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성녀 힐데가르트( 1098년~1179년)의 영성-(1)
하늘이 내린 환상을 보는 아이
힐데가르트는 1098년 라인헤쎈 지역의 베르메스하임에서 작위가 없는 귀족 아버지 헬데베르트와 어머니 맥틸드의 열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세 살 무렵에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부모는 중세 당시 많은 부모들이 그러했듯 열 번째 아이 힐데가르트를 십일조로 신에게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 맹세에 따라 그녀는 여덟 살에 디지보덴베르크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유타에게 보내졌다. 한편에서는 어린 시절 몸이 너무 약해 신의 뜻을 따라 수도해야만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20대였던 은수사 유타는 수폰하임 백작의 여동생으로 힐데가르트는 다른 한 명의 또래 여자아이와 함께 유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힐데가르트는 유타에게서 종교적인 가르침 외에 포괄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타 자신이 귀족계급 출신이었으므로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었을 것이고 이는 그녀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거기에다 당시 베네딕트 수도원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지식을 접할 기회가 풍부했다. 힐데가르트는 중세시대에 여자라는 불리한 위치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받았고 이는 그녀가 40대 이후 쏟아낸 업적들의 밑거름이 되었다.
1112년에서 1115년 사이에 힐데가르트는 평생 수도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밤베르크의 주교 오토의 집전으로 베네딕트 수도원에 입회, 수녀가 되었다. 그 시대 수녀들은 남성수도원에 부속된 여성수도원에서 살았는데 그녀가 들어간 디지보덴베르크의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수도원의 원장은 유타가 맡았다. 이 시기 힐데가르트는 하늘에서 내린 현시를 끊임없이 보았지만 스승 유타의 충고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녀의 현시가 종교조직으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녀는 물론 수녀회 전체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힐데가르트는 38세에 유타가 죽은 뒤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10여명으로 늘어난 공동체의 후임 원장으로 선출되어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1179년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방안에서 쌍무지개가 뜨고 아름다운 향기가 났다고 전한다. 또한 성녀의 묘지에서 기도한 사람들은 치유를 얻었다고 한다. 부패한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한 성녀이었기에 사후 830여년이 지난 2012년에서야 교황 베네딕도 16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올랐으며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
1. 21세기에 거듭난 교회 박사 성녀, 힐데가르트
13세기 당시 파리 대학의 신학자 윌리엄 오브 오세르는 “힐데가르트의 글에는 인간의 말이 아닌 신성한 말씀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힐데가르트는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았으며, 마치 수로처럼 비워진 성녀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지혜가 흘렀고, 이 지혜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많은 이들 안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성녀는 신비가, 예언자, 치유자, 음악가, 신학자, 조언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마주 서 있다. 우리는 각각의 장면에서 성녀를 만나고, 다양한 색상이 처음부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듯이 그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서 힘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그 음성과 향기에 마음을 기울일 때 스며드는 성녀의 영성이 하느님께로 집중하도록 이끈다.
2. 다양성 밑에 흐르는 일관된 신학
성녀에 관한 국내 연구의 상당수는 생태 신학과 신비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 비해 뛰어난 신학자이기도 했던 베네디도 16세 교황은 성녀가 여성으로서 신학에 미친 영향에 주목했다. 교황은 특히 여성 고유의 지혜와 감수성으로 하느님과 신앙의 신비에 관하여 서술한 부분을 들며 신학에 기여한 성녀의 업적을 부각한다. 이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일반적 신학 서술이 사랑과 관계성을 중시하지 않는 점과 대비된다. 또한 신학자들이 주목한 점은 자연 안에 깃든 하느님의 창조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성녀의 면모였다. 그녀의 신학에서 강생과 창조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세계는 하느님의 자궁 안에 깃들어있다고 묘사된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선함과 완전함 및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성사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자연과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긴밀하게 연결된 통전적(integral) 생태학이 드러난다. 이 점에서 성녀의 생태신학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반포한 ‘찬미 받으소서’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성녀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통점은 덕의 실천을 창조 세계 보존과 회복의 핵심 요소로 꼽는다는 점이다. 성녀는 사랑과 겸손, 그리고 평화를 강조한다. 이와 유사하게 프란치스코 교황도 하느님의 사랑과 피조물간의 사랑과 책임, 피조물로서의 겸손한 자의식 및 정치경제 제도와 가치관의 변화로 평화가 생태계 회복의 중심에 놓임을 강조한다. 그 내용이 집약된 ‘생태적 회심’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직조된 논리와 직관을 종합한 ‘찬미 받으소서’의 정점에 자리 잡는다.
