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晋州)지역의 선조 발자취 1. 해주 정씨가 진주에 세거한 내력 진주에 세거하고 있는 해주정씨는 주로 충의공 농포 정문부(忠毅公 農圃 鄭文孚 1565~1624)공과 그 아우 용강 정문익(龍岡 鄭文益 1568~1639)공의 후손이다. 농포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시다. 자는 자허(子虛), 농포는 호이다. 서울출신. 아버지는 부사 신(愼)이시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하고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함경도병마평사(약칭 북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등을 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최배천(崔配天)ㆍ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각 진의 수장(守將)ㆍ조사(朝士)들과 합세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ㆍ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서 명천ㆍ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여 후세의 사가들이 南忠武 北忠毅(남쪽은 충무공 이순신, 북쪽은 충의공 정문부)라고 한다. 공은 첫째, 북으로 들어간 왜적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억센 군대들과 싸워야 했고, 둘째, 왜적에게 부역하여 우리 왕자와 대관들을 사로잡아 주고서 조국에 반역 행위를 하는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 악한 무리들을 지혜로써 무찔러야 했으며, 셋째, 우리의 어려운 틈을 타서 침구해 오는 북쪽 오랑캐들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이같이 한때에, 한 칼로써 삼중 전투를 감행하고, 또 능히 모두 다 승첩을 거두었던 것이야말로 임진란 전체 역사를 통하여, 다른 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위업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공의 승첩은 국가의 도움이란 추호도 없이 오직 충의로 부르짖어, 흩어진 민심 속에서 불러일으킨 민간 의병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 상관이던 감사 윤탁연(尹卓然)의 시기 질투로 그 공로를 제대로 포상 받지 못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 길주목사 안변부사 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에 이어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ㆍ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하여 나가지 않았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1624년(인조2)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詩)로 인하여 박홍구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고문 받던 끝에 별세하였다. 뒤에 함북 지방민의 송원(訟寃)과 임란이후에 북평사를 역임한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 외재 이단하(畏齋 李端夏1625~1689) 부자의 상소와 후손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사후 43년 만에 신원(伸寃)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셨다. 그 후 증손 주부 삼(主簿 杉 1634~1708)공이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1714년에 충의(忠毅)의 시호가 내려졌다.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 회령의 현충사(顯忠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 일명 崇烈祠)에 제향되고 근래에 이르러 다시 진주(晋州)의 충의사, 의정부의 충덕사(忠德祠)에 제향(祭享)되셨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약탈되어 동경 야스쿠니신사로 옮겨져 방치되었다가 2005. 10. 20 황국하여 북한에 인도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1709년 곤륜 최창대(崔昌大)선생이 농포공의 사적을 밝혀 함경북도 길주에 세운 것이다. 