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연구]청개구리의 후손이 자랑스럽다.
승석공은 청개구리의 저돌성으로 불의와는 결코 타협을 하지 않았다. 공의 생전에 김종직(형조판서)은 개혁의 선각자라고 하였고, 서거정(대사헌)은 이조의 사표라고 공적을 기린 시가 남아 있다.
1. 별명의 유래
예씨 가문의 자손들을 흔히들 ‘청개구리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 말을 어릴 적부터 들어왔다.
처음에는 우물 안 개구리로 깎아 내리는 뜻으로 알았다. 그런데 고희가 지난 지금에야 청개구리가 예씨의 별명으로 불리어지게 된 내력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으니 철이 덜 들어도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청개구리의 설화가 전래된 내력을 보니 지금부터 일천년이 훨씬 넘는다. 중국 당나라 때 ‘청개구리의 불효’라는 설화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거꾸로만 행하던 청개구리 형제가 있었다. 어미 청개구리가 죽으면서 산에 묻히고 싶어 자식에게는 거꾸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불효를 뉘우친 개구리는 유언대로 냇가에 묻었다. 그 뒤 걱정이 되어 슬프게 울었다』라는 줄거리다.
청개구리의 습성을 보면 앞으로만 높이 뛰어간다. 그 모습을 보면 목표가 있고 활력이 넘친다. 최고로 높이 뛸 때는 자기 몸 길이의 20배를 뛴다. 부득이 옆으로 갈지언정 뒤로는 뛰지 않는 저돌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수몽헌문집, 동국속수찬헌보감, 원종공신록권 등에서 조상들의 당당하게 살아오신 삶의 기록을 처음 보았을 때 500년의 세월을 넘어 필자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살아 나가는데 때로는 물러설 줄도 알고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한번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물러설 줄 모르는 조상의 얼과 행적이 대대손손으로 이어져서 오늘날 후손들에게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을 무엇 때문일까? 또한 청개구리의 후예라는 별명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임금이 잘못할 때는 죽기를 각오하고 간하였고, 나라 일을 볼 때는 충성과 지조를 지켰고, 백성을 돌보는 데는 사랑과 열정으로 온 몸을 불사른 희생의 댓가로 얻게된 그 이름이 청개구리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흥분과 감동을 주고 청개구리라는 별명을 갖게 해준 윗대 할아버지 몇 분을 여기에 소개한다.
2. 상소문으로 세조의 미음을 받다.
8세 예승석(1406-1476)공은 1447년 대과에 급제하여 지방과 중앙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공은 학식이 높고 인명이 두텁고 청빈해야만 천거를 받아갈 수 있는 사헌부(지평, 집의)와 사간원(헌납, 대사간)등의 사정기관에서 오래 봉직한 바 있다. 특히 대사간을 지낸 사람은 큰 과오가 없으면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이 당시의 인사 관례였다.
공은 1468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절대권자인 왕의 통치철학의 잘못과 세도가들의 부패와 비리를 고발하는 상소문을 세조에게 올렸다. 뇌진 상소문이라고 불리어졌던 이 상소문을 요약하면,
(1)지방관리들이 임지에 있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세도가를 찾아다니는 엽관 운동의 풍습을 쇄신하고,
(2)사회혼란을 조장하는 무고를 막기 위한 법을 제정하고,
(3)매관매직을 금하고 시험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성균관 유생들의 학문 증진을 꾀하고,
(4)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향리들의 조세와 부역권을 없애고,
(5)나라의 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주는 상의 남발로 세도가들이 상을 대물림하면서 사돈의 팔촌까지 주는 대가직(다른 사람이 승진)을 없애기 위하여 일년 이내는 상을 거듭받을 수 없도록 상벌제도의 확립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문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세조는 『왕을 업신여기고 불손하기 짝이 없다. 대사간이 성질이 곧아 융통성이 적은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지만 원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어서야』하고 투옥을 지시하고 임금을 능멸한 죄를 심문토록 했다.
평소 승석공을 미워하고 눈에 가시처럼 못마땅해 하던 한명회, 구치관 등 원로 재상들은 이때다 하고 대사간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인지만이 간관을 죽이면 언로가 막히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진언하였다. 세조는 생각 끝에 파직을 명하였다. 원로 재상들은 파직에 불복하여 계속 사약을 내릴 것을 주장 하였지만 세조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만약 대사간에게 사약을 내린다면 후세 사람들이 나를 뭣이라 하겠는가, 바른 말을 하는 충신을 죽인 폭군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 두렵다』고 하면서 복직을 지시한다.
2개월이 지나서 세조가 승하하고 나이 어리고 병약한 예종이 등극하자 원로 재상들의 모함으로 사소한 일로 강등을 당하였다.
1469년 성종 원년에 와서는 원로 재상들이 다시 모함하여 중앙정치 무대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 강원감사, 명나라 사신 정조사, 전라감사 등으로 지방과 외국으로만 돌게되는 불운을 겪게된다.
승석공은 청개구리의 저돌성으로 불의와는 결코 타협을 하지 않았다. 공의 생전에 김종직(형조판서)은 개혁의 선각자라 하였고, 서거정(대사헌)은 이조의 사표라고 공적을 기린 시가 남아 있다.
3. 채홍사 협조 거부, 연산군이 진노하다.
