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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역사 개론 (2)
라오스의 성립과 프랑스의 식민통치
History of Laos to 1945
1945년 이전의 라오스 역사 (하편)
4. 라오스의 성립
역내에 유럽 식민주의가 도래한 일은 라오스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한 구별을 영속화시켰다. 현재의 공식적인 라오스 역사가 후대의 반-식민지 투쟁은 강조하면서도, 라오스 영토 일부에서 시암(=태국)의 통치가 종식된 일 및 라오스 국가의 탄생이 프랑스의 공로인 동시에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라이벌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때문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부인도 하지 않지만 굳이 언급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따이족(Tai: [역주] 여기서는 특히 시암과 라오스를 지칭) 사람들에게 버마(=미얀마)는 수세기 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다.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는 1826~1885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버마를 병합했다. 역내의 또 다른 전통적 강국이었던 베트남은 프랑스에 무릎을 꿇었다. 프랑스는 1862년에 베트남 남부(코친차이나, Cochinchina) 및 캄보디아 동부지방을 보호령으로 만들었고, 1885년에는 나머지 베트남 전역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공격성을 지닌 두 식민주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던 시암에 문제가 발생했다. '짜끄리 왕조'의 시암은 근대적인 국왕들이었던 라마 4세(Rama IV, 몽꿋: 1804~1868, [재위] 1851~1868)와 라마 5세(Rama V, 쭐라롱꼰: 1853~1910, [재위] 1868~1910)의 치세에서 국가 독립을 수호할 수 있는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국경선과 다민족의 구성을 가진 이 제국은 방어가 불가능했다.
1883년의 제1차 후에조약(Treaty of Huế [1883]: 계미조약)을 통해 베트남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 1802~1945)의 황제는 그 동안 후에(Huế)의 황실에 조공을 바쳐오던 모든 공국들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이 조약의 내용을 매우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쪽을 선택한 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라오스 영토의 대부분은 한번이든 그 이상이든 한때 베트남의 조공국이었던 적이 있었다. 프랑스는 이러한 봉건적 관계들에 유럽의 개념인 '국가의 지위'(statehood)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과거 란상(Lan Xang: 1354~1707) 왕국의 모든 영토에 대해서도 날조된 영유권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측에서 이 문제를 전담하는 대리인은 오귀스트 파비(Auguste Pavie: 1847~1925)였다. 파비는 이미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17년을 보낸 상태였고, 1886년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에 위치한 프랑스 공관의 부-영사로 임명되자 프랑스의 국익을 더욱 확대시키려 했다. 또한 파비는 인도차이나 지역 사람들에게 참다운 애정을 가진 뛰어난 탐험가이자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계몽국가인 프랑스가 이 지역 민중들을 무지와 봉건제도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라오스 지역에 있는 시암인 통치자들을 부패하고 억압적인 자들로 간주했다.
1887년, '흑기군'(Black Flag Army, 黑旗军)이라 불리던 산악지대의 따이족 폭도들이 루앙프라방을 공격하여 [당시 이 지역을 자국의 조공국으로 삼고 있던] 시암의 파견자들이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 도시 방어를 조직하고 노쇠한 왕 오운 캄(Oun Kham: 1811 혹은 1816~1895, [재위] 1872~1887)을 구출한 인물이 바로 파비였다. 오운 캄 국왕은 이 일에 너무도 감사하여, 파비에게 시암인들이 통치하던 지역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파비는 따이어를 사용하던 십성추(Sipsông Chu) 지역을 프랑스령 베트남(French Vietnam)에 병합시키긴 했지만, 오운 캄 국왕의 부탁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파비는 자신이 라오스에서 프랑스의 선의를 구현한 것을 두고 "마음의 정복"이라고 불렀지만, 궁극적으로는 시암인들의 강제이주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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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자 미상) 1893년에 촬영된 오귀스트 파비의 모습(뒷줄 우측 2번째). 그는 '프랑스령 라오스' 체제의 완성자로 불리며, 1893년 라오스에 설치된 식민당국 최초의 총독 및 전권공사에 임명됐다. Pierre Fournie의 "Aventuriers du Monde"(p.101)에 삽입된 사진. |
1890년, 하노이(Hà Nội)에 있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자국 의회 내에서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던 정당의 후원 하에 시암 전체를 병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라오스를 분리시키는 것을 그 제1단계로 여겼다. 1892년, 오귀스트 파비가 방콕 주재 프랑스 총영사로 임명됐다. 그는 시암 정부에 대해 루앙프라방에서 스떵 뜨라잉(Stung Treng: [역주] 현재는 캄보디아 최북부 지방)에 이르기까지 라오스의 주요 도시들에서 프랑스의 "통상 대리인들"(commercial agents)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파비는 프랑스가 메콩 강(Mekong River) 양편의 모든 라오스 땅을 보호령으로 요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일이 시암을 매우 약화시킬 것이며, 그 이후 시암 전체를 곧 병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암은 프랑스가 압박해온다는 것을 완벽히 인식하고 라오스 땅으로 군대와 행정관들을 급파했다. 하지만 그토록 멀리 떨어진 지방들에 대한 확고한 장악력을 갖기엔 당시의 기반시설들이 잘 발달되어 있지 못했다. 게다가 프랑스와 충돌할 경우 영국이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 믿고 있었던 라마 5세의 믿음도 근거가 없었음이 밝혀지고 말았다.