농포공은 역모라는 무고로 60고령의 몸에 가해진 4번의 압슬을 포함한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1624년 11월 18일 옥중에서 돌아가시기 전 두 아들에게 너희들은 벼슬할 생각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 은거하며 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 유언에 따라 공의 장남 대영(大榮 증 執義) 차남 대륭(大隆 증 承旨)과 공의 동생 용강공 문익(文益)은 해를 넘긴 1625년 2월 양주 송산(지금의 의정부시)의 선영하에 장사를 지내고 상복을 입은 채 가족을 데리고 천리길 진주로 남하하여 비봉산 자락인 봉곡동과 옥봉동에 터를 잡았으니 오늘날 해주정씨 농포공파와 용강공파가 진주를 중심으로 세거하게 된 연유이다. 진주는 농포공이 창원부사 재임 중 진주에 들러 인심이 후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해주정씨는 진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문무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크게 번성하였다. 2. 농포공의 충의사 가. 농포공 부조묘와 종택 유교사회에서 조상의 제사는 4대까지 받들고 4대가 넘으면 사당의 신주를 묘에 묻고 시제를 모시게 되어 있지만 나라에 공훈(功勳)이 있는 분의 신위(神位)는 공인절차를 받아 왕의 허락으로 신주(神主)를 옮기지 않고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한 특전을 부조묘(不祧廟) 또는 부조전(不祧典)이라 하여 가문의 영예로 여겼는데, 진주향내에는 해주정씨와 문화 유씨 두 가문이 있다. 농포공의 부조묘는 5대손 죽와 정근(竹窩 鄭瑾1725~1799)공의 상소로 1789(정조 14)년 4월 왕의 윤허를 받아 진주의 까꼬실(貴谷)에 모셨다가 남강댐 수몰로 1995년 현재의 이반성면 용암리로 종택과 함께 옮겼다. |
나. 충의사(忠義祠:경남 문화재 자료 61호) 의병장 충의공 농포 정문부(鄭文孚)선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농포공을 모신 사당은 북한에 창렬사 현충사 청암사(일명 숭렬사) 등이 있으나 후손들이 거주하는 진주의 까꼬실에는 부조묘 사당만 있었는데 1970년 공의 10대손 야은 정구석(野隱 鄭九錫 1907~1986)공 11대손 석천 정한재(石泉 鄭翰載 1931~)씨 등이 유림들에게 발의하여 가호서원을 세우면서 당시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충의사」라는 편액을 받았다. 남강댐 숭상공사로 인하여 1995년 까꼬실(진주시 귀곡동)에서 현재의 용암으로 이건하였는데 정한재씨는 이건(移建) 추진위원장으로서 수십억원의 정부지원을 유치하였다. 다. 가호서원(佳湖書院)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의 연구와 선현 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인 동시에 향촌 운영기구 역할을 한 곳이다. 농포공은 의병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원래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고 문장과 시에 뛰어난 학자로서 농포집을 남기셨는데 야은 정구석(野隱 鄭九錫)공의 주동으로 지방유림을 움직여 전국 유림의 동의를 얻어서 까꼬실(진주시 귀곡동)에 농포 선생을 제향하고 강학을 하는 가호서원(佳湖書院)을 설립 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3일에 유림들이 모여 향례를 올린다. 1995년 남강댐 수몰로 이곳 용암에 이건하였는데 용암은 농포공의 작은 아들 승지공(大隆)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라. 삼덕재(三德齋)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의 충의사 옆에 있는 재실이다. 농포공이 시화로 억울하게 옥사를 하자 1625년 상복을 입은 채 진주로 이거하여 일문을 번성하게 한 농포공의 아우 용강공(文益1568년~1639년)과 두 아들 집의공(大榮1586년 ~1658년) 승지공(大隆1599년~1661년)의 삼숙질(三叔侄)의 덕을 기리기 위해 1997년 후손들의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용강공(文益)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고, 집의공(大榮)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아버님의 뜻에 따라 과거를 접었고 슬하에 4형제를 두셨고, 승지공(大隆)은 슬하에 6분의 아드님을 두셨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제청에서 매년 음력 4월13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마. 유물관과 장판각 충의사 경내에 있는 유물 전시관은 농포공의 공적을 유물, 그림, 도표, 모형, 영상으로 전시 하고 있다. 