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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4) 2024. 6. 2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행전1:12-14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두 가지 명령과 한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행1:4-5).
두 가지 명령은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둘째,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은 그들이 순종하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남기시고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제자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을까요?
첫째, 말씀에 순종하여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12절).
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감람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서 예루살렘 성과 마주 보고 있는 산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 기도하러 다니신 산이고, 마지막 날 기도한 곳도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이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말은 아니라 ‘가깝다’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을 해석한 책인 미쉬나에 의하면, 안식일의 여행 거리는 최대한 2천 규빗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2천 규빗은 약 1km 남짓 되는 거리입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그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산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두 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북쪽 갈릴리지방 출신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떠나고 계시지 않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낙심하여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안 계시기 때문에 다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떠나지 않고 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 당하실 때 제자들이 숨어있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찾아가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신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저는 성지순례 중에 그 다락방에 가 보았습니다. 약20-30평 남짓 되는 공간인데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사진 보여주기). 바로 이 ‘마가의 다락방’이 초대교회의 요람이자 산실이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터전이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의 ‘마가의 다락방’인 ‘교회’를 떠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
그런데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5:6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을 500여 명의 사람이 목격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도 전해 들은 이야기일 테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장면을 목격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는 약 120명 정도였습니다(15).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불과 1km 남짓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중간에 많은 사람이 흩어졌습니다.
그분들이 왜 흩어졌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다 바쁩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바쁜 사람의 종류를 설명하셨습니다(마22, 눅14).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매우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혼인 잔치에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였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인은 종들을 네거리 길로 보내,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은 그 잔치에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았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이 말씀은 순종하는 사람은 적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아주 기본적인 명령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의 화제는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뜬 가수 김호중 씨의 음주운전 사고와 도주였습니다(운전자 바꿔치기, 매니저에게 대신 뒤집어씌우기). 그로 인해 그가 입은 손해는 엄청납니다(구속, 그동안 쌓아 올린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짐, 그가 속한 연예 기획사 폐업, 경제적 손실 등) –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를 키워 준 할머니가 2008년 대장암으로 돌아가시며 남긴 "하늘에서 지켜볼 테니 똑바로 살라"는 유언에 폭력 써클을 탈퇴하는 등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명령에 순종하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술을 먹고 운전해서는 안 된다’는 아주 상식적인 규율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을 때는 동의하고, 결심하기도 하지만 막상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하지만 지키기 어렵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급하고 바쁜 일이 있어서 그리로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뒤로 미루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몽골 선교사인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벌러르'라는 자매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교회로 들어오더랍니다. 이 자매는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그 소를 찾으러 뛰어나갔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하니까 소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는 겁니다. 몽골에서의 소가 귀중합니다. 소는 그들의 삶의 기반이요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소 한 마리가 보통 사람의 1년 치 월급과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자매는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예배가 중요하다’ 주님의 말씀을 그 어떤 것보다 소중히 생각하고 소를 포기하고 교회로 달려온 겁니다.
놀라운 것은, 예배를 마치자마자 예배당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나가서 보니까 잃었던 소가 스스로 예배당으로 주인을 찾아왔습니다. 소를 잃어버렸을 때, 소를 찾는 일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배를 선택했는데, 하나님은 예배의 기쁨과 함께 소를 찾는 기쁨을 모두 얻게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흩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120명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한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 성령님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바쁘고, 다 할 일 많고, 다 자기 스케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의 계획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13~14절).
13~14절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누가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약 120여 명의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가룟 유다가 제외된 예수님의 11명의 제자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아우들이 함께 모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우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막6:3)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초창기 때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승천 사건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고 결국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가 바로 예수님의 친형제였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던 목회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공생애 시절 12명의 제자와는 구별되는 70명의 제자들도 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다 합치면 얼추 120명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소위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다 도망쳤습니다. 특히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의리도 없이 그것도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소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수제자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습니까?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간 아들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마리아의 마음이 그들을 용납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그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또,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에 함께 앉아있는 예수님의 동생들을 보면 아마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귀신들렸다’며 잡으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다니며 온갖 고생은 자신들이 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니까 그의 가족이라고 나타나서 큰소리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사랑해서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여인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십자가 가까이 갔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그의 시신을 내려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자 무덤을 찾았다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제자 공동체에 가장 먼저 전하였습니다.
그녀들이 보기에 거기 다락방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비겁하게 자기만 살자고 다 도망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락방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전전긍긍했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어도 믿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여자인 자신들만도 못한 겁쟁이 남자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 한심해서 속이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는 일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약 120여 명의 사람은 서로의 약점과 상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약점을 감싸 안으면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곳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는 그곳에 성령이 임재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 되게 하는, 일치의 영입니다.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는 나뉘었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원수가 서로 화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악한 영, 마귀는 분열케 하는 영입니다. 서로 자신의 옳음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정죄하는 곳에는 언제나 마귀가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분열하고 나누고, 싸우고 다투는 곳에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던 처음 교회의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허물을 감싸 안고, 서로 용납하고 더불어 마음을 같이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 바로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온 환경이 다 다르기에, 신앙의 수준이 다 다르기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다 녹아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런 교회가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신분과 성별, 출신과 직업, 빈부의 격차, 삶의 수준 등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먼저 온 것’, ‘나중에 온 것’을 따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상처를 줄 수 있고, 봉사와 헌신을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엡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렇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여 명의 성도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었을 때, 성령의 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 우리 교회도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주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14절).
14절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한 일은 무엇입니까?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기까지 거의 열흘 가까이 제자들은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로 번역된 헬라어(‘프로스카르데레오’)는 ‘자신을 붙들어 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자신들을 붙들어 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만 집중했다는 말입니다(지속).
물론 열흘 동안 기도만 한 것은 아닙니다.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모여서 대화도 했을 것이고, 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기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과가 기도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가장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떻게(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하는지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가르치신 것이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가장 좋고, 빠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대화하는 것입니다.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한 곳은 강원도 정선으로 탄광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폐광이 되어 화전민들만 남았지만, 한때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닐 만큼 경기가 좋았던 곳입니다. 저는 기회가 되어 탄광에 들어갈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땅속 400m까지 내려가면 두렵습니다(세상과 단절된 느낌). 어떻게 그런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지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전화선입니다. 이 전화선을 통하여 외부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땅속 깊은 곳에 내려와 있지만, 전화선을 통해 외부와 소통할 수 있기에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교제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제는 일회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제는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통(대화)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이 자연스럽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기도에 대한 정의 가운데 가장 멋있는 것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는 표현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호흡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는 사람만이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는 중에 오셨습니다. 기도하는 곳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신앙의 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떠났습니다.
첫째, 예루살렘(마가의 다락방)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12절).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떠나지 않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둘째,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는 하나 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교회는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 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셋째,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에 자신을 붙잡아 매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시대의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내려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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