1893년 7월, 프랑스의 군함들이 짜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방콕을 위협하자(빡남 사건, Paknam Incident), 소규모 국경 충돌이 무력충돌로 발전했다(프랑스-시암 전쟁, Franco-Siamese War). 이런 위협 앞에서 시암은 굴복했고, 프랑스는 메콩강 동쪽의 전 지역에서 보호령을 수립했다. 프랑스는 방콕의 시암 국왕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따르도록 요구했다.
(1) 메콩강 동쪽의 모든 땅을 프랑스의 관할로 이양한다.
(2) 메콩강 서쪽 둑으로부터 25km 폭의 "완충지대"(buffer zone)를 설치한다.
(3) 시암 내에 주재하는 "프랑스 백성들"(French subjects)에 대해서도 [프랑스의] 역외 법권이 적용된다.(주2) |
(주2) John Holt (2009). p.80. Spirits of the Place: Buddhism and Lao Religious Culture. |
1904년에도 시암과 프랑스 사이에 다시금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로 프랑스가 일으킨 것이었다. 영국은 다시 한번 시암을 방어하는 데 나서지 않았고, 시암은 북쪽의 사야부리(Sayaboury: 현 사이얀불리)와 남쪽의 참빠삭(Champasak) 등 메콩강 서쪽의 영토 2곳을 내주고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와 동시에 스떵 뜨라잉은 라오스(=프랑스령 라오스) 영토에서 캄보디아(=프랑스령 캄보디아) 영토로 편입됐고, 라오스(=프랑스령 라오스)와 베트남(=프랑스령 베트남) 사이에도 몇 가지 영유권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이후 라오스 국경선들을 확정시켰다.
파비의 주장에 자극받은 프랑스의 팽창주의자들은 이제 코랏 고원(Khōrāt Plateau: '이싼'[Isan])의 라오어 사용 지역들에 관해서도 압박을 가하면서 영유권을 주장하게 됐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영국이 개입했다. 영국은 버마와 말라야(Malaya)의 지배권을 확보한 상태였고, 시암이 프랑스에 병합되기보다는 자국과 프랑스 사이의 완충 국가로 남아 있기를 바랬다. 1909년 무렵에는 유럽의 상황도 변화했다. 프랑스는 급부상하는 독일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맺을 필요를 느꼈다. 파리의 프랑스 정부는 시암을 병합하여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 영국의 국익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지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시암이 상실한 종주권 보유 영토 및 상실한 년도가 표기된 지도.
그리하여 유산된 프랑스의 라오스 전역 통제가 현재의 라오스 국경선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프랑스가 시암 내로 더 들어가는 일을 영국이 반대하면서, 이러한 국경선은 영구적인 것이 됐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이후 라오스 국민들을 계속해서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만일 프랑스가 시암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라오족은 보다 광범위한 따이어 사용 시암 국가에 조용히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만일 프랑스가 라오스를 시암에서 분리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결국에는 메콩강 양편의 땅을 포괄하는 주요한 라오족 국가가 탄생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것은 과거 란상 왕국의 참다운 재건이었을 것이며, 필시 2천만명 정도의 인구를 포괄했을 것이다([역주] 현재의 라오스+이싼지방[태국 북동부]을 의미).