관복과 장검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 의해 탈취되어 최근 그 반환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북관 대첩비의 모형이 있다. 경내에 있는 장판각(藏板閣)은 농포공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바. 삼효각(三孝閣) 충의사가 있는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마을 입구에 있는 삼효각은 농포공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지극한 효를 실천하여 삼대가 정려를 받음으로서 해주정씨 가문을 명륜가로 드높인 정려각이다. 정려각에 모셔진 분은 15세 역효당육(亦囂堂堉 1718~1769) 16세 만성재 현의(晩省齋 鉉毅 1734~1813) 17세 관란 달현(觀瀾 達賢1778~1849) 공이다. |
3. 진주성 일대의 선조 유적 가. 진주성(晋州城) 영남의 요새인 진주 중심부의 남강 절벽위에 위치한 진주성(사적118호)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이다. 성내에 촉석루 의암 의기사 쌍충각 김시민장군비 영남포정사 북장대 서장대 창렬사 호국사 등 많은 문화재가 있고 아름다운 절경을 더하여 오늘날은 관광지로서 또 시민의 공원으로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남강과 절벽과 연못을 두른 천연요새로서의 입지를 갖춘 이곳은 임진왜란 1차 진주성 싸움에서(1592년) 6일간 3,800명의 군사로 왜적 2만 여명을 물리친 김시민(金時敏)의 진주대첩이 있었고, 이듬해 계사년(1593) 전투에서는 10만 왜적을 맞아 9일간의 혈투에서 삼장사를 비롯한 7만 군·관·민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세계 전사상 찾아보기 힘든 끔직한 전투의 현장이다. 성내에는 해주정씨와 관련된 유적 유물 작품이 농포공의 시를 비롯하여 8가지가 있다. 나. 촉석루(矗石樓 경남 문화재 자료8호) 예로부터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진주성의 남쪽 남강변 벼랑위에 우뚝 솟은 촉석루는 강과 벼랑이 어우러져 영남제일의 풍광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전쟁이 있을 때는 진주성의 지휘본부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누각으로 향시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활용되었다. 촉석루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다가 6ㆍ25사변 때 불타고, 1960년에 8번째로 재건이 되어 문화재 자료에 지정 되었다. (1) 농포공의 시(詩) 촉석루에는 농포공을 비롯한 대표적인 시인 학자 9분의 시가 남아 있다. 농포공의 시는 54세 때 창원부사 시절 진주에 들렸다가 의병장으로서의 남다른 감회로 진주성 싸움을 읊은 시다. 次 矗石樓韻 | 촉성루 시에 차운하다 | 龍歲兵焚捲八區 | 임진년 병화가 전국을 휩쓸어 | 魚殃最慘此城樓 | 느닷없이 입은 참화 이 성루가 제일 컸네. | 石非可轉仍成矗 | 돌은 구를 수 없이 우뚝하게 솟았는데 | 江亦何心自在流 | 강물은 무슨 마음으로 흐르고 있나. | 起廢神將人共力 | 신명은 사람과 함께 퇴폐함을 복구하려 하고 | 凌虛天與地同浮 | 무한한 공간은 땅과 같이 떠있네. | 須知幕府經營手 | 알겠구나 막부의 경영하는 솜씨가 | 壯麗非唯鎭一州 | 한 고을만 진압하지 않으려는 장한 뜻임을. |
(2) 명암(明庵)공의 촉석루 중수기(矗石樓 重修記) 예로부터 사우나 정자 등 건물을 지을 때나 수리를 할 때 뜻과 정신이 담긴 내력을 쓴 기문을 걸었는데, 명망있는 분의 글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향교나 서원의 기문은 유림의 추천을 받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의 글이므로 기문을 짓는 것 또한 큰 영예로 여겼다. 촉석루는 창건 이래 760여년 동안 왜구침입, 임진왜란, 6·25로 3번 소실되어 재건하고, 5번의 중수를 하였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 하수일 정식(鄭栻) 신호성이 지은 4편의 중수기가 있는데 모두 중의에 의해 추천된 당대의 대표로 선정된 대 문장가이다. | 용강공(文益)의 증손인 명암(明菴) 정식(鄭栻)공의 중수기는 영조 즉위년인 1724년 중수시에 지은 것으로 당시의 해주정씨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참고로 그 역문을 붙인다. |
