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쟁 발전 과정.
... 이승만 하야까지의 과정.
① 2.28 대구에서 학생들의 민주당 집회 참가를 막기위해 강제등교시킴. 시위시작.
②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 (1차 마산봉기)
③ 4.11 김주열 학생의 시체발견. 다시 시위가 거세짐. (2차 마산봉기)
④ 4.18 정치깡패들의 고대학생구타 사건 발생.
⑤ 4.19 시위 전국으로 확산. 학생들과 시민들 광화문에서 경무대까지 시위.
⑥ 4.25 교수단 시위.
⑦ 4.26 이승만 하야.
- 4.19 의 전개과정....... 학생이 주도적 역할을 함..
1. 부정선거 규탄
독재정권이 쓸 수 있는 모든 흉기를 휘두르면서 한국민중을 긴 어둠 속으로 내몰았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마지막 발악과 같은 부정선거를 계획하였다.
선거 한달을 앞두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병사함레 다라 이승만이 단독 출마하게 되었고 당선은 이미 확정된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지난번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기붕을 마저 당선시키기 위해서 4할 사전투표,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야단 참관인 매수,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0%확보등 상상을 초월한 부정선거를 계획대로 추진하였다.선거운동 과정에서 부터 부정이 저질러 지자 이에 항거하는 시위가 선거를 보름이나 앞둔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남녀 고교생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민주당의 선거유세가 예정되어 있던 이날,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등을 구실로 등교를 강요받았던 대구시내 고교생들은 이승만 정권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는것에 분노를 느껴 가두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이후 시위는 서울, 수원, 부산, 광주, 대전, 충주, 문경등에서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갔고, 시위내용도 학원의 정치적 이용반대와 자유보장에서 점차 부정선거운동의 공명선거 실시요구, 민주주의 수호다짐으로 바뀌어갔다.
선거당일 이승만 정권은 계획된 대로 엄청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투표소 습격, 무더기사전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 참관인 매수 및 폭행 등 선거를 가장한 강도행위나 다름없었다.
개표과정은 보나마나였다. 개표과정에서도 투표함 바꿔치기, 전기끊고 표바꾸기, 야당표에 인주묻혀 무효표 만들기등의 부정을 저질렀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득표차로 개표가 진행되자 오히려 당황하게 된 자유당은 이승만은 80% 이기붕은 70% 정도로 득표율을 조정 발표하라는 긴급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개표결과가 나오기도 전, 선거 당일 저녁 남쪽 항구도시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제 1차 마산시위>가 불타올랐다. 수천의 학생과 시민이 참가하여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 소방차에 맞서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날 저녁 7시경 경찰은 폭력진압에도 굴하지 않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4월혁명 최초의 희생자 수는 사망 16명 부상 72명이나 되었다. 마산상고 1년생이었던 김주열군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날이었다.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인구 15만의 마산은 도시의 경제적 기반과 민도가 높아 역대 선거마다 야당이 승리했었다. 관권이 기승을 부린 1958년 민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 허윤수를 거뜬히 당선시켰었다. 그러나 허윤수는 자유당 강경파 실력자 이용범 의원에게 포섭당해 이번 선거에서 선거민을 배반하고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이 되었다. 때문에 마산시당의 민주당원들은 이번 선거에서 기필코 본 때를 보이겠다고 별렀다.
이런 상황에서 허윤수는 자유당원들에게도 쉽사리 지지를 얻지 못했는데 이에 당황한 이용범은 선거가 임박하자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경찰 조직을 최대한 동원했다. 그 결과 마산의 선거 운동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경찰 조직 대 시민이라는 특이한 대결 양상을 띤 채 유별나게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엄청난 부정 선거였다. 이런 선거 분위기에 짓눌린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다른 곳보다 더욱 컸을 것이며 결국 3.15 부정선거에 의해 폭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시위에 대해 당시 내무부 장관 홍진기는 시위가 공산당의 지령에 의한것인양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경찰은 공산당의 배후조종이 있었다고 조작하기 위해 사망자의 호주머니속에 불온문서를 넣어 두기도 했다.
1차 마산시위 이후 서울, 광주, 부산등지에서 고교생이 주축이 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현실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지식이 부족한 학생들이었지만 썩고 병들은 독재 권력의 가증스러운 부정선거와 비무장 시민에 대한 무차별 총격이 그들의 용기와 정의감을 자극했던 것이다.