하지만 현재의 라오스는 6백만명의 인구만 갖고 있으며, 그 중 절반 정도만이 라오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 태국의 북동부지방인 이싼에는 라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1500만명이나 있다. 현재 그들의 언어는 "북동부 태국어"(North-East Thai)라고 불리지만, 라오스 표준어와 거의 동일하다.(역주) 근래에는 많은 수의 이싼지방 출신자들이 방콕으로 이주하여, 현재 방콕에는 라오스 수도 위앙짠(Vientiane, 비엔티안)의 라오어 사용자들보다도 많은 수의 라오어 사용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라오족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민족국가의 국경선과 실제로 거주하는 지리적 분포상황이 불일치하는 거의 유일한 민족에 속한다.
(역주) 태국의 주류민족인 '타이족'(Thais: 태국민족)과 라오스의 주류민족인 '라오족'은 모두 '따이족'(Tais)이라는 보다 넓은 범주의 민족군에 속한다. 타이족과 라오족은 혈연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큰 차이를 갖고 있진 않지만(한국어 방언 정도의 차이), 나름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태국 북동부지방(=이싼지방)은 라오어 사용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라오스의 라오족과 구분하여 '콘 이싼'(Khon Isan: 이싼 사람)이나 '타이 이싼'(Thai Isan: 이싼 태국인)이라 부른다. 학자들은 이들을 '이싼 라오족'(Lao Isan)이나 '라오족 태국인'(Thai Lao)이라고 부르고 있다. |
5. 프랑스령 라오스
'프랑스령 라오스'(French Protectorate of Laos)는 프랑스가 동남아시아에서 수립한 보호령으로서, 프랑스 식민제국(French Colonial Empire)의 한 부분이었다. '프랑스령 라오스'는 과거 란상 왕국의 영토 중 많은 부분을 포괄했고, 1893년부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의 일부였다가, 1946년에 프랑스 연방(French Union) 내의 자치권을 획득했다. '1953년 프랑스-라오스 조약'(Franco-Lao Treaty of 1953)은 라오스에 '프랑스 연방' 내의 독립국가 지위를 부여했다.(주3)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a War: 1946.12.19.~1954.8.1.)에 이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한 후 열린 1954년의 제네바 회담(Geneva Conference)은 라오스에 완전한 독립국 지위를 부여했다.
(주3) "Brief Chronology, 1959–1963". Foreign Office Files: United States of America, Series Two: Vietnam, 1959–1975 ; Part 2: Laos, 1959–1963. "October 22 Franco-Lao Treaty of Amity and Association". |
5.1. 보호령의 수립
프랑스는 1863년 캄보디아를 합병한 후, 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Ernest Doudart de Lagrée: 1823~1868)가 이끄는 탐험대가 여러 차례 메콩강을 따라 탐사를 벌였다. 그것은 남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캄보디아와 코친차이나(Cochinchina: 오늘날의 베트남 남부)에서 가능한 교역 관계들을 발견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1885년, 루앙프라방에 프랑스 영사관이 개설됐다. 당시 루앙프라방은 왕도인 위앙짠과 더불어 시암의 조공국이었다. 시암의 라마 5세(쭐라롱꼰)는 프랑스가 루앙프라방을 병합하려는 데 두려움을 갖고, 1886년 5월 7일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라오스 지역 왕국들에 대한 시암의 종주권(suzerainty)을 인정받아 두었다.(주4)
1886년 말, 오귀스트 파비가 루앙프라방 주재 프랑스 부-영사에 임명됐고, 라오스 지역에서 진행될 탐사활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탐사활동은 라오스를 프랑스 영토로 편입시킬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1887년 '흑기군'으로 불리던 중국계 군벌세력이 루앙프라방을 약탈하고, 시암 및 그 조공국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자 파비와 프랑스 군대가 개입하여 라오스 왕가를 안전지대로 대피시켰다. 이후 하노이에서 파견된 프랑스 군 증원대가 도착하여 '흑기군'을 루앙프라방에서 몰아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오운 캄 왕은 자신의 왕국이 프랑스 보호령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파비는 오운 캄 왕의 요청을 파리에 있는 본국 정부로 보냈다. 시암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루앙프라방 왕가는 1889년 3월 27일 루앙프라방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삼는다는 조약에 서명했다.(주5)
이후 프랑스와 시암은 몇 차례의 국경분쟁을 거친 후(=프랑스-시암 전쟁), 1892년 방콕 주재 프랑스 주재장관(=대사)이 된 파비는 시암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1893년 7월, 프랑스의 군함들이 짜오프라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방콕을 위협하는 '빡남 사건'이 발생했고, 소규모 국경 충돌이 무력충돌로 발전했다. 시암은 굴복했고, 메콩강 동쪽의 모든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프랑스령 라오스
French Laos |
