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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4) 2026. 3. 25
엘리야의 마지막 여정
열왕기하 2:1~6
<엘리야의 마지막 여정>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엘리야도 이제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2:1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여기에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회오리바람’(whirlwind)으로 번역된 ‘사하르’(sahar)는 성경 다른 곳에서는 ‘폭풍’(storm,겔1:4)이나 ‘광풍’(tempest,시83:15)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회오리바람’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리고자 하신다’고 했을 때의 ‘하늘’(샤마임, shamayim)은 눈에 보이는 ‘하늘’(sky)이 아니라 ‘천상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엘리야의 지상 생애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회오리바람’을 사용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의 죽음이 일반인들의 죽음과 같지 않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죽음은 다른 사람에 의해 목격되고, 사람의 손에 의해 무덤에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고 특별한 방식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신비한(특이한) 방법으로 데려가신 사람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에녹입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아무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데려가셨다는 뜻입니다.
또 한 사람은 바로 모세입니다.
신34:5~6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는 120세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때까지 눈도 흐리지 않았고 전혀 기력이 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때가 되어 죽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가셔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느보산). 게다가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특별히 본받을만한 믿음의 사람들을 이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데려가실까요?
그들이 이 땅에서 우상화(신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각각 오경(토라)과 예언서(느비임)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모세와 엘리야의 무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수많은 사람이 그 무덤을 찾아올 겁니다. 그야말로 성지(聖地)가 될 것입니다. 그 무덤을 순례하며 그들을 신격화할 것입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장항준 감독) - 단종의 유배지(청령포), 엄흥도의 장례와 피신. 그런데 영월에서는 단종이 신격화되어 있음).
모세를 우상화한 흔적인 왕하18:3~4에 나옵니다.
왕하18:3~4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느후스단 – 각주 ‘놋조각’ ‘장대 위의 청동 뱀’).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만든 놋뱀까지도 우상처럼 섬겼던 것입니다. 만일 모세의 무덤이 발견됐다면 어떠했을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죽은 사람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약을 대표하는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와 엘리야의 무덤을 처음부터 아예 없애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벧엘 동행>
엘리야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온 줄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아마도 가족을 만나고, 재산을 정리하고, 지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세운 ‘선지 학교들’을 순례하려고 합니다.
지금 있는 곳은 길갈(Gilgal)이라는 곳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에 처음 할례를 한 곳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길갈에 열두 돌을 세웠습니다. 엘리야는 이 약속의 땅, 길갈에 선지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수제자가 바로 ‘엘리사’였습니다.
자신이 곧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것을 깨달은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먼저,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청하건대’라는 말은 명령의 말이 아니라 부드럽게 권유하는 말입니다. 제자를 사랑하는 배려의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수행하느라 애썼는데, 더 이상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홀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벧엘’(Bethel)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왜 벧엘일까요? 예, 거기에도 엘리야가 세운 ‘선지 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의 외삼촌 라반에게로 피신하는 중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 속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뻗어 있는 사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사다리 위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창28:13~15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잠이 깬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베고 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창35장에서 야곱이 벧엘로 돌아감).
그러니까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 상 중요한 약속의 장소에 ‘선지 학교’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한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의 말을 들은 엘리사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너는 여기에 머물라’는 엘리야의 말속에 ‘다른 제자들처럼’이라는 말이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엘리사는 스승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라는 말은 ‘당신이 살아 있는 한 나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엘리사가 끝까지 엘리야와 함께 하겠다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승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엘리야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엘리사는 엘리야의 태도에서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야를 통해 영적 능력을 얻기를 사모하였을 것입니다.
<너희는 잠잠하라>
이렇게 해서 이 두 사람은 함께 벧엘로 내려갔습니다(길갈에서 벧엘까지 - 16km).
엘리야와 엘리사가 벧엘에 세운 선지 학교에 도착하자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묻습니다.
3절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하고 묻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벧엘의 제자들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특별한 방법으로 하늘로 올리울 것이라는 것은 당시 제자 공동체 사이에 퍼져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 속에 두려움과 위기감이 들어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떠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근심하는 마음이 깊게 배여 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들에게 명합니다.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그래 스승님이 떠날 날이 오늘인 것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소동치 말고 조용하고 침착하게 처신하라는 뜻입니다.