9세 예충년(1446-1507)공은 각 지방의 현감, 군수, 병마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중앙의 선공감 부정으로 있을 때 1502년 7월 훈련원정으로 발탁되었다.
병조판서 이극돈은 훈련원정의 자리를 놓고 세도가의 청탁이 많아 후임 인선에 골머리를 앓았다. 고민 끝에 병조의 정5품이상 무관을 모아 의견 수렴을 한 결과 충년공을 최적임자로 선택하였다. 원래는 적임자 3명을 추천하면 그 중에서 왕이 한명을 낙점하는 것이 인사제도였으나 한명만을 올려 낙점을 받은 것이다.
훈련원정은 군사의 무술연마와 교육을 맡아보고 왕궁의 호위병을 선발하는 관청의 장으로서 무관된 자 한번 거쳐가고 싶은 선망의 자리요, 명예스러운 자리이다. 여기서 청심으로 병사를 맡아 보았고 군사의 증강에 충실한 공이 인정되어 1506년1월에는 이조판서 류순정의 추천으로 경주부윤으로 승진하였다.
부윤으로 있을 때 하루는 폐허가 된 신라의 고찰 영묘사 터에서 군사훈련을 하다가 아무도 거들떠 보지않고 버려져 있는 큰 종을 발견하였다. 자세히 관찰하다가 이 종의 웅장하고 신비한 소리에 매료되어 경주성의 남문루에 옮겨 달았다. 그 뒤에 종에 새겨진 글을 통해 봉덕사 종(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이라는 것을 알고 보존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 때 연산군은 채홍사를 전국에 보내어 처녀 징발령을 내렸다. 경주에도 채홍체찰사 임숭재가 왔다. 충년공은 채홍사의 처녀징발을 거부하고 일제의 협조를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연산군이 진노하여 1506년6월10일에 서울로 잡혀와서 의금부에 감금되고 혹독한 문초를 받은 후에 풀려 나왔다. 이 때받은 고문으로 지병을 얻게되고 이듬해 1507년12월에 향년62세로 돌아 가셨다.
충년공의 삶도 청개구리와 같이 저돌적으로 불의에 항거하였고 왕명에 도전하여 백성을 보살피다 희생을 당한 것이다.
공의 사후에 중정반정으로 영의정이 된 류순정은 예충년은 “무신이었지만 문신이가는 경주부윤으로 보냈더니 정사를 잘 보았고, 지병만 없었더라면 중종 반정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여 병조판서를 하여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돌아 가셨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4. 선조의 사성을 사양하다
15세 예인상(1562-1623)공이 병조의 주부로 있을 때였다. 1592년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침공해 오자 선조는 의주로 파천길에 오르는데 인상공이 왕의 호위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때 왕과 종친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의 고관대작들의 많은 사람이 왕을 수행하지 않고 일신의 안위만을 쫓아 피난을 떠났다. 혹자는 병을 핑계로 혹자는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또 다른 사람은 나이가 많다는 구실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난 것이다.
백성들은 우왕좌왕하고 울부짖는 참상속에 날은 저물고 비까지 내렸다. 허술한 왕의 행차가 궁권을 버리고 가는데 선조는 군복차림으로 말을 탔고, 왕비는 걸어서 가는데 도승지 이항복이 초롱을 들고 앞에서 인도했다. 비는 더욱 거세게 쏟아지고 초롱불은 꺼지고 산길은 험하고 말을 타고는 더는 갈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
선조는 배가 고픈데다 비마져 흠뻑 맞고보니 추워서 어쩔 줄 몰라한다. 보다못한 인상공이 “전하 소신이 뫼시겠습니다.”하고는 선조를 등에 업고 험한 산길을 넘었다. 5월1일 임금의 행차가 삼각산을 뒤로하고 개성으로 향하는데 마중나온 황해도 감사와 서흥부사 일행을 만나 처음으로 밥을 먹게되고 개성부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임란이 끝나고 환도한 후에 선조는 인상공을 불러 그 간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사성을 하였다. “예씨성은 조정에서 희성이니 고침이 마땅하다. 앞으로 채씨 성을 갖도록 하라”고 하였다. 원래 임금이 사성을 할 때는 국가에 특별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데, 감격하면서 받는 것이 관례였다. 사성 뒤에는 많은 땅과 재물이 내려지고 성씨의 시조에 맞게 특권이 주어진다. 개인적으로는 무한한 영광이요, 권릭과 부귀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상공은 “조상의 높은 얼을 이어 받들고, 예씨 가문의 창씨의 예를 따르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완곡하게 사양하였다. 그리고 선무원종 공신으로 1계급 특진하여 훈련원 판관으로 만족하였다.
이 일로 인해 유림에서는 임금의 은총과 하명도 따르지않고 거꾸로만 한다고 하여 인상공에게 청개구리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고, 예씨 성을 가진 후손들은 청개구리의 후손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윗대 할아버지들의 대쪽같이 곧은 소신과 치적이 귀감으로서 고문헌록에 죽백지공(역사기록으로 전해질 만한 공로)으로 전하여 내려온 것을 볼 때 후손으로서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대종회 이사, 서울, 예종호)
[출처: 의흥예씨 대종보 제9호(2004.4.20)]
조상연구-청개구리후손.hwp
첫댓글 우리 예성 조상님들의 자랑스런 모습을 정리한 글입니다.
다시 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