Protectorat français du La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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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위앙짠 (공식),
루앙프라방 (의전) |
언어 |
프랑스어(공식),
라오스어 |
종교 |
상좌부 불교,
로마 가톨릭 |
정치적 구조 |
군주제, 프랑스의 보호령,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 |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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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95 |
오운 캄 (초대) |
- |
1904~1954 |
시사왕 웡 (마지막) |
역사 시기 |
신 제국주의 |
- |
보호령 수립 |
1893년 |
- |
라오스 왕국 선포 |
1947-5-11 |
- |
독립 |
1953-11-9 |
- |
제네바 협정 |
1954-7-21 | |
파비는 시암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라오스 지역으로 가는 프랑스 탐험대를 지원했고, 그 지역에 오늘날의 명칭인 '라오스'(Laos)라는 이름도 붙였다. 시암이 파비의 최후통첩을 수용하자, 1893년 프랑스는 라오스의 행정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위앙짠에서 옮기면서 '프랑스령 라오스'를 공식적으로 수립했고, 1894년에는 파비가 새로 출범한 '프랑스령 라오스' 행정조직의 첫번째 총독에 임명됐다. 하지만 라오스 왕가는 루앙프라방에 남았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은 명목상의 수장 역할로 감소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부-영사와 [하노이의] 총독 등 프랑스인 관리들에게로 이관됐다.(주6)
1896년 프랑스와 영국은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령 라오스'와 '영국령 버마'(British Burma) 사이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주4)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60~64.
(주5)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66~67.
(주6)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67~68. |
5.2. 행정조직의 재구성
1898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 내로 완벽하게 편입됐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은 프랑스가 지배했던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통합하여 1887년에 출범한 것이었다.(주7) 이후 위앙짠에는 식민 통치기구가 설치됐고, 상-라오스(Haut-Laos)와 하-라오스(Bas-Laos)라는 2개의 구분만 있던 라오스의 행정구역도 10개 도로 늘어났다.
루앙프라방에 있던 왕가는 여전히 루앙프라방 도의 공식적인 통치자로 간주됐으며 국왕의 정부도 존속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가 임명하는 관료들로 채워졌다. 나머지 9개 도는 위앙짠에 있던 프랑스 식민당국이 직접 통치했고, 각 도마다 주재이사(=행정장관)와 군 부대를 두었다. 식민당국의 재정 충당을 위해 세금제도가 도입됐고, 인구에 비례하여 세금이 부과됐다.(주8)(주9)
1904년, 시암은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메콩강 동쪽에 남아 있던 모든 땅에 대해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됐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사이얀불리 도도 포함됐다.(주10) 1905년, 시암이 프랑스에 쁘레아위히어(Preah Vihear) 도를 넘겨주면서 오늘날의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선도 확정됐다. 하지만 라오스 영토를 더욱 활장시키려던 프랑스의 계획은 1907년에 끝이 났다. 시암이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프랑스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과 공조를 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프랑스가 결국 시암을 병합하여 역내에서 힘의 균형을 흔들리게 만드는 일을 우려했다.(주11)
(주7) Chronologie du Laos, Clio.
(주8)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69~72.
(주9) Martin Stuart-Fox, A History of Lao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ISBN 0-521-59235-6, p.30.
(주10) Pierre Montagnon, La France coloniale, tome 1, Pygmalion-Gérard Watelet, 1988, p.180.
(주11) Laos under the French, U.S. Library of congress. |
5.3. 라오스의 식민주의
프랑스는 시암 병합이라는 웅대한 계획이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라오스가 인도차이나의 자국 식민지들 중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낮고(1900년 당시 총인구는 47만명으로 추정), 교역을 위한 해상 항구도 없다는 점 때문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이후 50년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도 산간벽지로 남아 있었다.