위기 앞에 있는 성도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동하고 원망했습니다(출14:10~12). 그때 모세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쳐 갈라지게 하고,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시46:10)며 하나님의 높으신 능력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입니다.
오늘 우리도 위기의 순간에 흥분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불신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기도’라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우리의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나아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갈 수 있습니다(복음성가 – 기도할 수 있든데….).
바라기는 기도보다 먼저 움직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행한다면 위기도 기회로 변화될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리고 동행>
아마도 엘리야는 벧엘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여리고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4절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
이번에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합니다. ‘청하건대’라는 말은 명령의 말이 아니라 부드럽게 권유하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잘 따라왔으니, 이제는 그만 따라와도 된다는 겁니다.
그럼, 왜 엘리야는 ‘여리고’로 가려고 했을까요?
예, 여리고에도 ‘선지 학교’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이후 만난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이 성을 넘지 못하면 가나안으로 진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그 성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내리십니다. 하루 한 번씩 여호와의 궤를 따라 조용히 성을 한 바퀴 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칠 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여리고 성 이야기는 전쟁에서 이긴 사건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믿음과 순종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길갈’, ‘벧엘’, ‘여리고’)에 선지 학교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엘리사의 반응은 앞서 ‘길갈’에서와 똑같았습니다.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잠잠하라>
이렇게 해서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여리고에 도착했습니다.
벧엘에 있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여리고에 있던 제자들도 엘리야에게 와서 묻습니다.
5절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사는 벧엘에 있던 제자들에게 한 말과 똑간은 대답을 합니다.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요단 동행>
아마도 엘리야는 여리고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또 같은 말씀을 합니다.
6절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이번에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스승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자신은 요단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요단에는 ‘선지 학교’가 없습니다. 요단은 강가입니다. 요단으로 가겠다는 말은 진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상징합니다(죽음을 요단강을 건너는 것으로 표현).
엘리사의 반응은 앞서 ‘길갈’, ‘벧엘’, ‘여리고’에서와 똑같았습니다. 끝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요단까지 함께 갑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엘리야의 행보를 통해 배우는 교훈입니다. 엘리야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하나님께 불리움을 받기 전 엘리야에게 임한 마음은 ‘선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가고자 했던 곳은 길갈-벧엘-여리고 입니다. 이곳들은 모두 엘리야의 선지 학교가 있는 곳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제자들을 돌보려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문득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여정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우리 같았으면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잔뜩 채워져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다른 마음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일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사람들’이란 좁은 의미로는 주님을 따라다니는 열두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예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하겠다’(마28:20)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성령님의 강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영적인 신앙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력의 공통점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엘리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입니다. 끝까지 따르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계속해서 ‘너는 여기 머물라’고 청합니다. 제자를 향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충성과 헌신의 대상입니다.
그는 ‘제자된 도리로’ 엘리야를 끝까지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엘리야의 말을 엘리사의 동행 의지를 확인하는 테스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엘리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그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같은 시험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갈릴리로 낙향한 베드로에게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요21:15) 그러나 두 번, 세 번 거듭 질문하시자 점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근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요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엘리야는 세 번이나 ‘너는 여기 머물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엘리사는 ‘나는 끝까지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테스트에 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길은 단번에 끝나는 결심이 아니라, 반복되는 부르심 속에서도 한결같이 응답하는 인내의 여정입니다. 진짜 제자는 한 번의 맹세가 아니라, 끝까지 동행하는 충성으로 증명됩니다.
한 번의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해서 그다음에도 다시 통과하리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나가사키에는 천주교 순교지가 있습니다. 그때 박해하는 자들은 일본의 기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을 가려내기 위해서 연례적으로 ‘후미에’ 즉 ‘예수님의 형상’을 밟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시도하는 끈질긴 시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엘리야의 ‘선한 목자’의 마음과, 스승을 끝까지 따르는 엘리사의 충성과 헌신의 마음이, 오늘 예수님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도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맡겨진 사명’을 잘 완수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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