을 수 있도록 증명서를 요청합니다.
2) 물질적인 지원입니다(8).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세우기 위한 목재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자신의 집까지 치밀하게 계산).
3) 군사적인 협조입니다(9). 느헤미야가 직접 구한 것은 아니지만, 왕은 군대 장관과 마병까지 붙여 호위까지 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왕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기 때문’(8)이라고 증언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느헤미야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그리고 도착>
드디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9~10절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왕의 행정적인 배려(왕의 조서 - 통과 증명서)는 느헤미야의 귀향의 안전과 속도에 엄청난 영향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9절에서 출발했는데(“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절에서 도착했습니다(“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그만큼 아닥사스다 왕의 배려는 느헤미야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습니다.
<부지런한 느헤미야>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불과 사흘 만에 첫 번째 일을 시작합니다.
11절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이것은 굉장히 서두른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성격이 대단히 치밀하면서도, 대단히 적극적이고 부지런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무려 1,20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요즘이야 비행기로 불과 몇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당시에는 최소한 몇 개월이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길이었습니다. 게다가 혼자서 하는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와 함께 귀국한 유대인은 무려 ‘42,360명’이나 되었습니다. 함께 움직였는지, 따로 움직였는지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대규모 일행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1차 포로 귀환’ : 스룹바벨이 이끄는 첫 번째 귀환(BC 537년 - 49,897명 귀환). 이때 귀환한 사람들은 어렵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제2성전 -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80년 후, ‘2차 포로 귀환’ : 학사(서기관) 에스라가 이끄는 두 번째 귀환(BC 458년, 1,754명 귀환). 에스라는 율법을 다시 가르치고, 1차 귀환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결혼한 문제들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13년 후, ‘3차 포로 귀환’ : BC 444년, 느헤미야가 이끄는 세 번째 귀환(42,360명 귀환). |
아마도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느헤미야와 그의 일행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성벽 터 현장점검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할 때는 금요일 해 지기 전에 돌아가셔서 주일날 새벽 동트기 전에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그 사흘 중에 온전한 날은 하루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음 날 딱 하루 쉬고는 그 다음 날로 일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 머나먼 길을 오느라고 쌓인 피로를 풀자면 한 주일 이상 휴식이 필요할 법도 한데, 느헤미야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여러 방해 세력이 있음을 고려할 때, 지체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질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할 때, 시간을 활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진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매우 서둘러서 처리하는 방밥입니다.
이 둘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앞에 나아갈 때는 기도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내하면서 준비하였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일은 지체하지 않고 진행하였습니다.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느헤미야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야간 순찰자>
그러면 느헤미야가 행한 첫 번째 일을 무엇입니까?
12~16절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13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14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16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느헤미야가 귀국한 목적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기 위함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현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몰래 밤에 일어나서 예루살렘 성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몰래 ‘야간 순찰’을 한 것일까요? 예, 우리가 다 짐작하다시피, 예루살렘 성벽건축을 방해하려는 세력들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정보가 미리 새어나가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내부에도 유다의 대적들과 내통하는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반대에 부딪히는 것을 피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현장을 둘러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일들을 진행해야 할지 구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을 거쳐서 ‘분문’에 이르는 동안 예루살렘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있고 성문은 모두 불에 탄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샘문’과 ‘왕의 못’에 다다르자 무너진 잔해로 인해서 더 이상 타고 있던 짐승이 지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드론 시내의 계곡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부터 올라가면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다시 골짜기 문을 통해서 돌아왔습니다. 그가 확인한 것은 성벽의 일부분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성벽 전체가 다 무너져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하게 무너져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성벽을 쌓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바사에서 그와 함께 온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일시에 다 동원되어야만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지만,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동시에 치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의 치밀함이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지 않았습니다. 직접 ‘야간 순찰자’가 되어, 현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치밀함으로 보였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가장 먼저, 자신이 책임져야 할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강남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온통 뒤숭숭합니다. 이에 대한 교사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학부모의 갑질이 있었는지 본격적으로 조사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동안 곪아왔던 것이 이제야 터졌을 뿐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서 그와 비슷한 사례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읽어보니 그것이 정말 사실일까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 수두룩합니다. 문제는 교육부 장관, 교육감, 학교장이 지금 학교, 교사, 학생, 학부모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뒷북치며 수습하기보다는, 먼저 현장의 소리를 귀담아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양서면에서 강산면으로)을 놓고도 온통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그 변경의 이유가 대통령 처가 땅 때문이라는 의혹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 문제입니다. 권력자는 스스로를 제어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토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현장을 정확히 파악해서 설명하려는 노력보다는, 무조건 방어하려고 ‘백지화하겠다’라며 국민을 협박하고, 앞뒤도 안 맞는 주장을 막 늘어놓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요즘 수해로 나라 곳곳이 난리입니다.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 큰 재산상 손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때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정책을 지휘하는 책임자들이 탁상공론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나가야 합니다(모범사례 – 군산시).