루앙프라방은 공식적으로 자치권을 가진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인 주재원들이 통제했다. 그리고 라오스의 나머지 지역들은 프랑스의 직접적인 식민지로서 통치됐다. 1904년, 시사왕 웡(Sisavang Vong: 1885~1959, [재위] 1904~1945 및 1946~1959)이 루앙프라방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55년 동안의 재위기간 내내 프랑스에 대해 두드러진 충성심을 보였다.
(사진) 1951년에 발행된 우표에 나타난 시사왕 웡 국왕의 모습.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프랑스는 라오스를 베트남만큼 개발하지 않았다. 또한 라오스의 통치기구에도 라오스인들 대신 많은 수의 베트남인들을 채용했다. 이 점은 라오스 지역 주민들과 식민당국(=정부) 사이에 약간의 갈등들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됐다.
라오스의 경제발전은 매우 더뎠고, 처음에는 주로 쌀경작 및 막걸리류(rice alcohol)의 제조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당국은 라오스 경제의 성장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상업활동도 지역 인구들에게 방치해두었다. 지리적 고립 역시 여타 프랑스 식민지들에 비해 라오스가 프랑스의 영향을 덜 받도록 만들어주었다. 1937년의 추정치에 따르면, 소규모 식민당국과 함께 라오스에 거주하는 프랑스 민간인들은 고작 574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와 비교하여 상당히 적은 규모였다.(주12)
프랑스의 식민통치 하에서 사회개혁도 진행됐다. 여기에는 산적떼의 진압, 노비제도 폐지, 주류 다수파인 라오-롬(Lao Loum 혹은 Lao-Lum: 계곡 평원의 라오족) 인들이 라오-텅(Lao-Thoeng 혹은 Lao Theung: 능선의 라오족) 및 라오-숭(Lao Soung 혹은 Lao-Sūng: 산 정상의 라오족) 인들에게 행하던 사법적 차별의 종식 등이 포함된다.
나중에는 베트남인 상인들과 중국인 상인들이 도래하여 --- 특히 위앙짠 등 --- 다시금 도시 인구들을 증가시켰고, 지방정부에 일부 라오-롬 인들이 참여하는 일도 허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개혁에도 불구하고, 특히 산악부족들인 라오-숭 인들을 비롯한 여러 소수 집단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의 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조차 존재했다.(주13)
(주12)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72~76.
(주13) Paul Lévy, Histoire du Laos, PUF, collection Que sais-je ?, 1974, p.83. |
5.4. 반란들
1901년 라오스 남부 볼라벤 고원(Bolaven Plateau)에서, 엉 깨우(Ong Keo 혹은 Ong Kaeo)가 라오-텅 부족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를 "푸미분"(phū mī bun: 성스러운 자)이라 자처하면서 구세주 숭배 종교를 이끌고 있었다. 이 반란은 프랑스의 라오스 식민지배에 대한 도전이었고, 엉 깨우가 죽임을 당한 1910년까지도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다. 하지만 엉 깨우가 사살당한 후에도 그의 후계자이자 중위였던 엉 꼼마담(Ong Kommadam 혹은 Ong Kommadam)이 1936년 죽임을 당할 때까지 라오스 민족주의 운동의 초창기 지도자가 됐다.(주14)(주15)
1899~1910년 사이에 라오스 북단의 퐁살리(Phong Saly) 도에서 정치적 소요가 발생했다. 프랑스 당국의 통치방식과 고산지대 부족들에 대한 동화정책에 반발했던 고산부족 부족장들이 도전을 한 것이다. 이 반란의 정정기에는 소요사태가 통킹(Tonkin: 베트남 북부) 지역의 고산지대로까지 확산됐고, 주로 소수민족들인 크무족(Khmu)과 몽족(Hmong, 흐몽족)이 소요의 중심에 섰다. 이 반란은 최초에 프랑스의 영향력 및 타이트한 통치행정에 대항해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프랑스 당국의 아편 밀매 단속을 중지시키려는 쪽으로 그 목표가 변했다.(주16)