촉석루중수기(矗石樓重修記) 영남(嶺南)은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곳인데, 촉석루(矗石婁)는 홀로 제일가는 누각으로서, 동남지방의 명승으로 그 이름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돌 절벽이 높고 강가 언덕의 대밭은 시원스럽고, 두 갈래 물이 가운데가 갈라져 기이한 바위가 층층이 펼쳐져 있다. 이것은 황강(黃岡)의 적벽(赤壁), 백로주(白鷺洲), 상강(湘江), 채석기(采石磯) 등의 명승지와 더불어 과연 그 우열(優劣)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누각에서 장사(壯士)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과, 바위 위에서는 이름난 기생이 왜적(倭賊)을 죽이고 의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절개는, 중국(中國)의 악양루(岳陽樓), 황학루(黃鶴樓)에서는 일찍이 듣지 못했다. 늠름한 영웅의 기상은 천고(千古)의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서게 만든다. 나는 듯한 용마루 단청을 한 기둥 조각을 한 난간 수놓은 문 등은 사신(使臣)의 임무를 띠고 나온 관원(官員)들이 올라 즐기다가 돌아가기를 잊을 뿐만은 아니다. 너른 물결 조그마한 배 달빛 비친 섬 안개 낀 물가는 시인과 도롱이 쓴 낚시꾼들이 즐겨 노닐고 시를 읊으며 다닐 뿐만은 아니다. 돌아보건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험한 지형이 이처럼 웅장하니, 정말 이른바 높고 보배로운 산하(山河)인데, 여기에 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여 원수(元帥)가 여기에 거주하면서 여러 막료(幕僚)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기도 하고, 때론 무예(武藝)를 익히거나 활을 쏘기도 하여 남쪽 지방의 방어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연하(煙霞)의 뛰어남이나 물과 돌이 아름다운 것으로 논해서는 안 되겠다. 아깝도다! 지난 임진(1592)년의 전란(戰亂)에 흉악한 왜인(倭人)들의 불길에 싹없어지는 환난에서 다행히 면했으나, 중수(重修)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기둥과 대들보가 기울어지고 단청이 더렵혀지고 벗겨져, 산뜻하던 제도(制度)가 다시는 옛날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자 고을 사람이나 지나는 손들이 개탄하고 서러워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으나, 일의 규모는 크고 재물은 부족하여 수리를 할 수가 없었다. 갑진(1724)년 정월 절도사(節度使) 이태망(李台望)공이 남쪽으로 부임하자 바다에는 큰 물결이 일지 않고 절도사 업무상 별다른 일이 없이 평화롭자, 오직 낡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는데, 이 촉석루가 무너지고 부서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우후(虞侯) 박황(朴璜)과 더불어 재물을 모으고 힘을 쌓고 공을 함께 들이고 지혜를 운용하였다. 기둥 문지방 마루판 난간 가운데 썩거나 검게 때 묻었거나 꺾어지거나 부러진 것과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 흰색 가운데서 낡아 어슴푸레 하게 된 것을 바꾸어 새롭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하니 연하가 빛을 더하고 바람과 달도 광채를 발하였다. 춤추던 교룡(蛟龍)과 헤엄치던 고래도 반드시 강산의 기이한 도움을 기뻐할 것이고, 시골의 노인 거리의 아동들 가운데서 누가 절도사(節度使)의 큰 공적을 칭송하지 않겠는가? 봉황대(鳳凰臺)의 형승(形勝)은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적선(謫仙) 이태백(李太白)의 시는 시인이 아무렇게나 한 말에 불과하고, 적벽(赤壁)의 풍경은 즐겁기는 즐거웠으나 소동파(蘇東坡)의 놀이는 세상 바깥의 고상한 생각에 불과했다. 국가의 정책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 되는 바가 있었는가? 뒤에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태백이나 소동파(蘇東坡)의 흥취를 본받아 의기양양해 하지 말고, 반드시 범문정공(梵文定公)처럼 천하의 근심에 먼저 해서 그 근심을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에 나중해서 그 즐거움을 즐기도록 하면, 이 누각은 썩지 않고 나라도 튼튼해질 것이다. (1) 승지공(大隆)의 글씨 1629(인조7)년 유림들의 중론으로 명필로 이름난 농포공의 둘째아들 승지 대륭(大隆) 공이 바위의 서쪽 면에 전서로 「義巖」이라 쓰고 새겼는데 강과 누각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어 진주8경으로 꼽힌다. (2) 명암(明庵 鄭栻)선생의 의암사적비(義巖事跡碑)(경남 유형문화재353호) | 이 비는 논개(論介)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경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722년(경종 2)에 명암공이 어우야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어 이 사적비를 세웠다. | |