뒤늦게, 수해 복수한다고 생색을 낼 것이 아니라 예방을 해야 합니다. 미리 대책을 세우고 방비를 해야 합니다.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어느 도지사는 “내가 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스스로 자신이 필요 없는 무능한 지도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다시 세우거나, 허물어진 삶을 회복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몇 마디 구호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평가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간증의 사람, 느헤미야>
예루살렘 성벽이 처참하게 무너져있는 것을 확인한 느헤미야는 드디어 전략을 짰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일은 몇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될 일이 아니고, 모든 유대인들이 다 함께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날을 정해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귀족들, 그리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한자리에 모으고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습니다.
17~18절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핵심은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정신적, 정치적 구심점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안전히 지켜져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다 무너지고 문이 다 불타 없어진 채로 긴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음을 역설하고 지도자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말을 잘 살펴보면, 지도자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과 동일시하여 말합니다(17).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1장에서 보았듯이 느헤미야는 ‘공감의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고난과 수치를 듣고서 금식하며 기도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당한 곤경’을 해결해주려고 온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한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파사 제국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교육받고 인정받아 왕의 술 관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늘 고국 예루살렘 사람들과 한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의 수치는 곧 자신의 수치’였고, ‘그들의 슬픔은 곧 그의 슬픔’이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일처럼 생각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이 일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일임을 간증하였습니다.
18절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는 자신이 페르시아 수산궁에서 처음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넉 달 동안 울며 기도한 일,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셔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예루살렘 성의 재건 공사 허락을 받아 낸 일, 그리고 자신의 요구대로 왕의 삼림에서 최고급 목재를 공급받게 된 일, 또 자신이 구하지도 않은 군사들까지 붙여준 일 등을 구체적으로 간증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돕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간증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눌 때, 듣는 사람들도 함께 용기를 얻습니다.
느헤미야의 간증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절망과 패배주의가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자고 하는 열정을 회복시켰습니다. 느헤미야의 간증을 듣고, 백성들은 ‘자, 일어나 건축합시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백성들의 대답은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폐허 속에서 살아온 것이 한두 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벽이 허물어져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익숙했습니다. 13년 전에 에스라가 왔을 때에 이미 성벽건축을 한 번 시도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잘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안 해 볼 줄 아십니까? 예전에도 해봤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고 뭐 다른 줄 아십니까? 다 소용없는 일이예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해 봅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한 번 해보자’고 그러는 겁니다.
이것이 간증의 힘입니다. 한 사람의 은혜 체험이 공동체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간증 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 역사하신 간증은 언제나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간증을 통해 많은 성도에게 힘을 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방해하는 사람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이니까 그냥 쉽게 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9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 호론 사람 산발랏입니다. ‘산발랏’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유력한 지도자였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의 재건되고 유대인들이 다시 강성해지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암몬 사람 도비야입니다. ‘종이었던 도비야’라고 되어있는데, ‘종’이라기 보다는 '신하'로 해석하는 게 맞습니다. 즉, 산발랏의 신하라는 말입니다. 도비야는 산발랏의 참모로 아주 지능적인 전략가입니다. 그리고 도비야는 유대인들의 지도자 계층과 친인척 인맥을 갖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에도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조직 안에 스파이를 심어놓고 느헤미야의 진영에서 내부 정보를 계속 빼내는 일을 하고 느헤미야를 힘들게 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아라비아 사람 게셈입니다. ‘게셈’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에돔 지방의 행정관이었습니다.
이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 나선 이유는 10절에 있습니다.
10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이 중수되고 유다 민족의 공동체가 재건될까 봐 마음 졸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던 자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들은 근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흥왕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누린 유다에 대한 통치와 행정권을 잃게 될 것이 뻔하였기에 그들은 근심 가운데 느헤미야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유다의 지도자들이 성벽을 건축하자고 다 일어나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방해 작전에 돌입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슨 말로 방해하였습니까?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19)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계략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롱하는 말로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업신여기고 비웃어 말합니다.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얼 가지고 그런 공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도대체 될 일을 해야지. 너희가 정말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보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기술자도 없었고 필요한 재료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들 눈에는 성벽을 건축한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이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협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겁을 주어 공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아주 심각한 협박 무기입니다. 사실 에스라 때에 이 말이 강력한 무기가 되어 성벽건축을 중단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말이 공포가 되지 못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성벽재건공사를 허락’하는 왕의 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느헤미야의 반박>
그들의 조롱과 협박에 느헤미야가 반박하였습니다.
20절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내가’ 주어입니다(1:1 “‘내가’ 수산궁에 있는데.”). 즉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본인이 기록한 자서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느헤미야의 대답을 보면서 그의 신앙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 같으면, 아닥사스다 왕이 성벽을 허락한다는 조서만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명령과 조서에 따라서 공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종들로서 그의 뜻을 받들어 성벽을 건축하려 할 뿐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맞섰습니다.
시편 127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
그리고 끝으로 느헤미야는 그 대적들에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고 잘라 말하며 성벽 건축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 것을 단호히 표명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주의 일을 하려 해도 반드시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조롱하고 협박하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사탄은 움직이는 목표물에만 화살을 쏩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 무언가 새롭게 일어서려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겨냥합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협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의 느헤미야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 기도와 치밀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는 담대한 믿음으로, 주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어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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