(지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주요 지방 구분. 라오스, 캄보디아, 코친차이나, 안남, 통킹 등 크게 5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1919년에도 라오스 북부에서 불안정은 계속됐다. 프랑스 당국의 징세 및 고산지대에서는 소수파에 속하는 라오-롬 인들에게 프랑스 당국이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데 반발하여, 인도차이나 지역 최대의 아편 생산자들이었던 몽족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빠 차이 우(Pa Chay Vue)가 이끌었던 이 반란은 [프랑스 진영에서는] "광기의 전쟁"(War of the Insane)으로 불린다. 몽족 반군들은 라오스인 및 프랑스인 관리들이 자신들을 종속적이고도 미개한 부족들로 취급했다고 주장했지만, 1921년 3월에 패배했다. 이 반란의 결과로, 프랑스 당국은 시앙코우앙(Xieng Khouang) 도의 몽족들에게 부분적인 자치권을 부여했다.(주17)
라오스 북부지방에서는 산악지대 소수민족들의 소요사태가 발생했지만,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에서는 시암의 통치에 비해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보다 호의적인 비교대상이 됐다. 이에 따라 시암의 북동부지방인 이싼 지역에서 상당한 이주민들이 다시금 라오스 지역으로 재이주했고, 인구증가와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비록 도시지역들에서 대체로 상당한 규모의 베트남인들과 중국인 소수파가 포함되긴 했지만, 위앙짠과 사완나켓(Savannakhet, 사반나켓) 같은 메콩계곡의 도시들은 괄목할만하게 성장했고, 빡세(Pakse, 팍세)를 행정거점으로 지정한 일은 라오스 남부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통치권을 천명하는 일이었다.(주18)
시암인들의 교역활동과 경쟁하기 위해, 프랑스 식민당국은 하노이~위앙짠 간 철도노선 건설도 제안했지만, 이 계획은 [파리의 중앙정부에서] 결코 승인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식민당국이 위앙짠~빡세 사이를 연결하는 13번 국도'(Route nationale 13)를 건설하면서 라오스에서 사상 처음으로 기반시설(인프라) 개선이 이뤄졌고, 이 도로는 오늘날까지도 라오스에서 가장 중요한 고속도로로 남아 있다. 1923년에는 위앙짠에 로스쿨(법과대학)도 개교하여, 공무원이 되고자 하던 라오스인들을 교육했다. 하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 중 다수는 베트남인들이었고, 베트남인들이 계속해서 정치적 관청들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주19)
1920년대부터 광업(광산)과 커피 경작도 시작됐지만, 라오스의 고립된 위치와 악조건의 지형 때문에, 프랑스 입장에서 라오스는 대체로 경제적 성장 가능성이 낮은 곳으로 남아 있었다. 90% 이상의 라오스인들은 생계형 농업(subsistence agriculture)에 종사했고, 자신들의 세금 납부에 필요한 만큼의 현금을 구하기 위해 잉여농산물을 파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라오스에서 베트남에서 행하던 만큼의 동화정책을 펼치진 않았지만, 지형적 고립과 경제적 중요성 부족 탓에 진척 속도는 느리긴 해도 동화정책을 완전히 시행해나가려 하고 있었다. 학교들은 주로 주요 도시들에 설치됐고, 농촌지역들에 프랑스식 교육제도가 도입된 것도 192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30년대 무렵, 다수파인 라오-롬 인들 및 저지대 인구들 사이에서 문자해독률이 상당한 수준으로 증가했고, 라오스인 학생들이 하노이나 파리로 유학가서 고등교육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산지대에서는 발전이 정체상태에 머물렀다. 산악 부족들은 너무도 고립되어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매체언어로 하는 교육제도에 접근할 수도 없었고, 그러한 교육제도를 거부할 기회조차 없었다.
라오스에 파견된 프랑스인 공무원들과 정착민 및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이 나라와 그 국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됐다. 그 중 많은 이들은 이후 수십년간 자신들의 라오스인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한 일들에 헌신했다. 일부는 라오스인 부인을 얻었고, 라오어를 공부했으며, 불교도로 개종했고, "현지인처럼 살고자" 했다. 이러한 일은 영국의 식민지들에서 나타났던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이 수용됐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유럽인들에게서 인종차별적 태도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라오스의 프랑스인들은 라오인들을 예의바르고, 쾌활하며, 어린아이 같고, 순진하면서도 게으른 사람들로 분류하는 경향이 존재했고, 한 작가가 표현한 바대로 그들을 "애정과 분노를 함께 갖도록 만드는 이들"로 여겼다.