(3) 의기사(義妓祠)(경상남도 문화재 자료7호) 제2차 진주성 싸움 뒤 순절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건립했는데 6.25로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진주 의기창렬회에서 재건하였다. 사당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와 매천 황현의 시판 한말 진주 기생이었던 산흥의 시판이 걸려 있고 김은호 화백 이 그린 영정은 그린분의 친일이 논란 되고 있다. 영정 뒷편 대형 병풍은 명암(鄭栻)공의 의암사적 비문을 농포공의 14세손 죽헌 정문장(鄭文丈 1943~)씨가 썼다. 참고로 의암비기의 역문을 붙인다. |
의암비기(義巖碑記)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논개(論介)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 계사(1593)년을 맞이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킨 선비인 김천일(金千鎰)이 진주로 들어와 왜적(倭賊)에게 대항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대는 흩어지고 백성들은 다 죽었다. 논개는 짙게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고서 촉석루 아래 뾰족한 바위 위에 서 있었다. 그 아래는 만 길인데, 바로 강 속으로 들어갔다. 여러 왜적들이 보고서 기뻐했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유독 왜인 한 명이 몸을 빼어 바로 나아갔다. 논개가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왜인이 장차 논개를 유혹하여 끌어당기려고 하자, 논개는 드디어 그 왜적을 끌어안고 바로 못으로 떨어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 관기 가운데서 왜적을 만나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 이 논개 한 사람에 그치지 않으나,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저 관기는 다 음란한 창녀니, 정렬(貞烈)로써 일컬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여 왜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그 역시 성스러운 임금의 교화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왜적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고, 특별한 충성은 없었을 것이다. 아름답도다. 슬프도다!” 이 글은 그 당시 사실적인 기록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제 비석에 새기는 글은 중첩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대로 새기고 명(銘)은 이러하다. 獨 | | 其巖 |
| 홀로 뾰족한 그 바위, | 特立其女 | 우뚝이 서 있는 여인. | 女非斯巖 | 여인은 이 바위 아니면, | 焉得死所 | 어디서 죽을 곳 얻으랴? | 巖非斯女 | 바위는 이 여인 아니면, | 烏得義聲 | 어떻게 의롭단 소리 들으리? | 一江高巖 | 한 줄기 강의 높은 바위, | 萬古芳貞 | 만고에 꽃답고 곧으리라. |
라. 병사(兵使) 이진경(李眞卿) 유애비(遺愛碑) 진주성 영남포정사 서편 비석군에 경상 우병사를 역임한 전의인 이진경(李眞卿)의 유애비가 있다. 이진경공은 오자등과로 유명한 한 해풍군 효준(海豊君 孝俊)공의 장인이자 그 다섯 아드님 식(植,이조판서) 익(좌참찬) 석(晳.예조 참판) 박(樸 대사헌) 적(도승지)의 외조부이다. 마. 진사 정공 태석 기념비 (進士鄭公泰奭紀念碑) 진주성 비석군에 있는 농포공의 11세손 정태석(鄭泰奭 1870~1938)의 송덕비이다. 공의 호는 야천(也川)으로 진주의 까꼬실에서 태어나 24세인 1894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만석꾼을 이룬 영남의 대 부호로 까꼬실 만석군으로 별칭 되었다. 인근의 어려운 사람과 공익사업을 많이 하여 주민들로부터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시혜불망비와 공덕비가 여러 곳에 있다. 사. 