성녀를 대변하는 또 다른 영역인 약학과 의학을 연결하는 고리도 여기서 드러난다. 창조된 세계와 하느님, 인간관계를 성찰한 신학의 연장선에 ‘창조된 상태로의 복귀’로 이해되는 ‘건강함’이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성녀가 의학과 약학에 집중했던 노력의 이면에 공동창조자인 인간이 창조질서를 회복한다는 이해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성녀가 인간의 몸과 약초를 창조 질서 안에서 이해하면서 질병을 고치려 했던 노력은 그녀의 세계관과 신학과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편, 성녀의 예언자적 활동과 개혁을 위한 노력도 창조 질서 회복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최근에 많은 관심을 받는 그녀의 사회활동은 날카로운 비판의식에 머물지 않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쇄신 노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봉쇄수도원에 속했던 성녀는 성직자의 부패를 고발했고, 교황과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수도원을 마련할 당시 수녀들의 재산과 지위를 통하는 권리를 놓고 수도원장과 당당히 논쟁을 벌였고, 파문당한 이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몇 달 간의 침묵 수행도 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수녀들이 아름다운 예복과 긴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도서관을 수녀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녀의 신비체험과 저술을 두고 무수한 비난과 의심이 제기되었지만, 마침내 교회의 승인을 받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자신의 경험과 전해 받은 내용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사회 지도자들과 만나 의견을 전하거나 설교하는 등, 현대 사회에서 봐도 여성으로서 놀라운 활동을 수행했다. 그녀의 존재와 활동, 저술이 여성에 대한 인식과 지위를 바꾼 점에서 여성 운동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성녀의 활동과 저술은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과 피조물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 그리고 창조된 세계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의 굵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녀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장면인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성녀의 음악은 감미로운 선율의 도약진행의 특징을 갖는다. 그녀에게 음악은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활동이자, 창조의 조화를 재현하는 장으로 이해된다. 음악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이 만들어낸 세계의 아름다움을 선율로 나타내는 활동이다. 이 때 인간의 몸과 마음이 모두 어울어진 아카펠라는 웅장한 교향곡의 선율을 노래한다. 성녀는 미사곡 전체를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수녀원의 전례를 위해 작곡하였다. 그녀에게 찬송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수도자를 주요한 대상으로 저술된 책과 음악은 선발한 수도자의 일상이 아름다운 음악과 찬송으로 채워져 하느님을 향해 상승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려는 그녀의 노력을 보여준다.
3. 힐데가르트의 지속적인 영향력에 대한 이해
힐데가르트의 다양한 활동이 결실을 맺고 당대에 널리 알려져 오늘날까지 보존,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대 교회의 인정이다. 당대 교회가 예외적으로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성녀의 활동한 이유는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그의 제자인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는데 성녀의 저술이 인간의 지혜에 그치지 않음을 검토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는 당시 베네딕도 수도회가 처했던 어려움을 정확히 파악했으며 기도와 노동은 분리 불가능한 수도 생활의 방편이었다. 베네딕도회는 중세 초기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지방 귀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급성장하는 가운데 점차 정체성을 흐려가고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당대에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아벨라르와 마니교 및 카타리파를 인지하고 성녀의 신비체험을 통해 국면을 타개하고자 했다. 즉, 클뤼니 수도자들의 사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베네딕도회를 보호하고 이성적인 신학을 제시했던 아벨라르를 반박하는 자신의 주장이 타당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베르나르도는 성녀의 작품 『길을 알라 Liber Scivias』에서 이성을 품는 직관의 풍부함을 감지했고, 육체를 부정하거나 극도의 고행을 통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성녀를 지지하던 인사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성녀의 신비체험과 수도원 운영을 둘러싼 심각한 비판과 견제가 있었음에도 그녀의 명성과 영향력은 현대에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지속적인 영향력은 그녀의 글이 보여주는 깊이와 현시 체험을 음악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완숙미, 그리고 의학과 약학이 실제로 증명하는 효과를 통하여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녀는 뛰어난 학식과 정세 판단력을 지녔지만 겸손하고 올곧은 자세로 이를 활용했다. 자신의 신념이나 그릇된 행동과 상황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심미적인 혜안과 풍부한 감성을 담아 다양하게 표현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녀의 작품에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고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든 그 요소가 그녀를 교회의 박사와 성인으로 지명한 근본적인 계기라고 말할 수 있다.
『힐데가르트의 영성학교』(서행자 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