프랑스는 라오스라는 국가 그 자체를 형성시킨 것과 별개로 라오스 민족주의의 성립에도 기여했다. 그것은 '프랑스 극동학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遠東博古院: EFEO) 소속의 동양학 전문가들 덕분이었다. EFEO의 연구자들은 주요한 고고학적 작업들에 착수했고, 라오스의 역사적 문헌들을 출판했다. 또한 라오어(Lao language)의 문어체 표기방식을 표준화했고, 방치되어 있던 사원들과 무덤들을 복원했다. 1931년, 위앙짠에 '독립 라오스 불교연구소'(Independent Lao Buddhist Institute)가 설립되어 자국의 역사나 불교 경전들을 공부하려는 라오스인들에게 빨리어(Pali)를 가르쳤다.
(주14) Stuart-Fox, 앞의 책, pp.34~36.
(주15) Paul Lévy, Histoire du Laos, PUF, collection Que sais-je ? 1974, pp.83~85.
(주16) Stuart-Fox, 앞의 책, pp.37~38.
(주17)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76~77.
(주18)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77.
(주19)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77. |
5.5. 제2차 세계대전 기간
1940년 이후 이 나라에 급격한 충격을 가한 외부적 사태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라오스는 프랑스 제국 내의 쾌적한 산간벽지로서 영원히 표류했을지도 모른다. 태국에서는 쁠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1897~1964) 등의 군인들이 1932년 혁명(Siamese revolution of 1932: 1932년 쿠테타)을 일으켜 절대왕정을 붕괴시키고 군사 파시스트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태국 내 라오족을 포함하여 모든 따이족 사람들을 하나의 국가 내에서 단결시킨다는 계획 하에, 이후 국호도 '시암'에서 '태국'(Thai: 타이)로 바꿨다.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함락(Fall of France) 이후 라오스는 여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들과 함께 독일 등 추축국 진영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존속기간] 1940~1944) 정부의 관할 하에 놓였고, 비시 정권의 프랑스 식민 당국은 일본의 침공으로 인해 일본의 감독도 받는 처지가 됐다.(주20)
1940년 8월, 추축국의 일원이 된 태국은 프랑스-태국 전쟁(Franco-Thai War: 1940.10.~1941.5.)을 일으켜 위앙짠과 참빠삭(Champasak) 사이에서 메콩강의 동쪽 제방들을 공격했다. 양측 군대는 이후 선전포그를 하려 했지만,프랑스 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개입하여 휴전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일본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압력을 가해 라오스 영토였던 참빠삭과 사이얀불리 및 캄보디아 영토였던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 도를 [다시금] 태국의 영토로 이양토록 했다.(주20)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태국이 유엔(UN)에 가입하고자 할 때, 상임이사국이던 프랑스가 태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자 태국은 이 땅들을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반환하게 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이었던 장 드쿠(Jean Decoux: 1884~1963)는 민심을 얻으면서 일본과 태국 모두를 축출하기 위해 라오스 민족주의 운동의 부상을 부추겼다. '민족혁신 운동'(Movement for National Renovation)이라는 이 운동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통치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라오스 영토를 수호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이 단체는 기관지인 <그랜드 라오스>(Grand Laos: 원대한 라오스)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라오스 민중에 대한 태국과 일본의 정책들과 영토 할양을 맹비난했다.(주20) 1944년, 라오스 남부에서는 '라오 세리'(Lao-Seri: 자유 라오스) 운동이 결성됐다. '민족혁신 운동'과 달리 이 운동은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았고, 전면적인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라오스인들을 위한 라오스"(Laos for Laotians) 정책을 선언했다.(주21)
(주20) Levy, 앞의 책, pp.89~90.
(주21) Pinnith, p.87. |
5.6. 일본의 라오스 점령
1944년 6월 6일 시작된 노르망디 상륙작전(invasion of Normandy)을 시작으로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됐고, 자유 프랑스(Free France: [존속기간] 1940~1944) 망명정부를 이끌던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장군이 정권을 잡았다.
일본 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대부분의 주력 병력이 패배하고 있었지만, 인도차이나에서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최후의 시도를 펼쳤다. 1945년 3월, 일본은 인도차이나 식민지들에서 프랑스의 통제력을 해제시켰다. 일본 군은 [사이공(Saigon)에서 프랑스 군 지휘관들을 연회에 참석시켰다 몰살시켰고,] 라오스에 있던 다수의 프랑스 관리들도 투옥시켰다. 루앙프라방의 시사왕 웡 국왕도 일본의 강압으로 라오스 독립을 선포하고 '대동아 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大東亞共榮圏) 이념을 수용했다.