진주성 임진·계사 순의비(壬辰·癸巳 殉義碑) 1592년 임진년 10월 3,800명 군사로 6일간의 혈전에서 왜적 2만명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다음해인 계사년 6월에 9일간의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삼장사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친 7만여 군·관·민의 충절을 이어받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그때의 격전지 진주성 중앙에 세운 추모제단이다. 비문의 글씨는 농포공의 14세손으로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 작가이며 심사위원인 죽헌 정문장(鄭文丈)의 작품이다. 아. 진주 향교(鄕校 경남유형문화재50호)의 기문(記文)등 진주시 옥봉북동에 위치한 진주 향교는 초창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고려 광종때로 추정되는 역사 깊은 향교이다. 건물 구성은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동재, 서재, 사교당, 풍화루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의에 의해 당대의 학자가 쓰는 기문 중 3편을 해주정씨 선조가 썼다. 정문에 해당하는 풍화루의 중수기문은 농포공의 4세손 동야 정상호(東野 鄭相虎 1680~1752)공의 글이며 풍화루 중수상량문은 농포공 4세손 평헌 정상열(萍軒公 鄭尙說 1665~1747)공의 글이고, 강학숙소인 동재와 서재의 기문은 농포공의 9세손 쌍주정세교(雙州 鄭世敎 진사)공이 썼다. 4. 산청군의 명덕사(明德祠) 지리산 천왕봉 들머리인 산청군 시천면 점동에 있는 명덕사는 용강공의 증손 명암 정식공을 주향으로 하고 농포공 9대손 지와 정규원(芝窩 鄭圭元)공을 배향한 사당이다. 명암 정식(1638~1746)공은 조선 영조때의 지사로서 자는 경보(敬甫)이고 명암(明庵)은 호이다. 용강공의 증손으로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재종형 노정헌 정구(露頂軒 鄭構)공에게서 공부하여 학문에 정통하였다. 젊어서 과거장에 나갔다가 호담암(胡澹庵 : 胡詮)의 척화소(斥和疏)를 읽고 비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유건을 찢어버리고 패랭이를 쓰고 명산대천으로 돌아다니며 많은 금석문을 남기고, 집에 들어와서는 경사를 공부했다. 만년에 지리산의 구곡산 계곡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이름하고 집에 제갈량(諸葛亮) 주희(朱憙)의 초상을 모사 봉안하여 놓고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홀로 즐겼다. 생활이 극도로 가난하여 고사리와 솔잎으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태연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헌부 지평(持平)에 추증되었고 유집(遺集) 5권이 있다. 지와 정규원(1818~1877)공은 일명은 면교(冕敎)이다. 농포공의 9대손으로서 매산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861년 세도가 안동김씨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안동김씨의 중심인물 김수근의 서원을 진주성내에 세우려 하자 남강통문(南岡通文)이라는 명문(名文)을 지어 배포하여 서원의 건립을 막았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곧고 정의로운 선비정신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나라의 큰일에 영남우도 사림의 대표로서 정신적 지도자로서 위정척사 운동 등 유림을 대표하는 지도자적 역할을 다하였다. 명덕사는 위패를 모신 사당과 강당인 숙세정사(淑世精舍) 아래에 덕산재 원덕문 등의 건물이 있는데 이는 모두 명암공의 7대손인 전 대진대학교 이사장 정대진(鄭大珍 1933~)공이 2003년부터 심혈을 기울여 지은 건물이다. 5. 마산 박물관의 농포공 시비 농포공께서 창원부사로 계시면서 고운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시를 읊고 강학하던 월영대를 보수하셨고 여가에 읊은 시 10여수를 남기셨는데 그 중 마산을 노래한 시 한수가 마산박물관 뜰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昌原 作 | 창원에서 읊다 | 太白山南智異東 | 태백산 남쪽 지리산 동에 | 還珠勝致以壺蓬 | 구슬처럼 둘러선 산세 선경같구려 | 人家離落千年碧 | 인가의 마을은 천년이나 푸르고 | 官舍門庭百日紅 | 관청의 문과 뜰은 백일이나 붉었네 | 元將候風行省廢 | 바람 기다리는 원나라 장수는 행성을 폐하였고 | 崔仙翫月古臺空 | 달구경하던 최고운의 옛 대만 공허 하구나 | 只今留與漁樵唱 | 지금은 어부와 초동으로 노래하면서 | 一半平分屬醉翁 | 절반은 취한 늙은이에게 나누어 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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