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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서갑양 교수가 만든 연잎 모방 물질. 연잎처럼 표면에 물을 밀어내는 미세 돌기들이 있어 물이 스며들지 못하고 방울방울 떨어진다. 물에 젖지 않는 옷이나 자기 정화 기능을 갖춘 자동차 유리로 개발이 가능하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
서갑양 교수 오른손에 든 고무 막대에는 접착제가 없다. 그런데도 반도체 기판에 달라붙는다. 천장에 달라붙는 도마뱀 발바닥처럼, 수많은 미세 털이 나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이렇게 만든 도마뱀 테이프(왼손)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기판 이송장비에 적용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
2004년 서울대 공대 기계항공공학부의 한 연구실. 게코(gecko) 도마뱀이 유리벽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는 과학자가 있었다. 게코는 도마뱀의 사촌 격인 도마뱀붙이과의 파충류. 동남아시아 여행을 가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발바닥에서 끈끈한 접착물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발바닥에 있는 수많은 미세 털들이 천장 표면과 물리적으로 서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연구실에서 게코는 사라졌다. 대신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기판을 옮기는 묘한 연구용 기계장치(이송장치)가 들어섰다. 기계장치는 게코 도마뱀의 발바닥을 모방한 접착테이프로 태양전지 기판을 옮긴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기판은 보통 집게로 집거나 정전기로 흡착해 옮기는데 둘 다 문제가 있다. 집게로 옮기면 기판 표면이 긁히거나 휘는 문제가 있다. 정전기 이송도 전기가 흐르는 소형 기판만 가능한 데다 표면이 오염되기 쉽다.
하지만 도마뱀이 모래밭을 지나도 발바닥이 깨끗한 것처럼, 도마뱀 테이프는 기판에 흠집이나 불순물을 남기지 않는다. 테이프가 기판 전체에 붙으니 아무리 큰 기판이라도 휠 염려가 없다.
경제적 효과도 대단하다. 매년 300억~400억원어치 수입하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이송 장비를 도마뱀 테이프로 대체할 수 있다. 도마뱀 테이프는 의료용 패치나 극한 환경용 접착제로도 쓰일 수 있다.
화학물질을 쓰지 않는 물리적 접착제 시장은 2008년 이후 매년 5%씩 성장해 올해는 77억달러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측된다.
7년 전 도마뱀 발바닥에서 '미래의 황금알'을 봤던 과학자는 바로 서울대 서갑양 교수(기계항공공학부·39)다. "원래 전공은 화학공학으로 주로 나노미터(10억분의 1m) 단위로 물질을 가공하는 연구를 했어요. 2004년 서울대에 부임하면서 남들이 안 하는 분야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도마뱀을 만난 것이죠. 나노기술로 모방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2000년 미국 연구진은 도마뱀 발바닥의 미세 털과 물질 표면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미세 털 구조를 모방한 접착테이프가 앞다퉈 개발됐다. 하지만 서 교수는 '자연을 100%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초보자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간 연구에 매달렸다.
과학자들은 액체 고분자에 아주 가는 홈들이 나있는 틀을 눌러 미세 털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자외선을 쪼이면 털이 굳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 산소가 들어가면 털이 제대로 굳지 않고 끈적끈적해진다. 다들 실패라고 생각하고 버릴 때 서 교수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1차로 만든 미세 털이 굳기 전에 처음보다 더 가는 홈으로 눌러 전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털로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머리카락 끝부분을 깎아내 아랫부분보다 더 가늘게 만든 것.
서 교수가 만든 도마뱀 테이프는 1㎠ 면적으로 2㎏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 실제 게코 도마뱀보다 접착력이 두 배나 강하다. 작은 도마뱀 테이프를 여러 개 연결하면 10㎏의 디스플레이 기판을 옮기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서 교수는 서울대 벤처 1호인 LCD장비업체 SNU프리시전과 협력해 3년 내 시제품을 내놓고, 산업체용 상용장비는 5년 안에 시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도마뱀 테이프를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 대형 기판을 수평으로 옮기는 장치도 개발 중이다.
서 교수는 서울대에서 학부부터 박사학위까지 마친 토종 과학자다. 유학을 가지 않는 대신 '무조건 남들보다 2배 열심히 한다'는 자세로 연구했다. "한밤중에 연구실에서 별을 보며 라면을 먹는 게 일상이었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6년을 보내며 석·박사 과정을 모두 수석으로 마쳤다. 학위 과정 중엔 교수도 한 해에 한 편을 내기 어렵다는
MIT가 발행하는 '테크놀로지 리뷰'는 2004년 이런 실적을 보인 서 교수를 '올해의 젊은 과학자 100인'으로 뽑았다. 전 세계 35세 미만 과학자 중 각 분야 최고에게만 주는 상이다. 2010년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40세 이하 최고 과학자에게 주는 '젊은 과학자상'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1등보다 더 빛을 발하는 2등 과학자"라고 규정했다. "좋은 논문을 내는 1등 과학자도 훌륭하지만, 저는 2등일지라도 그 원리로 세상에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자연은 그의 스승이다. 그는 뱀 피부를 모방해 마찰이 없는 베어링을 만들었고, 튤립이 색을 내는 것을 본떠 고효율 발광다이오드(LED)도 개발했다. 연잎의 표면을 본떠 물에 젖지 않는 물질도 만들었다. 풍뎅이 날개에서는 인공피부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생각이 막히면 과격한 운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다 쏟아낸 다음, 머리를 리셋(reset·재시동)합니다. 조급하면 아무것도 못하죠. 세계적인 학자가 나오는 학회에 가서 '따끈한' 연구성과를 보고 감동하면서 자극을 받으면 또 아이디어가 샘솟게 됩니다."
박사과정의 방창현씨는 "대학원생 모두가 열심히 하면 교수님처럼 한국에서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 과학자들의 자부심이 자연의 지혜를 한국의 기술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