내륙에 잔류했던 프랑스 관리들과 민간인들은 산악지대로 퇴각하여 조직을 재정비했고, 당시 성장 중이던 라오스인들의 대-일본 반군과 합류했다. 일본은 1945년 3월부터 위앙짠을 점령하고 있었다. 시사왕 웡 국왕의 아들 시사왕 와타나(Sisavang Vatthana 혹은 Savang Vatthana: 1907~1978 혹은 1984, [재위] 1959~1975) 왕세자가 이끌던 라오스 반군들은 라오스 영내에서 일본의 관리들과 군대를 공격하여 대항했고, 일본인 점령자들에 대적하던 프랑스인 반군들과 싸우다가 많은 라오스인들이 죽기도 했다.(주22)(주23) 일본은 자국에 대항하는 계속되는 민란에도 불구하고 라오스를 직접 통치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1945.9.2.)을 불과 한달도 채 남겨놓지 않은 8월 초에, 일본은 라오스에서 강압적으로 철수당하고 말았다.
(주22)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77~78.
(주23)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82~86. |
5.7. 라오스의 독립
라오스에서 일본이 축출된 후, 프랑스 임시정부의 한스 임펠트(Hans Imfeld) 대령이 프랑스-라오스 혼성군을 이끌로 루앙프라방에 입성했다. 그리고 투옥됐던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었다. 이후 위앙짠도 프랑스가 재점령했다.
당시 '비엣민'(Viet Minh, 베트남 독립동맹) 반군은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고, 여기에는 프랑스의 통치에 저항하는 많은 수의 라오스인들도 참여했다.(주24) [시사왕 웡 국왕의 조카였던] 펫사랏 라따나웡(Phetsarath Ratanavongsa: 1890~1959) 왕자는 '비엣민'과 동맹관계에 있었는데, 라오스에서의 프랑스 보호령이 소멸했다고 선포하고, 라오스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특히 '라오 이싸라'(Lao Issara, 자유 라오스: 1945~1949) 운동을 지지했다.
베트남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라오스 군대와의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1949년 라오스에 '프랑스 연방' 내에서의 자치국가 지위를 부여했다. 이후 1954년, 프랑스 군대가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비엣민'의 공산주의-민족주의 연합군에 패하고 나자, 그해 9월에 개최된 '제네바 회담'을 통해 라오스에 독립이 부여됐다.(주25)(주26)
(주24) Philippe Franchini, Les Guerres d'Indochine, tome 1, Pygmalion-Gérard Watelet, 1988, p.250.
(주25) Jean Deuve, Guérilla au Laos, L'Harmattan, 1997 (1ere édtion en 1966, sous le nom de Michel Caply), p.226.
(주26) Carine Hahn, Le Laos, Karthala, 1999, pp.88~89. |
참고문헌
Kenneth Conboy, War in Laos 1954-1975, Squadron/Signal publications 1994
Marini, G.F. de. (1998). A New and Interesting Description of the Lao Kingdom (1642–1648). Translated by Walter E. J. Tips and Claudio Bertuccio. Bangkok, Thailand: White Lotus Press.
Martin Stuart-Fox, A History of Lao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Moppert, François. 1981. Le révolte des Bolovens (1901–1936). In Histoire de l'Asie du Sud-est: Révoltes, Réformes, Révolutions, Pierre Brocheux (ed.), 47-62. Lille: Presses Universitaires de Lille.
Murdoch, John. 1974. The 1901-1902 "Holy Man's" Rebellion. Journal of the Siam Society 62(1) 47-66.
Ngaosrivathana, Mayoury & Breazeale, Kenon (ed). (2002). Breaking New Ground in Lao History: Essays on the Seventh to Twentieth Centuries. Chiangmai, Thailand: Silkworm Books.
Phothisane, Souneth. (1996). The Nidan Khun Borom: Annotated Translation and Analysis, Unpublished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Queensland. [This is a full and literal translation of a Lān Xāng chron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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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부분의 내용에서 각주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프랑스어 서적들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위키피디아 영문판>이 없었다면
우리 카페는 이런 내용에 접근조차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영문판의 제작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