2. 독재정권 타도
4월 11일 오전 마산 중안 부두에서 17세의 고교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1차 마산시위때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이 눈에 박혀 죽은뒤 유기되었다가 28일만에 발견된 것이다. 경찰의 비인간적이고 비인륜적인 행동에 대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제 2 차 마산시위>로 폭발하였다. 이 시위에 참여한 총 인원은 모두 2만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날 한 밤중까지 계속된 시위과정에서 또다시 경찰의 총격으로 2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이날 밤 항쟁의 거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산공고 3학년 간부들은 김주열 군의 영전에서 다음 날 다시 투쟁에 발벗고 나서기를 결심하고 한자리에 모였다. 플랭카드 작성반과 각 학교 연락반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이라서 조직적 투쟁의 성패여부는 사실상 미지수였다.
이튿날인 12일 아침, 마산상고, 마산고, 제일여고, 마산여고에 연락반이 가서 오전 10시에 일제히 일어서기로 약속하였고, 가까이에 있는 마산상고의 경우 시내에 들어가기 전에 같이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다. 2명은 플랭카드 작성에 나섰고 나머지 간부는 학교 당국 몰래 학생들과 내통할 방법을 강구하였따. 신호종이 울리면 일제히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되 그 때까지는 열심히 수업을 받는 것처럼 행동을 취하자고 했다.
9시 50분, 역사적인 신호종이 한 학생의 손으로 난타되었다. 1학년을 제외한 마산공고 2, 3학년 학생은 일제히 교실을 뛰쳐나와 시내를 향해 돌진하였다. 교장은 간부를 붙들고 말리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조직적이냐?" 고 묻는 체념의 빛을 띄었다. 오히려 "비조직적인 난동은 희생자를 낼 뿐이니 정연한 질서 유지를 부탁한다." 고 학생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약속했던 다른 학교 학생들의 합류는 없었고 대신에 그들을 지지하는 3만의 시민들과 함께 15km의 시위 행진을 무사히 끝냈다. 이 시위가 무사히 끝난 것은 학생들과 같이 시위를 한 선생님들과 민주당 의원들이 경찰들과 타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학교 학생들도 늦게나마 각자 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는 사흘간이나 계속되었다. 경찰은 소요및 공공건물파괴루 30명을 구속 하였고 문교부는 전국의 중고교 학생들의 등교정지를 명했다. 어이없게도 이승만은 " .... 난동 뒤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 도 있어....",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게 좋은 기회를 줄 뿐이니...."라는 협박조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위협과 방해공작도 한번 불타오른 혁명의 불길을 잠재울 순 없었다. 마산에 이어 주변의 진주, 부산으로 시위는 확산의 일로에 있었으며 새봄의 꽃소식과 함께 북으로 북으로 번져갔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의 시위로 시위의 중심은 중고생에서 대학생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 졌다. 이날 평화적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되돌아가던 고대생들의 정치깡패들의 습격사건은 시만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 하였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우는 4월 19일 대장고교생 1천여명이 교문을 박차고 나선 것을 선두로 해서 광화문, 종로, 동대문 일대의 서울 도심은 학생과 만중들의 시위물결로 가득 메워졌다. 시위대열은 독재정권의 심장부 경무대로 향하였다. 이기붕의 집도 목표가 되었다, 다급해진 경찰은 맨주먹으로 맞서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승만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부산, 광주, 청주, 인천, 대구 등지에서도 수많은 민중이 시위에 참가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재정권에 항거하였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희생자 수는 사망 183명 부상 6200여명에 달했다.
계엄에 의한 군의 짐주로 시위는 일단 진정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군은 더 이상 돗재정권의 수족이기를 거부하고 시위대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오랫동안 이승만을 후원하면서 이익을 챙기던 미국도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4월 25일 서울의 대학교수단 250여명이 "이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가두시위를 나섬으로써 시위는 다시 격화되고 비틀거리는 독재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오후 1시 이승만이 민중에게 굴복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
분단 이후 좌절을 거듭해 오다가 처음으로 승리를 쟁취하게 된 한국 민중들은 환회의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시위의 시작을 보면 모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그 주체임을 알 수 있다. 선생님들이나 교수들, 시민들은 학생들의 시위에 뒤늦게 거리에서 합류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