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평국 (강년국. 아가다)
1900. 6.17. 출생(제주시 일도리 . 아버지 강두훈, 어머니 홍소사)
1909. 신성여학교
1915. 경성여자고 보통학교
1918. 박희도의 비밀 써클 활동
1919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
1919 . 3.1. 3·1운동 참가. 3.5 학생만세운동에서 검속 서대문 형무소 수감 (3.24 출옥)
1920. 전남진도 공립보통학교 교사
1921. 여수원 설립
1924 . 조천 부인회 조직
1925. 조천공립보통학교 교사
제주 여자 청년회 조직
1926. 동경 여자 의학전문학교
17271.1.6. 조선여자청녀 동맹 초대 집행위원
1928.1. 근우회 동경지회 의장단
1933. 광주 백청단 사건 연루 광주 경찰서 구인
8.12. 선종
2019.8.15 대한민국 독립운동가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강춘길: 강평국 언니
강세독: 강평국의 오빠
최봉조: 강평국의 외조카. 어도초 교장
강세독: 월등초등학교 (1930.11.11개교)초대교장
* 강평국 가족
*강평국 묘지를 찾아서
2019.5.23
박재형 선생님께서 고수선씨와 잘 알던 성당 자매님(김한숙)이 강평국 묘지를 본적이 있다하여 확인하려고 함께 황사평을 찾아갔다.
기억하던 자리에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돌아왔고 후에 교구에서 굴삭기를 동원하여 파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자매님께 다음 사진을 보여줬더니 맞은 것 같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 나무십자가가 세워져있어 지나갈 때 고수선씨가 강평국 묘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다.
좌측앞:김경숙 최정숙 기념사업단 이사.뒤: 김한숙씨.우측앞 김창훈 신부님, 뒤:박재형 선생님
항일운동 강평국(김 찬흡저) | 강평국
- 인물상세정보
- 일본에서 근우회(槿友會)의 항일 활동. 본관은 진주, 본명은 강연국(姜年國),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노라고 이름을 평국(平國)이라고 고쳐 사용하였다. 원적은 산북 애월면 광령(光令)리이다. 강두훈(姜斗勳)의 3녀로 산북 일도(一徒)리 1390번지에서 태어났으며 근대교육 태동기의 교육자 강세독(姜世篤)의 누이이다. 강세독은 1911년 제주공립보통학교 4년을 제1회로 졸업하고 관비 유학생으로 1916년 경성고보(京城高普)와 동교 부설 사범과를 졸업, 동년 대정공보교, 또 제주공보교 교사로, 1923년 표선면 성읍리에 개설된 정의공립보통학교 교장 사무취급이 되었다. 후일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東洋大學)을 졸업하고서도 또 도내외의 초등교육에 몸바쳐 정년 퇴임한 분이다. 그녀의 부친 강두훈은 순교하였으며 모친 홍소사(洪召史)는 1901년 신축(辛丑) 천주교란(天主敎難) 당시 세례명은 유리안나였으니 당시 강평국은 2세, 강세독은 10세, 천주교에서 이들을 키워 강평국은 본도 여성으로서 최초ㆍ최고의 학력을 갖추었다. 그녀는 1910년 신성(晨星)여학교에 입학하고 1915년 3월에 제1회로 졸업, 당시 동기생 최정숙(崔貞淑)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다. 1919년 3월 만세 운동에 참여, 얼마 뒤에 경성(京城)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사범과를 졸업하면서 전남 진도(珍島)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한편 제주 지역 유지들이 1920년 제주여자장학회를 조직하여 여학교 설립을 추진할 때 그녀는 이를 모태로 여자 50명을 모집하여 1921년 동지 최정숙과 함께 여수원(女修園)을 개설하였다. 이는 여성에 대한 문맹(文盲) 퇴치와 초등 교육 및 계몽ㆍ교양을 통하여 여권을 신장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하는 희생적인 봉사 활동이었다. 동년 본도의 진보적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역자구락부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할 때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1922년에 여수원은 사립 명신학교(明新學校)와 통합하여 남녀 공학 사립 초등학교로서의 출발을 할 때 최정숙과 함께 명신학교 교사가 되어 김응두(金應斗), 오유일(吳有一), 송택훈(宋澤壎), 한상호(韓相鎬), 김택수(金澤銖), 박교훈(朴喬薰) 등과 같이 근무하였다. 이 학교는 민족주의 교육에 치중하여 공립초등학교의 황민화(皇民化) 교육과는 차별화하니 일제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아 결국 1924년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북교)에 흡수 통합되었다. 1925년 제주 여성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강평국은 최정숙, 김시숙(金時淑), 이재량(李載良) 등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약칭:女靑)를 조직하여 새로운 여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녀는 천주교의 독실한 신자로서 의술을 통한 봉사의 중요성을 인식,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이는 본도 여성으로서 고등 교육기관에 유학한 제1호가 된다. 학업을 닦는 여가에는 항상 민족 문제에 관심을 보여 1927년 1월 16일 창립된 조선여자청년동맹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어 두 가지 일을 추진하였다. 첫째는, 1927년 3월 "재일본 동경동부 조선 노동조합 정기총회"에서 임원 개선 시 강평국은 유일한 여성으로서 집행 위원회 부인부(婦人部)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총회에서 결의하길 먼저 전민족적 단일당(單一黨)을 결성하여 민족적 압박에 철저히 저항하고 이론 투쟁에서 정치적 폭로를 거듭하자는 것과 다음으로 모든 정치적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원해야 하며 파벌주의 잔재를 근절하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1928년 1월 22일 근우회(槿友會) 토쿄(東京)지회가 일본에서 최초의 지회로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 때 당선된 대회의 의장단은 강평국, 박화성(朴花城:목포)이다. 이 민족단일 여성 단체가 태동하는 데는 강평국 등 신간회(新幹會) 계열의 여성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당시 회원이 140여 명이었으니 그녀의 역량을 돋보여 준 거사였다. 이때에도 정치문화부 간부인 강평국의 주도로 도재희(都在姬:경북 성주), 조영기(趙英基:경북 영양)의 지도가 주효되었다. 동경여의전(東京女醫專) 3학년 재학 중 늑막염으로 몸이 극히 쇄약해지자 귀향한 바 있다. 일제당국은 1933년 1월 12일 광주(光州)에서 여성 비밀 결사의 활동이 일경에 의해 탄로되어 전라남도 일대의 여자청년회(약칭:女靑)를 탄압할 목적으로 신여성 운동가들을 검거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 때 제주서(濟州署)에서는 병으로 요양중인 강평국 여사를 광주로 구인(拘引)해 갔다. 이런 일로 병이 극히 악화되어 동년 11월 10일 병몰(病沒), 황사평 천주교 묘역에 안장되었다. 1981년 11월 10일 고인의 업적을 기리어 동창 고순선(順善), 벗 한여택(韓麗澤)과 문하생 김서옥(金瑞玉) 등 13명의 여성들에 의해서 "독립투사 강평국선생 추도비"를 묘소 앞에 세웠다.
- 참고문헌
- 자료출처 : 김찬흡 (북제주문화원 원장)